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한국문단의 영원한 ‘신인’

  • 입력2006-10-13 10: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습득된 선의는 본질악보다 더 나쁜 경우가 많아요. 문학마당이란 궁극적으로 진실과 정의에 순교하는 막장입니다. 그런 정신이 없이 만들어진 문학작품이라면 차라리 장소팔의 만담보다 못해요.”
    종이책 시대가 거(去)하고 플라스틱책 시대가 내(來)하리라 한다. ‘책은 종이로 만든다’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해 보이던 진리가 이제 더 이상 ‘참’이 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산다. 첨단 테크놀로지 열풍이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할 만한 ‘문학’의 생산과 유통구조마저 한바탕 뒤바꾸어 놓을 기세다.

    이제 작가들은 사전에 계약을 맺은 인터넷의 출판 관련 업체에 작품을 제공하고, 독자는 발품 팔아 서점에 찾아갈 필요 없이 좋아하는 작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컴퓨터에서 다운로드 받아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한 체제는 그 그릇에 담을 내용을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규정하려 들 것은 뻔한 일. 성급한 평자(評者)들은 작가들이 소위 엔(N) 세대에 영합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제 ‘문학이 가벼워졌다’는 비판적 담론을 내놓는 사람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발표공간과 유통구조와 독자들의 입맛이 어떻게 변했든 문학은 문학이다. 이런 시기에, 한국 현대문학사의 저만치 윗자리에 이름을 걸어놓고 있는 ‘천승세’라는 일견 낡아보이는 코드를 디미는 이유는 모든 게 바뀌어도 문학 생산자로서의 ‘정신’만은 바뀔 수 없다는, 그리고 그 정신의 실천자로 천승세만한 작가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모름지기 소설이란 ‘포유동물의 절규’라고 정의한다. 포유동물의 육친애적인 사랑 없이 감히 소설에 범접 말라고 당당하게 경고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의 애기봉 입구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그의 집이 있다. 평생을 셋방살이로 전전해오다가 1988년에 그곳으로 이사하여 처음 가져본 자신의 집이다. 아니 그의 집이 아니다. 낡은 농가주택으로 보이는 방 둘짜리 자그마한 양옥집의 현관 밖 기둥에는 ‘이철진’이라는 낯선 문패가 달려 있다. 이철진은 부인의 이름이다. “이나마 처가식구의 도움으로 장만한 터에 거기다 ‘천승세’라는 이름표를 달 이유가 없어서”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5년, 내가 ‘포유동물의 육친애적인 사랑 없이 감히’ 소설을 써보겠다고 갓 등단했을 때,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이었고, 뒤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군사정권의 폭압통치에 대한 항거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자고나면 글 쓰는 놈 한두 놈이 감쪽같이 잡혀가기 일쑤였고’(천승세의 표현), 따라서 그 진보적인 문학단체 사무실에서는 일년 내내다시피 항의농성이 이어졌다. 그 농성장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독재권부에 대한 그의 질타의 목소리도 거침이 없었지만, 동료나 후배 문인들에 대한 비판에도 가차가 없었다. 당연히 천 선생에 대한 내 첫인상은 ‘무섭다’였다. 나는 그를, 그의 작품 ‘砲大領’에 나오는 바로 그 예비역 포대령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서운 포대령’과의 만남

    얼마 뒤, 임진강변의 ‘반구정’에서 작가회의의 분단현장 탐방 행사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빵떡 모자를 머리에 인 근사한 모습으로 소형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잔을 사양하는 천승세’를 이전에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집이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그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해서 살기 시작하던 88년 무렵에 나도 김포읍 들머리 사우리라는 동네에 이삿짐을 풀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차를 얻어타는 행운을 얻었다. 주말이었던 탓에 서울 쪽으로 돌아오는 통일로에는 승용차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뒷감당 생각 않고 마셔댄 막걸리였다.

    “선생님,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차를 잠깐 갓길에 세우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운전이 서툴러서 한 번 행렬을 이탈하면 다시 진입 못 해.”

    “금방 터져나올 것 같은데요?”

    “그럼 말이야. 지금 차들이 서행하니까 내리자마자 앞으로 50미터쯤 전력질주해서 오줌 싸고 재빨리 올라타라구. 텔레비전에서 맥가이버 하는 것 봤지?”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차에서 내려 이만하면 됐다싶게 내달린 다음에 소변을 보았는데, 고춤을 추스리고 났을 때 그의 승용차는 30여 미터쯤이나 앞으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 한바탕 달음박질을 해야 했다. 그는 헐떡거리며 올라탄 나를 보고 사람좋게 껄껄껄 웃었고, 나도 그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무서운 포대령’으로부터 예편시켜 주었다. 여기까지가 선생과 사적으로 친분을 나눴던 기억의 전부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글이 잘 안 돼요. 일어나서 밥 먹고 책도 뒤적거리고 세상 한탄도 하다가 낚시도 가고….”

    ─9년 전에 발간한 자선(自選) 단편집 ‘혜자의 눈꽃’ 서문에 “세상의 여러 가지 형편이 소설을 짓기엔 마뜩찮은 건덕지로 싸발랐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가 그랬다면 요즘의 세상 건덕지는 어떻습니까?

    “문학정신의 퇴행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종시대예요. 컴퓨터문학이다 뭐다 해서 소설도 아닌 것들이 나와 설치고…. 단편소설의 멸종 상황은 이미 드러난 것 아닙니까. 단편이 얼마나 어려운 건데요. 장편은 일기 쓸 수 있는 능력만 가지면 누구나 흉내낼 수 있어요. 하지만 단편은 얼개에서부터 문장 운영, 게다가 자기 문장을 스타일화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어렵냔 말이야. 요즘 그런 단편 구경할 수 있습니까?”

    ─왜 그런 현상이 빚어졌다고 보세요?

    “작가들에게 신인정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술이란 시작만 있지 끝이 없는 겁니다. 소설이 뭔지 알 만하면 죽는 거요. 어떻게 예술에 ‘이만하면 됐다’가 있을 수 있어요. 요새 새끼들 소설집 달랑 하나 내고 나면 신춘문예 예심을 안 하나, 문화센터 강의를 안 하나, 소설에 일가를 이뤄버린 것처럼 착각하는데 틀려먹은 자세입니다. 나는 말이오, 믿는 종교가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남은 피 한 방울이라도 예술혼의 정면궤도에서 성혈을 뿌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내게 용기와 격려와 힘을 주시오’ 하고. 왜냐고요? 신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기 때문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신인정신’

    문단생활 42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긴 원로작가가 아직도 신인이라 말한다. 실제로 그의 문학적 궤적을 더듬어보면 그가 ‘신인정신’에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얘기타래를 풀어갈 요량으로 “요즘 문학을 어떻게 보느냐?”는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가, “예술혼의 정면궤도에서 성혈을 뿌리며 살아가고 싶다”는 경건하고도 진중한 대답에 접하자 모골이 송연한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낚시 이력이 문학 이력 못지않은 걸로 들었습니다. 낚시의 매력이 뭐지요? 낚시터에 앉아 있으면 강태공이 되십니까?

    “천만에. 낚시를 두고 선(禪)이니 수양이니 따위 선비의식을 가지고 말들하는데 웃기는 얘기예요. 고기가 물어줘야 지루하지 않고 좋은 거지. 선비 사(士)나 스승 사(師)자를 떠억 받쳐서 ‘조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동물적인 포획력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말이 ‘낚시꾼’입니다. 나는 지금도 낚아올린 고기는 반드시 먹습니다.”

    54년에 처음으로 목포의 저수지에서 민물낚시를 배웠고, 전문적인 바다 낚시꾼이 열 몇 명밖에 안 되던 시절, 7박8일이나 9박10일 일정으로 거문도에 들어가 무인도에서 갯바위 릴낚시를 했을 정도로 그의 조력(釣歷)은 화려하다.

    ─바다낚시를 하다 민물낚시를 하면 싱겁지 않습니까?

    “물론 바다낚시는 역동적이지요. 억세게 차고 들어가는 탄성과 원시적인 완강한 거부, 거기서 열혈의 정열을 느낄 수 있지요. 반면 민물낚시는 기법이 까다롭고 섬세합니다. 그 나름의 묘미가 따로 있어요. 낚시의 경지를 제대로 체험하려면 붕어낚시가 제일이에요. ‘낚시는 붕어낚시로 시작해서 붕어낚시로 끝난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1939년 목포에서 출생했고, 당시 호남의 거부였던 천독근이 그의 부친이며, 유명한 소설가였던 박화성이 모친이다. 삼형제 중 둘째인데 그의 형은 평론가 천승준이며 동생은 서울대 천승걸 교수인 걸로 돼 있다.

    ─이름이 승세(勝世)인데다 천(千)씨 성까지 붙여놓으면 무시무시한데요?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오셨다고 생각하세요?

    “어머님 말씀으로는 외삼촌이 내 이름을 지었다는데, 원래 사람의 이름이 그렇게 건방져서는 못 쓰는 법입니다. 나는 천승세라는 이름 자체가 엄청나게 싫어요. 영철이니 철수니 하는 식의 흔한 이름은 아니더라도, 왜 전화번호부 보면 비슷비슷한 이름들 많지 않습니까. 그런 이름들 속에 민족의 동질감도 배어 있고 좋은 법이오. 그런데 ‘이길 승’에다 ‘인간 세’라니, 이건 도무지 건방진 이름이오. 주변을 보면 꼭 실력 없고 못된 것들의 호(號)가 요란하잖아요. 인생을 더럽게 산 놈들이 무슨 백운이니 청파니 고산이니 하는 고상한 글자들로 치장하지 않습디까. 물론 지면서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세상을 이기면서 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해서 탐욕의 내포예요. 터무니없는 과욕이 들어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살기도 싫어요.”

    ─목포에서의 청소년기는 평범하게 보내셨나요?

    “요란하게 살았지. 목포고등학교 시절 간신히 낙제를 면할 정도였어요. 공부보다는 당수 4단의 유명한 깡패였어요.”

    ─훗날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 주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겠네요?

    “깡패 천승세가 글을 쓴다? 상상도 못 했지. 어렸을 때 내 꿈은 체 게바라 같은 혁명군이 되는 것이었어요. 자주독립국가의 명장이 되어서 구국혼으로 전투속에서 산화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온갖 깡패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면서도 이상스럽게 문학작품을 읽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주로 러시아문학을 읽었고 훗날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물론 당시 학교에서 문학 한답시고 서클 만들어서 활동하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꼭 비리비리한 놈들만 모여 있어요. 사나이 문학이라는 게 강해야 할 터인데, 신체 자체가 그렇게 약해 빠졌으니 자연히 삶도 비열할 것 같고 정신 연령도 한참 떨어진 것 같아서 상대도 안 했어요.”

    천승세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한 번은 집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또 누군가가 사람을 ‘개 패듯’ 두들겨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가보니 70이 넘어뵈는 이웃 마을의 한 노인이 나무 위에 올라가 오랑우탄처럼 가지에 붙어 있고,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장대로 노인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패고 있었다. 그 중년 남자가 다름아닌 천승세의 부친이었다. 사정을 알고보니 노인의 며느리가 출산을 하다가 과다하게 출혈을 했는데 그 나뭇잎을 달여 먹으면 효험이 있다 해서 나무에 올라갔던 것이고, 천승세의 선친은 자기 땅에 있는 나무에 허락없이 올라간 노인을 그런 식으로 응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부자들에 대한 적의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가난한 집 할아버지가 자식뻘밖에 안 되는 사람한테 장대로 무수하게 얻어 맞으면서 살려달라고 싹싹 빌고 있는 모습을 보자 부(富)의 폭력에 대한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겁니다. 도대체 있는 놈들이라는 게 뭔가.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이 저 정도로 짓밟혀도 되나 생각하니까 괜히 분하고 눈물이 나서 책가방 들고 공동묘지에 가서 하루종일 드러누워 있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일기도 아니고 뭣도 아닌 글을 끄적거렸는데 그게 처음 써본 글이었어요.”

    ‘부의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의 아버지였고, 가진 자들의 폭력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치를 떨었던 사람이 그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천승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뒷골목을 주름잡고 다니는 그의 일탈 역시 가진 자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던 부친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 껄렁거리고 다니던 ‘불량 학생’ 수준을 넘어 외지에 원정 싸움을 다닐 정도로 알아주는 목포깡패였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을 때려놓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날 “얻어 맞은 녀석이 병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했고”, 어미를 잃고 죽어 있는 까치집의 까치새끼들을 보고는 그답지 않게 ‘슬프고 이상해서’ 시를 끄적거리기도 했다는 그의 복잡한 내면구조다.

    “러시아 문학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시 쓰는 공부를 제법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직한 시를 썼는데, 공부를 할수록 자꾸 지식이 개입해서 정직성은 걸러져버리고 시가 난해해지고 유식해져요. 그래서 만족을 못 하고 포기해버렸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의 가회동 집에서 모친인 소설가 박화성과 함께 살게 된다. 말이 함께 사는 것이었지 서울에 올라와서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던 그를 당대의 문사였던 어머니가 곱게 여길 리 만무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1957년 12월 초순, 어머니 박화성이 강릉의 친척집에 가느라 집을 비웠다. 어머니도 없겠다, ‘니기미, 소설이나 한 번 써봐?’ 그는 원고지를 꺼낸다. 신춘문예 마감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뭘 쓸 것인가. 좋다, 목포에 살 때 박 아무개라는 여자와 밤중에 논바닥에서 질펀한 사랑을 나누다 분뇨 구덩이에 빠져버렸던 사건을 소재로 삼기로 했다. 남자를 도살장의 백정으로, 그리고 여자를 점례로 비틀어서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냈다. 소설 습작 한번 안 해본 상태에서 단 한 자의 추고도 없이 8시간 만에 단편 하나를 완성해서 신문사에 보냈다. 그의 에세이집 ‘번데기가 자라서 하늘을 난다’에 보면 초고 없이 8시간 만에 단편 한 편을 써 치웠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어느 평론가가 그를 일컬어 “천재병이 들었다”고 비아냥거렸다는데, 그는 “억울하고 절통하다”고 항변한다. 단편소설로부터 3000매짜리 장편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초벌 빨래 마른 빨래를 따로따로 헹궈본 적이 없다.”

    12월 31일, 그는 ‘동아일보’를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단편소설 당선작은 그의 작품 ‘점례와 소’였다. 염상섭과 안수길이 심사위원이었다.

    강릉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신문을 들이밀며 그가 말했다.

    “동아일보 이거 이상한 신문이네. 어머니, 이거 좀 보세요. 참 요상한 일이 생겨버렸어요.”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으며 “장하다”고 했다. 깡패짓이나 일삼고 부자들에 대한 적의를 품고 엇나가기만 하던 그를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감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뒤에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돼버렸다. 더구나 박화성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청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김동리와 박종화의 천승세 쟁탈전

    그 당시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이 김동리였고,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학장은 월탄 박종화였다. 신춘문예에 등단한 문인을 학생으로 확보한다는 것은 학교의 자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천승세 쟁탈전이 벌어졌다. 지금이야 서라벌예대 출신 문인들이 수두룩하지만 당시만 해도 단 한 사람의 소설가도 배출해내지 못하던 때였다. 동국대 국문과에서도 입학권유가 들어왔다. 김동리의 강권에 못이겨 2년제 서라벌예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성대 국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김동리 그 양반 욕심이 대단했어요. 번듯하게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해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한테 자신의 추천을 받아서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라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1,2차 추천받는 절차를 거쳤지요.”

    1960년, 그는 전도유망한 연극배우였던 이철진을 만나 결혼한다. 당시 어머니는 잘살았지만 천승세는 결혼 후 빈손으로 나와 영등포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부자, 혹은 부(富)에 대한 그의 친화할 수 없는 적의는 여전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질기게도 가난을 옆구리에 끼고 산다. 영등포의 셋방살이에서 김포에 있는 현재의 집까지 37번을 옮겨다녔다.

    등단한 지 6년 만에 그는 희곡에 도전하기로 한다.

    “공연작품이 태부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6년 동안 활발한 소설창작 활동을 해왔기에 희곡 작품 한 편만 써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나는 아직 희곡으로 등단한 바 없는데 소설가라는 이유로 거저 먹을 이유가 어딨어요. 정식으로 두드려서 실력대결을 하는 것이 정도 아닙니까.”

    태릉에 살던 시절이었다. 싼 방을 고르다 보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그곳까지 흘러들어갔고, 호롱불 아래서 87매짜리 단막희곡을 썼다. 천 선생이 부인 이씨를 향해 “그때 그 희곡 내가 몇 시간 만에 썼지?” 하고 물었고 부엌에서 일하던 부인이 “6시간 만에요”라고 ‘공증’을 해주었다.

    ‘물꼬’라는 작품이었다. 어렵사리 청량리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경향신문사에 작품을 우송하고 돌아왔다. 당시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1월2일자 신문을 사보고서야 신춘문예 당선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끼니가 걱정스럽던 시절이라 어렵사리 버스비를 구해서 세 번씩 갈아탄 다음에 경향신문사에 도착했다.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자는 ‘김미수’였다. 천승세가 이름을 감추고 써보낸 가명이었던 것이다. 그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조태일이 ‘아침선박’이라는 작품으로 시 부문에 당선되었고, 염무웅이 평론에 당선되었다. 훗날 조태일은 천승세를 만날 때마다 “등단 동기인데 뭘 그러십니까”라며 농을 걸어오곤 했다.

    만취상태에서 쓰는 시(詩)

    셋방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태릉에서 구파발 단칸방으로 옮겼다.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라 인근 전파사에서 전선을 끌어다가 비둘기집 모양의 스피커를 벽에 붙여놓으면 KBS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 베니어판 상자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천승세는 귀가 번쩍 뜨였다. 국립극장에서 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장막 희곡을 공모한다는 뉴스였다. 그의 도전의욕이 꿈틀거렸다. 좋다, 장막극에 도전해보자.

    “자식이 둘이었을 땐데, 못 먹어서 몸이 말이 아니었어요. 사흘 만에 376매를 완성했는데, 영양실조에다 사흘을 불철주야로 써갈겼더니 이상스럽게도 손가락이 짧아지더란 말입니다.”

    만선이 이 미친 놈아아!

    (스산한 바람 무대 휩쓸며 지나가고 장대줄에 걸린 생선대가리 건들거린다. 급히 막(幕).)

    마지막 문장을 쓰고 그는 탈진해서 쓰러져 버렸다. 마감날 부인 이씨가 불광동 우체국으로 가서 부쳤다. 이번엔 이진숙이라는 가명이었다. 그는 그 작품 역시 ‘파지 한 장 안 내고’ 써치웠다고 했다.

    발표하던 날, 그 비둘기집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국립극장 100만원 현상모집 당선작에 이진숙의 ‘만선’이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녹번동에 살던 소설가 홍성유가 흰고무신을 신고 달려와서는 “이진숙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낸 사람 당신이지? 당신은 천재야, 천재!”라며 흥분했다.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 좀 여유가 생겼겠습니다.

    “100만원이면 후생주택 두 채를 살 만한 돈이었어요. 그런데 빚쟁이가 시상식장까지 따라와서 대기하다가 몽땅 빼앗아가버렸어요. 추석날 찐고구마 하나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궁핍했는데.”

    그의 신인정신 고집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990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펼쳐 읽던 문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축시 春蘭’외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신인의 이름이 천승세였던 것이다. “이 천승세가 혹시 그 천승세 아니냐?”는 전화가 쇄도했다. 문단 데뷔 30년이 넘은 소설가 천승세가 신인투고 작품으로 시를 보냈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창작과 비평사의 이시영 시인이 나한테 전화를 해왔어요. 이번 편집회의에서 선생님의 시를 싣기로 했으니 10편만 보내주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미친 소리 말라고 했어요. 신인들은 등단하기 위해서 명을 걸고 다투는데 시로 등단한 적이 없는 천승세가 뻔뻔스럽게 어떻게 그냥 실을 수 있느냐고 야단을 쳤어요. 정 그렇다면 신인작품으로 실어달라고 했지요.”

    창비에서는 예우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했고, 천승세는 소설이나 희곡이라면 모를까 시를 공짜로 먹을 수는 없다고 버텼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시작품 하단에 ‘신인’이라는 활자가 찍혀 나갔다.

    천 선생의 시작(詩作)에 얽힌 얘기는 문단에 꽤 알려진 일화다. 그는 맨정신으로 시를 써본 일이 없다. 만취상태에서 시를 쓴다. 그러나 혼자 쓰는 게 아니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이규배 시인과 함께 쓴다. 정확히 말하면 ‘천승세는 입으로 쓰고 이규배는 손으로 쓴다.’ 한밤중, 이규배의 집 전화벨이 울린다.

    “규배냐? 나다.”

    “선생님,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지금 내 머리속에서 시가 한 수 써져버렸다. 받아 적어라.”

    “부르십시오.”

    이런 식이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소설은 좋은 의미의 협잡이 가능합니다. 매수를 채우기 위해서 원고지 몇 장 정도는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어요. 또, 이번엔 이런 소설 한 번 써보자, 하는 식의 작의(作意) 자체가 불순하되 먹히는 장르예요. 그러나 시는 달라요. 시는 그 자체가 삶의 노래예요. 서양의 명곡이라는 것들 들으면 옆에서 누가 때려도 눈물 안 나지만, 실연당한 사람이 ‘대전발 영시 오십분’ 어쩌고 하는 유행가 들어봐요. 눈물 납니다. 요즘 시들 보세요. 전체적인 시적 사유의 통일성도 없이 행행마다 전연 의미가 다른 문장들을 억지로 꿰맞춰서 만든 시가 대부분이에요. 멀쩡하게 깨어 있으면 잘 쓰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식이 개입돼서 정직한 삶의 노래가 나올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만취상태에서 쓰는 거지.”

    그러나 요즘 천 선생은 그 좋아하던 술을 삼가고 있다(내가 찾아가던 날 결국 소주를 입에 대고 말았지만). 진찰 결과 폐포(肺胞)에 심각한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이 정도면 계단 몇 개를 오르내리기도 힘들어해야 하는데 팔팔하게 돌아다니시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고개를 젓더란다.

    천승세의 문학을 얘기할 때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희곡 ‘만선’을 비롯하여 중편 ‘낙월도’, ‘신궁’ 등은 빼어난 어촌소설이다. 그는 ‘신궁’을 쓰기 위해서 거의 12년 동안 거문도를 들락거렸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다면 천승세가 아니다.

    “연근해에 대한 체험은 할 만큼 했고 작품으로도 담아냈는데, 문제는 원양을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원양으로 나가보자고 결심했지요. 남양이 좋긴 한데, 남양은 여기저기 기항지가 있어서 술도 있고 여자도 있고, 그래서 뱃놈이 외국 여자하고 여차여차해서 애도 낳고…그게 더 소설적이라고 할지 몰라도 내 문학 기질하고 맞지 않아요. 더 처절한 곳이 어디냐, 그게 바로 북양이에요. 떠났다가 돌아올 때까지 기항지가 없어요.”

    그는 결국 1973년에 “황천(荒天) 항해로 인하여 생명이 절(絶)한다 해도 본인은 일체의 배상요구를 않겠습니다”라는 각서에 도장을 찍어 제출한 뒤에, 동태잡이 원양어선에 몸을 싣고 캄차카반도로 향한다.

    “도봉동의 8평짜리 단칸 셋방에 굶은 제비새끼들처럼 오글거리는 자식새끼 다섯을 남겨둔 채, 죽어도 찍소리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가면서 생각했어요. 문학 혹은 예술의 피는 어느 정도로 진하기에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서 죽음의 길이나 다름없는 이 고난의 길로 자청하고 나가야 하는가, 끊임없이 자문했지요.”

    한 개의 태풍이 생기면 자(子)태풍이 너댓 개씩이 파생하고, 1200t짜리 대형어선이 파도 속에 형체도 없이 묻혔다가 솟아오르는 험난한 항해를 체험하면서 그는 여기를 왜 왔던가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 시간 이후에 어떤 글쓰는 놈이 시도한다면 몰라도, 오늘 천승세가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까지는, 약소대한의 천승세라는 소설가가 동태잡이배를 타고 북태평양 그 더러운 바다를 항해한 것이 현역 소설가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일입니다. 문학 예술의 풍토가 우리하고 다른 외국 같았으면 난리 났을 겁니다. 이 말을 이가 갈려서 꼭 해야 되겠어요. 우리나라가 3면이 바다 아니오. 정치가든 역사학자든 해양입국입네 야단들 아닙니까. 세계 최초로 현역 작가가 북태평양의 사지에 나갔다 왔으면 신문사마다 달려들어서 연재하자 뭣하자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한 군데도 없어요.”

    그가 선택한 ‘외져서’ 살아온 삶

    한 세월이 흐른 뒤, 월간 ‘한국문학’에 북양 나갔던 체험을 살려 ‘빙등(氷登)’이라는 제목의 작품 연재를 시작했으나, 안기부의 압력으로 이내 중단됐다. 당시 ‘호지명’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천승세는 반체제 작가로 낙인 찍혀서 작품활동 자체를 방해받고 있었다. 1985년, 그러니까 5공시절 얘기다.

    “우리나라에 어민사를 정리해 놓은 게 어디 있습니까. 처음 계획은 조선 초기부터 시작해서 한국어민사 전체를 소설에 담아 10부작으로 쓰자, 해서 무수한 자료를 수집했어요. 뱃놈 소설이라는 게 재미가 없을 수가 없어요. 조선 초기부터 중종 5년까지를 담은 4500장은 장롱구석에 처박아 두었고, 전체 중에서 끝부분에 해당하는 ‘북양’ 부분만이라도 오는 6월까지 완성하려고 하는데 이제 진이 빠져서 잘 될지 모르겠어요.”

    그는 탁월한 문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러울만치 외진 곳으로 제쳐져 살아왔다. 그는 작품집 ‘황구의 비명’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말고, 그가 권력과 문단 일각으로부터도 ‘외져서’ 살아온 삶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외진 자리가 바로, 머리와 가슴을 온통 ‘예술혼’으로 단단히 들여채운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제자리가 아닐까.

    그는 전두환 시절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절필하기로 선언했다가 얼마 안 가서 신문 연재소설을 쓰는 등 태도를 바꿔버린 문인들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비판적인 문인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1인당 4000달러씩 주면서 해외여행을 권유했을 때 얼씨구나 하고 비행기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 자신은 절필선언을 지키느라 콩트만 써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고 했다. 그는 그 자신이 문인이면서도 문인들의 행태에 할 말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너도나도 전집(全集)을 발간하는 세태에 대해서도 그는 독설을 쏟아놓았다. 소설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 난고의 길이고, 전집이란 작가의 문학적인 일생을 정리하는 것인데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집을 낼 수 있느냐고 했다.

    이야기가 천상병 시인에 이르자 그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우이동 판잣집에서 셋방살이할 때, 우이동 전체에서 전깃불 없는 집이 바로 그 집 하나였어요. 그때 천상병이가 내 단칸방에서 7개월을 함께 살았어요. 우리 집에 얹혀 살게 된 사연이 기구합니다. 이 사람이 억울하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다 나오니까, 문인들이라는 자들이 천상병만 나타났다 하면 다 도망가버려요. 행여나 같이 어울렸다가 다칠까 봐. 문인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더러운 놈들이에요. 그래서 내가 판잣집 단칸방으로 데리고 갔지요. 한 방에서 내 마누라랑 나랑 천상병이랑 다같이 자는 거요. 요놈이 아랫도리를 붙들고 ‘부인, 요강 가져오세요!’ 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우리 마누라가 오줌빨래 다 했어요.”

    천상병과 청승세

    우이동 셋방에서 쫓겨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셋방 보증금이 1만2000원이었는데, 이사하던 날 인근 가게에서 외상값을 갚으라고 했다. 천상병이 천승세 이름으로 외상술을 마셨는데 그 돈이 1만2000원을 넘었다. 외상값을 갚고 나니 그야말로 무일푼으로 온가족이 쫓겨났다.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상병이 저 놈을 나 아니면 어느 놈이 보호하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허허 웃고 말았다는 것이다. 범인으로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도량이다.

    천승세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문장의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토속 민중언어다.

    “적어도 한 나라의 소설가라면 그 나라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문학공부를 할 때 국어사전 하나 정도는 아예 통째로 외워버렸어요. 예를 들어서 호랑이 새끼를 ‘개호주’라 하는데 아주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엘레지’라고 하면 외국말인 줄 아는데 그가 아녜요. 개좆을 그렇게 부릅니다. 금성을 샛별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그건 ‘개밥바라기’예요. 이런 걸 글 쓴다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어요. 나는 팔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의 문장은 정확해야 하는데 요즘 소설가들 너무 공부를 안 해요. 어떤 소설 읽다보니까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는 문장이 나오던데, 도대체 그게 말이 됩니까.”

    문학마당은 진실과 정의에 순교하는 막장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그의 작품 ‘황구의 비명’을 읽다가 실감나는 의성어 한 대목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좌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를 ‘쐐에쐐에, 호그르호글, 터텁텁, 꼬골’이라고 표현한 부분이었는데, 나는 하릴없이 책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실제로 변기의 물을 내려보기까지 했다.

    ─문재(文才)란 타고나는 것이라고 보세요, 아니면 학습에 의해서 작가적 역량이 갖춰질 수 있다고 보세요?

    “가장 바람직한 것은 타고나는 경우예요. 50은 타고난 재주이고, 그 뒤에 식견이나 학식 이런 게 붙어서 나머지 50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어떤 소재든 맡기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특정한 소재 아니면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상황변화에 아랑곳없이 똑같은 문장 운용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주 재주가 모자란 사람들이에요. 우리 문단에 어중이떠중이가 너무 많습니다. 나는 심지어 이런 생각을 다 해봤다니까요. 글 쓴다는 놈들을 한군데에 다 모아가지고 백일장을 열어서 자격 없는 놈들은 걸러내버렸으면 좋겠다고.”

    ─문학적 자질말고, 진보적인 문학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진정한 진보는 사회적·정치적 모순과 싸울 게 아니라 온당치 못한 평화하고도 싸워야 합니다. 습득된 선의는 본질악보다 더 나쁜 경우가 많아요. 문학마당이란 궁극적으로 진실과 정의에 순교하는 막장입니다. 그런 정신이 없이 만들어진 문학작품이라면 차라리 장소팔의 만담보다 못해요.”

    나는 애당초 천승세 선생과의 인터뷰를 위해 녹음기를 준비해갔다. 그리고 말했다. “혹시 제가 선생님보다 오래 살게 되면 육성이라도 녹음해 뒀다가 영결식장에서 조문객들에게 들려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얘기에 가시가 너무 많았다.冬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