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민중 정치’ 꿈꾼 이단아 마키아벨리

  • 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

    입력2004-09-16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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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 중국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늘 갈등이 있어왔다. 그 세 나라를, 흔히 우리는 불교·유교권에 속한 동양이라 부르며 서양에 대응시키지만, 동·서양이라는 구분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이 든다. 지리적으로도 정확히 말하자면 ‘동양 3국’이란 곧 동북아시아다. 동양에는 그밖에도 많은 지역의 나라들이 포함돼 있다.

    최근 유럽이 통합됐다. 꼭 그 수준은 아니어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통합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에 통합이란 없다. 합치기는커녕 한반도는 분단국이다.

    유럽 통합과 함께 15개국 역사가가 공동집필한 유럽사가 나왔다. 우리나라에는 ‘유럽 공동의 역사 교과서’란 식으로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교과서’란 사실과 다른 선전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유의 유럽사는 이전에도 수없이 씌어졌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처럼 역사서술에 갈등이 일었던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로렌제티의 벽화다. ‘조화를 이룬 하나의 유럽’이라는 주제 아래 이 벽화를 소개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균형, 공간을 조직하는 능력이 유럽의 특징임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그 특징들이 거대도시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으나, 다른 많은 도전들을 극복했듯 이 또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도시는 유럽의 물질적 토대로서 큰 중요성을 갖는다.

    이 책은 또한 ‘유럽 정신’이란, 그리스에서 비롯한 민주주의(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토대로 한)에서 출발해, 로마시대 법치주의와 입헌주의를 거쳐,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에 의한 개인의 자유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부(富)의 편중 문제가 발생했으나 중세 수도원은 이 문제를 극복했고, 그 성공을 바탕 삼아 19세기에는 세속수도원 창설을 통한 유토피아 건설을 추구했다. 새로운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대신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나 1945년 이후 사회보장제도에 의한 복지국가 건설로 귀결되었다. 이 책은 국민복지 실현이야말로 전세계에 발산하는 유럽의 매력이라 결론짓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잘못된 시각


    유럽 통합의 아버지로는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많은 르네상스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이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사람들의 견해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갈망했고, 그 실현을 위해 현실감각이 뛰어난 정치인이 되기를 희망한 인물이지 유럽 통합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 강하게 ‘민중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한때 반공학자로 각광 받은 막스 베버는, 이제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닌 유교를 토대로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사람으로 원용되고 있다. 그가 ‘동아시아는 유교로 인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은 간과한 채 말이다. 그러나 베버 자신은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물질만으로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시각에서 정신의 측면을 보충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베버는 겹눈을 가진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그는 19세기말 독일에 만연한 이데올로기병을 치유하고자 노력했다. 즉 정치를 하나의 관념으로 보고, 그것을 긍정하면 무조건 미화하고 부정하면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베버는 긍정에 대해서는 부정, 부정에 대해서는 긍정이라는 균형적 태도를 취했다. 즉 국수주의가 판을 치면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평화주의가 판을 치면 국수주의를 변호했다.

    이를 일관성 없는 태도라 매도할 수도 있겠으나, 베버에게 정치란 윤리와 별개인 실용주의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가치를 선험적인 것으로 고정해두지 않고, 강인한 주체성을 바탕 삼아 구체적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화·상대화하는 유연한 사고를 구사했다. 그러한 사고는 당시 독일에서 철저히 매도되었으나, 유연한 사고의 부재야말로 나치스와 분단의 ‘씨앗’이었다. 지금 우리의 사정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이러한 겹눈의 사고방식이야말로 르네상스, 특히 그 정치관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잇는 것이라고 본다. 마키아벨리를 흔히 권모술수의 독재를 주장한 사람으로 폄훼해 왔으나 이는 선험적 가치에 사로잡힌 편견에 불과하다. 그는 정치와 윤리를 구별한 점에서 정치학의 선구자였고, 반민중적인 귀족정(貴族政)에 반대하기 위해 군주정과 공화정을 번갈아 옹호했다.

    ‘모나리자’의 미소와 달리 마키아벨리의 입가에는 조소가 있다. 눈은 교활하게 빛나고 얇은 입술은 굳게 닫혀 있으나, 언제나 비웃는 듯한 모습이다. 권모술수를 뜻하는 마키아벨리즘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교활한 느낌을 주나, 귀족에 대항하는 민중사상가라 생각할 때는 영민한 지혜와 저항의 조소를 표상하는 얼굴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우리 정치학자는 신념 없이 정치판에 뛰어드나, 플라톤이나 마키아벨리는 일관된 신념에 따라 정치에 참여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나는 우리 정치학자가 그랬다는 점에는 동의하나, 플라톤이나 마키아벨리가 그렇지 않았다고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해도 오십보백보 차이라고 본다.

    나는 마키아벨리를 처세주의자로 이해하는 나나미류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한국 정치학자들이 그를 공화주의자나 통치기술자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나나미처럼 그를 풍류객으로 묘사하거나 정치학자들처럼 학문의 시조 모시듯 하는 태도 또한 무시한다. 마키아벨리는 권위의식 없는 민중 지식인으로서 노동자·창녀·과부·제자들과 함께했고, 한편으로는 역사를 통한 정치 연구에 진력했던 르네상스인이라는 것이 내 견해다.

    아니 그는 정치학자이기보다 역사학자, 무엇보다 휴머니스트라는 점에서 르네상스인이었다. 그 자신 ‘정치학자’라는 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오늘의 행태주의적 정치학은 그의 실천적 정치학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이론조작에 불과하므로 그를 ‘현대정치학의 아버지’라 칭한다면 아마 그 자신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희극과 비극을 쓴 극작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만드라골라’는 이탈리아 연극사에서 가장 위대한 희극 중 하나로 평가된다. 유부녀를 유혹하는 줄거리에는 아마 마키아벨리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으리라. 그러나 ‘만드라골라’가 이 땅에서 상연돼 우리에게 감동을 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 점에서는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학문과 예술의 모든 것을 말한 듯한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도 정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상승하는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 세계의 창조자이며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전인적 인간의 사회참가, 문화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정치적 위기의 시대였다. 외국의 침입으로 이탈리아 정치조직의 허약성이 폭로됐으며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종래의 신뢰 또한 서서히 무너졌다. 인문학은 천박한 관념의 유희로 전락해 궁정인이 되기 위한 출세 요건 정도로 대접받게 됐다. 마키아벨리가 산 16세기 르네상스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마키아벨리는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인보다 더 예속되고, 페르시아인보다 더 억압받고, 아테네인보다 더 분열되어 있으며, 인정받는 지도자도 없고, 질서나 안정도 없으며,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찢겨지고, 유린당한, 한 마디로 완전히 황폐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가 1513년 집필한 ‘군주론’ 제26장에 나오는 글이다. 그런 극단적 현실분석으로부터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군주를 열망하는 이 책 ‘군주론’을 쓴 것이다. 분단 극복은 침략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 가능한데, 민중의 투쟁력은 충분하나 이를 뭉쳐 낼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그의 현실인식이었다.

    ‘군주론’ 헌정사에서 그는 실증과학, 정치과학의 토대라고 여겨진 모든 것들에 대한 ‘참된 이해’를 펼치기 시작한다. 사물을 현실적 진리 그대로 표상하는 것은 가상적으로 표상하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을 편다. 정치적 실천을 이데올로기보다 중시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은 이데올로기에는 당시 휴머니스트들의 훈고풍 (정치·도덕·미학적) 담론이나 사보나롤라의 혁명적 설교, 기독교 신학, 고대 정치이론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르네상스가 문예부흥으로 이해되듯 고전 부활이 각광받던 시대에 마키아벨리는 그 고전의 권위에 철저히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훈고적 학자가 아니다.

    서술 형식에서도 그는 다른 전형적 르네상스인들과 다른 길을 간다. 고상한 어조나 멋진 구절 등의 수사, 기교는 일절 배제했다. 이는 자신의 책이 오직 독창성과 중요도로 판단되기를 바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헌정사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민중의 입장에서 쓴다’는 것을 분명히 한 점이다. 군주가 아닌 민중의 관점에서 본 군주론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관점이 아니면 통치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군주는 민중적 군주다.

    ‘군주론’ 제1장에서 제11장까지는 전제정이나 세습정을 비롯한 군주국의 여러 현실 유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목표는 그런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유형이 아닌 새로운 군주국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탈리아를 분열시키고 통일을 방해해온 교회국가나 도시공화국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군주국에 대한 설명은 제12장에서 제23장까지 수록돼 있다. 군주가 이끄는 국가는 민중 속에 뿌리내린 민중국가로서 군대로 대표되는 강제장치, 종교나 명성을 통한 동의장치, 계급투쟁의 결과이자 제도인 정치-사법장치로 구성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다. “무장한 예언자는 모두 성공하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한다.” 따라서 군대는 이데올로기와 법에 우선한다. 여기서 군대란 외국군이나 용병이 아닌 순수 자국군, 즉 민중군대여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란 사적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 개인이다. 따라서 종교나 도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목표, 즉 역사적 목표인 국가 창건과 공고성(鞏固性)을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것은 개인적 비도덕이 아닌 정치적 비도덕이다. 군주는 법에 의거하되 법이 무능하면 강제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제는 사자와 여우의 비유로 설명된다. 덫을 알기 위해서는 교활한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쫓아버리기 위해서는 사나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여우는 기만, 즉 간계와 속임수를 뜻한다. 기만은 강제와 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군대에 대입하면 전략이고 법에 대입하면 정치술이 된다. 그러나 이는 무법이나 불법과는 다르다.

    법을 갖고 술책을 부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이 존재하고 승인돼야 하며 무시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군주는 다시금 민중적 기반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당대의 현실에서 볼 때 군주란 인민의 편에 서서 귀족에 저항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귀족과 민중의 ‘계급대립’을 직시했다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귀족은 민중을 지배하려 하나 민중은 그 지배를 원치 않아 대립이 생기므로 군주는 힘의 균형을 표현하는 법을 만들어 민중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마키아벨리를 알튀세르 같은 사회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그는 국가가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 창건된다고 본 점에서 분명 군주론자다. 그렇게 본다면 마키아벨리 역시 시대에 타협한 궁정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스틸리오네처럼 궁정인으로의 출세를 위한 천박한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은 아니나, 권모술수의 군주를 절대시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는 가난하나 덕이 높은 중세식의 금욕적 유토피아 국가를 부정한다. 에라스무스의 관용에 근거한 이상주의적 정치사상 같은 것은 마키아벨리에겐 휴지조각보다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의 책은 출간되자마자 교황이나 신부, 도덕주의자는 물론 군주들에게조차 저주를 받았다. 종교나 도덕을 정치의 도구로 타락시키고, 잔인하며 간교하고 배신을 일삼는 악마를 군주로 추앙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말은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게 됐다.



    나나미의 책에 지성은 없다


    그러나 당시 사회지도층이 마키아벨리를 증오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는 르네상스기뿐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이 붕괴할 무렵부터 19세기까지 분열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 요인 중 하나가 통일을 방해한 가톨릭의 존재였다. 반도가 통일되면 교황청은 그 산하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각 도시국가의 이해관계와 일치했다. 따라서 교황청이나 도시국가나 마키아벨리를 환영할 리 없었다. 그는 분명 이단아였다.

    마키아벨리가 그렇게도 열망한 강력한 군주를 통한 이탈리아 통일은 ‘군주론’이 출판되고 약 350년이 지난 1861년에야 가능했다. 여기서 우리는 르네상스 당시의 정치를 경제·사회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마키아벨리의 정치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경제 르네상스는 12세기 무렵에 시작됐다. 그러나 이는 나나미가 찬양하듯 이탈리아인의 상재(商才)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무렵 오랫동안 닫혔던 지중해가 사라센 등의 약화로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 때문이다. 부 축적의 대표주자는 베니스였다.

    우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통해 베니스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역자는 ‘자원이라고는 없는 손바닥만한 나라’가 무역입국으로 번영하는 과정이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고 한다. 그런 교훈이야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욱 일찍, 더욱 강하게 의식되어 일본에는 베니스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나나미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베니스를 르네상스의 ‘알맹이’라 보았기 때문에 그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 1000페이지를 다 읽어도 알 수가 없다. 베니스에서는 예술이나 학문이 그다지 융성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뛰어난 장사나 외교술을 ‘알맹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 나나미의 책을 읽어보면 장사나 외교를 르네상스만이 아닌 로마를 비롯한 모든 문명, 역사의 알맹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나미의 세계에서 예술과 학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인 마키아벨리마저 학자로서가 아니라 정치가, 외교가로 다루고있다. 저 명치유신 이래 마키아벨리만큼 일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없다. 지금도 일본 정치가의 상당수는 마키아벨리 제자들이다. 그것도 오직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의미에서.

    그런 일본적 풍토에서 씌어진 나나미의 책을 대단한 지적 작업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최인호의 ‘상도’와 같은 소설 이상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나나미나 최인호가 역사를 ‘재미있게’ 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미 이상은 기대할 수 없다. 그나마 담긴 교훈이란 것도 곁가지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베니스나 로마 이야기가 100년 이상 쓰여지고 읽혀졌다. 무역입국, 장사제국의 모델로서 말이다. 나나미의 책은 그런 풍조의 산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훈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그저 재미있다는 걸로 충분하다. 그런 책이 처음 소개되는 까닭에 한국에서는 아직 100년 전 일본에서처럼 교훈 운운하는 이야기가 먹히는 것일까.

    일본을 따라 한국도 무역입국, 장사제국으로 치닫고 있다. 나나미의 책이 우리 기업인이나 기업인이 되려고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나미의 책이 그들에게 흥미는 물론 ‘교훈’까지 준다면 다행이겠다. 그러나 ‘지성’ 운운함은 솔직히 역겹다.

    마키아벨리는 경제에 대해 쓴 바가 없다. 그러나 정치를 경제 없이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베니스뿐 아니라 르네상스 전체가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 형성의 중요한 계기는 자연적 조건과 로마시대 이래의 도로(지금의 철도)였다. 자연적 조건으로 보면 해양도시와 강변도시로 분류된다. 전자의 보기는 베니스·제노바·나폴리 등이고, 후자는 피렌체·로마·피사 등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도시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 발생을 필요로 하는 다른 지역이 배후에 존재해야 한다. 그에 따라 도시는 다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상업도시인 베니스와 그 호적수인 제노바다. 베니스 상인들은 유럽과 동방무역의 핵심 중개상이었고, 15세기말 포르투갈인들이 희망봉을 도는 항로를 개척하기까지 경쟁상대가 없었다. 그때까지 베니스는 세계 최강의 상업도시로서 목면·비단·향신료(특히 후추)를 수입해 유럽 전역에 팔았고, 모직물과 은화를 수출했다. 한편 제노바는 곡물·양모 무역으로, 프랑스·스페인·북아메리카와 깊은 경제관계를 맺었다.

    둘째, 공업도시인 피렌체와 밀라노다. 피렌체는 모직물과 수공예의 중심지로 15세기 후반에 이미 270개의 모직물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밀라노에서도 모직물공업은 중요했으나 이곳에선 특히 무기제조업을 비롯한 금속세공업이 발달했다. 베니스와 제노바의 공업은 상당히 발달한 수준이었다.

    셋째, 서비스 도시다. 가장 이익이 큰 분야는 금융업으로 14~16세기 이탈리아인은 유럽 전체의 은행업을 지배했다. 예컨대 피렌체의 메디치가(家)는 그 자체가 최대의 은행이었다. 로마와 나폴리는 수도이자 관리들의 도시였으며 권력의 중심이었다. 로마는 교회국가의 수도로서 가톨릭 세계 전체에 정치적·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했다. 로마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판매하는 거대한 상점’으로서 특히 값비싼 면죄부와 각종 허가서를 수출했다. 그 경영은 교황청에 딸린 은행가들이 맡았다. 그 은행가의 대표가 바로 메디치가였다.

    위 어느 도시든 전체를 뒷받침하는 것은 농업이었다. 특히 포강 유역은 유럽 대평원의 하나였다. 그 비옥함은 적당한 강우량과 함께 15세기, 100여 년간에 걸친 관개사업에 의한 미개간지의 경지화라는 인위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14~15세기에 이르러 토스카나에서는 경지 상당 부분이 버려졌고, 촌락의 10%가 소멸했다.

    그보다 더 남쪽에서는 바위가 많은 지형과 적은 강우량으로 인해 나폴리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는 농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남부 농업은 갈수록 쇠퇴해 경지는 방목지로 전환되고 인구도 감소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양이 인간을 먹는다”고 개탄한 현상이 이곳에서는 더욱 일찍 발생했다. 거대한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농업은 시장을 위한 상업적 생산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도시는 주변 농촌을 지배하고 희생시켜 도시 주민에게 값싼 식량을 제공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 정책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농민들에게는 본래 과세해야 할 액수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해 부유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을 낳게 했다. 도시 주민들이 향유한 법적·정치적 특권은 농촌 주민에게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16세기에 임산부들은 자녀에게 그런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도시에 가 아기를 낳았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농촌은 동물을 위한 곳이나, 도시는 인간을 위한 곳이다’라는 격언이 존재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도시와 농촌이 균형을 이루었다는 평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가능하나, 소수 기업가에게 자본이 집중되며 그 운영이 합리적·계획적으로 제도화된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르네상스는 어떠했는가.

    첫째, 자본의 집중도가 높아 메디치가처럼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가가 존재했다. 자본의 축적은 노동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모직물공장의 경우 분업이 고도로 발전해 25단계 이상의 전문 직인을 요구했다. 이들은 일급을 받았다. 방적공업은 상당 부분 재택(在宅)여성에 의존했다. 그들은 원료를 공급하는 기업가에 종속돼 있었다. 상인들은 원료뿐 아니라 기계나 공장까지 직공들에게 대여해, 19세기식 직접 관리는 아니되 간접 수단을 통한 지배를 공고히 했다.

    둘째, 자본주의적 제도로서 추상개념과 계산을 기초로 하는 복잡한 신용제도·은행·공채(公債)·상업회사·해상보험 등이 존재했다. 특히 은행업, 공식 이자가 정해진 공익 전당포 제도 등은 교회의 장려에 따라 확산됐다. 이는 14세기 피렌체에서 시민을 국가에 대한 투자자로 삼는 공채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심지어 딸의 결혼 때 투자한 돈을 이자와 함께 지급받는 결혼자금 기금제도까지 있었다. 상업회사 투자자는 회사가 파산할 경우 유한책임을 졌다. 선박 상실에 대비한 보험도 있었다. 특히 베니스는 해상보험의 중심지였다. 제노바에서는 남편이 출산하는 처를 대상으로 보험을 들기도 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거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베니스는 향신료와 함께 중부 유럽과 예술가 및 예술작품을 사고 팔았다. 티치아노는 지금의 독일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로 갔고, 반면 뒤러는 독일에서 베니스로 왔다. 또 피렌체의 회화작품은 프랑스 왕실까지 갔으며, 되돌아오기도 했다. 14세기에는 특히 페스트에 의한 경기 후퇴로 미술품 투자가 늘어났고, 15~16세기에는 개인적 과시 경향이 더해져 그 규모는 날로 커졌다.

    물론 전통적인 요소도 있었다. 공업생산과 상거래는 여전히 소규모 공방과 가족경영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또한 대다수 소작농은 현물로 지대를 지불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 경제를 근대 자본주의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부르주아 사회로 보아왔으나 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15~16세기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1550년에 이미 인구 1만명 이상을 가진 도시가 40여 개에 이르렀으며, 그중 20개 도시는 인구가 2만5000명 이상이었다. 도시집중도도 높았다. 예컨대 토스카나 지역 인구의 4분의 1은 피렌체를 비롯한 도시에 집중됐다. 당시 유럽에서 그 정도 집중도를 보인 곳은 네덜란드의 프랑드르뿐이었다.

    그러나 도시민 전체가 부르주아였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대부분이 노동자였다. 물론 상인·기술자·전문직이 존재했으며 그들이 르네상스 문화의 주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들이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부르주아에 속한 마키아벨리는 단테와 마찬가지로 ‘상점주인’들이 다스리는 피렌체를 경멸했다. 마키아벨리는 부르주아를 찬양하지 않았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흔히 이념적으로 봉건적 대가족제도를 탈피한 것으로 설명하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대가족제도에 근거한 가계의 중요성과 결합력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다. 조상숭배에 근거한 거대 궁전과 가족 집회소, 가족 예배당 및 가족 묘소가 다수 건설됐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근대적 용어가 일제 이후 정착된 것처럼 서양에서도 근대적 용어는 실제 근대가 시작된 이후에야 나타났다. ‘사회’란 말이 등장한 것도 17세기 후반이다. 르네상스기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정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사회를 ‘신체’에 비유한 것이었다.

    즉 ‘신체에서 모든 기관은 심장의 지배에 복종하듯’ ‘정체에서 사람들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식이다. 또 지배자는 정체의 ‘내과의사’에 비유되기도 했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진단과 치료라는 개념으로 정치를 설명했다. 즉 군주를 심장과 같은 것으로 보고, 인체가 심장에 지배되듯 군주를 정체의 ‘내과의사’로 보았음을 ‘군주론’ 제3장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한편 당시 ‘국가’라는 말은 정체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공공복지나 권력구조의 뜻으로 사용됐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위 책에서 국가라는 말을 115회나 쓰고 있다. 반면 정부라는 말은 군주정이나 공화정, 또는 과두정이나 민주정을 뜻하는 말이었다. 당시 정부는 그 두 가지, 또는 중간형태를 취했으므로 사람들은 정부란 주민에 의해 변화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마키아벨리 또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정부는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건축처럼 인간이 ‘건설’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당시 건축론은 사회건축론이기도 했다. 예컨대 알베르티의 그것은 건축술의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자 사회 유토피아로 당시의 이상인 도시국가를 구상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상상도시 설계도도 사회생활의 계획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예술작품으로서의 국가’라는 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주의적 정치의식이 르네상스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관료제로 설명하는 학설이 우세하다. 베버는 관료제를 가산제(家産制)와 대립시켰다. 가산제는 개인에 귀속되나, 관료제는 비개인적이며 전문가에 의해 운영된다. 전자는 전통에 의존하나, 후자는 법과 이성에 의존한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는 도시화와 더불어 식자율(識者率)이 높아졌으며 공화국이 존재했다. 또한 알베르티는 공사의 구분을 주장했다. 정부에는 감사제가 있어 관리들이 사적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기능을 했다. 전문 법학사 교육을 받은 상근 관리의 수도 많았는데 이들은 정액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이처럼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예술뿐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주국에서 아직 공사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직은 매매되고, 그 급여는 비숙련 노동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처럼 당시 관료제에도 문제가 많았다. 또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우리의 읍 정도에 불과한 크기였기 때문에 비인격적 관료제 행정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당시 도시국가가 우리 시골마을처럼 단일한 농촌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특히 빈부 차가 격심해 사람에 따라서는 3500배씩 차이가 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500년경 베니스에서 가장 부유한 추기경의 수입이 1만4000리라였다면, 1450년경 피렌체의 사환은 40리라에 불과했다. 이처럼 도시국가는 평등사회가 아닌 신분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시키는 사회였다. 그럼에도 중세의 성직자·군인·농민이라는 단순 구별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복잡해져 있었다.



    벼락출세는 어떻게 가능했나


    먼저 직무가 아니라 징세를 위해 부자·중산·빈민이라는 구별이 존재했다. 또한 가계에 따라 귀족이냐 아니냐, 정치적 권리에 따라 시민이냐 아니냐를 가렸다. 아울러 길드에 따른 구별도 있었다. 당시 가장 중요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대중’ 또는 ‘민중’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들은 사용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했다. 상층부는 그 말을 일반인을 경멸하기 위해 사용한 반면, 중산층은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서민과 자신들을 구별하고자 사용했다. 전자는 현대와 유사하나, 후자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정체가 인간에 의해 변화한다고 믿어졌듯 신분도 변화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이에 따라 귀족성이란 출신에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가치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연 빈부간 자리 교환이 가능할 정도로 이탈리아 도시는 개방적이었는가? 예컨대 사환이 추기경이 될 수 있었는가? 그렇다. 지오토를 비롯해 농민 출신이 예술가가 된 경우도 있고, 빈민의 자녀가 교수나 사제, 교황의 자리까지 오른 사례도 있다. 사회가 개방적인 만큼 경쟁은 치열했고 질투가 난무했다.

    단테는 ‘신곡-지옥편’에서 벼락출세나 벼락부자가 많다는 이유로 피렌체 사회를 비판했으며, 특히 귀족들은 농촌 출신이 시민이 되거나 공직자가 되는 것을 격렬히 비판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인식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대 사람들은 오히려 대부분 벼락출세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특히 상인이 지배하는 피렌체에서는 업적을 중시하는 기풍이 형성돼, 뛰어난 창의력으로 업적을 생산해내는 문화인의 가치를 쉽게 인정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의 나폴리나 프랑스, 스페인 등이 출신성분을 중시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유동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구체적 증거는 없다.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사회적 유동성이란 지극히 제한적인 형태로 나타남을 고려할 때, 당시 피렌체 사회 역시 계급·계층의 이동이 일반적이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15세기 후반에 오면 사회적 상승의 길은 거의 막혀버린다. 이는 베로나 등 여러 지역이 베니스에 편입된 결과다. 베니스에서 새 귀족의 탄생은 극히 어려웠다. 르네상스 도시가 아무리 개방적이었다고 해도 외국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흑인 오셀로가 베니스에서 장군이 되었다는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역사적 상황과 맞지 않다.

    흔히 르네상스는 도시국가와 공화정의 산물이라고 한다. 13세기 무렵 이미 도시국가의 수는 200~300개에 이르렀다. 15세기에 와서 그 대부분은 독립성을 상실했으나, 르네상스가 꽃핀 피렌체, 베니스 등은 이를 유지했다. 두 도시는 모두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었지만 성향은 대조적이었다.

    흔히 베니스는 안정과 균형, 조화를 특징으로 했다고 한다. 그 이유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세 가지 형태로 구성된 정치 시스템이다. 군주제에 해당하는 통령제, 귀족제에 해당하는 원로원, 민주정에 해당하는 평의회의 혼합. 그러나 통령의 힘은 약해 실질적 권력을 갖지 못했고, 귀족으로 구성된 평의회도 민주적이지 못했다. 결국 소수 귀족에 의한 지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쨌거나 베니스의 정치상황은 비교적 안정돼 있었으나 피렌체는 그렇지 못했다. 단테는 이를 ‘신곡’에서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편하지 않은 병든 여성에 비유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체제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고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변화를 열망해 하나의 정체가 15년 이상 유지된 적이 없었다. 물론 한국처럼 5년에 한번 꼴로 정체를 바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렇듯 피렌체는 변혁의 도시였다. 예를 들어보자. 1434년에는 코지모 데 메디치가 추방되었다가 돌아와 도시를 장악했으며, 1458년에는 70인 평의회가 같은 일을 했다. 1494년 메디치가가 다시 추방당하면서 베니스의 그것과 같은 의회가 설립됐다. 1502년에는 통령의 일종인 종신 국가주석제가 실시되었으며, 1512년에는 메디치가 외국 군대를 끌고 복귀했으나 1527년에 다시 추방되었다가 1530년에 귀환했다. 이러한 정치적 변혁과 예술적 변혁 사이에는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베니스보다 피렌체에서 훨씬 격렬한 예술적 변혁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작 르네상스를 빛낸 미술과 문학은 군주정이 실시되던 밀라노, 나폴리, 바티칸에서 더욱 번성했다. 밀라노와 나폴리는 세습 군주국이었고,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국가 바티칸은 선거 군주정이었다.

    군주정의 무대인 궁정은 수백명의 관리들로 구성됐다. 1527년 교황궁정은 약 700명의 궁정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피렌체의 공화국을 지배한 메디치가는 수십명에 불과했다. 궁정에는 귀족들이 차지하는 상위직부터 갖가지 직업이 있었는데, 시인 음악가 미술가와 같은 예술가군(群)은 군주를 즐겁게 하는 하층직업에 속했다.

    군주정은 군주와 그 가족이라는 사적 부분과 국가를 운영하는 귀족이라는 공적 부분으로 구성됐다. 군주는 가족 및 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항상 같이 움직였는데 그 자체가 거대한 행사이자 행정이었다. 궁정을 구성한 귀족들은 물질적·시간적 여유로 인해 예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점에서 민중과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이는 르네상스뿐 아니라 17세기 파리의 살롱문화에까지 이어진 전통이었다.

    그렇다고 궁정의 군주나 귀족들이 고상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다. 당시 문헌은 궁정문화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사실 시간을 죽이는 오락에 불과했고, 그 또한 대부분 예술이라기보다는 헛되고 소비적이며 퇴폐적인 향락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르네상스 예술의 흔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들 역시 그러한 쓰레기 중 일부다. 그들에 의한 정치 또한 분열을 일삼고 통일을 방해하는 일종의 소비행위였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군주·귀족에 의한 정치에 반대해 새로운 정치를 열망했다. 그것은 군대에 의한 강제장치, 종교에 의한 동의장치, 그리고 법에 의한 권력장치다. 이는 근대국가의 운동원리를 분석한 ‘최초의 정치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조국 이탈리아에서 현실화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이탈리아는 파시즘을 경험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베버가 경고한 바, 이데올로기병에 걸린 19세기 독일과 마찬가지로. 과연 우리는 예외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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