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탈북자 지원활동 벌이는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나는 左도 右도 아니다. 북한 인권 실태 알리려 양쪽 이용할 뿐”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3-09-25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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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 따지는 한국적 논리구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 북한은 역사 속 어떤 정권보다 영리한 정권
    • 최상의 대북 전략은 그들을 교란시키는 것
    • 탈북자 적극 끌어내면 단기간내 북한정권 붕괴 가능
    • 북한 인권 신장 위해 세계 50여 개국 여행
    • 모든 북한주민이 굶주림, 질병, 독재에서 벗어나는 꿈 꾼다
    탈북자 지원활동 벌이는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보수단체들이 개최하는 반북, 반김정일 행사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45)은 어떤 사람일까. 남북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깊어지다 보니 북한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하는 폴러첸의 활동도 정치적 중립지대에 머물러 있기 어렵게 됐다.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한 기자들은 워싱턴에 북한인권 정부를 세우겠다고 발표하는 폴러첸을 공격했다. 그는 최근 소란스러운 보혁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정확히 알아보기도 전에 어떤 너울부터 씌워서는 안될 것이다.

    남북 화해와 통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진보이고, 북한 인권에 대해 언급하면 ‘수구 꼴통’이라는 시각은 잘못돼 있다. 인권은 인류 역사가 지향해온 보편적 가치다. 북한의 2200만 동포가 독재체제에서 인간으로서의 천부적 권리를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언필칭 진보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전쟁을 막고 북한과 화해협력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친북용공’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세계 스포츠의 제전에 가서 북한 기자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한 일부 보수단체 인사들도 어른스럽지 못했다.

    “긴장과 위험 좋아한다”



    폴러첸은 8월22일 강원도 철원군 노동당사 앞에서 돈과 라디오가 담긴 풍선을 북한으로 띄우려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목과 왼쪽무릎을 다쳤다. 그는 사흘 만인 8월25일 목 보호대와 목발을 짚은 모습으로 대구 유니버시아드 미디어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다시 사흘 뒤인 8월28일에는 미국의 보수 신문인 ‘월스트리트 저널’에 ‘남한의 방해자들(South Korea’s Spoilers)’이란 제목으로 ‘북한의 정권교체뿐만 아니라 남한에도 정권교체를 이야기할 때인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펴 노무현 정부의 분노를 샀다.

    폴러첸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한국인 친구가 받아 “폴러첸씨가 오늘 출국한다”고 말했다. 폴러첸은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위치가 추적될 가능성 때문에 모든 연락을 이메일로 하고 있다. 필자는 인터뷰를 포기하고 “다음에 한국에 들어올 때 연락해달라”며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겨두었다. 그런 지 두 시간 만에 연락이 왔다. 폴러첸씨가 출국을 하루 연기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가 지시한 장소로 나가 전화를 걸었더니 폴러첸의 숙소로 안내했다. 벼락치기로 성사된 인터뷰에 ‘동아일보’ 국제부 김정안 기자가 동행했다. 미국 UCLA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김기자는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부에서 탈북자 문제를 담당해 폴러첸과 수차례 전화 통화를 한 일이 있다.

    폴러첸은 “베이징 6자회담이 끝나는 8월29일 10여 명의 탈북자들이 중국 주재 외국 대사관에 진입해 탈북자들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려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세계의 이목이 베이징 회담에 주목돼 있는 만큼 탈북자의 현실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방콕, 하노이, 베이징의 대사관과 이들 나라의 국경 경비가 엄중하다. 그렇지만 괜찮다. 그들이 10명, 100명은 막을 수 있겠지만 결국 100만명이 되면 못막는다. 동독에서 똑같은 경험을 했다. 나도 내일 방콕, 홍콩, 하노이 중의 한 도시로 떠난다. 이 도시들에는 예닐곱 개의 탈북자 그룹이 있다. 이번에 최대 20명 정도의 탈북자가 일을 벌일 것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하지만 우리는 언론의 관심을 끌어내길 원한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할지 몰라도 큰 소동을 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다.”

    -탈북 계획을 미리 공개하면 탈북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긴장과 위험을 좋아한다. 북한주민이나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 모두가 위험에 처해 있다. 어떤 차가 교통사고를 당해 불타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이 응급의사라면 차 밖으로 기어나와 다리가 부러진 채 피 흘리며 생명을 부지하려 애쓰는 한 사람을 구조할 수 있다. 아니면 불부터 끄고 차에 탄 다섯 명을 모두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에 대항해 싸웠던 사람들은 결국 자신과 가족, 친구들까지 모두 사형당했다. 그들은 6000만명의 독일인을 살리려고 그런 희생을 했다. 중국 경찰도 있고 북한 특수공작원들도 활동하고 있어 위험하지만 중국의 탈북자들은 용감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면서 행동한다. 우리는 단지 공론화하는 일을 맡을 뿐이다.”

    2박3일간의 베이징 6자회담이 끝났지만 폴러첸이 예고했던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폴러첸은 전에도 몽골에 탈북난민 수용소를 세우겠다거나 탈북난민 보트피플 수천명을 한꺼번에 해상탈출시키겠다는 계획들을 발표했지만 공수표를 냈다. 부단히 뉴스거리를 공급해 탈북자 문제를 이슈화하려는 욕심이 앞서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수표가 반복되다 보면 뉴스원으로서 그의 가치도 하락할 수밖에 없다.

    폴러첸은 남한에서의 활동이 북한에서처럼 24시간 감시받는 데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당신들이 들어오면서 이 집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물어보면 24시간 나의 모든 일정을 말해줄 것이다. 그는 매우 영리하며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내가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거나 택시를 탈 때도 그의 동료들이 내 뒤에 있다. 그들은 내 이메일을 검색하고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감시한다. 이 나라에서 내가 비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양에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그들은 내가 DMZ에 갔을 때도 미행했고 보트피플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하고자 할 때도 감시했다.”

    폴러첸을 인터뷰한 직후 그를 관리하는 당국자를 만나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국자는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폴러첸을 인터뷰한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당국자는 감시가 아니라 보호라고 해명했다. 북한의 테러 위협이 있는 폴러첸을 보호하는 조치에 대해 독일대사관과 폴러첸에게 충분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씨가 19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당한 것과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는 해명이다. 전 북한 노동당 국제비서 황장엽씨도 폴러첸과 같은 경찰보호를 받고 있다. 당국자의 설명을 듣고난 필자의 판단은 ‘50% 보호, 50% 감시’였다.

    “폴러첸이 NGO(비정부기구)들과 협력해 정부가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의 행동이 번번이 사태를 악화시킨다. 목적이 정당한 일을 하더라도 방법이 적절해야 한다.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찾아가 북한 기자들을 도발한 행위에 대해서는 여론조사에서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나쳤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마치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 인권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국가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폴러첸은 언론플레이의 천재다. 우리가 신변보호를 해주는 걸 뻔히 알면서 감시당한다고 주장한다.”(당국자)

    외국언론 적극 활용

    폴러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에 작전을 바꿨다. 이번에 풍선 띄우기 작전도 비밀리에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체포됐을 것이다. 우리는 풍선 띄우기에 앞서 미국·일본의 언론과 연계했다. 20개의 풍선띄우기 작전은 실패했지만 세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데는 성공했다.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이 북한난민들을 받아들여 피난처를 제공해주고 있다. 잘하는 일이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북한난민에 관한 실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미디어의 관심을 이용해 북한의 인권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한다. 중국은 100여 명에 가까운 탈북난민을 억류하고 있다. 우리의 주된 목표는 중국이 북한난민을 해외로 내보내게 하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경제개혁을 추진한다지만 너무 늦었다. 중국은 결국 그를 버릴 것이다. 중국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참아 더 이상 인내하긴 힘들 것이다. 중국은 ‘그래 할 만큼 했는데, 이제 어쩌란 말인가’라는 식으로 북한에 말하고 싶어한다. 후진타오(胡錦濤) 집권 이후 북한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사진기자가 떠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북한에서 화상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허벅지 피부를 떼주고 ‘우정의 메달’을 받았다. 그 상처를 촬영하게 해줄 수 있는가.

    폴러첸은 “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북한에서 피부이식수술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려 했다. 필자가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자 그는 “어떤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라고 물었다. 필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폴러첸은 “바지를 벗어 보여줄 수 있지만…” 하며 김정안 기자를 의식해 주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필자는 “그녀는 기자다. 괜찮다”고 말했다.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실망시킬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직접 면돗날로 살을 떼내고 스스로 치료했다. 흉터를 보여주겠다.”

    그가 바지를 벗어내렸다. 오른쪽 허벅지에 피부를 떼낸 상처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가로 1.5cm 세로 1cm 크기였고 다른 곳은 그보다 작았다. 그는 허벅지에서 피부를 떼낼 때 찍은 사진이 실린 ‘미친 곳에서 쓴 일기’ 일본어판을 보여주었다.

    “나는 피부를 떼내 북한 환자한테 주고 나서 우정의 메달을 받았다. 피부를 깊이 파면 긁힌 상처와는 달리 나중에 이렇게 상처가 흉터로 남는다. 새살을 돋게 하려고 독일제 약을 발랐다. 나는 수영과 서핑을 좋아해 큰 흉터가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 치료했다.”

    탈북자 지원활동 벌이는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폴러첸과 인터뷰하고 있는 황호택 논설위원

    -당신 친구가 오늘 오후 출국하기 때문에 인터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다. 왜 오늘 떠나지 않았는가. 인터뷰 때문인가.

    “일정을 바꾼 이유는 밖에서 날 감시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어디에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내일 새벽 3시 저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나가려 한다. 풍선 날리기 프로젝트를 할 때도 새벽 2시쯤 몰래 숨어서 나갔다. 나는 감시자가 잠들면 밖으로 나간다. 감시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양에서도 그랬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당신들이 가고 난 뒤 나는 또 아주 웃기는 짓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인터뷰 때문에 출국을 늦춘 것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간의 행적과 그날 여러 정황에 비춰 폴러첸이 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출국을 하루 늦추었다고 믿는다. 그가 미디어와 인터뷰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인터뷰를 통해 차차 드러날 것이다.

    -당신이 미 중앙정보국(CIA)과 연결돼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임스 울시 전 CIA 국장도 가까운 친구다. 그가 북한 정권이 교체돼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를 아는가. 그에게 물어봐라.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위츠 국제인권종교자유프로젝트국장에게도 물어보라. 나는 CIA 비밀요원이 아니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북한 전문가들을 잘 안다. 그들이 인권문제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그들은 오로지 군수산업에 돈을 어떻게 공급해야 할지 궁리할 뿐이다.

    그들은 나를 이용한다. 나를 이용해 이곳에서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게 하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들만의 의제는 따로 있다. 미국, 일본, 중국 가운데 누가 북한 어린이들의 굶주림을 걱정하는가. 내 나라 독일이나 일본이 그런 문제를 걱정하는가. 나는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일을 한다. 독일에서 나는 좌파 의사로, 심지어 급진적인 공산주의 의사로 불렸다. 나는 CIA를 아주 증오한다.”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북한 기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가.

    “내가 연설을 끝내고 목발에 의지해 서 있을 때 북한 기자들 가운데 한 명이 목발을 걷어찼다. 그 바람에 쓰러졌다. 두세 번 목 부분을 채였다.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이 완화돼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조해녕 대구 유니버시아드 조직위원장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당신과 우익보수 단체 인사들이 스포츠 행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쳤다고 비판했다.

    “나는 작년 월드컵대회 때도 외국 언론이 서울에 집중하는 기회를 이용해 북한 어린이들의 인권 문제를 이슈화하는 이벤트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게 ‘이 급진적인 의사야, 월드컵 분위기를 해치는 일을 하지 마라’고 했다. 한국 축구팀의 성적이 좋아 나라 분위기가 고조돼 아무도 북한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작년의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세계 젊은이들이 벌이는 우정과 화합의 제전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참가국 선수들을 자극하는 행위가 잘한 일이라 보는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경기를 기억하는가. 히틀러는 인권에 대한 세계인의 생각을 흩뜨려놓기 위해 올림픽 경기를 열었다. 아름다운 북한 여성응원단이 지금 그런 것처럼. 1년 반 전에 북한 소년궁전에 방문했을 때 예쁜 아이들이 로봇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갑게 맞았다. (대구에 온) 북한 응원단의 미소도 북한 소년궁전 어린이들의 미소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미소를 연습하는 북한 어린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똑똑히 목격한 증인이다. 북한의 메인 스타디움에서 아이들이 추운 겨울 아침 7시경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본 적이 있다. 대구의 북한 여성응원단이 보여주듯 그들은 정말 100% 완벽했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연습했을까. 벌 받고 때론 얻어맞아 가면서 연습하다가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에 쓰러진다. 나는 그들을 여러 차례 내 차로 실어나른 경험이 있다.”

    폴러첸은 북한 응원단의 미소에 가려져 있는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한참 말했다. 스포츠가 독재정치에 이용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나 전세계 174개국이 참여한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를 히틀러 치하 베를린올림픽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

    -북한 미녀응원단이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흥행에 크게 기여했다. 아마 그들이 없었더라면 객석이 텅빈 경기장이 많았을 것이다. 북한 응원단이 당신들의 시위에 반발해 돌아갔다면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었겠는가.

    “내게 책임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면 응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핵을 갖고도 지금처럼 공갈 협박을 한다. 이게 바로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수법이다.”

    -당신이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관여한 탈북자 수는 얼마나 되나.

    “작년에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을 통해 망명했던 25명이 전부다. 25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천기원 전도사(두리하나선교회)와 미국인 선교사 팀 피터스 같은 운동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나도 옌볜과 두만강 일대에서 의사로서 탈북자들을 치료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탈북자 25명을 스페인대사관에 들여보낸 사건 때문에 중국에서 추방되고 중국 비자가 취소됐다. 얼마전 서울에 있는 중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다시 발급받으려 했는데 창구를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중국에는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인가.

    “불법적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세 가지 여권이 있다. 북한의 입국 스탬프와 북한 비자가 붙어 있는 여권은 의심받기 쉽다. 홍콩에 가면 비자를 위조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에서 직접 베이징이나 단둥으로 가면 그곳 공항에서 문제가 생긴다.”

    -당신이 직접 관찰한 북한 의료시설에 대해 말해보자. 북한에서 몇 개의 병원에 가보았는가.

    “솔직히 북한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내가 가본 병원들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북한 안내인이 군인병원과 평양에 있는 병원 두 곳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군인병원은 아름다운 건물에 훌륭한 전기시설, TV세트와 멋진 환자실을 갖춰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평양 교외의 두 병원에는 붕대조차 없었다. 최신식 일제 의료카메라와 엑스레이, 새 컴퓨터 등을 갖춘 군인병원과 평양 교외의 일반병원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발목이 부러진 할머니를 평양 중심가의 대학병원으로 데리고간 적이 있는데 충격을 받았다. 명색이 병원인데 물도 공급되지 않고 의료장비가 낡아 작동되지 않았다. 평양에는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병원이 있다.”

    의료기와 약품조차 없는 북한 병원

    -그간 둘러본 북한의 의료설비와 약품 부족 현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병원에도 전력공급이 제대로 안 된다. 의료기자재도 없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은 주로 중국과 독일에서 발전기, 의료기자재 및 의약품을 구입해 해주 남포 원산 등지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시골 병원에는 아무것도 없다. 의약품도 없고 제대로 작동되는 의료기자재도 없다. 시골 병원에는 의사도 없고, 환자도 없다. 병원이 아니라 사막이라 해야 옳다. 심지어 창문조차 없어 찬바람을 막을 수 없는 곳도 많다. 그런 곳을 병원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김일성이니 뭐니 하며 써 있는 병원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어린이 환자들은 어떻게 치료를 받고 있는가.

    해주 남포 등지의 병원을 방문했을 때 병실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여러 가지 응급조치를 해보았지만 그 아이들은 다음날 모두 죽었다. 북한 의사들은 나를 보면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문을 닫고 들어가버린다. 내가 한 할머니를 모시고 어떤 병원에 쳐들어갔는데 병원 안이 시체들이 널려있는 곳처럼 지저분하고 악취가 났다. 아무런 의료장비도 없었다. 사리원에 있는 한 어린이병원에 갔을땐 어린 환자들이 약물을 투여받고 있었는데, 그 용기가 오래된 맥주병이었다. 맥주병을 대충 헹궈 물과 소금, 설탕 같은 것을 넣어 팔이나 머리에 링거처럼 놔주고 있었다. 더 이상 몸을 가눌 수도 없어 화장실에서 대소변도 볼 수 없는 환자에게 내가 다가가려 하자 북한 의사가 막아섰다. 하루 이틀 뒤면 죽을 건데 무얼 할 수 있겠냐고 그가 말했다.

    북한 의사들은 기술은 있지만 아무런 장비가 없어 어떤 조치도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외국인으로서 내가 도와주려 해도 그들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라고 했다. 어떤 병원에서 한 아주머니에게 ‘먹을 음식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주저하면서 미소로 괜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문을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북한 병원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과 의료기구가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방의 병원에 의료기구와 약품, 식량을 보낸 지 일주일 뒤 그 병원을 방문했더니 의료기구는커녕 먹을 것도 없었다. 나는 우리가 보내준 의약품이 어디로 갔는지, 군대로 갔는지, 불법적으로 다른 나라로 갔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찍은 사진이라며 3명의 어린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린이들은 줄무늬가 있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독일이 패전한 뒤 미군에 의해 구출된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처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이 아이들은 매우 슬퍼 보인다. 이들은 더 이상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마치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의료봉사를 하고 환자에게 피부를 떼주는 활동을 하자 독일 동료 한 사람이 나보고 순진하다고 했다. 그는 내게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공산주의가 뭔지, 북한이 어떤 식으로 너를 기만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에게 화를 냈지만 내가 마치 햇볕정책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반성했다. 나는 일하던 방법을 바꿔 문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에 결핵약 등 기초 의약품을 지원하는 유진벨재단의 스티브 린튼 회장은 북한을 60여 차례 방문했고 남북한에서 폴러첸을 여러 번 만났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폴러첸을 이렇게 비판했다. ‘폴러첸의 탈북운동은 5명, 10명을 살리면서 500명, 1000명을 버리는 방법입니다. 북한에 창피를 줘서 무엇을 얼마나 얻어낼 수 있을까요. 나는 평양에서 밤에 길거리에 몰래 나가 ‘언제 변화가 올 것 같으냐’고 묻는 식의 활동은 안합니다. 그러면 나는 침입자가 되고 그 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려 결핵환자를 돕지 못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스티브 린튼을 잘 아는가.

    “평양에서 여러 차례 마주쳤고 평양공항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연세대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그의 동생도 만났다. 그들 두 형제에 대해 잘 안다. 그들이 나에 대해 비판적인 것도 안다. 그가 나보고 5명, 10명을 살리면서 500명, 1000명을 버리는 활동을 한다고 비판했지만 나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린튼 회장은 500명, 1000명을 살리면서 2200만명의 북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고.”

    -린튼 회장은 당신이 북한을 부끄럽게 만들더라도 동양문화의 특성상 북한은 좀처럼 그들의 정책이나 문화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 말했는데….

    “그가 여기서 꽤 오랜 기간 살았기 때문에 나보다 동양문화에 대해 훨씬 많이 알 거라 생각한다. 그는 여기서 태어났고 교육받고 성장했다. 비난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포용정책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길 원치 않는다. 한국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 린튼 회장 같은 사람들에게도 계속 그런 일을 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햇볕정책을 펼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당근을 준다면 나는 인권을 주장하는 채찍이 되겠다. 햇볕정책도 분명히 필요하고 식량 지원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통해 성공적으로 북한과 관계 개선을 했다. 나는 어떤 우호 조약도 찬성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비밀리에 북한에 돈을 보낸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작년에 ‘워싱턴 포스트’는 폴러첸에 관해 재미난 기사를 실었다. ‘그의 열의는 논스톱이다. 언론에 그의 뜻을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면 숨쉬는 것조차 아까워한다. 아침을 먹으며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거의 식사에 손을 대지 않았다.’

    폴러첸을 인터뷰해보니 ‘워싱턴 포스트’의 소개가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이야기한다. 한 손으로는 제스처를 쓰면서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여러 가지 서류와 사진을 펼쳐보인다. 독일인이 프랑스인보다 대체로 영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그의 영어는 미국 본토 사람에 가깝다.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 신경쓰지 않아”

    -당신이 북한에 풍선을 보내려고 철원에서 소동을 피웠던 날, 미 보수파 신문인 ‘월스트리트 저널’이 그 행사를 지원하는 사설을 실었다. 사전에 협의했나.

    “나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비밀요원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다. 북한 기사를 다루려는 신문이 있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겠는가. 내가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과 ‘미친 곳에서의 일기’란 책을 출판한 이유를 아는가. 급진적인 좌파 의사라는 비난을 듣기 위해서 이 책을 펴냈겠는가. 내가 북한에서 사상이 개조돼 지금은 우파 운동가로 돌아섰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한국에서 북한을 비판하는 사람과 ‘조선일보’ 같은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도 마찬가지다. 나는 언론보도를 이용해 중국을 압박함으로써 국경을 개방시키고 억류된 탈북자들이 석방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조국통일을 이룬 독일 사람들처럼 북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자는 것이 최종 목표다. 나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동독에서도 똑같은 논쟁이 있었지만 독일인들은 난민을 수용하는 정책을 만들어 미국 영국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이뤄냈다.

    내가 이것을 아무리 말하고 외쳐도 도저히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 그들은 나 보고 미쳤다거나 바보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나 보고 히틀러 또는 파시스트라고 말해도 괜찮다. 한총련 학생들이 나를 욕하는 이메일을 보내거나 우파 그룹이 뭐라고 말할지라도 그런 정치적 논쟁에는 관심이 없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야기만 하고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면서 우파와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한국의 일부 진보세력이 비판하고 있다.

    “내가 독일에서 건강보건 문제에 대해 발언할 때는 좌파 쪽에 치우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급진적 성향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학창시절 급진좌경 학생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가 의료정책 개혁을 위해 독일정부와 싸울 때 나는 급진적인 공산주의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곤 했다. 나와 내 친구들의 학생운동을 염려했던 부모님이 우리더러 ‘그럴 거면 동독으로 가서 살라’고 할 정도였다. 한총련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미국에 대항해 소리치기도 하고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며 ‘호 호 호 호치민’이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것은 아니니까 이 곳 보수단체 사람들에게 내게 그런 과거가 있다고 제발 말하지 말아달라(웃음).

    내가 같은 문제를 놓고 걱정하고 발언하는데, 독일이나 북한에서는 좌파로 취급되고 이곳 한국에서는 우파로 분류된다. 나는 그 논리적 구조에 의문을 갖고 있다. 남한에서 북한 인권에 관한 일을 할 때는 보수 우파와 연관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내가 우파 운동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좌파처럼 행동하면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우파진영으로부터 공격당할 것이다. 내가 우파처럼 행동하면 좌파진영으로부터 공격당할 것이다.”

    -그럼 전략적으로 좌파인 척하고 우파인 척하지만 실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나는 단지 인권문제를 염려하고 돌보는 응급의사다. 독일에서도 줄곧 정신 나간 급진적인 의사로 불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분류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당신을 인터뷰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좋다.”

    “북한에 동독 같은 상황 만들고 싶다”

    -베이징 6자회담에 대해 언급하면서 핵을 제거하려면 먼저 김정일 정권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일과 핵을 제거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나는 동독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고 싶다. 동독에서 경제가 붕괴한 후 동독 군과 정부는 통일을 계획했다. 그들은 동독과 소련연방의 법 안에서 통일을 준비했다. 북한이 미녀응원단을 보내며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북한 스타일로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 비슷한 특성을 지닌 김정일 위원장은 거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또 변화하지 않으려 한다. 북한 지도부는 루마니아 상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김위원장은 그런 상황이 북한에 닥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1989년 루마니아에서 민주화혁명이 일어나자 공산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도피길에 올랐다. 그러나 곧 체포돼 동구 민주화 드라마의 절정을 장식했다. 체포된 지 3일 만에 그는 전격적으로 처형당했다.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생전에 가깝게 교류했으며 북한의 통치 스타일을 모방했고 부자 권력세습을 획책했다.

    “북한은 유일한 생존전략이 핵이라 믿고 있다. 북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이 어떤 조약에 함께 서명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단지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핵을 갖고 있다면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진한 서방국가를 속이고 있다. 그들이 유일한 안전보장 장치라고 믿는 핵 대신에 종이에 쓴 조약서 따위에 의지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핵 논의를 가능한 한 연장하려 시도할 것이다. 6자회담 10자회담, 더 나아가 100자회담을 하며 몇 년 끌면 북한주민의 인권문제는 망각될 것이다.

    그들은 역사 속의 어떤 독재정권보다도 영리하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무지막지한 전사들이다. 모든 어려움을 뚫고 조작을 거듭하며 50년 넘게 생명을 부지해온 것을 보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북한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도 그들은 지능적으로 행동했다. 나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주며 독일에 있는 내 아이의 안전을 염려해주고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불편한 것이 없느냐, 곧 떠나지 않으려느냐….’ 마치 스파이 영화에 나오는 악역처럼 그들은 정말 멋있고 대단하다.”

    -북한을 달래고 어를 필요성도 있지 않은가. 당신처럼 싸우는 사람도 있고 대화하고 지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종의 역할 분담 말이다.

    “나는 동양철학의 음양이론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한국의 축구팀을 생각해보라. 거기에는 골키퍼도 있고 레프트윙도 있다. 골키퍼는 골을 막아내야 하고 레프트윙은 골을 넣어야 한다. 그들은 한 팀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같은 시간에 전혀 다른 일을 한다. 한국에서 햇볕정책을 펴고 6자회담을 통해 조약을 맺으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나처럼 논란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채찍을 휘두르고 어떤 사람은 당근을 들었지만 상대를 설득하고 압박하기 위해 한 팀처럼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접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약을 말하고 저기서는 압력을 가하고, 전쟁을 대비한 군사훈련에 관한 정보를 흘리고, 제임스 울시 전 CIA 국장처럼 ‘김정일을 죽일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북한 응원단을 환대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북한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1936년 중국전쟁에 관한 책에 나오는 것처럼 강하고 많은 수의 적을 대하는 최상의 방법은 적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탈북자 지원활동 벌이는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북한에서 받은 ‘우정의 메달’ 수여증을 보여주고 있는 폴러첸

    -북한이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오래 버틴 것 같지만 언젠가는 붕괴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정부가 언제쯤 붕괴할 것이라 예상하는가.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섬 같은 곳으로 가서 긴장을 풀고 한 10년쯤, 20년쯤 휴가를 즐긴다면 북한이 오래 버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과 동남아에서 적극적으로 탈북자들을 끌어내면 40일 또는 80일 안에 북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 모두가 올바른 책임감을 갖고 다같이 움직인다면, 중국 러시아 일본이 탈북난민 수용을 위해 함께 움직이고, 미국의 전략이 함께 해준다면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 김정일을 나가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

    한국정부 혼자서 경기를 치르려고 하면 그 효과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젠가 중국이 탈북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하는 조치를 할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북한정권의 붕괴시기가 올해 후반 또는 내년 초가 될 수도 있다.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본다면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당신은 한국에 북한 스파이가 6000명쯤 된다고 주장했다. 이 나라에는 간첩 잡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국정원, 기무사, 경찰이 있는데 정말 스파이가 6000명이나 활동한다면 큰일이다.

    “나만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다.”

    -당신이 우파 쪽 사람들과 가깝다 보니 편향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통일부, 정보기관, 서울대, 연세대, 미대사관, 인터넷 등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것이다.”

    황장엽씨도 폴러첸씨와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지만 정확한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중국은 탈북자를 정치적 망명자가 아니라 경제적 이민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탈북자들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대에서 만난 탈북난민들은 몸에 생긴 상처를 보여주며 그들이 북쪽에서 당했던 고통에 관해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들은 체포돼 북송될 것이 두려워 숲이나 산속에 숨어 지내고 있다. 중국은 UNHCR이 정확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그 지역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탈북난민인지 아니면 불법 취업자인지 확인하면 된다. 아프리카의 우간다와 르완다 같은 나라도 그들 나라에 있는 난민과 UNHCR이 접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토의가 필요 없는 문제다. 난민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UNHCR 직원들도 가기 어려운 곳이 아니니 옌볜이든 어디든 가서 조사해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굶주린 아이들의 엄마가 거기서 먹을 것을 구하려고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러지도 못해 몸을 팔고 있는지 확인해보라. 나는 경제적 이민 따위의 얘기를 하는 UNHCR 직원이 있다면 정말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매일같이 UN이나 UNHCR에서 싸우는 이유는 그런 풋내기 같고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 때문이다. 그들은 북한난민을 조사하고 돌보아야 하는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1만명 그도 아니면 20만명 또는 30만명?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 힘든 것은 제대로 된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거기에 몇 명이 있는지 모른다. 단지 추정만 할 뿐이다. 옌볜, 투먼 같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은 조선족과 똑같이 생겼고 한국말을 하기 때문에 누가 난민이고 누가 조선족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아 통계를 내기 어렵다. UNHCR이나 국제 인권보호기구가 정보를 수집하지 않아 데이터가 없다. 현장에 가서 수를 세어보고 조사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작년 4월 당신이 탈북자 25명을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을 통해 망명시킨 적이 있다. 매스컴에 미리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중국에 숨어 사는 탈북난민들의 처지를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이 있다.

    “탈북난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나 탈북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라. 만일 탈북자들이 나의 행동으로 인해 더 어려움을 겪고 나아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만둘 것이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나를 환영하고 감사하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나는 계속 탈북자들의 말을 듣겠다.”

    -당신이 쓴 기고문에 ‘독일인으로서 같은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구절이 있더라. 그 의미는 무엇인가.

    “독일인들은 지금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진을 보면 일부러 모른 척한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더니 “할아버지도 잘 모른다고 하시더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는 집단수용소에 관한 소문이 있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 지금도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나는 독일인의 이런 태도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런 잘못을 또 범하면 내가 아이들에게 어떤 지식을 전달하고자 할 때 어떤 것도 올바르게 전할 수 없다.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고, 또 어째서 더 이상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됐는지를 알아야 한다.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잘나가는 인생을 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더 이상 독일의 자녀들이 ‘파시스트 독일인’이니, ‘나쁜 독일 놈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몇 나라나 여행했나.

    “50개국이 넘는다. 최근에는 프랑스 칸영화제에 다녀왔다.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의 공동제작자도 북한의 인권관련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열린 필름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미국 호주 일본도 방문했다.”

    “개인자금으로 인권활동 한다”

    필자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인권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어디서 조달하느냐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다음 질문을 하기도 전에 경비조달과 관련한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각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연설과 인터뷰를 한다. 미국기업들에게 자문도 한다. 미국과 일본에서 발간되는 책의 인세도 받는다. 어쨌거나 나는 돈 문제와 관련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불행히도 나는 CIA가 지원해주는 비밀계좌가 없어 내 스스로 돈을 마련해야 한다. 난 자유롭기 때문에 급진적 행동을 할 수 있고 문제를 일으킨다. 어떤 이들로부터 돈을 받으면 그들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 미국·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연설을 하고 약간의 돈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동비를 개인자금으로 충당한다.”

    -NGO나 기독교 단체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 돈을 받으면 돈을 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내가 만일 CIA나 미국과 일본의 기업에서 돈을 받았다면 그들 단체에 가입하라는 종용을 받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조직의 일부분을 나에게 떼주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싫어한다.”

    -독일에서 벌였다는 의료개혁운동에 대해 소개해달라.

    “독일은 의사들이 의료보험에서 진료비를 지급받기 때문에 약물처방을 많이 하고 엑스레이 같은 것을 많이 찍어야만 돈을 더 벌 수 있다. 나는 그런 것들에 10년 동안 저항했다. 보건복지빌딩 앞에서 450여 명의 환자들과 함께 소리쳤다. TV 및 라디오 방송국, 신문사에 전화를 했다.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제껏 독일의 어떤 의사도 독일 의료제도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한 적이 없었다. 그뒤 토크쇼에 나가 독일 보건복지에 대한 내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의료개혁을 주장했다. 나의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 일로 인해 급진적인 의사, 심지어 좌파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됐다.

    패션사업에 종사하던 아내는 내가 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급진적인 의사 남편 때문에 의류업계에서의 명성에 손상이 가는 것을 싫어해 이혼했다. 그 뒤 나는 1984년부터 인도양의 섬에 있는 환자들을 찾아가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긴급의사회(캡 아나무르)라는 독일 의료봉사단체가 수단이나 북한에서 활동할 것을 제안하길래 북한을 선택했다. 북한이 이상한 왕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바로 내가 갈 곳이구나 하는 예감이 다가왔었다.”

    -사회운동을 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려는 당신의 행동은 지나친 감을 준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내가 자살을 시도하려던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그는 독일에서 의료개혁을 주장하며 TV 카메라 앞에서 거짓 권총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나는 TV가 가진 위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내가 방송국의 높은 사람들에게 의료개혁운동에 관해 보도해달라고 부탁하자 소리치는 환자가 한 1000명은 돼야 방송거리가 되지 않겠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자살을 시도할까’라고 제안했더니 그들은 ‘폴러첸씨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방송 채비를 갖추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나는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가. 한번 더 강조해서 이야기하면 바로 그것이 나의 미디어 접근법이다. 내가 논쟁의 여지가 많은 소동을 일으키면 사람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묻는다. 그러면 나는 예전 TV 토크쇼에서 그랬던 것처럼 뉴스프로그램을 통해 의료복지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고 무엇이 어찌돼야 하는지를 말할 기회를 갖게 된다.

    지금 시대에 미디어의 관심을 끌려면 뭔가 볼거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마돈나가 거의 반라(半裸)의 몸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처럼 CD나 레코드판을 팔려는 게 아니다. 바로 북한 인권을 말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을 위해 7년 넘게 활동한 사람이 많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바꾸어놓으려고 나는 미친 짓을 한다.”

    -그러나 뉴스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

    “정신 나간 조작의 세계 챔피언은 김정일 위원장이다. 우리는 단지 그가 보유하고 있는 무기에만 신경 쓰지 그가 꾸미는 조작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김위원장은 그가 사용해온 방법에 의해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나는 ‘펜은 검보다 강하다’는 문구를 좋아한다. 당신 같은 기자들이 기사를 씀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기자들이 북한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북한엔 뭔가 있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고 결국 그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언론 인터뷰는 비타민 같은 것”

    -북한에서 왜 추방당했는가.

    “미국 토니 홀 하원의원은 WFP(세계식량기구)와 함께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나는 긴급의사회를 통해 북한 어린이들의 복지와 인권에 대한 의견을 문서로 정리해 그에게 보냈다. 북한에 있던 통역자에게도 내가 쓴 문건을 한국말로 번역해 상관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북한에서 추방당했다. 비자가 연장되지 않아 평양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돌아가는 대신 비밀리에 단둥으로 도망 나와 인천으로 왔다. 그때는 내가 한국에서 좌파니, 급진이니, 우익이니, 북한의 첩자니 하는 논란을 일으키며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지 몰랐다.”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는 형편이 어떤가.

    “일요일에 평양에서 지프를 타고 지나치면서 바라본 교회들은 문이 닫혀 있었다. 겨울에는 평양에 눈이 많이 온다. 교회 앞에 눈이 1.5m씩이나 쌓여 있지만 치우지 않는다. 실제 기독교 활동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인가.

    “부모님은 개신교도였지만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지금 당신은 목에 보호대를 하고 있고 목발에 의지하고 있다. 부인으로부터도 이혼당했다.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미디어와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다.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도 흥분되고 힘이 생긴다. 미디어의 위력을 아는 나로서는 인터뷰하는 것이 비타민처럼 느껴진다. 인권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취미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주어져 나는 늘 행복하다.”

    -이혼한 부인과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전 아내는 의류를 생산해 팔고 있다. 그녀는 상당한 재력가다. 네 자녀가 독일에서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안전 문제가 걱정돼 이메일 접촉이나 전화 통화는 피한다. 그러나 친척들을 통해 서로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본 적이 있나.

    “전혀 없다. 악수한 적도 없다. 여기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국립묘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한 적이 있다. 김일성경기장에서 네댓번 김정일 위원장을 5∼6m 떨어진 지점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이 꽃을 갖다 바쳐도 꼭 쓰레기를 받는 사람처럼 그냥 받았다가 치워버리고 웃지도 않는다. 아주 차가운 사람으로 보였다.”

    -한국 일부 젊은이들의 반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학생시절에 미국에 대항해 소리치기도 했고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도 벌였다. 젊은 사람들은 급진적일 수 있고 미국에 대해 반대시위도 할 수 있다. 예전에 동독이 서독에 간첩을 보내 정치적 선동을 하고 반미사상 교육을 했다. 남한에서도 북한 공작원이 내려와 노동조합이나 학생단체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서울의 어떤 대학에 갔을 때 시위 슬로건을 보고 마치 평양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남쪽에 북한의 공작이 침투할 가능성이 있다.”

    -독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 의료개혁을 주장하는 등 좌파 성향의 활동을 했는데 여기 남한에서는 우익과 친하게 활동한다. 재미있는가.

    “아주 흥미롭다. 나는 혼란을 좋아한다. 인간은 여러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하기도 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하다.”

    “난 혼란을 좋아한다. 그게 인간 본성”

    -취미에 관해 말해달라.

    “여행과 하이킹을 좋아한다. 시간이 나면 북한산으로 산행을 한다. 가까운 남산에서 일출을 보기도 한다. 평양과 백두산에도 하이킹을 갔다. 등산을 좋아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얼리 버드(Early bird)다. 면도를 하면서도 계속 생각을 한다. 화장실에다 연필을 두고 생각이 나면 뭔가를 적고 기사거리가 떠오르면 언론사로 보낸다. 엄청나게 많은 이메일을 정리한다.”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다.

    “나도 고맙다.”

    -한국 음식 중 어떤 걸 좋아하는가.

    “김밥이다. 찬 음식을 좋아한다. 요리할 시간이 부족하다. 김밥을 먹으면서 인터넷을 할 수도 있다. 밖으로 가지고 다니기에 편하다. 북한산 하이킹을 가서도 김밥을 먹는다. 나는 북한 김치를 좋아했다. 김치에는 비타민 성분이 많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섞여 맵지만 김치를 먹어선지 난방장치가 없는 백두산호텔 같은 데서도 감기 한번 걸린 적이 없다. 평양냉면도 아주 좋아했다.”

    폴러첸은 인터뷰를 마친 기자와 악수를 나누며 그의 꿈을 이야기했다.

    “나는 마틴 루터 킹처럼 꿈을 갖고 있다. 북한의 모든 주민이 굶주림과 질병과 독재로부터 벗어나는 꿈을 꾼다. 모든 저널리스트들과 북한의 아름다운 치어리더들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팔짱을 끼고 춤 추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그 꿈이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열정도 있고 쇼맨십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도 청산유수다.

    폴러첸이 한국을 떠난 뒤 그가 ‘월스트리트’에 기고한 ‘남한의 방해자들’이란 논평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 격앙된 반응이 있었다. 독일인 의사가 한국의 정권교체를 거론한 것이 과연 적절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내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정권교체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자유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말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독에서 처럼 북한에서도 자유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한국에서도 요즘에는 새로운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폴러첸의 ‘월스트리트’ 기고문 전문과 이메일 답장을 분석해보면 그가 말하는 ‘정권교체’가 4년여 뒤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부가 불신을 받으면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러 국민의 신임을 묻고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독일의 정치체제(내각책임제)와 5년 동안 대통령 임기가 보장되는 한국의 체제를 혼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수우파 인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폴러첸이 노대통령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대통령 탄핵론’에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임기 전 비정상의 정권교체를 거론했다면 경솔한 발언이겠지만, 폴러첸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주장했다고 하니 정부가 지나치게 발끈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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