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물 맑고 사연 많은 강원 평창·영월

메밀꽃에 취하고 東江의 청순함에 반하고

  • 글·성기영 기자 사진·김성남 기자

    입력2003-09-29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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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맑고 사연 많은 강원 평창·영월
    9월 초순∼중순이면 절정에 이르는 봉평 메밀밭에는 부부동반이나 가족단위 나들이 인파가 끊이질 않는다.

    여름 휴가는 끝났고 가을 단풍은 아직 멀었다. 한껏 높아진 하늘 아래 해바라기는 큰키를 자랑하고 옥수숫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사람 구경밖에는 한 것이 없는 여름 휴가의 짜증은 그래서 사람들을 다시 한번 가을의 무대로 불러낸다. 그러나 그뿐이다. 아무리 머리를 맞대봐도 마땅히 떠날 곳이 없다. 선뜻 차에 시동을 걸지 못하는 것도 가을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기가 여름이나 겨울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을 강원도 평창이나 영월쯤으로 행선지를 정해보자. 이 무렵 평창에는 메밀꽃이 절정인데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효석문화제’의 막이 오른다. 평창과 남쪽으로 맞붙어 있는 영월. 영월은 역사의 고장이요, 단종(端宗)의 고장이다.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에게 그 자리를 찬탈당하고 유배지에서 한(恨)을 곱씹던 끝에 결국 사약을 받은 어린 단종의 넋을 찾아 떠나기에도 초가을처럼 좋은 계절은 없다.

    영동고속도로 장평IC로 빠져나간 뒤 봉평읍내를 찾아들어갔다. 평창농협에서 메밀꽃을 둘러보기 가장 좋은 곳을 물으니 봉평면 무이1리를 추천해 준다. 다른 곳보다 메밀꽃이 조금 일찍 핀다는 곳이다. 무이1리에 들르면 메밀꽃 구경은 조금 미루더라도 평창무이예술관을 찾아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1999년 폐교된 무이초등학교를 개조해 조각 도예 회화를 망라한 종합미술전시관으로 꾸몄다. 가을이면 백화점 문화센터 표지를 단 관광버스가 줄을 이을 정도로 주부들에게 인기를 끄는 장소. 하루쯤 휴가를 내 아내의 손을 잡고 단둘이 이곳을 찾는다면 추석 보너스를 봉투째 내놓는 것보다 훨씬 큰 감동을 선물할 수도 있다.





    물 맑고 사연 많은 강원 평창·영월

    한반도의 모양을 꼭 빼닮아 유명 관광지로 떠오른 영월 선암마을 풍경.

    내친김에 나들이에 들뜬 아내의 손목을 무이예술관 앞 메밀밭으로 이끌어 보자. 이 메밀밭은 사진 촬영장소로 특히 인기가 높은 곳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메밀밭에 원두막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밭 한가운데 원두막이 덩그러니 서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방송사에서 지어놓았다고 일러준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원두막이 ‘메밀밭의 추억’을 만들려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이 원두막에 올라서서, 허벅지까지 차오른 눈부신 메밀꽃 속에 몸을 절반쯤 묻은 아내의 얼굴을 파인더로 들여다보면서 처녀 시절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시장기를 느낄 만하면 평창 일대에 지천으로 깔린 메밀국수집 중 어디를 들어가도 시원하고 푸짐한 메밀맛의 정수(精髓)를 느낄 수 있다. 봉평면에서 메밀국수 전문점 ‘옛골’(033-336-3360)을 운영하는 곽희창씨는 춘천 막국수와 봉평 메밀국수를 견줘 비교우위론을 편다.

    “춘천 막국수는 사골이나 정어리 같은 육수로 맛을 내지만 메밀국수는 고기를 넣지 않고 야채와 과일로 국물맛을 내지요. 국수도 마찬가지예요. 전통적 메밀국수에는 질경이 씨앗도 갈아넣구요…. 또 느릅나무 껍질을 벗길 때 나오는 끈적한 즙을 넣으면 반죽이 쫄깃쫄깃해진다고 해서 즐겨 쓰기도 하지요.”

    봉평에서 메밀국수를 한 그릇 해치운 뒤 영월로 내달리기 시작해 1시간 남짓이면 영월읍내에 이른다. 평창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31번 국도는 평창을 벗어나자마자 굽잇길로 이어진다.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휘어진 도로를 달리다가 평창~영월의 중간쯤이나 왔을까. 평창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성(聖)필립보 생태마을(033-333-8066)을 발견한 것도 낯선 여행자에게는 큰 기쁨이다. 여행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지나가는 길손 한 명이라도 환한 웃음으로 맞는 수녀님의 해맑은 미소만 보고도 하루쯤 묵어가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평창∼영월간 국도는 군간(郡間) 경계인 원동재를 넘자마자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기 힘들 정도로 험한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구름이 낮게 깔린 날이면 구름 사이를 뚫고 오르내리는 묘한 기분을 느낄 만도 하다.

    물 맑고 사연 많은 강원 평창·영월


    ①강원도 명물로 유명한 옥수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다.②평창군 봉평면의 대표음식인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부침 등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③불그스름한 빛깔을 띠는 영월 송어는 빛깔만큼이나 쫄깃쫄깃한 맛을 자랑한다.

    물 맑고 사연 많은 강원 평창·영월

    호박이 주렁주렁 달린 봉평면 들판에서 한 농부가 막바지 손보기에 여념이 없다.

    영월을 찾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모르면 몰라도 동강의 비경(秘境)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강댐 건설을 막아 강을 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평온하게 흐르던 강줄기를 도회지 사람들에게 뺏긴 탓에 지금도 여름철이면 동강 상류로 오르는 좁다란 도로는 래프팅 보트를 실은 차들로 주차장이 돼버린다.

    그러다 보니 정작 영월이 단종의 고장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없지 않다. 영월에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淸?浦)와 마지막으로 사약을 받은 관풍헌(觀風軒), 강물에 버려졌던 시신을 뒤늦게 수습해 매장한 장릉(莊陵) 등 비운의 왕 단종을 추억케 하는 유적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인구 5만의 소도시 영월에 별자리 관측이 가능한 ‘별마로천문대’는 물론 박물관과 미술관이 4개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제현대미술관, 곤충박물관, 책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 등 중소규모 박물관이 영월읍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학생 수가 줄어들어 폐교된 학교들이 하나같이 그럴듯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영월이 내세울 만한 음식은 역시 송어회다. 지금은 도시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40∼50대에게는 송어와 향어를 함께 파는 민물횟집에 대한 추억이 생생하다. 동강의 최대 비경인 어라연 쪽으로 차를 몰다가 어라연을 옆에 두고 래프팅 출발점인 최상류 쪽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송어 양식장들이 있다. 산간 맑은 계곡에만 서식하는 송어의 특성상 양식장은 이렇게 인적없는 계곡을 찾아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라연 송어장 횟집(033-375-4242)을 함께 운영하는 양식장 주인 오영택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도지사의 지시로 강원도립 양어장에서 처음 송어 양식에 성공했을 만큼 송어는 강원도의 전략상품”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송어회의 고소한 입맛에 취해 동강 기슭을 타고 영월읍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귓전을 울리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단종에게 사약을 진언(進言)하고 돌아가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남겼다는 시구다. 영월을 찾는 사람들에게 단종은 가을햇볕이 드리우는 그림자만큼이나 긴 여운을 남긴다.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 내 마음 둘 듸 없어 냇가의 안자시니 / 져 물도 내 안 같아여 우러 밤길 녜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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