2002년 10월호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베이징 속의 시골’ 후통(胡同) 기행

  • 권삼윤·문화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2-10-07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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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쯔진청(紫禁城)과 톈안문(天安門) 광장을 둘러봤다고 베이징을 다 들여다본 게 아니다.
    • 이 거대도시의 진면목은 내로라하는 관광지가 아니라
    • 오히려 좁디좁은 골목길 ‘후통(胡同)’에 숨어 있다.
    • 중국 각 지역에서 올라온 선각자들의 은신처로, 혹은 애첩과의 밀회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 후통에는 베이징의 전통과 문화, 서민들의 일상이 700년 역사와 함께 고스란히 녹아 있다.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고루에서 내려다 본 후통지구. 푸른 수목들 사이로 검은 기와 지붕을 뒤집어 쓴 가옥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중국 고사에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다. 뽕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됐다는 뜻이니 세상 일이 덧없이 바뀜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대개는 급격한 변화를 일컫는 데 쓰인다.

    ‘경제 대장정’의 길을 힘차게 달리고 있는 오늘의 중국에서 급격한 변화라는 의미로 상전벽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상하이(上海)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황량한 논밭에 불과했던 양쯔강 하류 삼각주의 푸둥(浦東) 지구가 홍콩을 대신할 아시아 금융·무역의 중심지로 개발되면서 오늘날 상하이는 높이가 468m에 이르는 아시아 최고의 TV송신탑(동방명주탑)과 421m 높이의 88층짜리 진마오(金茂) 빌딩 등 초고층 빌딩 200여 개가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마치 우주 도시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측면만 보면 상하이는 뉴욕의 월스트리트나 런던의 시티 지구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상하이를 일러 ‘중국의 경제 수도’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베이징(北京)이 정치 수도에 지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은 워싱턴을 정치 수도, 뉴욕을 경제 수도로 간주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있는 미국과 닮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서민들의 삶터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후통 골목의 회색 담장 사이로 나 있는 좁다란 대문. 나무 그늘을 벗삼아 두 노인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 분야에서 베이징의 위력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경제 중심지가 될 수 있는 요건을 금융산업의 발달, 민간경제의 활성화, 시장경제화와 국제화 등이라고 한다면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본부 대부분이 몰려 있는 베이징의 위세도 상하이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중국에 진출한 세계 400대 기업 가운데 200대 기업이 중국에 본부를 두고 있고, 그 대부분이 베이징에 위치해 있다.



    덕분에 베이징은 1997년 들어 새로이 단장된 쯔진청(紫禁城) 동쪽의 왕푸징(王府井) 거리, 하루 유동인구 120만명을 겨냥해 초고층의 앤더슨 빌딩이 들어서면서 오피스 지구로 거듭난 베이징역 앞, 힐튼·켐핀스키·쿤룬 등 별 다섯 개짜리 최고급 호텔과 빌라, 쇼핑센터 등이 들어선 북동부의 옌샤(燕莎)지구,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북서부의 중관춘(中關村) 등을 거느리며 서구 도시 같은 면모를 갖췄다.

    원·명·청 등 3개 왕조 시대에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줄곧 수도 역할을 해온 베이징에는 궁궐인 쯔진청, 황실 원림인 이허위안(헊和園)과 위안밍위안(圓明園), 매년 정월이면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올리곤 했던 톈탄(天壇), 명왕조의 황제 13명이 잠들어 있는 명13릉 등이 포진해 있다.

    여기에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축조한 만리장성과 50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동양 최대의 톈안문(天安門) 광장, 베이징에 들른 조선조 선비들이 서책과 지필묵 등을 사면서 청조의 문화와 접했던 ‘베이징의 인사동’ 리우리창(琉璃廠), 쯔진청 동쪽의 고급 상가와 드넓은 보행자 거리를 끼고 있는 왕푸징 거리 등 볼거리와 명소가 한둘이 아니다. 때문에 빡빡한 일정으로 베이징을 찾은 외국 관광객은 이들을 한번 둘러보기에도 벅차 그중 겨우 몇몇만 보고 떠나기 일쑤다.

    700년 동안 왕도 노릇을 했고, 그 사이에 몇 차례 겪은 왕조의 변혁기에도 궁궐의 주인만 바뀐 터라 베이징의 도시 구조와 건축물들은 이렇다할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지 않았다. 때문에 베이징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서민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골목과 주거공간들을 지금껏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대표적 공간이 후통(胡同)이다.

    은신 혹은 애정행각의 공간

    흔히 ‘주거지역에 있는 좁은 골목’이라 번역되곤 하는 후통은 몽골어로 우물(井)이란 뜻의 ‘후툭’에서 유래했다. 물이 귀한 메마른 땅을 터전 삼아 유목생활을 영위하며 살던 몽골인들은 우물을 파고 그 주위에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는 전통을 갖게 됐는데, 원 왕조가 지금의 베이징을 ‘대도(大都)’라 부르며 천도하자 몽골인들 또한 남하해 왕성 주위에 후통을 건설한 것이다. 그때가 원의 태조 쿠빌라이 칸의 치세(1285)였으니 후통의 역사도 어언 700년을 헤아린다. ‘베이징’이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이 명의 3대 황제 영락제 때(1403)이고 보면 후통의 역사는 베이징의 그것보다 118년이나 앞선다.

    후통은 몽골족 치하에서 조성됐지만 명·청 시대에도 그대로 살아남아 청나라 말기(19세기 초)에는 성 안에 1200여 개, 성 밖에 600여 개에 이르렀고, 1980년대 후반에는 도합 6000개를 헤아릴 만큼 ‘성황’을 이뤘다. ‘후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만도 1316개나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중국의 농촌을 무대로 한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펄 벅은 ‘베이징에서 온 편지’라는 작품에서 1900년대 초 베이징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베이징은 보석과도 같은 도시였다. 모든 것이 풍요롭게 꾸며졌고, 오랜 세월과 역사로 찬란한 금박을 입힌 것처럼….”

    일제하의 베이징에서 1년 동안 살았던 조선의 문인 한설야는 ‘옌징(燕京)의 여름’(1940)이란 글에서 “궁성·관아·주택 및 도로 등 제반 설계가 완벽에 가까워서 우리 조선처럼 이미 있던 집을 파헤치고 새 길을 내는 일은 하지 않고 건물의 외양만 조금 손질해도 아주 번듯한 새 거리가 되오. 북경의 외국인 거류지나 근대식 신시가지도 파헤치고 지은 것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손질하여 만든 것이니 중국의 도시계획 기술은 그저 놀라운 따름”이라며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후통이 밀집한 지역은 왕궁인 쯔진청 주위, 다시 말해 구시가지다. 그 좌우를 이루는 동·서 면에는 왕실 측근과 고관대작들이, 남·북 면에는 상인과 일반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집은 사각형태의 쓰허위안(四合院)이 주류를 이뤘고, 집의 크기는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후통이 가장 극심한 변화를 겪은 것은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신거주지역으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난 1950년대 초와 재개발 사업이 가속화하고 있는 지금이다. 그렇지만 후통은 여전히 베이징 구시가의 뼈대를 이룬다. 시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시(광역시 전체가 아님) 인구가 400만명이라면 200만명이 후통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후통을 알게 된 것은 베이징을 처음 다녀온 뒤인 1993년이다. 베이징에서 온 중국인 친구가 당시 중국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기러기(鴻·우리나라에선 ‘대륙의 딸’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란 소설을 소개하면서 후통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 각지에서 상경한 선각자, 호족, 유지들이 청조 관헌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 회동을 갖기도 하고 몸을 숨기기도 했으며, 더러는 애첩과 애정행각을 벌이던 곳이 바로 후통이라고 했다.

    당시 각 성(省)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앙정부와 교섭하거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성(省)별로 회관을 세웠고, 대학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숙식 걱정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마련하게 됐다고 한다.

    베이징대는 이런 전통을 살려 지금도 신입생을 뽑을 때는 성적순으로만 선발하지 않고 지역할당제를 병행,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수학(修學)의 기회를 고루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완당과 소현세자의 자취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조선조 순조 때의 선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떠올랐다. 그가 연행사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이는 3000년 전 ‘燕古城’에서 유래된 이름이나 조선시대엔 베이징을 이렇게 불렀다)을 찾았다가 당대 최고의 경학자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학문과 예술을 논했다는 석묵서루(石墨書樓) 역시 이런 후통에 자리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915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 사학과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는 박사학위 청구 논문 ‘조선조에 있어서의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에서 추사가 옹방강을 처음 만난 1810년 정월 29일 석묵서루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이 논문은 1994년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이란 제목으로 번역됐다).

    “석묵서루 안의 담계(覃溪·옹방강의 호) 노사(老師)는 78세이고, 해동의 뛰어난 재사 김완당은 불과 25세, 그리고 그날의 안내자인 이심암(李心庵)은 41세였는데, 이때 담계는 반가이 추사를 맞이했다…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작은 키의 정한(精悍)하고 기백이 넘치는 청년 완당의 대단한 호학심과 혀끝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오는 경의한묵(經義翰墨)의 놀라운 조예에 그는 감탄하고 말았다. 담계는 말하기를 ‘해동에 아직도 이와 같은 영물(英物)이 있었던가’라고 하면서 청년 완당에게 ‘경술문장(經術文章), 해동 제일’이라고 칭찬했다. 완당 또한 담계의 평범하지 않은 마음 씀씀이와 탁월한 학문 품격에 감격해 수희갈앙(隨喜渴仰)의 정성을 다하였다.”

    노학자와 젊은 인재의 국적을 초월한 학문적, 인간적 만남의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 다시 베이징을 찾게 되면 후통부터 둘러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결심은 두번째 베이징 여행에서 실천에 옮겨졌다. 석묵서루는 그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지만, 당시의 거리 이름인 보안사가(保安寺街)는 중난하이(中南海·쯔진청 서쪽에 위치한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거소)의 높다란 담장 서쪽 너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향 예산에서 올라온 추사가 한양에서 머물곤 했던 장동(壯洞)이란 지명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후통의 거리는 이처럼 옛 그대로였다. 완당이 경학의 대가인 완운대(阮芸臺·추사는 완운대를 흠모하여 완당이란 호를 갖게 됐다)를 처음 만난 연성공저(衍聖公邸)가 자리했던 내성태복사가(內聖太僕寺街) 역시 그 이름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온 소현세자가 독일 출신의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만났던 천주교 남당(南堂)과 연행사를 따라 연경을 찾았던 조선조 선비들이 자주 들렀다는 북당(北堂)도 그대로 남아 그들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후지쓰카의 논문에 나오는 거리 몇몇 곳만 찾아봤을 뿐 후통을 헤집고 다니지는 못했다. 후통에는 이렇다할 명소도 없을 뿐더러 길도 좁고 긴 데다 꼬불꼬불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라고 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리고 유능한 가이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막연히 찾았다간 다리품만 팔다 말 것 같았다.

    스차후, 가장 후통다운 곳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스차후 근처 골목에 대기하고 있는 삼륜거. 붉은 휘장에는 '후통유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인과 중국문화의 참모습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친 중국 문인 린위탕(林語堂)이 ‘중국인’이란 글에서 “한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활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안다면 비로소 그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한 것을 떠올리며 내가 후통을 한번 제대로 살펴보자고 지난 여름에 길을 떠났다. 그럴 작정으로 서울을 떠나기 앞서 인터넷을 뒤져 ‘후통 투어’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구하는 등 ‘만반’의 준비도 했다.

    인터넷엔 중국어는 물론 영어, 독일어, 일어로 된 후통 관련자료도 있어 이곳을 찾는 외국인의 숫자도 적지 않은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쯔진청 관람을 마치고 북문인 선우문(神武門)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통!” “후통!” 하면서 ‘후통요우(胡同遊·Hutung Tour)’를 호객하는 세발자전거(三輪車)꾼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들의 끈질긴 유혹에 시달리면서 ‘쯔진청을 봤다면 이젠 후통을 보셔야죠’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었지만, 나는 속으로 ‘그대들보다는 신원이 확실한 여행사를 통하는 게 낫겠지’라고 하면서 그 자리를 간신히 벗어났다.

    호텔로 돌아와 인터넷을 보고 적어둔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2시간30분 투어에 요금은 교통비와 입장료, 가이드 팁을 합쳐 180위안, 우리 돈으로 2만9000원 정도였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호텔로 날 데리러 왔다. 그는 “오늘 손님은 당신 한 사람뿐”이라면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이내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가자고 했다.

    지도를 펴들고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베이하이(北海) 공원(쯔진청 북서쪽에 위치) 북쪽에 위치한 꿍왕푸(恭王府)를 가리켰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그곳은 후통에 있는 청대 귀족의 대저택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해 당시 왕푸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20세기를 빛낸 중국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궈머뤄(郭沫若)의 고거(故居)와 쑨원(孫文)의 처 쑹칭링(宋慶齡)의 고거 또한 거기서 멀지 않은 듯했기에 드넓은 후통 지구에서 왜 하필이면 그곳을 찾아가나 싶었다.

    베이하이 공원 북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핑안(平安)대로를 지나기가 무섭게 녹지대가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에 남북으로 길게 퍼진 호수도 보였다. 호수의 이름은 스차후(什刹湖), 절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스차후는 남쪽의 전해(前海)와 중간의 후해(後海), 그리고 제일 북쪽의 서해(西海), 이렇게 세 개의 작은 호수로 이뤄져 있다.

    전해의 호수변에는 버들이 줄지어 서서 그늘을 드리우고, 이를 따라 활처럼 휘어진 길 한쪽으로는 붉은 색의 휘장에 흰 글씨로 ‘후통 유람’이라 쓴 삼륜거들이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고 도열해 있었다.

    그렇지만 허름한 복장의 중국인들이 호수변으로 나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통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가이드는 “스차후 일대는 가장 후통다운 곳이라 ‘베이징 역사문화 풍경구’로 지정됐다”고 일러줬다.

    연꽃 낙원의 꿍왕푸

    전해와 후해를 가르는 것은 은정교(銀錠橋)라는 작은 다리였다. 날씨가 청명한 날 그 곳에 오르면 병풍처럼 호수를 두른 뒷산의 정경을 조망할 수 있어 예로부터 ‘은정망산(銀錠望山)’이라 부르며 ‘베이징 8경’의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은 약간 흐린 날씨 탓에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대신 그 아래로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수련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후통 거리에는 드물게나마 중국의 전통주택 양식인 쓰허위안이 아직 남아있다. 본채는 햇볕이 잘 들도록 남향이다.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 린위탕이 “수면에 떠 있는 수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게 바로 수련이 아닐까 싶다. 근처에 연이 없으면 여름을 즐길 수 없다…공리적인 견지에서 봐도 연에는 버릴 게 아무것도 없다. 뿌리는 청량음료를 만드는 데 쓰이고, 잎은 과일이나 그밖의 음식을 찔 때 그것들을 싸는 데 쓰이고, 꽃은 그 모양과 향기 때문에 사랑받고, 연밥은 신선이 먹는 것으로서 존중되며, 까서 그냥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고 말려서 먹기도 하고 설탕에 절여서 먹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 이 대단한 수련의 무리를 누군들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곳에 정자 하나쯤은 마땅히 있어야 할 터, 작은 기정(旗亭)이 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옛날 중국의 시인 묵객들은 여름이면 이곳에 와 연자죽(연뿌리로 쑨 죽)을 먹으면서 세상의 시름을 잊곤 했다니 낙원을 떠올렸을 법도 하다. 이곳에 꿍왕푸가 자리한 까닭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왕조시대의 황제는 대궐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들(親王이라 함)은 성인이 되면 대궐에서 나와 백성들 사이에서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꿍왕푸의 ‘푸(府)’는 그런 왕실 가족들이 살던 주택을 일컫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친왕(親王)의 푸를 ‘왕푸’라고 불렀다. 왕푸는 황제의 거소인 황궁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화려해 1급 주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청나라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 공친왕의 저택인 꿍왕푸의 입구는 일반 여염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통의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 진면목은 그런 입구를 지나 한 차례 길이 꺾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우람한 대문과 함께 동굴처럼 생긴 길다란 입구가 거기에서 시작됐다.

    세 칸이나 되는 대문을 통과하자 수저우(蘇州) 근방의 타이후(太湖)에서 캐내 옮겨다 놓은 괴석들이 특유의 자연미를 펼쳐보였고, 세월과 함께 자란 수목과 파초, 해당화, 대(竹), 연꽃 등이 한데 어우러진 못, 그 위에 걸쳐 있는 아치형 나무다리, 날렵한 지붕을 인 작은 정자와 거기에 잇댄 지붕 덮인 회랑, 바위와 잔디와 수목이 뒤엉킨 작은 동산, 그리고 수백개의 방을 거느린 세 동의 큰 저택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파노라마식 풍경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막과 장으로 구성된 연극에서처럼 하나가 끝나야 다음 코스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 왜 ‘시간 전개형’을 취하는지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후통은 왜 폐쇄적인가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중국인들은 집 대문에다 '복(福)'자를 쓴 마름모꼴 쪽지를 붙여놓는다.

    정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꿍왕푸를 서둘러 둘러본 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삼륜거에 몸을 싣고 후통의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달렸다. 길이 좁은 후통에선 두 발 달린 자전거나 세 발짜리 삼륜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이런 자전거들이 베이징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의화단사건이 일어난 직후라고 하니 중국의 자전거 문화는 그 역사가 100년을 조금 넘는다. 그런데도 중국은 여전히 자전거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이상 경제적인 교통수단을 찾지 못한 탓이리라.

    골목 어귀의 벽면에 무슨 무슨 후통이라고 쓴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으나 삼륜거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읽을 수가 없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옆자리에 앉은 가이드에게 모든 걸 맡겨두고 거리 풍경에 눈길을 보냈다. 안내책자에는 후통의 노폭이 6보(약 8m)라 되어 있었으나 그보다 좁은 곳도 많았다. 그런 곳에선 맞은편에서 삼륜거가 달려오면 멈춰섰다가 한 대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출발하곤 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담장이 길을 갉아 먹다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벽돌을 쌓아올려 세운 담장의 겉쪽에 다시 시멘트를 바른 데다 지붕에 올려진 기와도 잿빛이라 골목은 전체적으로 우중충했다. 잿빛 담장을 뚫고 세로로 긴 대문이 드문드문 박혀 있지만 대부분은 닫혀 있었다. 그 문만 굳게 잠그면 내부와 외부는 완전히 단절될 것 같았다.

    후통의 집들은 왜 이렇게 폐쇄적일까. 누군가는 이를 베이징 특유의 ‘울타리 문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이유의 일단을 앞서 말한 소설 ‘기러기’에서 찾는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실려 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과 찌는 듯한 여름 사이에 사실상 봄이나 가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극악스러운 기후에 최대한 대비해서 지어졌다. 거기다 1년 내내 먼지가 눈으로 들어가고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으니….”

    땅위에 세워지는 집만큼 그 땅의 조건에 지배받는 것이 달리 없다면 이같은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사실 좁은 골목은 베이징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방의 상하이나 광저우(廣州) 같은 대도시, 그리고 황산 아래의 훙춘(宏村), 시디(西遞) 같은 민속마을에도 좁은 골목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상하이 일대에선 이를 ‘리눙(里弄)’ 또는 ‘눙탕(弄堂)’이라 부르고, 광저우 사람들은 ‘샤오샹(小巷)’이라 한다.

    그런데도 남방에선 ‘좁은 골목=폐쇄성의 상징’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개방적이라 할 만큼 바깥과의 교류에 열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춥고, 배고프고, 메마르고, 전쟁이 잦고, 권력 또한 자주 교체됐던 북방에 위치한 데 반해 상하이는 덥고, 모든 게 넉넉하고, 물이 많으며, 권력의 부침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은 남방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거기다 상하이는 이주(移住) 문화가 주류를 이루기에 ‘上海’ 즉 ‘바다로 나가자’는 이름 그대로 대외지향적이다.

    반면에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라는 이유로 늘 무게를 잡아왔기에 어딘지 모르게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색채가 짙다. 베이징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후통도 한몫 거들었다. ‘베이징 속의 시골’인 후통은 바로 그같은 시골스러움으로 베이징에 자기 정체성을 불어넣은 것이다. 후통은 결코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골목길에 넘쳐나는 매력

    중국 전통의 주거 양식을 말하면서 쓰허위안(四合院)을 빼놓을 수 없다. 쓰허위안이란 동서남북에 각기 건물을 두어 균형과 대칭을 이루도록 한 폐쇄형 주택이다. 차라리 작은 성채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이곳에서 가장은 햇볕이 잘 드는 북쪽의 본채(正房)에 기거하고, 자녀들에게는 동서 양쪽의 상방(廂房)이나 남면의 방을 내준다.

    안뜰(中庭)을 향해 문과 창을 내지만, 외부로는 일절 문이나 창을 내지 않은 채 등을 돌리고 있는 형상을 취한다. 가족은 분해가 아니라 통합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닫힘과 격식이 강조됐다고 해서 나무랄 일은 못된다.

    쓰허위안이 주류를 이루는 후통에서 길은 대개 동서로 길게 뻗게 마련인데, 본채가 남향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베이징에는 이렇다할 산이나 언덕이 없는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동서 방향으로 긴 길을 낼 수 있었다. 시 중앙을 한일자로 가로지르는 창안로(長安路)는 길이가 수십리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은 후통에서도 쓰허위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대(代)가 이어지면서 분가가 계속돼 작은 집들로 쪼개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98년에 주택분배제도가 폐지됐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고옥의 파괴와 재건축이 가속화했다. 그때 직장분배제도도 함께 무너져 중국은 누구나 집과 직장을 스스로 구해야 하는 시대로 진입했고, 시 당국은 이를 기화로 인구증가에 따른 주택부족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으로고옥을 헐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세우는 재건축에 열을 올렸다.

    명대에 지어졌다는 퇴직교수 자오징신(趙景心)씨의 고옥도 당시 철거 위기에 몰렸다. 물론 자오씨 부부는 이에 완강히 반발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안뜰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운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 등은 “자오씨의 고옥을 철거할 경우 베이징의 전통문화를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관(官)은 듣지 않았다. 후통도 역사의 산물이라 역사의 거센 흐름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삼륜거에 앉아서 잿빛 골목을 바라보았다. 식료품과 음료수, 과일, 과자 등을 파는 구멍가게와 더 이상 못쓰게 된 낡은 가구, 그늘을 선사하는 나이 먹은 수목,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찜통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만두가게, 줄에 이리저리 널린 빨래, 나뭇가지에 매달린 그물 침대에서 웃통을 벗은 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쉬고 있는 노인네,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달리는 사내,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놓는 할머니, 그리고 대문마다 어김없이 붙어 있는 ‘복(福)’자와 ‘재(財)’자…. 정말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골목이다.

    나는 이런 인간적인 모습에서 골목의 매력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의 고샅도 그러하거니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고도를 여행하다 여러 차례 만난 이슬람의 전통도시 메디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메디나 중에서도 그물처럼 얽혀 있는 미로로 유명한 시리아의 알레포나 모로코의 페스가 유별나게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순박하고 친절하고 또 낙천적이었던 것이다.

    큰길은 흔히 스피드와 미래, 자본주의 시장경제, 진보, 물신숭배를 상징한다. 좁은 길은 보수성과 과거, 전근대적 유산, 가난 등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이는 대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된 이분법적 도식일 뿐 사실과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제각기 다르듯이 인간이 만든 문화도 제각각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문화적 다원주의를 설파했던가.

    知足常樂의 삶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집 앞의 작은 사각 마당을 정원으로 꾸며 놓은 후통의 아주머니. 낯선 손님 앞에서도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띠었다.

    달려오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가이드는 좁은 골목의 어느 집 앞에서 삼륜거를 멈추게 했다. 주민 몇 사람이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그도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후통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겠다”며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들어가자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정말 작은 사각의 마당이 나왔다. 여러가지 화초들이 싱그러운 녹색을 내뿜고 있었고, 그 속에는 새장도 보였다. 순하디 순하게 생긴 바둑이를 품에 안은 주인 아주머니는 함박웃음을 띠고는 어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예쁘게 손질된 마당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녀에게 “정말 아름다운 정원이네요”라고 찬사를 보내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더니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거실 한쪽에 그리다 만 그림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직업은 화가인 듯했다.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화가라는 사실에 마음이 끌려 가이드를 사이에 두고 그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림은 잘 팔리나요?”

    “리우리창의 룽바오자이(榮寶齋·유명한 골동품 가게) 등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돈이 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지 그림 시장이 예전 같지 않아요.”

    “그러면 생활은 어떻게 꾸려갑니까?”

    “버는 게 적으니 적게 쓰는 거죠. 이 집은 40년 전부터 살고 있는데, 돈이 들지 않아 견딜 만합니다.”

    “후통 사람들의 형편이 대개 그런가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통에선 변화를 느끼기 힘들다는 겁니다. 이곳을 벗어나 왕푸징 같은 번화가로 나가면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지만, 이곳에선 10년을 하루처럼 살죠. 웬만큼 수입만 있으면 후통에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 수 있답니다.”

    “후통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안달할 필요가 없는데, 늙은 우리가 왜 이곳을 떠나겠습니까.”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게 부자인 그에게서 나는 중국인들이 삶의 덕목으로 삼아왔던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실체를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발전과 성장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값진 일은 달리 찾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리라.

    짧은 대화가 끝나자 그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함 그 자체인 침실과 자기(瓷器)보다 스테인리스류 그릇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입식부엌, 그리고 최근에 그가 그렸다는 그림들을 보여줬다. 산수와 화조, 인물 등 대상과 소재를 가리지 않아 그림의 내용이 아주 다양했다.

    식목은 생존전략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종루와 고루는 후통의 중심지구다. 종루 앞에 손님을 기다리는 삼륜거가 진을 치고 있다.

    화가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가이드는 조금 전에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스차후의 북쪽에 위치한 고루(鼓樓)로 안내했다.

    옛날 중국에선 북과 종을 울려 시간을 알렸는데, 이곳의 고루와 종루는 원·명·청 대에 걸쳐 실제로 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베이징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붉은 색 기단 위에 세워진 고루의 높이는 50m나 됐지만, 올라가는 계단은 꺾어진 곳 없이 곧장 위로 뻗어 있어 길고 가팔랐다. 정상의 한가운데에 큰북을 두고 동서남북 어디서건 조망할 수 있게 그 둘레에 베란다를 들였는데, 그곳에 서니 700년 역사가 녹아 있는 후통이 한눈에 들어왔다.

    골목길을 다닐 때는 잿빛투성이였으나 위에서 내려다보니 후통엔 푸른 수목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수목은 더운 여름 날에 그늘도 제공하지만 모래 바람을 막기도 하고 빗물을 땅속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황토 고원을 터전 삼아 살아온 중국인들에겐 수목을 키우는 일이 취미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전략이다. 최근 들어 황사 피해가 심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식목 노력이 배가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루 맞은편엔 1924년까지 매일 오후 7시면 어김없이 울렸던 우람한 종루가 서있었다. 그 앞으로는 스차후에서처럼 삼륜거가 즐비했다. 그것도 아주 다소곳한 자세로.

    가이드는 고루에 오른 것으로 투어는 끝났다면서 원한다면 스차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더 볼 게 있다며 거기에서 헤어졌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화장실이다. 중국인들은 먹는 데는 온갖 정성을 다 바치면서도 배설에 대해선 게으를 만큼 무신경하다고 알고 있던 터라 과연 후통의 화장실은 어떤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골목 어귀에서 만난 ‘꿍처(公厠)’는 예상보다 훨씬 깨끗했다. 화장실에 문이 달려 있지 않다는 것만 빼고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고옥이 빼곡한 후통에선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집집마다 화장실을 두지 않은 대신 이런 공중화장실을 만들었다. 청결 유지는 관리인의 몫인 셈인데도 그토록 윤이 났다. 대부분의 중국 공중화장실은 유료인데 후통에선 무료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공중목욕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집안에서 물을 데워 몸을 씻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건 확인하지 못했다.

    “베이징은 당신 안에 살아있다”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후통 지구에도 그럴듯한 호텔이 있다. 청대 군왕이 살았던 왕푸식 쓰허위안을 호텔로 개조한 뤼쑹위안빈관이 그것인데, 왕조시대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내부가 자랑거리다.

    그런 후통에도 별 셋짜리 호텔이 있다. 핑안대로 북측에 위치한 뤼쑹위안(侶松園) 빈관(賓館)이 그것인데, 청대 군왕이 살았던 왕푸식 쓰허위안을 호텔로 개조한 것이라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프런트의 예약 담당자는 “왕조시대의 귀족생활을 경험해보려는 구미 관광객들 때문에 여름철에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얻지 못할 만큼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그날 중국식 라운지에서 만난 한 스코틀랜드 청년은 “현대식 호텔은 세계 어디서나 구경할 수 있으나, 하루 40달러(300위안)로 이런 귀족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며 “나는 요즘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창문과 소파, 등(燈), 찻잔, 심지어 수저 하나에 이르기까지 청조의 분위기를 꼼꼼하게 살리려 한 것을 보고는 나 역시 놀라고 말았다. 바깥에선 잿빛을 띠고 있어 그저 그렇고 그런 집으로 보이지만 그 내부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잘 가꾼 정원이 딸린 호텔이 있었다. 이런 곳은 일반 관광안내서에는 나오지 않아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운이 좋아 어쩌다 이런 곳에 묵게 된다면 당신의 베이징, 아니 후통 여행은 길이길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린위탕도 이런 것을 알고 있었던 듯, 1940년대 후통의 풍경을 흑백영화처럼 묘사한 수필집 ‘임페리얼 페킹(Imperial Peking·우리나라에선 작년에 ‘베이징 이야기’란 이름으로 번역됐다)’에서 “한번쯤 베이징에서 살았다면, 베이징을 떠난 뒤에도 베이징은 당신 안에 계속 살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진정한 힘은 삶의 방식과 문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익히 체험한 그가 확신을 갖고 한 말이기에 믿어도 좋을 법하다.

    이럴진대 후통이 없는 베이징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서울은 어떤가. 개발과 편의, 생산성이란 구호 속에 역사의 숨결이 스며 있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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