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공짜 구경, 심야의 가출 그리고 도둑질

축구에 미쳤던 시절의 만화 같은 이야기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입력2004-09-16 16: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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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시민운동장에서 망원경으로 처음 만났던 화랑팀, 10년 뒤를 훤히 내다본 축구광 아저씨, 사춘기 소년을 설레게 만들었던 분데스리가와 독일 여학생의 펜팔 편지… 밥보다 축구를 더 좋아했던 사커키드의 그때 그 시절.
    TV로만 축구경기를 보던 1970년대 시골소년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은 직접 운동장으로 찾아가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A매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축구경기가 서울에서만 열렸기 때문에 지방에 사는 축구팬들이 대표선수들을 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나는 1977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대구로 옮겨왔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인재는 대구로 보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소신에 따라 촌놈이 대도시로 진학한 것이다. 나는 중학교 추첨을 실시할 때 축구부가 있는 계성중학교(황보관씨가 나온 학교)에 배정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늘이 무심했던지 럭비부가 있는 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해 봄 대구시민운동장에서는 MBC배 고교축구대회가 열렸다. 워낙 축구 열기가 높고, 대구MBC가 열심히 홍보한 덕분에 예선 첫날부터 3만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꽉 들어찼다. 흔히 대구를 야구의 도시라고 말한다. 경북고와 대구상고라는 야구명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축구의 인기는 야구에 견줄 만했다.

    나는 잔디구장에서 벌어지는 진짜(?) 축구시합을 보기 위해 날마다 학교가 끝나면 시민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대회진행 도중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소식이 들렸다. 지방의 축구열기를 높이기 위해 국가대표팀이 고교축구대회 결승에 앞서 영남대학과 평가전을 치른다는 빅뉴스였다.

    당시 대표팀의 인기는 상종가였다. 불과 한달 전 이스라엘과 일본을 누르고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최종예선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스라엘을 3대1로 통쾌하게 누른 게임은 올드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명승부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잠시 1977년 서울운동장으로 돌아가보자.



    1977년 봄. 78아르헨티나월드컵을 앞두고 전세계는 지역예선전 열풍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4년 전 74서독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호주에 덜미를 잡혀 온 국민에게 쓰라린 좌절을 안겨준 한국축구는 이번에야말로 월드컵에 진출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1차예선 조 편성은 축구팬들을 한숨짓게 했다. 강호 이스라엘, 숙적 일본과 같은 조에 속한 것이다. 세 팀 중에서 1위만 최종예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일본이야 이길 수 있겠지만, 유럽축구를 구사하는 이스라엘은 아무래도 버거운 상대였다.

    1차전 어웨이 경기는 0대0 무승부. 이제 홈에서 이기면 최종예선 진출이 확정된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1년 전 서울에서 열린 76몬트리올올림픽 예선전에서 이스라엘에 1대3으로 완패당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3월20일.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서울운동장은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찼고 도로는 한산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3000만 국민 모두가 TV 앞에 모여 앉았다.

    경기 시작 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영무가 운동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스라엘 선수들과 싸우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다니….

    마침내 휘슬이 울렸다. 그러나 채 5분도 안돼 김강남이 허벅지 근육통으로 쓰러지면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한국대표팀의 최정민 감독은 곧바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박상인을 교체 투입했는데, 이것이 결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전열을 정비한 태극전사들이 특유의 기동력으로 이스라엘 문전을 위협하자 노련한 이스라엘 선수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전반 22분 한국이 드디어 첫 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이 왼쪽을 치고 들어가다 이영무에게 밀어주자 이영무는 상대수비를 넘기는 재치있는 월(Wall)패스로 공을 차범근에게 넘겼다. 그리고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서 상대 수비 두 명을 제친 차범근의 왼발이 불을 뿜었다.

    골인! 숨죽이며 지켜보던 3만 관중의 함성이 폭발했다. 차범근은 득점 후의 감격을 이렇게 회고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뒤에서 목을 감아쥐었고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계속해서 동료들이 나를 짓누르듯 올라탔다. 축구가 아닌 그 무엇이 이런 감격을 맛보게 할 수 있을까.”

    후반전. 이스라엘의 맹렬한 반격이 펼쳐졌다. 제발 1대0으로 끝나주었으면 하는 온 국민의 애절한 소망을 짓밟기나 하듯 이스라엘은 후반 31분 동점골을 뽑아내고야 말았다. 문전 프리킥이 수비를 맞고 나오자 말미리안이 땅볼 중거리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스탠드는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무승부는 안된다! 동점골을 허용한 뒤 태극전사들의 투지가 다시 불타올랐다. 짧은 패스와 과감한 돌파로 이스라엘 문전을 더욱 세차게 두들겼다. 몇 차례의 결정적 찬스가 있었으나 아쉽게 골문을 비켜갔다. 남은 시간은 3분여. 이때 오른쪽 코너 부근에서 최종덕이 긴 드로인을 던지자, 차범근이 비호처럼 달려들며 백헤딩했고, 한번 잔디에 튀긴 볼은 골에어리어 정면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곳에 박상인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물이 찢어질 듯한 통렬한 발리슛이 터지면서 전광판에는 2대1이란 스코어가 새겨졌다.

    그라운드엔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퍼졌고, 박상인은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며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아마도 이때가 박상인의 축구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박상인의 회고다.

    “범근이의 헤딩 패스가 날아오는 순간, 골문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골키퍼는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나는 오른쪽을 노렸다. 내 생애를 통해 이처럼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

    역전골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인 불과 1분 뒤 이번엔 수비수 최종덕의 장거리 캐논포가 터져 운동장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공격에 가담한 최종덕이 약 40m 떨어진 지점에서 슛을 날려 이스라엘 골문의 왼쪽 모서리를 꿰뚫은 것이다. 3대1. 한국의 완벽한 승리이자, 1년 전 패배의 통쾌한 설욕이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본부석에 앉아 있던 코미디언 남보원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관중들을 흥겹게 했다. 다음날 어느 신문엔 ‘3월20일을 한국축구의 날로 정하자’는 사설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드디어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 왔다. 그날은 봄비가 오락가락하는 일요일이었다. 접전 끝에 결승에 올라온 팀은 대구 대륜고와 서울 우신고였다. 나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시민운동장으로 향했다. 형은 모교(대륜고)가 결승에 진출하는 바람에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당시 대륜고 감독은 프로축구 전북 감독을 지낸 김기복씨였고, 우신고에는 최강희가 뛰고 있었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스탠드는 이미 만원이었다. 관중들은 게임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국가대표팀이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에 앞서 오픈게임을 벌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대표선수들이 연습하는 쪽 스탠드에서 구경하다 경기가 시작될 무렵 재빨리 자리를 옮겨 대표팀 벤치 바로 뒤에 앉았다. 내가 좋아하던 최종덕 허정무 박성화 선수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망원경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자꾸만 주전 선수들보다 후보 멤버였던 조광래 김희태 박종원 등에 시선이 쏠렸다. 세 선수는 벤치 쪽에서 함께 헤딩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을 처음 봤다. 망원경으로 봐도 얼굴 윤곽이 제대로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조광래의 별명이 ‘깜상’이라는 걸 나중에 알고 나서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우연인지는 몰라도 세 선수 모두 연세대 동기에다 나중에 프로팀 대우에서 뛰었다).

    경기를 앞두고 볼보이를 맡은 중학생 선수들이 대표팀 벤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더니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조폭문화’에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요즘에야 ‘그 흔한 대표선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태극마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만, 당시엔 대표선수가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선수가 소개되었다. 대표선수들이 스탠드 한쪽 구석에 숨어있다가 호명되면 그라운드 한가운데로 달려나오는 세련된 방식이었다. 선수가 달려나올 때마다 밴드가 반주를 넣고 태극기를 든 학생들이 선수 주변을 호위했다. 선수 이름도 밋밋하게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전에서 40m 롱슛을 통쾌하게 꽂아넣은 한국 최고의 장거리 슈터, 최-종-덕!”

    “한국축구의 대들보, 아시아의 호랑이, 차-범-근!”

    마지막으로 차범근을 소개할 때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맞춰 3만 관중이 일제히 “차-범-근!”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요즘 유럽축구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20년 전 한국축구에서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기는 예상대로 국가대표팀이 영남대를 4대1로 눌렀다. 한마디로 대표팀이 가지고 논 게임이었다. 관중들을 의식해서인지(?) 영남대 선수들이 악착같이 마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대표선수들의 개인기가 그라운드를 수놓았던 흥미만점의 게임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데도 축구에 굶주린 대구시민들은 미동조차 없이 게임에 빠져들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대표팀 경기가 끝났는데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선수 학부모와 동문들이나 자리를 지킬 고교대회 결승전에 3만 관중이 집중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물론 대구시민들은 고향팀 대륜고를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결국 일방적인 성원을 받은 대륜고가 우승을 차지했다. 대륜고는 네덜란드 아약스팀을 그대로 흉내낸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동문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어내려와 선수들을 무동 태운 채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었다.

    난 보자마자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서독대표팀의 모든 선수들이 전면 컬러로 나왔으니 도저히 안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통 ‘사커 매거진’보다 서너 배나 비싼 이 책을 내 용돈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 번을 뒤적이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책꽂이에 다시 꽂아놓았다. 몇 달 용돈을 모아 그 책을 사야 하나?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며칠 뒤 난 결심했다. 훔치기로! 범행을 결심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중간고사를 마친 어느날, 나는 대담하게 서점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제든지 책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책가방 열쇠는 풀어놓았다. 책가방 안의 교과서도 최대한 줄여 그 잡지를 넣어도 표시가 나지 않게 했다. 이 얼마나 주도면밀한 범행준비인가.

    그 단행본을 책꽂이에서 꺼내 뒤적이는 척하며 나는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있자 어느 손님이 책값을 계산하러 카운터에 갔다. 손님으로 인해 내 몸이 가려졌다. 그 순간, 재빨리 책을 가방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태연히 다른 잡지들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내 실력에 나도 감탄할 정도였다.

    혹시, 만에 하나 그 주인이 내가 훔치는 장면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주인이 경찰에 신고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내가 그 서점의 주요 고객 중의 한 명이므로 주인은 차라리 모른 척하고 다음에도 나에게 책을 파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아, 난 왜 이렇게 머리가 좋은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 책을 손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데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책이 막상 수중에 들어오니 별로 좋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후회가 됐다. 내가 이런 짓을 해서 도대체 뭐가 되려고 하지?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그 사건 이후에도 그 서점에 자주 들렀다. 그 다음부터는 돈을 주고 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서점은 없어졌다. 대구 집에 들러 시내에 나가면 가끔 그 부근을 지나게 된다. 이미 다른 가게가 들어선 그 자리를 보면 그때 느꼈던 희열, 놀라움, 그리고 부끄러움이 새삼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른다.

    “학생, 축구 꽤 좋아하나봐? 일본어도 잘하겠네.”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던 그 서점 주인에게 이제라도 빌고 싶다. ‘아저씨,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날 이후 대표선수들이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대표선수의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 참고로 당시 대표팀은 빨간색 상의, 흰 팬티에 빨간 스타킹을 신었다. 그때까지는 특별한 메이커도 없고 태극기만 달랑 붙어 있었으나, 1977년부터 아디다스가 대표팀 유니폼을 독점 공급하면서 어깨에 세 개의 줄이 그려진 산뜻한 디자인이 등장했다. 나는 그 유니폼을 사기 위해 대구의 옷가게와 스포츠용품점을 이잡듯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유니폼은 없었다. 대신 ‘아디도스’니 ‘아디스’니 하는 복제품은 숱하게 많았다. 대구 시내에 아디다스 대리점 하나 없던 시절이었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시도였다.

    국가대표팀의 대구경기가 인기를 끌면서 그뒤 지방경기가 잇따라 열렸다. 박스컵 예선전과 외국 프로팀 초청경기가 열릴 때마다 지방의 공설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대목에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나는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경기가 열릴 때마다 공짜로 드나들었다. 운동장 바로 앞에서 가게를 하시던 외삼촌이 운동장 직원들과 잘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외삼촌이 나를 운동장 입구까지 데리고 가서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면 언제나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그게 뭐 대단한 특권은 아니었지만, 나는 항상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외삼촌의 힘을 빌려 여러 친구들을 공짜로 입장시켜주는 바람에 ‘능력 있는 아이’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될 때도 있는 법. 78아르헨티나월드컵이 끝나고 페루의 어느 프로팀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공짜 입장을 하려고 외삼촌과 출입구 쪽으로 다가갔는데 운동장 직원이 우리 삼촌을 보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냥 가라는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시청에서 특별단속을 나온 것이었다. 그때 걸렸으면 즉결심판에 넘어갈 뻔했다. 할 수 없이 외삼촌 집에 쪼그리고 앉아 간간이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운동장에는 재미있는 사람도 많았다. 1979년 내가 중3 때 서독의 함부르크팀이 내한해 대구에서 대표팀과 경기를 벌인 적이 있었다. 그날 내 옆에 앉은 한 아저씨는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표팀 경기는 물론이고 웬만한 전국대회는 어디에서 열리든 다 구경 다닌다고 했다. 그 분은 이틀 전 부산에서 1차전을 보고 서울로 올라가 일을 본 뒤 오늘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며, 경기를 보고 나면 서울로 가 장사하고, 광주로 가서 3차전을 볼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면서 신기하게 생각했다.

    대표팀 경기에 앞서 대구 청구고와 협성고가 오픈 게임을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야, 청구고의 저 오른쪽 풀백 있지? 쟤 이름이 박경훈인데 수비 좋고 오버래핑이 끝내주는 애야. 아마 몇년 후면 이름 날릴 거야. 내가 확신해. 작년부터 쭉 봐왔거든. 그리고 저기 청구고 공격진에 키 큰 놈하고 오른쪽 윙 보는 조그만 선수 있지? 큰 애가 백종철이고, 작은 애가 변병주인데 쟤들도 대단해. 너 꼭 기억해 둬라. 쟤들 틀림없이 스타 된다.”

    난 그 말을 듣고 아저씨의 열성에 탄복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청구고 3인방은 훗날 ‘큰 물건’이 되었다. 그 축구광 아저씨는 지금도 축구장 스탠드 어느 한쪽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시골 소년이 대도시 대구에 적응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학교 가기가 싫어졌다. 아침마다 콩나물 시루보다 더한 만원버스에서 1시간 동안 시달리는 일도 지겨웠고, 규율을 강조하는 학교 분위기도 마뜩찮았다. 또 학교가 빈민가에 있다보니 등하교 때 퇴학당한 불량배들에게 돈을 빼앗기는 일이 허다했다. 재미라곤 하나도 없던 그 시절, 그나마 나의 정신세계를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축구뿐이었다.

    1978년 6월 아르헨티나월드컵이 열렸다. 사실 월드컵이 열려도 별로 흥분이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출전조차 못한데다 아는 선수도 별로 없고, 내가 좋아하는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는 부상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출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 대 폴란드의 개막전도 월드컵 경기치고는 너무 재미없었다.

    둘째날 주최국 아르헨티나와 헝가리의 예선 1차전이 열렸다. 난 아무 생각없이 TV를 켰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선수들이 입장하자 8만명을 수용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버플레이트스타디움에 색종이 꽃가루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8만명의 홈관중이 한꺼번에 뿌려대는 오색종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하얀 두루마리, 일제히 나부끼는 하늘색과 흰색의 아르헨티나 깃발…. 난 그렇게 멋있고 열광적인 장면은 처음 봤다.

    관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고 등장하는 아르헨티나 선수들. 하늘색 줄무늬에 까만 팬티, 하얀 스타킹, 야간경기에 특히 잘 어울리는 전통의 유니폼. 난 그 경기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남미축구 하면 브라질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아르헨티나가 보여준 절묘한 1대1, 2대1 숏패스, 놀라운 개인기, 시종일관 원터치 패스로 헝가리 진영을 유린하는 조직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도 완전한 찬스가 생길 때까지 개인기로 수비를 제치거나 끝까지 패스를 주고받는 모습은 남미축구의 진수를 만끽하게 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공이 발에 착착 달라붙으면서 패스가 살아 움직였다. 때까지 차범근과 허정무가 최고인 줄로만 알던 나에게 남미의 개인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요즘은 남미축구도 유럽 스타일의 롱패스와 공중공격을 많이 시도하지만 당시만 해도 철저하게 남미 스타일을 고집했다(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까지 남미축구를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고수하는 콜롬비아 대표팀을 좋아한다). 더군다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만큼 시종 자신만만한 플레이를 펼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용모는 또 어떤가.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이 빚어낸 그 절묘한 조화(?), 한마디로 너무나 멋지게 생겼다. 두꺼운 가슴은 당시 유행하던 착 달라붙는 상의와 어울리고, 고무공처럼 탄력 있고 미끈한 다리는 짧은 팬티와 조화를 이루었다. 홈 관중들을 열광시키며 연전연승을 거둔 하늘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전사들은 결승에서 오렌지군단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79년 대구의 어느 극장에서 78아르헨티나월드컵 기록영화가 상영되었다. 제목이 ‘토도스의 축제’인가 그랬다. 월드컵 기록영화는 가끔 TV에 나오지만, 극장에서 상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5mm 영화필름으로 축구를 보는 그 생생한 맛은 비디오와는 또 달랐다. 극장측에서는 관객이 꽤 있을 줄 알고 상영했지만 흥행에는 완전히 실패해 내가 그 영화를 볼 때는 관객이 열 명도 채 안됐다. 그렇지만 난 너무나 재미있어 두 번이나 보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결승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고 무동을 탄 채 운동장을 행진하자, 8만 관중이 모두 일어나 깃발을 흔들며 “알젠티나! 알젠티나!”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1978년에 아르헨티나가 보여주었던 ‘축구예술’로 인해 삭막하고 암담했던 나의 중학시절은 아름답게 채색될 수 있었다. 동시에 축구는 내 생애 최고의 스포츠로 영원히 자리잡게 되었다.

    78아르헨티나월드컵 이후 나는 축구의 새로운 경지에 눈뜨기 시작했다. 월드컵에 이어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독일 분데스리가였다.

    20대 후반 이상이라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독일 분데스리가 경기가 얼마나 국내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는지 잘 기억할 것이다. 분데스리가 때문에 국내 축구가 시시해 보이고 축구장에 관중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데스리가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77년부터 MBC 텔레비전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방영됐다.

    먼저 경기장 시설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일자무늬로 융단처럼 멋있게 깎은 잔디는 흑백TV로 보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듬성듬성 패인 잔디, 조금만 날씨가 추워지면 누렇게 변하는 우리나라 축구장만 보다가 양탄자를 연상케 하는 경기장을 보니 축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스탠드를 꽉 메운 관중들이 우렁찬 함성과 합창으로 경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장면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잠시도 쉴틈 없이 공격을 주고받는 가운데 수만 관중들이 하나가 되어 부르는 합창소리…. ‘찬양하라 노래하라 창조자의 영광을’ 하는 베토벤의 교향곡도 들리고, 당시 인기를 끌던 록그룹 퀸의 노래도 나왔다. 특히 동점골이나 역전골이 터지는 순간 추운 날씨에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관중들이 부르는 웅장한 베토벤의 교향곡은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때 서독 축구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1974년 월드컵 우승과 막강한 독일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분데스리가는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황금의 땅, 세계축구의 ‘엘도라도’였다. 따라서 유럽의 내로라하는 축구선수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케빈 키건, 토니 우드콕, 덴마크의 알란 시몬센,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페차이(차범근과 함께 프랑크푸르트팀의 외국용병이었던 이 선수는 1996년에 아깝게 죽었다. 차범근도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리고 유고, 폴란드 같은 공산국가의 유명 선수들이 모두 분데스리가에 몰려 들었다.

    당연히 경기 수준도 최고였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유럽 최우수선수상을 모두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선수가 차지할 정도였다. 각국의 축구 스타들이 망라된 데다 독일 특유의 조직적이고 짜임새 있는 스타일, 그리고 두 골을 먼저 먹더라도 세 골을 넣어 역전승을 거두는 특유의 ‘게르만 정신’으로 인해 분데스리가는 언제나 흥미만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축구경기라도 지금처럼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어서 보거나 누워서 시청했다면 기억에 오래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데스리가가 녹화방송되는 시간은 매주 월요일 밤 11시부터 1시간 동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안 가는 일요일보다 월요일이 더 기다려졌다. 월요일 저녁만 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시계를 자꾸 쳐다보았다. 책상에 앉아 영어단어를 외우면서도 머릿속은 축구로 가득 찼다. 연습장에 R자로 시작되는 단어 스펠링을 쓰다가 보면 어느새 Rittbarski(리트바르스키)나 Rummenigge(루메니게) 같은 축구선수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축구가 시작되는 밤 11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이다(1970년대에는 통금이 있었기 때문에 취침시간이 지금보다 더 빨랐다). 우리 부모님도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안타깝게도 집에 한 대뿐인 TV는 안방에 있었다. 월요일 밤마다 나는 도둑 걸음으로 소리 안나게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 가슴 졸이며 TV를 켜야만 했다.

    불꺼진 방에서 TV를 켜면 방이 갑자기 환해지므로 부모님이 깰 염려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화면을 어둡게 했다가 차츰 밝게 하는 전술을 썼다. 또 화면이 방안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려면 TV 앞에 바짝 다가앉아 봐야 했기 때문에 2.0이던 내 시력은 그때부터 수직 낙하했다.

    소리가 밖으로 새면 안되므로 이어폰은 필수적이었다. 그냥 그림만 봐도 되겠지만 이철원 캐스터의 명쾌한 진행과 주영광 할아버지의 구수한 해설을 빼놓으면 흥미가 반감된다. 그리고 축구경기에서 관중들의 응원소리는 얼마나 중요한가. 숨소리도 잘 못내는 이런 열악한(?) 시청조건이었지만, 한 경기 한 경기 모두 축구의 진수를 보여주었기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고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싸는 법이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시는 바람에 이부자리를 펴자마자 분데스리가를 방송하는 시간이 됐다. 난 조금 불안했지만 여느 때처럼 조심스레 TV를 켰다. 아직 잠이 들지 않으신 아버지는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만 가서 공부나 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조금만 볼게요” 하면서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어느 팀간의 경기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무튼 골이 많이 터지면서 역전극이 펼쳐질 찰나였다. 아버지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잠을 못이루셨고, 옆에 있던 어머니도 그만 TV를 끄라고 재촉하셨다. 그러나 도저히 중간에 포기할 수가 없어 못 들은 척하며 계속 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도 귀에 생생한 그 호통…. “이 노무 자슥이 축구에 미쳤나? 공부는 안하고 뭐하고 있노! 빨리 안 나가나?” 그러시면서 TV를 팍 꺼버리는 게 아닌가.

    난 입을 삐죽 내민 채 안방을 나왔다. 아, 어떡해야 하나? 대역전극이 펼쳐질랑말랑 하는 시간인데. 잠시 머리를 싸매다가 용단을 내렸다. 동네 시장에 있는 전파사로 가자! 그 가게는 밤 늦게까지 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거기 가서 보자!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추리닝복을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집에 돌아올 때를 대비해 대문을 살짝 열어 놓았다. 11월쯤이었을 것이다. 밤 날씨가 꽤 추웠다. 그러나 분데스리가에 대한 사커키드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파사 유리 안에 진열된 TV를 밖에서 보느라 오들오들 떨었다.

    소원대로 경기를 다 보고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문이 잠겨 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보니 화가 난 아버지가 내가 방에 없는 것을 보시고는 얼어죽으라고(?) 대문을 잠가 놓은 것이다. 엄하고 고집 세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대문을 잠가 놓았으니 아무도 허락 없이 열어주지 못한다. 몇번이나 대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이고, 난 죽었다. 이 추운 날씨에 정말 얼어죽겠구나.’ 손은 시려오고 발은 점점 얼어오고. 혼자 대문 앞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에 열을 냈다. 이러기를 30여 분.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왔다. 119 구조대, 아니 어머니가 나오시는 게 아닌가. 대문을 열어 주시면서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아이고, 이 자슥아? 뭐가 좋다고 밖에까지 나가서 그걸 보고 오노?” 이러셨다. 나도 내 신세가 처량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다시는 안 봐야지. 이게 무슨 꼴이야’ 하며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1주일 뒤 나는 또다시 도둑 고양이처럼 안방문을 열고 말았다.

    분데스리가 선수 중에 내가 특히 좋아했던 선수들이 있다. 바이에른 뮌헨 소속의 칼 하인츠 루메니게는 20세 신인 때부터 보았는데 첫눈에 대성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 골 결정력이 돋보이는 전형적인 독일스타일이었다. 고 1 때인가, 이 선수에게 난생 처음으로 팬레터라는 것을 보낸 적이 있다. 일본 축구잡지에서 뮌헨팀 주소를 찾아내 보냈는데 영어로 작성하느라 며칠을 끙끙 앓았다. 기대도 안했지만 답장이 없어 그 뒤로는 그 선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슈투트가르트 소속의 한지 뮐러도 나의 우상이었다. 이 선수는 20세에 대표팀에 뽑혀 1978년 월드컵에 출전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어머니가 이탈리아계여서 그런지 몰라도 라틴형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동양적으로 보이는 미남이었다. 잘생긴 얼굴에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덕분에 오랫동안 아디다스의 공식모델로 활약했고, 이 때문에 외국 축구잡지엔 언제나 이 선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중학교 2, 3학년 무렵 내 방안에는 한지 뮐러와 아르헨티나의 마리오 켐페스, 그리고 축구를 좋아한다는 팝 가수 로드 스튜어트의 대형사진이 붙어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제일 좋아한 선수는 쾰른팀의 헬베르트 노이만이었다. 쾰른팀의 미드필더로 활약한 이 선수는 실력은 물론이고 뛰는 모습이 멋졌다. 늘씬한 몸매에 금발을 휘날리며 날렵하게 달리는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그 나라의 축구가 맘에 들면 그 나라 자체가 좋아진다. 분데스리가에 반한 나는 독일이라는 나라에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3 때 영어실력도 키울 겸해서 펜팔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서독의 어느 여학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엘케 브링크마이어’라는 이름을 가진, 나보다 한 살 어린 시골 여학생이었다.

    내가 또박또박 인쇄체로 써서 편지를 보내면, 이 여학생은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로 날려써서 답장을 보내왔다. 이 때문에 문장 해석보다는 철자 해독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여학생에게 한번은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걸 아느냐”고 내딴에는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물었는데, 그 여학생은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당시 방송에서는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나는 서독 여학생의 답장을 받은 이후 우리나라 언론을 별로 믿지 않게 되었다.

    또 한번은 차범근이 서독에서 맹활약하던 때여서 “차범근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나는 스포츠를 별로 안 좋아해서 모른다. 그러나 오빠에게 물어봤더니 안다고 하더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 내가 내린 결론은? ‘축구는 올림픽보다 위대하다’는 것.

    1년 정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친해지자 선물이 오갔다. 나는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서독의 축구 주간지 ‘키커(Kicker)’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이 보고 싶어한 우리나라의 여학생 잡지들을 몇 권 보내주고 ‘키커’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한달 후 서너 권의 ‘키커’지가 도착했다. 분데스리가의 생생한 경기사진과 스타들의 올 컬러 화보를 보던 순간의 짜릿함이란…. 나는 며칠동안 그 잡지 뒤적이는 재미로 살았다.

    분데스리가는 축구에 대한 나의 시야를 한 단계 높여주었다. 플레이는 어떠해야 아름다운가. 고급축구는 무엇이며, 관중들의 응원은 어떠해야 하는가. 팬을 최우선시하는 그들의 확고한 프로정신도 배웠다. 페어 플레이의 소중함도, 성실한 축구스타의 자세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축구가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포츠라는 사실이었다.

    당구를 처음 칠 때 누워서 천장을 보면 당구알이 굴러가고, 바둑을 열심히 배울 때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바둑판이 어른거리는 법이다. 무엇인가에 빠져들면 사람의 시각, 청각 등 모든 감각이 최대로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감수성이 풍부하고 기억력이 최고로 발달해 있는 사춘기 시절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모든 상품이 청소년을 제1의 구매대상으로 설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소년기에 친밀하게 접했던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호감을 갖는 법이다.

    축구에 빠져들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축구와 관련된 것들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고, 한번 들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정확하게 기억했다. 정작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들(수학공식, 친척 이름 등)은 쉽게 까먹어서 ‘난 참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축구에 관한 기억력은 비상해 나 스스로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축구에 빠져들수록 더 많은 정보를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스포츠 주간지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5년, 서울신문사(현 대한매일신문사)에서 ‘주간 스포츠’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형이 학교 갔다오는 길에 사오면 난 형보다 빨리 읽어 나갔다. 당시 최고 인기 스포츠는 뭐니뭐니해도 축구라서 허구한 날 표지는 차범근이었고, 대표팀의 국제시합만 있다 하면 대표선수 전원의 컬러 사진이 화보로 실렸다.

    선수 개개인에 대한 소개나 해외 유명스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김호곤(현재 부산 아이콘스 감독)이 고등학교 시절 한때 유혹에 빠져 깡패 비슷한 생활을 했다는 얘기였는데 어린 마음에 꽤 충격이었다.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사진으로 차범근이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을 들 수 있다. 1975년 ‘브라보콘’이라는 이름을 달고 콘 형식의 아이스크림이 처음 등장했다.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하는, 지금도 가끔씩 나오는 추억의 텔레비전 광고가 유행하던 때였는데, 시골 아이들이 브라보콘을 먹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나 또한 브라보콘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주간스포츠’의 ‘소문난 자기’ 코너에 당시 대학생이던 차범근이 등장했다. 조끼 러닝 차림에다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브라보콘을 먹고 있는 사진(난 지금까지 차범근의 그 얼굴만큼 해맑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이 실렸는데,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정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스포츠 신문이 속보뉴스와 다양한 읽을거리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스포츠 주간지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초반이 되자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85년 프로야구 붐을 타고 ‘스포츠서울’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스포츠 신문은 ‘일간스포츠’였다.

    1970년대 초반에 창간된 ‘일간스포츠’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인기 작가 고우영의 만화가 연재되면서 독점적인 인기를 누렸다. 요즘에야 1년 내내 스포츠 신문의 1면이 프로야구로 장식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전날 벌어진 경기 중심으로 1면 톱기사를 채웠다(나는 이게 원칙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말도 안되는 뻥튀기 기사는 없었다).

    분데스리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중2 때부터 ‘일간스포츠’를 정기구독했다. 물론 스포츠 신문 본다고 부모님이 돈을 주실 리는 없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을 꼬드겨(?) 공동으로 부담하는 조건으로 구독하게 됐다. 분데스리가가 매주 토요일 열리므로 월요일 아침 ‘일간스포츠’엔 분데스리가 소식이 꼭 실렸다. 그만큼 독자들도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아예 분데스리가 18개팀을 가로, 세로로 그려놓고 리그 1차전부터 대전기록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한칸 한칸 메워나가면서 내가 좋아하던 쾰른팀과 보루시아 MG팀의 우승 가능성을 전망해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축구가 뭐길래 유럽에서 벌어지는 리그경기를 놓고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나라의 시골 소년이 마치 주택복권 번호 맞추듯이 체크해가며 일희일비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일간스포츠 구독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끝났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그 따위 신문을 돈주고 보느냐’는 부모님의 구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신문으로도 축구정보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 수는 없었다. 경기결과와 단편적인 소식만으로 축구전문가(?)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구시내 중심가 큰 서점을 두리번거리다가 ‘월간 축구’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어? 이런 게 있었어?’ 감격의 순간이었다.

    지금 본다면 별로 시답잖은 내용이었겠지만 축구에 관한 정보를 목마르게 찾던 나에겐 샘물과도 같았다. 비록 두어달 지난 소식이긴 했지만 외국의 주요 경기를 꼼꼼히 설명해주고, 외국 스타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소개했다. 외국의 축구잡지를 번역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문장이 어색했지만, 그런 게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월간 축구’라는 대단한(?) 잡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상 다음호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월간 축구’ 과월호를 사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그러나 대형 서점엘 가도 과월호는 이미 반품된 뒤였다.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헌책방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하루를 잡아 대구 시내 헌책방을 이 잡듯이 뒤졌다. 자전거 하나 없던 그 시절에(있어도 복잡한 도시에서 끌고 다닐 수도 없었겠지만) 그 넓은 대구시내를 걸어서 돌아다녔으니 나도 참 웃기는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닌 결과 수확은 꽤 짭짤했다. 거의 공짜로 ‘월간 축구’ 과월호를 모으게 되었다. 나는 4∼5년 전에 나온 것까지 구했는데, 그 덕분에 허정무 조광래 최종덕 같은 선수들의 고등학교 시절 까까머리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또 내가 환상처럼 여기는 74서독월드컵 때의 화보와 그 대회의 스타들에 대한 기사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그때의 즐거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아마 고고학자가 천신만고 끝에 원시시대 유적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그렇지 않을까? 그때 헌책방에서 사온 옛날 ‘월간 축구’를 방 한쪽 구석에 쌓아둔 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책장을 넘기던 내 모습을 누가 봤다면 ‘독서삼매경’이란 말이 어떤 건지 실감했을 것이다.

    ‘월간 축구’의 때 늦은 기사, 질 낮은 사진, 엉성한 정보는 해외축구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나의 눈에 점차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인 어느날, 시내에 들렀다가 일본인들이 주로 찾는다는 호텔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옆에 일본책만 파는 조그만 서점이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 요즘에야 외국책 서점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대구에 그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본에 잡지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다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약간은 외설스런 잡지도 있었는데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한참을 보다가 드디어 축구 잡지를 발견했다. ‘사카 마가진(사커 매거진)’과 ‘이레분(일레븐)’이었다. 우선 화려한 컬러사진이 나를 사로잡았다. 와, 이렇게도 멋있는 사진들이! 그것도 한두 페이지가 아니라 앞, 뒤, 중간으로 여러 쪽에 걸쳐 있었다. 모두 최신 사진들이었다. 게다가 유럽, 남미 각국의 최근 리그 소식, 심지어는 한국축구 소식까지 자세히 실려 있었다. ‘월간 축구’만 봐오다가 그런 잡지를 보니 한참 동안 눈이 떼어지질 않았다.

    당시 ‘사커 매거진’은 한 권에 350엔 정도 했는데 한달 용돈의 3분의 1을 바쳐 구입했다. 진열대에 꽂혀 있는 축구 잡지 중 일본선수 사진이 가장 적고, 유럽의 축구스타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을 사기 위해 고르고 또 골랐다. 이렇게 사온 ‘사커 매거진’을 집에 가져와 밤 새도록 뒤적이는 내 모습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이렇게 해서 중3 때부터 용돈을 탈 때마다 사기 시작한 일본 축구잡지가 고등학교 2학년쯤 되자 40∼50여 권에 달했다. 학교 친구들이 가끔 집으로 놀러오면 축구잡지만 잔뜩 책장에 꽂혀 있으니까 “너 축구선수 되려고 하냐?”면서 놀리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넌 매국노, 친일파다. 저 책 사면 일본놈들 돈 버는 것 아니냐” 하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안타깝도다! 홍곡의 뜻을 어찌 연작이 알 것인가.

    축구를 꽤 좋아한 한 친구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잡지를 보며 대단히 재미있어했다.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나는 어렴풋이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기사 내용 중에 어떤 선수를 설명하며 ‘한사무 푸레이야(핸섬 플레이어)’라는 말을 써놓았다. 친구가 “그게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나에게 물어왔다. 가소로운 녀석, 그런 것도 모르다니. 나는 그 친구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한참 동안 무식함(?)을 탓한 후에 가르쳐준 일도 있다(그 친구가 어찌어찌해서 광고회사에 들어가 몇 년 전에 엄청난 히트를 친 ‘효(孝) 광고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친구는 팀장으로 신문, 잡지에 자주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런 것만 봐도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니 함부로 친구를 무식하다고 놀리면 안된다).

    이번에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고백하겠다. 1980년 가을, 고1때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루메니게, 슈스터 등을 앞세운 서독이 벨기에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 유럽 최강의 자존심을 지켰다. 몇 달 뒤 내가 들르는 일본잡지 전문서점에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다룬 특별 단행본이 나왔다. 경기모습과 스타들의 컬러화보만 수십쪽에 이르는 꽤 두꺼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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