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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자랑 마라’ 평생 가슴에 새긴 아버지의 ‘공직 3戒’|고건

  • 글: 고건 전 국무총리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자랑 마라’ 평생 가슴에 새긴 아버지의 ‘공직 3戒’|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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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서울대로 옮기시고 나서 3년 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해에 6·25가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제일 먼저 칸트 전집 10여권과 나의 중학교 1학년 교과서들을 챙기셨다. 한 톨의 양식이 아쉬웠을 전쟁통에 그런 행동을 하는 아버지가 어머니 보시기에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을 짊어지고 고깃배로 밤섬까지 건넌 뒤 걸어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 전쟁기간을 보냈다.

환도(還都)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쟁을 겪고 난 뒤라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가 되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나의 결정을 지지하셨다. 워낙 자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성품인 데다 아무래도 이과보다는 문과에 대해 호감을 가지셨던 것도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와 사제간이 되었다. 당시 철학개론은 모든 문리대 학생에게 필수과목이었는데, 주요과목의 개론은 주임교수가 직접 담당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기동창인 송복 교수 말에 따르면 논어에서도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라 하여 자식은 서로 바꾸어 가르치는 법이라고 했다지만, 내게도 영 거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수 놀리고 흉보는 것이 낙이었을 젊은 시절의 내 동기들은 꽤나 불편해했을 것이고 아버지 역시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셨을 것이다. 출석을 직접 부르지 않고 서면으로 하던 시기여서 수업시간에 이름을 불리는 일만은 면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B’에 그쳤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후광



대학 2학년 때던가, 홍릉 숲에서 여학생과 난생 처음 데이트란 것을 하다가 산책 나오신 아버지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사실, 내 딴에는 먼저 아버지를 발견하고 재빨리 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나를 봤다는 말씀을 안 하셔서 오랫동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아버지의 신춘수필을 보니 홍릉 숲에서 나를 발견하셨던 이야기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의 이 수필은 “우리 건이한테 완전히 점령당한” 이 홍릉 숲은 당신도 “언젠가 여인(麗人)과 함께 거닐고 싶었던 숲”이었다는 술회로 끝난다. 아버지의 숲을 본의 아니게 점령(?)해버려 뒤늦게나마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나의 문리대 시절, 아버지의 후광(?)은 계속됐다.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학생회장이 된 뒤에는 선거 공약대로, 필화사건으로 폐간된 문리대 교지를 ‘새 세대’로 이름을 바꾸어 복간했는데, 이때도 문리대 학장으로 계시던, 어린 시절 ‘옆집 아저씨’ 이양하 교수가 많이 도와주셨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당시 필화사건을 빚은 이념연구 서클 ‘신진회(新進會)’ 멤버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이른바 ‘꼴통’ 보수로 호칭되고 있으니 세상은 참 모를 일이다.

내가 대학을 마칠 무렵 4·19가 터졌다. 전북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기셨던 아버지는 이때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셨다. 그 몇 해 전 미국 예일대에 1년동안 교환교수로 가 계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사는 나라를 보시면서 지식인에게는 학문보다도 행동이 요구되는 때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고등고시를 통해 공무원의 길을 가겠다는 내 생각을 지지하신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고시에 합격해 내무부 지방국의 수습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1962년, 아버지는 군정반대의 선봉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르셨다. 그 다음해에는 총선거에서 통합야당인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셨다. 국회에서는 윤보선 야당 대통령후보 아래에서 당의 정책위원장과 사무총장의 요직을 맡았다. 군사정권을 상대로 가시밭을 걷는 듯한 야당 정치활동의 선봉장이 되셨던 셈이다.

나는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 그 여파를 톡톡히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고시 합격자들은 1년반 후 자동적으로 수습 딱지를 떼고 보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내 고시 동기들은 때가 되자 모두 중앙부처의 계장이나 지방의 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나에게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보직 없는 공무원 생활은 기약 없는 셋방살이와도 같다.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으니 일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고 놀아도 노는 것 같지 않은 것이 보직 없는 공무원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버지가 강성 야당 정치인이라는 것말고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행정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마땅하건만 나라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정견을 바꾸시라고 할 수는 없고, 고민 끝에 장관을 면담하고 사표를 내기로 했다. 그러나 무보직의 평사무관이 장관을 면담하기가 쉽지 않은 터라 면담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알려졌는지 드디어 보직발령을 받았다. 고시 합격 후 3년반 만의 일이었다(아직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상공부 상역국장이던 형님은 강제퇴직을 당했다. 나 대신 당하신 것 같아 무척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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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건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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