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어느 불법시위자의 전원일기

  • 김철수

    입력2005-05-13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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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여름이다.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반상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논두렁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낭자하게 흐른다. 자지러질듯 울어대던 개구리들이 내 발소리에 놀라 풍덩풍덩 논 속으로 뛰어든다.

    벌써 반원들이 거지반 모였다. 동네 사람들끼리 매월 하는 반상회니 특별한 안건이 있을 리도 없고 도시민들이 하는 반상회처럼 어색한 분위기도 없다. 그런데 낯모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C가스 대리 이현필이란다.

    반상회가 끝나자 이현필씨는 반원들에게 “우리 C가스는 인체에 무해한 산소, 질소, 아르곤만 생산하기 때문에 마을에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자기네 가스회사가 들어오면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 한 명이 나서서 “공장이 들어오면 물이 필요할 텐데 그건 어떡할 거냐”고 묻자 “하루에 얼마 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지하수를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지하수를 사용한다고? 마을 사람들 모두 식수 외에 농수, 가축사육을 위해 지하수를 쓰기 때문에 안 그래도 물이 모자랄 지경인데 얼마나 쓸지도 모를 지하수를 퍼내면 앞으로 우리는 어떡하라고? 하루에 물을 얼마나 쓸 거냐고 물으니 이현필씨는 대답을 못 했다.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직원이 와서 뭐하느냐, 직접 사장이 와서 해명해야 우리도 협조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이대리는 다음 반상회에 사장이나 실무진이 직접 와서 정확한 답변을 하겠노라고 했다.

    반상회는 별 무리없이 끝났다.

    우리 동네에 공장이 하나 들어선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만 접하고 긴가민가 하던 중이었는데 공장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우리 동네에 공장이 들어선다니 마을이 공해로 오염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공장이 들어선다!

    1990년 9월25일

    지난번 반상회에 왔던 이대리가 서이사라는 사람과 함께 왔다. 사장이 직접 오지 않아서 떨떠름했지만 안 온 것을 어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안건은 뒤에 의논하기로 하고 먼저 가스공장 설립 건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했다.

    우리는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서이사의 답변도 별반 새롭거나 자세한 것은 없었다. 서이사가 준비해온 차트는 공장 부지와 공장용도, 취급할 가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고 공장에서 취급할 가스는 인체에 전혀 무해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토의 결과 공장 설립 건은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을 안에 가스공장이 들어서면 주민들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올지 모르고 농사에도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회사측 사람들의 해명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반상회가 끝나갈 무렵 회사측에서 보낸 봉고차가 한 대 도착했다. 봉고차 안에는 박스가 가득 실려 있었다. 서이사와 이대리가 작은 성의표시니 받아달라고 했다. 그런 거 필요없다고 극구 거절했지만 두 사람은 서둘러 짐을 모두 풀어놓고 가버렸다. 뭐가 들어 있는지 풀어보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그 선물박스는 개봉되지 않은 채 창고 한구석에 처박혔다.

    ‘뭔가 있다. 동네에 들어온다는 그 가스공장이 전혀 해가 없다면 이런 선물공세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대로 보관해 두는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1991년 1월 중순

    C가스 사장 한효정(52)씨가 와서 임시 반상회를 소집해달라고 했다. 한낮에 임시회의를 소집하기는 일은 드물지만 농한기이기도 하거니와 사장이 직접 오기는 처음이고 마을 주민들도 사장과 직접 대면하기를 원하던 터라 나는 즉시 임시회의를 소집한다는 방송을 반 전체에 내보냈다. 1월부터 내가 우리 동네 반장을 맡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잣집 맏며느리 노릇에 실속없이 골병만 든다’는 말이 있지만 시골 동네의 반장 노릇이야말로 없는 건더기에 일만 가지가지 많아서 누구나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반 일을 맡아볼 사람은 꼭 필요하기에 생각다못해 반원이 모두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하기로 했다. 1991년 상반기 반장으로 내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반원들이 모두 큰다리로 모였다. 동네에 가스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해하던 다른 반 주민들도 몇 명 왔다. 한효정 사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대접하려고 가져왔다는 술과 음료수를 내놓았기에 그것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눴다.

    “작년 9월 반상회 때 서이사와 이대리한테도 얘기했지만 우리 주민 일동은 공장 들어오는 것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보다시피 여긴 농지전용지역이에요. 일년 농사 지어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쌀, 고추, 배추 할 것 없이 오염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여기가 폐허가 되면 지가 하락은 또 어떡하고요.”

    내 말에 한사장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 땅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땅은 내가 다 삽니다.”

    “우리 동네 땅을 전부 말입니까?”

    “그럼요. 필요하면 다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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