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또 하루키 열풍… 출판계에 日流가 뜨는 이유

  • 정해윤 │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입력2013-08-22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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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출판계에 또 ‘하루키 열풍’이 불고 있다.

    ‘1Q84’로 선(先)인세 기록을 갈아치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최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 다시 기록을 경신했다. ‘색채가…’는 한국출판인회의가 8월 2~8일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예스24 인터파크도서 알라딘 등 8곳의 서적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 판매량 1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학은 습작기”

    사실 하루키 열풍은 ‘한국 출판계 내 일류(日流)’의 한 단면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다카노 가즈아키, 요코야마 히데오 등 일본 작가들은 한국 작가 못지않은 독자적 팬을 거느리고 있다. 일부 대형 서점들은 일본소설 매대를 따로 설치하고 있을 정도다. 반대로 한국문학이 일본 독자에게 어필한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다른 분야와 비교해볼 때 이례적이다. 한국의 TV 드라마, 대중가요, 영화는 일본에서 한류 붐을 일으키고 있다. 반면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에서 득세하진 않는다. 축구, 야구 등 스포츠 분야에서도 한국은 일본에 밀리지 않는다. 올림픽을 보면, 대다수 스포츠 종목에서 한국은 일본을 추월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경제나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한일 간 격차는 크지 않다. 한국의 삼성전자는 일본 전자업체들을 앞질렀다.



    왜 문학시장에서만 일본이 한국을 압도하고 있을까. ‘품질 면에서 일본문학이 한국문학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나올 수 있다. 작가 황석영은 한국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오에 겐자부로(‘만엔원년의 풋볼’)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하는 동안 한국은 한 명도 내지 못한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중국 작가 모옌도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우리가 매우 이해하기 힘든 일은, 한국소설 중엔 문학성을 떠나 팔리는 작품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조정래의 ‘정글만리’와 정유정의 ‘28’이 그나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라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한국문학은 문학성과 대중성에서 모두 신통치 않은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문단에선 한국문학이 국내외에서 저평가되는 이유로 번역 문제를 꼽는다. 번역비용 등 정부 지원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소설가 박민규는 2007년 ‘문학동네’ 여름호에서 “일본소설이 많이 팔리는 이유는 일본문학이 그만큼 앞섰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한국문학에 대해선 “단 한 번도 번성한 적이 없고 이제 겨우 습작기에 들어간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작가정신’의 결핍

    한국의 주된 특성은 ‘출발은 늦지만 빨리 따라잡는다’는 점이다. 일본보다 근대화가 100년 늦었지만 초고속 압축성장으로 근대화를 이뤄냈다. 그런데 다른 분야에선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패스트 팔로어’의 모습이 문학 분야에선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번역과 같은 창작 외적 요소는 핑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는 한국 작가들의 ‘작가정신’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봐야 한다.

    ‘우리 사회가 문학에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문인(文人)에게 과잉 보상을 안겨주는 편이다. 생존 작가의 기념관을 짓는 희한한 일이 그 단면이다. 조정래의 기념관만 두 개가 있다. 이외수의 감성마을은 문학관, 자택, 집필실, 강연장을 포함한 호화시설을 갖췄다. 여기에다 한 기업의 후원으로 이외수문학상까지 제정됐다.

    해외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우리 사회가 ‘박정희기념관’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왜 작가 기념관의 당위성에 대해선 침묵하는지 모르겠다. 특정 작가의 기념관이 과연 문학적인 업적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일부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념적 목적, 상업적 의도가 작동한 결과’라고 의심한다.

    우리 사회에선 ‘특정 정파를 편드는 것’과 같은 작가의 문학 외적 행위가 작가에 대한 평가에 반영된다. 그것이 현실적 보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그릇된 전통이 창작열 자체를 왜곡시킨다. 작가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격을 높이는 데 혼신을 힘을 쏟기보다는 작품 외적인 데에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는 것이다.

    일본문학이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책값이 아깝지 않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장인정신 덕분이다. 이들은 마치 분업을 하듯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으로 나뉘어 각 분야에서 깊이 있게 파고든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다.

    반면 한국 작가들에게선 이러한 직업적 철두철미함, 진심, 열정, 외길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작가 중 상당수는 끊임없이 정치에 곁눈질을 한다. 민주당은 당 대표가 소설가 출신이며 시인 출신 의원이 두 명 더 있다. 2012년 대선 때 유명 문인들은 여당 편, 야당 편으로 갈라져 트위터에 글 올리고 언론 인터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문인의 정치화’ ‘정치적 문인의 범람’은 거의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실 작가의 잘못만도 아니다. 한국의 대중은 작가에게 영혼과 세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프로 작가’의 모습보다는 사회 이슈에 비분강개하는 ‘조선 문사(文士)’의 모습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일부 작가들이 원고지 대신 SNS를 더 가까이하고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한국소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이유로는 ‘출판계 내부의 공모’를 꼽을 수 있다. 과거에 작가들은 자기 책이 안 팔려도 고민했고 많이 팔려도 고민했다. 잘 팔리는 소설은 상업적인 작품으로 치부돼 평론가들로부터 인색한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 마치 중세 기독교가 부(富)를 죄악시한 것과 유사한 관념이 풍미했다. 이런 모순은 문단 내부의 자정장치 내지 발전장치 기능을 했다. 그러나 어느 땐가부터 출판업자들은 이런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작품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할 평론가들을 내부자로 포섭하려 한 것이다.

    출판업자와 평론가의 결탁

    일본의 지한파 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2005년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한국도 1990년대에 근대문학의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 말에 당시 한국 문단은 발칵 뒤집혔다. 실제로 한국문학사를 보면 칼로 무 베듯 뚜렷한 경계 지점이 발견된다. 1990년대 초반 신경숙과 공지영이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장하면서 이전까지 대하소설로 문단을 주름잡던 ‘늙은 남자들’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들 여성 베스트셀러 작가의 등장은 대중문화의 상징인 서태지의 등장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소련이 해체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한국 문화계가 ‘탈이념’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회과학 서적의 인기가 급락했고 하루키 유의 포스트모던한 소설이 히트를 쳤다. 이때부터 출판계도 신비주의 마케팅 등 상업주의에 천착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1990년대 말 벤처기업 붐이 일 때 출판계에도 벤처기업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일부 코스닥 기업들처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출판 자본은 평론가들을 자기 편으로 삼는 데 급급했다. 포섭된 평론가들은 칭찬 일색의 평론으로 평범한 ‘문학상품’을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포장했다.

    이것은 애널리스트들이 펀드매니저들과 결탁해 특정 주식에 매수 권고를 남발하는 것과 같은 행태였다. 이런 평론이나 평론가를 풍자하는 ‘주례사 비평’ ‘상업자본에 하청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 ‘출판사의 파출부’ 같은 표현이 나왔다.

    자본시장에선 공모와 결탁에 벌칙이 가해지지만 문학시장에선 어떠한 제재도 뒤따르지 않았다. 출판사와 평론가의 공모와 결탁은 일종의 ‘지적 사기’였다. 앤디 워홀은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했는데 한국 출판계야말로 이런 정의에 가장 근접한 분야가 돼갔다.

    ‘평론의 질적 저하’가 ‘작가정신의 결핍’을 더욱 부채질하고 나아가 ‘한 나라 문학 수준의 정체 내지 퇴보’를 불러오는 것은 불문가지다. 독자들은 점차 한국소설을 외면했으며 이들이 대안으로 발견한 것이 일본소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기조인 ‘창조경제’의 해법으로 ‘인문학 부흥’을 언급했다. 15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주창한 ‘신지식인’과 내용상 별반 다르지 않다. ‘신지식인’ 정책은 막대한 국가 예산만 축내고 실패로 끝났다. 박 대통령은 냉정한 판단과 비상한 통찰을 발휘하지 않는 한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의 절박함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이 위기”라고 엄살을 떨어왔다. 과연 그런가. 문사들이 홀대받은 때가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다. 미당 서정주는 생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포지엄에서 “과학은 문학보다 저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은 우리나라 작가들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낸 말이다.

    한국의 전자산업이 일본을 추월한 것은 엔지니어들의 직업정신 때문이다.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는 기업가,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는 과학자에 비해 작가나 인문학자를 과대평가해주고 있다. 작가나 인문학자는 치열하게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고결한 정신이 자신의 전유물인 양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소설이 일본소설에 뒤떨어지고 한국에서 세계적인 석학이 나오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인지 모른다.

    작가들은 기본으로 돌아가 ‘노동의 고귀함’과 ‘먹고사는 문제의 절박함’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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