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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⑩

와카야마 유학의 비조(鼻祖) 이진영 父子

야만의 왜인들에 사람의 도리 가르치다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와카야마 유학의 비조(鼻祖) 이진영 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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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야마 유학의 비조(鼻祖) 이진영 父子

이진영 부자의 묘가 있는 해선사 입구.

진주성 전투는 임란의 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선조실록’ 및 ‘징비록’에는 “군관민 6만∼7만명이 죽고, 소 말 돼지 닭 개에 이르기까지 남아난 것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기록에도 “적(조선 군관민)의 목을 벤 것만 2만여 명에 이르고 포로도 이에 맞먹는다. 물에 빠져 죽은 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라고 나와 있다.

이진영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부산으로 끌려갔다. 왜군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납치해서 끌고 갔다. 일본인 종군 승려 게이넨의 기록에도 참혹한 납치 장면이 나온다.

“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백성의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들이며 산이며 태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태워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눈에 띄는 대로 베어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地獄圖)에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를 무엇에 쓸 작정인가.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이진영은 부산에서 배로 옮겨져 대마도, 규슈의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과해 오사카로 갔다. 밧줄에 묶인 채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배에 실려 가는 동안 먹고 마실 것을 제대로 줬을 리도 없다. ‘간양록’에 실린 강항의 증언을 보자.

“잡혀서 여기(오사카)까지 오는데 아흐레가 걸렸다. 그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았다. 사람의 목숨이란 것이 이리도 모진 것일까. 도착한 뒤에야 왜녀(倭女)가 밥 한 공기를 가져다주는데, 쌀에는 모래와 뉘가 섞여 있고, 생선은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루(船樓)에 묶인 채 대마도 이키(壹岐) 시고쿠(四國)를 거치는 여정을 9일간 계속했다. 묶였던 손은 3년이 지난 지금도 굽히고 펴기가 어렵다. 시고쿠에 상륙했지만 굶주려 허기진 나머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열 걸음 걷다가 아홉 번은 넘어지고 말았다.”

포로수용소가 있을 리도 없었다. 왜군은 조선에서 납치해온 사람들을, 왜병 징발로 부족해진 농촌 일손을 보충하거나 무사(관리)의 집에 잡역 노비로 배치했다. 도자기 기술을 지닌 도공(陶工) 같은 우수 인력을 납치하는 ‘기술노예 사냥’은 그보다 5년쯤 뒤인 정유재란 이후에 나온 간지(奸智)였다.

이진영도 나니와(難波·오사카의 옛 지명)의 어느 농가에 배치됐다고 하나 어디, 누구 집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농노 생활은 고단하고 힘들었다. 그렇게 6년여 세월이 흐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1598)과 더불어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시련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돌연 다른 농촌으로 팔려가게 된 것이다. 나니와의 주인이 지금의 와카야마시 마쓰에니시초에 해당하는 기이구니 가이소군 니시마쓰에무라(紀伊國 海草郡 西松江村)에 사는 니시유 에몬에게 그를 팔아넘긴 것이다.

조선인 승려 사이요

낯선 주인을 섬겨야 하는 머슴살이는 더 고됐다. 거기서는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영은 산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이진영에게 말을 건 스님은 그의 말투가 이상하자 관심을 보였다. 이진영은 결국 “전쟁 때 포로로 잡혀와 지금은 니시유 에몬 집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스님 사이요(西譽)도 조선사람이었다. 스님은 ‘어떤 이유’로 일본에 건너와 지금은 인근 해선사(海善寺)라는 절의 승려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금세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진영은 사이요에게 해선사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농노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참으로 백골난망입니다” 하며 매달렸다. 결국 스님이 주인을 찾아가 이진영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스님은 해선사에 돌아와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진영의 학문적 자질이나 능력에 비추어 농노로 썩히기에는 아깝지 않으냐면서. 마침내 주지 스님이 허락해 절에서 니시유 에몬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이진영을 절로 데려올 수 있었다.

기복신앙과 뒤섞인 일본 불교

사이요 스님과 이진영의 자취를 찾아 해선사를 찾았다. 와카야마시 도조초(道場町) 1번지. 절은 지금도 건재했다. ‘해선사’라는 큼직한 간판과 번듯한 사찰건물로 미루어 재정적으로 윤택한 절임을 느낄 수 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일본 최대 명절 오봉(お盆) 시즌의 피크인 8월16일이었다. 절에서는 오봉을 맞아 기원(祈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오봉은 집안 대대의 조상 영혼이 사후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벌이는 철이다. 절은 조상의 평안을 비는 신도들로 붐비고 북소리와 목탁소리가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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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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