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번 웃으면 수명이 이틀 연장돼요. 웃음이 면역기능에 관여하는 임파구나 세포를 자극해 면역력을 높여주는 거죠. 체내에는 650여개의 근육이 있는데 웃을 때 231개의 근육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마음의 조깅’인 셈이죠.”
황 박사의 설명대로라면 그는 잠잘 때를 빼곤 항상 조깅하고 있는 셈이다.
항상 웃고 다니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2000년 총선 때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서울 마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당직을 맡고 있던 황 박사는 당사에서 우연히 이희호 여사와 마주치자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 여사는 그날 오후 청와대에 들어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물었다고 한다. “황 박사 당선됐나요?”
보는 이가 오해할 만큼 편안함과 기쁨을 전해주는 황 박사의 웃음, 그건 결코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기나긴 질곡의 세월 속에서 찾아낸 ‘깨달음’이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이듬해 부모의 품에 안겨 국내로 들어왔다. 그의 부모가 터를 잡은 곳은 경북 경주 인근의 안강. 아버지는 일본에서는 그런대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지만 귀국 후에는 논 열다섯 마지기를 일구는 가난한 농사꾼일 뿐이었다. 그런 농사꾼의 아들로서의 고달픈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7남매의 맏아들로.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고등학교까지는 장학금을 받아 그럭저럭 다녔지만 대학이 문제였다. 당시 2년제였던 교육대학이 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1966년 첫 발령지는 대구 내당초등학교.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식에 대한 강렬한 욕구는 새로운 도전의 길을 찾아 나서게 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74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한 그는 졸업 후 다시 경북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찹쌀반죽으로 옹심이(새알)를 빚고 있는 황 박사 가족. 왼쪽부터 며느리 박소정씨와 아들 진훈씨, 황 박사, 부인 손정자씨.
그와 아내, 두 딸과 아들. 다섯 식구는 전세와 사글세를 전전해야 했다. 가난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1986년 9월 그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소 별다른 감정 없이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날 한 외국선교사의 강연을 듣던 중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벅차게 내리쳤던 것. ‘항상 기뻐하라. 그것이 주님의 뜻이니라’. 이때까지 황 박사는 무뚝뚝한 표정에 산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해맑은 웃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황 박사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삶이 즐거운 것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많이 했다. 물론 처음엔 너무나 어색했고 우락부락한 내 몰골도 형편없이 구겨져버렸다. 그런 심각한 표정으로 웃는 연습을 하는 내 모습이 우스워 히죽 웃고 말았는데 그게 바로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