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년 ‘애정만세’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대만 감독 차이밍량은 허우샤오시엔, 양더창 등 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작가들의 대를 이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는 이야기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도시인의 소외와 단절을 전하는데 예를 들어 ‘애정만세’에서 양귀매의 울음을 담은 마지막 장면은 전후 맥락에 대한 구차한 설명 없이도 보는 이의 감정을 사로잡아 유명해졌다. 이는 서정적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그의 선배세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한데 그는 대단히 건조하고 단순한 형식으로 대만의 현재를 그려왔다.
1957년 말레이시아에 태어난 차이밍량은 1977년 대만으로 이주해 문화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 시나리오 작업과 TV연출로 경력을 쌓았다. 1992년 데뷔작 ‘청소년 나타’는 그의 영화에서 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배우 이강생과 한 첫 작업이기도 한데 10대들의 방황과 우울한 미래를 담아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애정만세’는 그의 두 번째 영화로 서로 엇갈리는 두 남자와 한 여자를 그리고 있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이뤄지는 이들의 엇갈림은 소통불능의 현대사회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투명하게 표현한다.
1996년작 ‘하류’는 부자지간의 동성애를 암시, 베를린영화제에서 대단한 충격을 던져준 작품. 차이밍량은 이 영화에서 무기력한 인간들이 직면하는 삶의 비애를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의 붕괴를 통해 보여준다.
참혹한 현실과 암담한 미래를 다룬 전작들과 달리 1998년작 ‘구멍’에선 가냘프지만 가슴 설레게 하는 희망이 제시된다. 세기말의 대만, 밖에는 비가 내리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벌레처럼 변해 죽어간다. 위층 남자 이강생과 아래층 여자 양귀매가 사는 단절된 공간에 수도공사로 구멍이 생기고, 이들은 이 작은 구멍으로 연결된다. 여자를 엿보던 남자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여자를 향해 손을 뻗고 여자는 그의 손을 잡고 위로 오른다.
프랑스-독일의 합작으로 아르테TV가 기획한 세기말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구멍’ 이후 차이밍량의 신작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관이냐 낙관이냐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말이 어느 쪽이든 도시생활자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형상화하는 그의 솜씨는 언제나 경탄할 만한, 대가 수준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 욕정과 이상심리에 집착한 스페인 감독
알 모도바르의 영화세계는 욕정과 이상심리로 뒤범벅된 난장판이다. 원색의 기괴한 의상을 걸친 인물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펼치는 그의 영화들은 늘 소수의 지지자를 몰고 다녔다.
1951년 스페인의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에서 태어난 알모도바르는 16살 때 마드리드로 상경, 전화국에서 일하다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과 교분을 트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아방가르드 연극집단인 로스 골리아도에 들어가 웃기는 대사를 썼고 가공의 국제적 포르노스타 페티 드푸사란 필명으로 추억담을 써서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74년 슈퍼 8mm로 영화를 찍었고 그 뒤 몇 편의 단편영화를 더 찍었다.
80년 ‘페피, 루시, 봄’으로 데뷔한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개성으로 똘똘 뭉친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국내에 비디오로 나온 ‘마타도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욕망의 낮과 밤’‘하이힐’ 같은 영화들은 허름한 비디오 가게 에로비디오 코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학, 피학적 음란증과 시체애호증이 뒤범벅된 ‘마타도르’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자를 겁탈하려 하고, 사람들의 욕망을 어이없을 정도로 순박하게 드러내는 ‘욕망의 낮과 밤’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이 연모하는 포르노 여배우를 납치해 묶어놓고 사랑을 고백한다.
연출자의 이성이 마비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순간이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런 요소들이 너무 즐비해서 그 자체가 새로운 미학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때문에 영화평론가 폴 줄리언 스미스는 “알모도바르는 서구의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학을 10년 앞서 예고한 바 있다”고 썼다.
그는 1999년 칸 영화제에서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17살 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30대 후반 여인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아들을 위해 사라진 남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알모도바르가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좌충우돌 소동극의 대가였던 그는 여기서 차곡차곡 감정을 쌓아올리는 드라마를 선보여 평단의 격찬을 받았는데 경쾌하고 도발적인 개성파 감독이 마침내 거장의 길로 들어섰음을 입증한 것이다.
홍상수 -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시선
1996 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이 나왔을 때 홍상수라는 인물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 ‘강원도의 힘’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고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이 촬영중인 지금 홍상수는 한국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왜 홍상수인가? 그것은 그가 일종의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리얼리즘의 명제가 영화감독들의 강박관념에 머물면서 현실과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홍상수 영화는 가장 좁고 깊게 들어가는 시도에 성공했다.
등장인물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자세히 보여주는 그의 영화는 80년대에 머무르던 문제의식을 동시대로 따라잡았으며 결코 온전한 전체를 이룰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들을 어긋난 모양새 그대로 시야에 밀어넣었다.
불륜에 빠진 삼류소설가와 유부녀, 그 유부녀의 남편과 삼류소설가를 사랑하는 극장 매표원 처녀 등 네 인물의 에피소드를 이어붙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통해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이 매일 당면하는 문제들을 건드린다. 사소한 거짓말, 메워지지 않는 거리감, 자기만족적인 행동들이 엉뚱한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웃는 웃음이란 결과적으로 가슴 아픈 기억이 되고 만다.
두 번째 영화 ‘강원도의 힘’은 한 여대생과 그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대학강사라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두 단락으로 나눠 진행하는 영화다. 마치 전혀 연출하지 않은 듯한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관습적 드라마 틀을 벗어나 진행되는 이야기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사랑’은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불륜에 빠진 남자주인공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는 건 눈물어린 사랑고백이나 죄의식에서가 아니라, 그가 술집 여자와 무미건조한 섹스를 하거나 여대생에게 ‘입으로 해달라’고 요구할 때다.
더러 잔인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홍상수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 자신이 영향받았다고 말하는 오즈 야스지로나 로베르 브레송의 세계와 또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는 데 성공한 셈이다. 홍상수는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을 흑백필름으로 찍는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적은 없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팀 버튼 - 샘솟는 상상력, 공포영화 감독
팀 버튼은 B급 공포영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할리우드 안에서 가장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 30년대 유니버설영화사에서 만든 공포영화에 매혹됐던 그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뒤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1982년 그는 첫 단편영화 ‘빈센트’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자신의 어린 시절 우상이던 공포영화 전문배우 빈센트 프라이스가 주인공인 6분짜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84년에는 프랑켄슈타인처럼 변한 강아지가 등장하는 단편영화 ‘프랑켄위니’를 만들었고 이후 디즈니에서 나와 장편영화를 찍는다.
그의 데뷔작은 ‘피위의 대모험’. 소수의 열광을 받았던 스타 피위 허먼을 연상케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알린 팀 버튼은 곧이어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에서 연출 제의를 받는다. 공포소설 작가 마이클 맥도웰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유령수업’은 아직 무명이던 팀 버튼에게 ‘배트맨’ 감독직을 선사한 출세작이다. 팀 버튼은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배트맨’ 주인공으로 마이클 키튼을 기용, 지극히 암울한 분위기의 영화로 완성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배트맨’은 대성공을 거뒀고 팀 버튼은 제작비 5000만달러가 넘는 블록버스터를 만들면서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는 드문 감독으로 할리우드의 기린아가 됐다.
다음 영화 ‘가위손’은 그가 다시 동화적 세계로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주인공 가위손은 마을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쫓겨나지만 세상을 저주하는 대신 아름다운 선물로 불신과 미움을 지우고자 한다는 이 따뜻한 이야기는 만화 속 세상 같은 세트 안에 끝없이 머무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다음 작품 ‘배트맨 2’는 ‘배트맨’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의 블록버스터였다. 배트맨, 캣우먼, 펭귄 등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늘진 표정을 보여주고 선악의 기준은 모호하기만 하다. 제작을 맡은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에서는 디즈니의 착하고 예쁜 캐릭터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했으며 흑백영화 ‘에드 우드’에서는 전설적인 B급영화 감독 에드 우드에게 경의를 표했다. 60년대 풍선껌 시리즈에 나오는 그림에서 출발한 ‘화성침공’에서 정말 만화 같은 SF영화를 보여준 그는 최근 동화 같은 공포영화 ‘슬리피 할로우’로 다시 나타났다. 팀 버튼의 상상력은 마르지 정말 않는 샘물 같다.
이원 맥그리거 - 청년문화의 상징이 된 영국배우
스 타란 분출하는 청년문화가 동시대에 남기는 증거물이다. 제임스 딘에서 톰 크루즈로 이어지는 젊고 잘생긴 남자배우들의 계보는 90년대에 등장한 이원 맥그리거로 이어진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근처, 전형적인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93년 ‘립스틱 온더 컬러’로 데뷔했지만 이원 맥그리거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대니 보일 감독의 97년작 ‘트레인스포팅’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마약에 빠진 젊은 백수건달로 등장, “인생을 택해라, 직업을 택해라, 경력을 택해라, 가족을 택해라, 망할 놈의 텔레비전을 택해라…”라고 선동한다. 영화에서 자신이 보여줄 행동과 정반대 되는 이 독백은 90년대 젊은이들이 당면한 고민과 절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진, 첨단 세상을 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자신감, 의욕, 낙관적 전망, 열정 등이 없는 공허한 젊음, 그것은 그들이 마약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셸로우 그레이브’에 이은 대니 보일의 두 번째 영화이기도 한 ‘트레인스포팅’은 이원 맥그리거를 단숨에 90년대 젊은 우상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런 점에서 96년 7월 미국 개봉을 앞두고 ‘타임’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64년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한 것과 맞먹는 사건”이라 평한 건 과장이긴 해도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지적이긴 하다. 게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오비완 케노비로 출연한 사실은 이원 맥그리거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게 한다. 이원 맥그리거가 ‘스타워즈’에서 맡은 배역이 과거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해리슨 포드가 했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더 그렇다.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지만 그는 아직 LA로 이사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돈으로 모든 걸 평가하는 할리우드가 싫기 때문이다. 반항적 기질과 영국적 자존심을 함께 갖춘 이원 맥그리거라면 가뿐히 90년대를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캐서린 제타 존스 - 시대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배우
최근 마이클 더글러스와 결혼할 거라는 소식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캐서린 제타 존스는 리타 헤이워드, 마릴린 먼로 이후 군웅이 할거하던 육체파 여배우 계보를 단숨에 정리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에 황갈색 눈동자가 빛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미국인들은 라나 터너와 에바 가드너 이후 잊고 지냈던 또 다른 관능의 영토를 발견했다.
그녀가 ‘마스크 오브 조로’에서 터질 듯한 가슴의 굴곡을 선보였을 때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이 꼬았던 다리를 푸는 0.5초간의 아찔함 같은 것을 경험한 관객이라면 ‘엔트랩먼트’ 포스터에서도 쉽사리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이다. 도둑질하는 데 필요한 복장치곤 지나치게 야하지만 영화선전에 그만큼 효과적인 옷차림은 흔치 않다. 그것은 짧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끝없는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엔트랩먼트’에서 캐서린 제타 존스가 적외선 감시망 사이를 유연하게 통과하는 광경이 자극하는 성적 상상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영국 웨일즈 태생으로 아역 배우출신인 그녀는 ‘벅시 맬론’ ‘42번가’ 등 많은 뮤지컬에 등장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은 ‘5월의 사랑스런 처녀들’이라는 TV미니시리즈였다. 막 20살이 된 그녀는 단숨에 섹스심벌로 떠올랐고 파파라치의 표적이 됐다. 런던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캐서린 제타 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이 시기에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라스, 가수 믹 허크낼, 영화사 조 피터스 등과 염문을 뿌리며 타블로이드 신문의 표제를 차례로 장식했다.
파파라치에게서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1995년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그러나 성공한 영국 TV스타에게 할리우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한 ‘팬텀’에서 악녀로 등장한 캐서린 제타 존스는 영화가 실패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CBS 미니시리즈 ‘타이타닉’에서 그녀를 본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고 ‘마스크 오브 조로’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캐서린 제타 존스는 이 영화에서 그 동안 품고 있던 에너지를 한꺼번에 뿜어냈고 곧이어 ‘엔트랩먼트’와 ‘혼팅’에 출연했다. 물론 아직 연기력에 대한 평가는 유보된 상태지만 한 시대의 성적 판타지로서 그녀의 이미지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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