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이건희의 집착, 조영남의 오버

  • 정혜신 정신과 여의사

    입력2006-10-10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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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제 회장’ 이건희와 가수 조영남은 정신의학적으로 ‘열등 콤플렉스’라는 키워드로 대비된다. 이회장은 항문기적 성향의 열등감을 갖고 있고, 조영남은 그것을 뛰어넘어 남근기적 성향의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가수 조영남보다 세 살쯤 많다. 모두 50대 후반이고 사는 방법이나 하는 일이 다르다. 취향이나 사고방식도 워낙 달라 우연히 부딪쳐도 서로 멀뚱멀뚱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은 구강기·항문기·남근기의 순서로 심리적인 발달을 하면서 성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구강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소아적 의존성을 가진 미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항문기적 성향의 사람은 목표를 정하고 완벽을 추구하며 강박적인 삶을 사는데, 그들은 세상을 경쟁의 원리에 따라 바라본다. 그에 반해 남근기적 성향인 사람은 즐거움 자체를 추구한다. 그들에게 경쟁과 완벽은 의미 없는 논리가 된다.

    이렇게 분류할 때 두 남자, 이건희 회장과 조영남은 어디에 속할까. 필자는 이건희 회장은 전형적인 항문기적 성향의 소유자고, 가수 조영남은 그것을 뛰어넘은 남근기적 성향의 사람으로 본다. 이건희 회장은 왜 항문기적 성향에 머물고 있으며, 조영남은 또 어떤 이유로 그것을 뛰어넘은 자유로운 남근기적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두 사람의 내면세계 분석을 통해 정신의학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인 ‘열등 콤플렉스’의 실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관적인 경험을 근거로 많든 적든 개인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폐소 공포증으로 동굴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무실도 엄청나게 크게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대부호 하워드 휴즈(공교롭게도 이건희 회장의 별명 역시 하워드 휴즈다)는 극단적인 결벽증과 세균 공포증으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대부’로 유명한 배우 알 파치노는 자신의 작은 키에 심한 콤플렉스가 있어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젊은 아가씨들도 꺼릴 정도로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닌다고 한다.



    ‘황제 회장’의 내면의식

    이건희 회장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황태자’를 거쳐 ‘황제’가 된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가 한 다이어트를 ‘황제 다이어트’라 칭하고, 그가 사람들에게 베푼 정을 두고서도 ‘황제의 정’이라는 희한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회장을 볼 때마다 정상에 선 사람의 쓸쓸함이 아닌 ‘황제의 열등감’을 느끼곤 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회장에게 열등감이란 단어는 가당치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인간 이건희의 일생을 관찰하다 보면 열등감이란 키워드만큼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그의 인생을 그림에 비유할 때, 바탕색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열등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열등감이 인간 이건희에게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가 오너로 있는 삼성그룹에는 어떤 형태로 스며들어 있을까. 필자는 자료에 나타난 그의 어린 시절 기록이나 대화록을 통해서 그 사실을 나름대로 입증해 보려고 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오만할 만큼 당당한 자신감의 발로였고, ‘역시 삼성’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게 삼성의 자존심이고 일등 문화다. 그러나 일등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는 내적 열등감의 발로인 측면이 있다.

    이 회장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사실이 더 명백해진다. 삼성은 ‘강박적인’ 기업 문화를 가진 조직이라는 게 필자의 진단인데, 이회장의 성격 역시 정신의학적으로 규정해보면 ‘강박적 성향’에 해당한다. 이 성향의 심리적 축은 열등감이다.

    강박적인 성격의 특징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감정 기능이 빈약하다. 감정 표현이 아주 드물며 감정 대신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사고 (思考)이고 원칙이다.

    이 회장은 취미가 ‘연구와 생각’이라고 할 정도로 감정보다는 사고(思考)가 비대한 사람이다. 그의 방은 한 벽에는 침대, 한 벽에는 책, 또 한 벽에는 대형 TV·VTR·오디오가 있다고 한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엔 책상과 의자가 있는데 재택 근무를 자주 하는 이회장은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몇 시간이고 꼼짝 앉고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퇴근 후에도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방에 들어가 한번 앉아버리면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박적 성향의 소유자는 타인과의 감정적·정서적 접촉을 꺼린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강한 분노와 적개심이 혹시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강한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10월에 발간된 독일의 경영전문 월간지 ‘매니저’에는 삼성그룹을 분석한 특집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를 보면 한국에서 이 회장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한 독일 최고경영자가 서울에서 겪은 일을 소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독일의 최고경영자는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커 두 번이나 항의해도 통하지 않자 세 번째는 항의차 옆집으로 갔다. 관리인은 그 집이 이 회장 일가가 살고 있는 저택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집도 이미 이 회장 소유로 넘어갔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이 항의 소식을 듣고 옆집을 매입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상상이나 공상으로 세상 즐긴다

    그는 감정이 개입되기 마련인 문제를 만나면 아예 그 해결 과정을 피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비용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적이던 선친의 원칙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삼성의 무노조 정책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삼성은 노조를 봉쇄하는 대신 타사와는 전혀 다른 사원복지 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즐기는 이 회장은 거의 24시간을 개와 함께 지낸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을 정도로 개를 좋아하는 그는, 그 이유를 “개는 거짓말 안 하고 배신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생을 ‘황태자’와 ‘황제’의 위치에서 직원들의 충성을 받아온 그다. 배신을 많이 당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란 것이 그에겐 그토록 어려운 일이고 사람과의 교감이 그에겐 그토록 위험한 일인 것이다.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원리원칙을 따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할 때 ‘일하는 것 자체’가 방해받을 정도로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방식을 정확히 복종하지 않으면 비난하고 같이 일하길 꺼린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직원들에게 신경영을 전수하는 과정에 “내 말을 적어도 50번 이상 반복해서 테이프를 통해 들어라. 자꾸 들어 외울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몸에 배게 되고 실천이 가능해진다”며, 자신의 방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직원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삶의 철학이란 것이 반복해서 듣고 보는 것만으로 체득되는 것인가.

    강박적 성향의 사람은 매우 사변(思辨)적이어서 이론이나 개념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면 끝도 없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거의 배제돼 있기 때문에 논쟁을 하다 보면 지루하고 공허하다. 말은 맞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1993년 중앙일보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이 회장은 “나보다 일본에 대해서 더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 나는 일본의 역사를 알기 위해 45분짜리 비디오테이프 45개를 수십번씩 봤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직원들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면서 육아전서를 최소한 30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도 그는 (아이와의 정서적 교류보다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매우 관념적인 사람이라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하며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시발로 런던·동경·오사카 등에서 해외 현지회의를 주재했는데, 밤낮 없이 8시간에서 최장 16시간까지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이 회장은 “더러 24시간 잠을 안 자며 구상할 때도 있었지만 48시간 꼬박 안 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회장의 집착을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문제가 있을 때 그 메커니즘이 머릿속에서 풀리는 순간 문제는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하는 게 그의 방식이다. 그가 기계에 열광하고 자동차를 수도 없이 분해조립했다는 것도 이런 성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런 원칙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눈치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삼성 안에서 국회의원에 나와도 떨어질’ 정도로 사람 이름을 못 외는 데 천재적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인 에너지가 자기의 안으로만 집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사변적이고 강박적이며 상상이나 공상의 세상을 즐기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탁월한 경영인의 면모를 적지 않게 보여주던 이회장이 삼성자동차 같은 무리수를 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의 한 신문은 기계에 열광하고 페라리 자동차 수집가인 이건희 회장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삼성마크의 자동차를 갖는 데 집착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삼성차는 모두 4조원 이상이 투입되었지만 프랑스 르노사에 3000억원에 매각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강박적 성격의 세 번째 특징은 도덕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도덕적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반듯하고 금욕적으로 살던 남자에게 어느날 숨겨둔 첩과 아이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처럼 지나친 도덕적 무장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은 그만큼 일탈의 욕망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자신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을 “기업이란 이윤추구 집단이 아니라 높은 도덕성과 강한 동지애로 뭉쳐 최고의 효율을 통하여 인류 사회에 기여하는 모임”이라고 정의한다. 허황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일제치하의 독립군에게나 요구함직한 덕목을 절대적인 이윤추구 집단인 기업에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기업이나 종교단체·학교·사회단체 등은 지역사회나 개인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각기 담당해야 할 몫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기업의 오너이면서 완전한 도덕성을 꿈꾸는 이 회장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요새 과학으로는 밥 안 먹고도 살게 되어 있다. 난 밥을 안 먹고, 하루종일 생선 몇 조각과 채소만 집어 먹고 있다. 금욕·권력욕·식욕, 이 세 가지가 사람을 버린다.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없애느냐가 관건이다.”

    필자는 지난 대선 때 이회창 총재가 패배한 가장 결정적 원인은 그가 ‘도덕성’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한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한 사람은 테레사 수녀 정도의 몇몇 성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는 내적 기준과 원칙에 엄격하고 특히나 도덕이라는 절대선을 자기의 푯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잔소리가 많아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침해하게 된다.

    영자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96년 9월에 한국 재벌 총수의 위압적인 자세를 꼬집는 기사를 실었는데, 특히 이건희 회장은 직원들에게 취침시간 까지 가르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한다면서 구습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초일류 사원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초일류가 되어야 한다. 업무의 질은 인간의 질, 나아가서 삶의 질과 이어져야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삼성맨은 직장인으로서뿐 아니라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올바른 도덕심을 갖춘 교양인, 국제적 감각과 매너의 소유자, 신뢰받는 동료애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질’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적인 분노와 공포의 두 얼굴

    이 회장의 내적 공포심의 대상은 그의 아버지, 이병철 선대 회장이다. 이병철 회장은 새끼를 벼랑 밑으로 떨어뜨려서 살아남은 새끼만 키우는 사자를 예로 들면서 강한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도 ‘어설픈 정’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 회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고향의 친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사업하는 아버지 뒷바라지 때문에 대구에 나가 있던 엄마 품에 처음 안겨본 것이 네살 때였고, 그때 엄마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특정 대상과 가까이 있으려 하고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되는 유아들의 성향을 ‘애착(Att- achment)’이라고 한다. 사람은 초기 발달과정에 부모와 따뜻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성장하면서 대인공포증이나 불안장애 등 여러 가지 정서적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일본을 배워라”는 아버지의 엄명으로 연락선을 타고 혼자 일본으로 건너간 게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 당시 일본에선 한국이란 나라를 ‘전쟁과 가난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일본 아이들이 소년 이건희를 어떻게 상대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민감한 때에 인종차별, 분노, 객지에서의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런 걸 다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는 뭐든지 지고 싶지 않아요. 상품은 물론이고 레슬링, 탁구, 뭐든지 일본에 이기면 즐거워요.”

    어린 시절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소년 이건희는 또다시 일본에서 엄청난 열등감을 경험하며 영화에 빠져 든다. 초등학교 3년간 그가 본 영화가 1000편이 넘는다고 하니, 그가 영화 속에서 홀로 보낸 공상의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혹한에 내던져진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 속에서 따뜻한 난로와 엄마를 보듯이 소년 이건희에게 영화는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과 같은, 유일하게 안락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던가요?”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요, 저희 남매들이 부모님과 함께 다 모인 게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모두 모이게 돼서 사진관에 연락해 사진을 찍은 적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혼자 있거나 떨어져 있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게 보통인 것 같아요.”

    정상적인 가족 개념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으로는 얼른 납득할 수 없는 고백이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에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공포의 감정이 내재화됐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그만큼의 분노와 반항의 감정도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에 잠재하는 분노나 반항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불쑥불쑥 그들의 삶을 위협한다.

    얼마 전 그는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치료경과가 좋아 경영일선에 복귀했는데도 일각에서는 ‘포스트 이건희’라는 말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사실 필자는 이 회장이 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 회장에 대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를 비판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다만 이 회장의 특이한 여러가지 행동들이 그의 열등감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정신과적인 의견을 내놓고 싶었다.

    필자는 이 회장에게 강박적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내적인 규율이나 원칙이 엄격하고 이상주의적이어서 스스로는 고통스럽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특징이 있다.

    삼성 초일류주의의 이면

    삼성이 지향하는 초일류주의는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초일류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겪는 이 회장과 삼성 사람들의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 열매를 달게 즐기고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필자는 삼성의 문화가 우리 삶의 질을 상당 부분 향상시켰다고 믿는다. 삼성은 우리에게 서비스라는 개념, 고객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기업이다. 어떤 회사에서 야유회를 갈 때 그 행사를 준비하는 관리부서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크면 클수록 나머지 사람들의 기쁨은 커지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회장에게 빚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소비자에게 개운치 않은 느낌을 주면서 부를 축적하는 기업이나 경영자가 너무 많은 현실에서 이 회장과 삼성이라는 기업이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은 생각보다 크고 깊다. 그게 필자의 생각이다.

    오너의 지나친 영향력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보류하고 현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면, 삼성의 완벽주의적 문화는 이 회장의 개인적 성향으로부터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성의 문화는 이회장의 개인적 고통을 기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삼성이라는 조직 자체가 가지고 있는 놀랄만한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자는 게 아니고 아직까지는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혈기왕성할 때부터 “제발 나를 비판해달라. 비서실에 200명이 있지만 아직까지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회장 이러시오. 저러시오’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개탄했던 사람이다.

    ‘인재의 삼성’에 예스맨만 즐비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회장은 분노와 은둔의 극단적인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인데, 그의 분노나 적개심은 적절한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회장식 사고방식을 한번 그대로 차용해보자.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순간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회장 자신과 삼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 이건희와 삼성의 울타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더 유연하고 여유있는 ‘남근기적 삶’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소비자로서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이회장의 고통스런 삶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도 가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회장을 비롯한 삼성 사람들의 행복감이 곧 우리의 행복감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열등감에서 해탈한 조영남

    이번에는 조영남에 대해 살펴보자. 1970년대 초반, 조영남이 지금의 서태지나 조성모 급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화여대 강당에서 조영남 콘서트가 열렸다. 공연 몇 시간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고 있는데 자기 학교 강당이라는 핑계로 이대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게 되었다.

    구경꾼(그것도 여자들)을 의식한 조영남은 확실하게 오버하며 열창했다. 너무 불러제끼는 통에 진짜 공연 때는 목이 거의 잠겨 공연을 망쳐버리고 말았단다. 아마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그는 여전히 오버할 것이다.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도 설교를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 목사 되기를 포기했다는 조영남이다.

    “왜 노래를 부르냐구요? 더 예쁜 여자, 더 좋은 여자를 얻어 멋지게 살기 위해서죠.”

    데뷔 2년째인 1968년, 한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못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일부러 큰 안경을 끼고 다닌다는 그가 그렇게 여자를 중요시(?)하면서도 그로 인한 열등감에 발목이 잡혀 있지 않은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가수, 화가, MC, 글쟁이, 뮤지컬 배우, 연애쟁이’

    그가 밝히는 자신의 다채로운 이력이다. 근자에 그가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은 그림인 모양이다. 20여 년간 십수번의 평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지금은 미술계에서도 무시 못할 존재로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저는 가수입니다.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기고한 그의 칼럼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데뷔 초창기의 이문세가 가수로서보다 모창을 잘하는 재치 있는 MC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종환이 그에게 늘 히트곡도 없는 가수가 무슨 가수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이문세에게는 그 말이 엄청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그 후 그는 피나는 연습과 좋은 곡에 대한 끝없는 욕심으로 최정상급 가수가 됐다.

    그러나 조영남은 30년 넘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그걸 자기 무기로 삼고 인기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1968년에 조영남이 ‘쇼쇼쇼’라는 무대를 통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릴 무렵, 최희준은 몇 년째 가수왕을 독식하면서 가요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조영남의 데뷔 당시를 회고하는 최희준의 고백.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놈이 나왔으니 정말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얼마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버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영남은 그런 가수였다. 그는 지금까지 늘 팬들로 꽉 찬 수백 차례의 개인 콘서트를 열었고 100여 장의 음반을 냈다. ‘이 세상에 있는 히트곡이 바로 나의 히트곡’이라는 그의 배짱이나 당당함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건강하게 만든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천성적으로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클래식을 아무리 파야 대학교수 되는 것말고는 뾰족한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쉽게 유명해지고 돈도 벌 수 있는 경음악을 선택했다.

    와우아파트를 건설한 서울시장 앞에서 신고산 타령을 개사한 ‘와우아파트는 우르르…’를 불러 괘씸죄로 군대에 끌려갔고, 군 시절에는 부대를 방문한 박정희 전대통령 앞에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를 열창해 주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죄로 인생을 마감할 뻔하기도 했다. 그게 조영남이란 사람이다.

    그는 요즘 도올 김용옥에 심취한 모양이다. 필자는 김용옥에 대한 그의 얘기를 들으면 ‘아, 저 얘기는 조영남이란 사람이 김용옥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투사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김용옥에 관한 조영남의 얘기는 결국 조영남의 속마음이라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도올의 모습, 도올의 장점이란 결국 그 자신의 모습, 그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못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그는 ‘이자식 저자식 개새끼 소새끼’ 하면서 목핏줄 터지는 도올의 TV강의를 들으며 매번 ‘아, 나의 살아 있는 스승이여!’를 되뇌었다고 한다. 그는 도올을 ‘이 시대의 마지막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의 중국식 검정 복장, 민머리,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 핏발 튀는 탁한 목청의 하이톤, 칠판 위를 유창하게 달리는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 단어들. 그가 골라 쓰는 난폭한 어휘, 하버드의 철학박사 학위를 손톱만큼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방대한 학문세계, 거기서 걸러져 나오는 우리네의 고질적 환부를 향한 예리한 비판과 통렬한 지적 등. 이런 요소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극 ‘왕과 비’를 방불케 한다.”

    그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도올에게 바친다. 비단 도올뿐이 아니라 조영남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보인다. 조영남은 자신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진 달란트가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그런 희망사항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부당하게 대접받거나 곤경에 처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그들을 두둔한다. 그게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투사(projection)’다.

    예전에 그는 불법 운전면허 문제로 재판을 받고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탤런트 이승연을 두둔하는 칼럼을 썼다가 심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두둔 이유를 들어보자.

    “불법 면허증 정도는 흔히 있는 일 아니냐. 초범이고 나름대로 방송을 통해서 국민을 위하여 그간 헌신도 했으니 관대히 대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걸 뭘 꼭 끌어다가 정식 재판까지 치르게 해야 했느냐? 승연아! 어쨌거나 너는 큰일을 해냈다. 국민들에게 운전면허 불법 취득이 그토록 무서운 죄라는 걸 원없이 각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왜 너한테 시선이 따가운 줄 아니? 네가 너무 이쁘고 똑똑해서 그런 거란다.”

    간혹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비호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그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와 같다. 도올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노자를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자랑이나 하고 앉았다니. 그런 유치찬란한 구조를 모를 김용옥이 아니다. 짬짬이 자화자찬으로 들리는 대목들은 면밀히 계산된 그만의 풍자이며 해학이다. 멍청한 상대방의 뇌신경을 찌르는 경각의 침술이며 상대방의 침술을 끌어당기는 고도의 테크닉일 뿐이다.”

    놀랄 만큼 조영남의 속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 도올은 ‘면밀히 계산된 풍자와 해학’의 소유자가 아니다. 노자와 김용옥이라는 단어만 없애면 그건 그대로 조영남 자신을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사람들한테 ‘오버’한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과장된 몸짓과 말투는 조영남의 트레이드 마크다. 30년 넘게 대중 예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유치함의 구조를 모를 리 없다. 예전에 ‘쟈니윤 쇼’에서 보조 MC로 나왔던 그를 기억한다. 턱을 괴고 앉아서 웃다가 옆으로 넘어지고, 게스트가 우스갯소리를 할 때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다가 바닥에 쭈그려 앉기도 했다.

    과장된 몸짓과 말투, 조영남의 오버

    1994년에는 ‘무의미한 감탄사의 습관적 사용, 불필요한 발어사 및 비표준 발음 문제’로 방송위원회에서 개선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조영남이란 인물을 표현할 때 쓰는 익숙한 이미지들이다.

    그는 자기를 망가뜨려 가면서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못생겼다는 자신의 얼굴이나 두 번의 이혼경력,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 등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킨다. 그쯤 되면 그의 약점은 이미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품가치를 적절하게 높일 수 있는 도구인 것이다. 그는 열등감을 훌쩍 뛰어넘어서 진화시킨다.

    균형감각까지 보태진 풍자와 해학은 김용옥을 능가한다. 이번 4·13총선에 나가려는 개그맨 김형곤에게 보낸 충고의 글을 한번 보자.

    ‘형곤아! 선배의 마지막 부탁이다. 어디 가서 네 입으로 너 자신을 ‘정치권의 가시 같은 존재’(김형곤은 자신이 정치풍자 개그를 했기에 정치권에 서 자신을 그렇게 본다고 했다)라는 표현을 쓰지 마라. 너무 오버였다. 그쪽도 다 바쁜 사람들이다. 장담하건대 아무도 너를 미워하지 않고 가시같이 여기지도 않는다.’

    절묘한 대중감각을 바탕으로 한 풍자와 해학의 백미다. 그런 풍자와 해학을 무기로 그는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일급 칼럼니스트로 활약 중이다. 그의 글은 재미있다. 일단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글의 문맥상 특별한 의미가 없어도 대중이 알 만한 사람들의 실명을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누구와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도 금방 알게 된다.

    ‘내가 멤버들을 소개하면 내 말뜻을 여러분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저쪽 끝자리부터 필립 모리스 담배를 파는 아저씨 민병휘, 국민회의 부총재 정대철, 연극배우 노처녀 정경순, 역시 연극배우이자 전직 환경부장관 손숙, 내 옆으로 조순 전 서울시장의 홍보비서였던 앵커우먼 정미홍, 천하의 국민 아나운서 김동건, 그리고 맨 끝자리에 명지대학 이사장 유영구….’

    그가 소개하는 사람들 앞에는 늘 그들의 직책이 길게 따라 붙는다.

    ‘국민회의 정대철 부총재도 30년 가까이나 형 동생으로 사귀어왔는데 요즘 만날 재판 받으러 다니고, 내 친구 청와대 수석비서관 김한길이도 어쩌구 저쩌구 시비가 분분하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김연주는 서울 강남에 있는 영동여고의 학생회장 출신.’

    그의 속을 다 알 수야 없지만 권력에 접근할 수도 있는 훗날을 위해서 인맥 인프라를 구축하는 차원은 아닌 것 같다는 게 필자의 느낌이다. 그는 인간관계 자체를 즐기면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은 유명인에 대해선 무조건적인 관심을 보이는데 그는 그런 심리를 자기 글의 상품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는 천재다.

    자유로운 삶의 심리

    연애도 인생도 봄바람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그는 결혼 두 번, 이혼 두 번에 지금은 자유로운 싱글이다. 이젠 세상의 히트곡처럼 세상의 여자가 온통 그의 연애 대상이 되었다. 그가 두 번째 이혼을 하자 한 개그맨은 “딸 가진 부모님들 조심하십시오. 조영남이 이혼을 했답니다”라며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하늘이 내린 예술적 재능과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자신의 자유로운 삶과 대중의 욕구를 적절하게 충족시키면서 ‘풍요로운 예술가’로 살아간다. 그러한 자유로움의 심리적 근원은 무엇일까.

    필자는 ‘내고향 충청도’라는 그의 노래를 참 좋아한다. 조영남은 ‘내고향 충청도’를 TV가 아닌 일반 무대에서 부를 땐 가사를 바꾼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시고, 아버지는 장에 가시고’ 대신에 ‘어머니는 예배당 가시고 아버지는 술집에 가시고’ 로 말이다.

    사연은 이렇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평생 술독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식구들을 예배당으로 내몰고 정작 당신은 장터에서 술에 절어 지내시던 아버지였다. 13년을 발치에 오줌깡통 놓고 사시다 세상을 뜬 아버지지만 그는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늘 좋았단다 . 고등학교를 서울 누이 집에서 다녔던 그가 방학 때 고향집으로 달려와 “아버지, 저 왔어요” 하면 아버지는 너무 반가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설렘과 벅찬 감동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건희 회장의 부자 아버지와는 달리 무능했지만 아들과 정서적인 끈을 놓지 않아서 행복했을 조영남의 아버지. 조영남은 어린 자신에게 화투 ‘육백’을 가르치던 한량기 많던 아버지(사실 그 기질을 그가 물려받기도 했을 것이다)를 조금의 두려움이나 부끄럼없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어쩌면 그의 당당함이나 거침없는 행동은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열등감이란 인간이 좌절을 겪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인간은 생로병사를 근간으로 좌절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린 보통 가진 것이 없을 때 좌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좌절로 인해서 스스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TV광고를 연출하는 감독에게 재미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CF 감독에게 가장 피가 마르는 순간은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클라이언트 앞에서 시사회를 할 때라고 한다. 시사회장에서 CF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나 제스처, 하다못해 기침소리까지에도 민감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감독은 가끔 장난(?)을 친다고 한다. 그 회사의 이름이나 브랜드명을 표시하는 자막을 일부러 약간 삐딱하게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사회장에 있던 열 명 중에 열 명은 그 삐딱한 자막에 신경쓰느라 다른 부분에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사 로고체만 똑바로 하면 좋을 거 같네요.’ 자막을 교체하는 작업은 일도 아니란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열등감도 그와 비슷할지 모른다. 문제의 본질과는 별로 상관없는 지엽적인 문제에 발목이 잡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삐뚤어진 자막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친다면 이것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없다. 그러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그 필터를 통해서만 인식되기 때문에 삶의 태도나 가치관, 대인관계 등이 모두 그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남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내게는 너무나 심각한 일인 경우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열등감이란 감정은 마치 변종 아메바처럼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모양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런 점에서 이건희와 조영남이 살아 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열등감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실상은 ‘마음의 자막’을 하나 갈아 끼우는 간단한 작업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럼에도 당사자는 죽을 듯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게 우리 삶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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