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홍어요리 전문점 ‘순라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 지 올해로 23년째. 카센터에서 일하던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두 아들 대학 등록금 대기가 빠듯해 일거리를 찾다가 식당을 찾아나섰는데, 장보기 요령에 따라서는 이윤이 꽤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직접 장사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식당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요리 비법은 절대 안 가르쳐줬어요. 음식 쓰레기조차 주방장이 직접 갖다버리더라고. 주방장을 졸라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내가 죄다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들고 나온 쓰레기를 몰래 뒤져 뭘 재료로 쓰는지 살폈습니다. 자나깨나 음식 만드는 것 연구하고 미친 듯이 일했어요. 앞치마 벗는 것도 잊고 집에 온 날도 많지.”
식당에서 10년 일하는 동안 두세 달에 한 번씩 일자리를 옮겨다녔다. 더 배울 게 없다고 판단되면 또 다른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 혼자서 3000원짜리 칼국수를 만들어 파는 집에서 걸쭉한 국물 맛의 비결을 알고 무릎을 쳤다. 값비싼 감자를 통째로 삶아 갈아넣었던 것. 재료를 아껴 이익을 많이 남기는 장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음식 다루는 사람은 음식을 자식 사랑하듯 해야 합니다. 세상에 자식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어요. 음식이 자식이다 생각하고 혼을 바쳐야 비로소 맛이 나는 거요. 몸이 피곤하거나 꾀가 날 때 음식을 만들면 평소 잘 내던 맛도 안 나온다니까.”
4대째 대물림한 서울 권농동 집에서 ‘숟가락 5개’로 시작한 ‘순라길’은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메뉴는 홍어회와 찜, 탕이 전부지만 홍어 맛을 제대로 알고 삼합(홍어, 돼지고기, 묵은 김치)을 찾는 미식가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단골이 꾸준히 불어났다.
“11월에서 4월까지가 홍어철인데, 이 시기에 흑산도에서 나는 홍어가 제일 맛있어요. 5월에 나는 홍어는 좀 씁쓸한 맛이 나지. 어머니가 하시던 전통 방식으로 홍어를 삭히려면 날씨에 민감해야 해요. 서늘한 그늘을 찾아 항아리를 옮겨가며 정성으로 돌봐야 제 맛이 나죠. 자칫하면 홍어가 삭기 전에 썩어버립니다. 홍어를 삭히는 기간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죠.”
회나 찜 등 조리 방법에 따라서도 홍어를 삭히는 기간을 달리해야 한다. 오래 삭힐수록 특유의 향이 강해지므로 찜에 쓰이는 홍어가 회에 쓰이는 홍어보다 삭히는 기간이 짧다.
김씨의 홍어요리는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 대신 홍어 고유의 향이 은근히 배어나면서 육질이 부드러운 게 특징. 비결은 오랜 전통 방식을 따라 제대로 삭히는 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소금”
김씨는 “홍어 맛을 제대로 보려면 홍어 불고기가 제격”이라고 한다. 홍어 불고기는 잘 삭힌 홍어를 손바닥 크기로 두툼하게 어슷어슷 썰고, 곱게 빻은 고춧가루와 간장, 설탕, 참기름, 마늘, 깨소금에 배를 갈아넣어 버무린 양념장을 먹기 직전에 발라 굽는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홍어 불고기는 찜기에 쪄내는 홍어찜보다 냄새가 더 강한데, 홍어를 웬만큼 좋아하는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것. 그래도 맛은 일품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순라길’에선 홍어 불고기 맛을 볼 수 없다. 대중을 상대로 내놓기엔 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홍어찜은 회, 탕과 함께 ‘순라길’의 3대 메뉴다. 삭힌 홍어를 적당한 크기로 토막내서 찜기에 쪄내는데, 약한 불에 30분 정도 은근하게 쪄야 쫄깃한 맛이 살아난다. 홍어찜은 젓가락으로 살을 떼어낼 때 특유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한다. 너무 오래 찌면 살이 뭉그러져 흐물흐물하게 되고 결도 없어진다.
‘순라길’에서 재료로 쓰는 야채는 김씨가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들이다.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상태 그대로 자란 싱싱한 야채를 얻으려고 김씨는 농사지을 터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녔다.
“5년 전부터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서 직접 가꾼 야채며 밑반찬을 가져다 씁니다. 고추장과 된장, 간장, 장아찌, 김치 등도 이곳에 담가둡니다. 장맛은 물맛이니까. 야채도 농약 안 쓰고 물과 공기가 좋은 곳에서 길러야 맛이 깊어요.”
지난 겨울에는 손수 수확한 고랭지 배추 4000포기로 김장을 담갔다. 일반 배추와 달리 고랭지 배추는 씹을수록 달고 은근한 맛이 배어난다. 이렇게 담근 ‘순라길’의 묵은 김치 맛에 반한 손님도 많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소금”이라는 김씨는 신안군에서 나는 천일염을 강원도까지 공수해 김치를 담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