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올림픽은 스포츠로 표현된 국가주의적 경쟁의 ‘종합선물세트’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 일본 그리고 중국. 20세기를 학살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했던 호전적인 제국(帝國)들이 앞장서서 올림픽을 그렇게 만들어왔다.
그러자 한국 북한 루마니아 터키 등 힘은 별로 없고 대신 엽기적인 독재로 더 유명해진 나라들이 열심히 올림픽에 참여했다. 참가 목적은 딱 하나, 우등상을 받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참가에 의의가 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실례다. 그들의 목적은 시상식장에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연주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얼마 안 되는 국력을 쏟아붓고 온갖 비장한 수사를 동원해 중계방송을 해서 눈물 콧물을 짜낸다. 또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린 선수들을 ‘선수촌’에 수용해 그리스식이 아니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킨다.
하긴 잔치라고 불러놓고는 힘센 국가들끼리 메달을 나누고 들러리나 서게 하니 힘없는 나라들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그러면 올림픽 같은 거 관심 없다고 딱 외면하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올림픽도 잔치판임에 분명하고 또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기자기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올림픽을 악용했다든가 올림픽이 국가주의에 오염됐다고 하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올림픽체전의 방식이 애초 ‘악용’에 걸맞게 고안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평화보다 전쟁을 더 많이 닮았다. 룰을 지킨다고 하지만 처절하게 경쟁해서 예선탈락시키고 몇 팀 혹은 몇 명만 남겨 본선을 치른다. 종국에는 1, 2, 3등을 가려내면서 “자, 평화가 느껴지지 않니?”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진정 평화를 위한 제전이라면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금·은·동을 없애고(4등은 뭐란 말이냐), 특히 1등에 대한 특별대우를 없애야 한다. 개막식에 국기를 앞세워 입장하는 일이나 경기장에서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것, 시상식장에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우승의 영광은 그저 참가한 선수들의 몫이어야 한다.
문헌을 보니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라는 쿠베르탱 남작이 애초에 이 대회를 만든 목적부터가 그다지 개운치 않다. 돈키호테 같은 이 인물은 올림픽을 구상할 때부터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진작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올림픽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이 유일무이한 국가주의적 국제행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8년 올림픽에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유색인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그것은 백인들의 잔치에 불과했다.
전쟁,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한 올림픽
결정적으로 1936년 베를린대회가 미치광이 히틀러에 의해 나치독일과 아리안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대회가 됨으로써 올림픽에서의 국가간 경쟁은 필연적이 됐다. 올림픽은 전쟁,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했다. 냉전시대에 미국·소련·동독이 올림픽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순위경쟁을 했는지, 어떤 나라들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싶어 안달했는지만 봐도 올림픽의 정체는 금방 드러난다.
‘기타이 쏘온’(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장의 장내 아나운서가 손기정 선수의 일본식 이름을 이렇게 불렀다)이 히틀러 앞에서 당당히 월계관을 써버린 1936년 베를린올림픽부터 남북한 선수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평화를 다짐하며 입장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20세기의 한국인들은 올림픽 때문에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한국인의 얄궂은 운명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세계 속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 싶다, 또 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당위와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여 식민지와 골육상쟁의 처절한 경험까지 한 약소국이라는 현실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컸다. 그리고 스포츠는 그 거리를 메울 가장 좋은 매개로 인식됐다. 작고 가난한 조선인들은 스포츠를 통해서만 우리를 짓밟고 괴롭혀온 양키와 로스케(러시아), 되놈(중국)과 왜놈(일본)과 당당히 맞서고 이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있었던 고구려도 아예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뭘 가지고 저 덩치 큰 자들로 하여금 ‘공한(恐韓)’에 떨게 하겠는가? 오직 축구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