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 전진부대(前進部隊)는 1947년 12월 육군에서 가장 먼저 창설된 사단으로 현재 수도권 방어의 최선봉에서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보병사단’이다. 북한군 3개 사단을 괴멸시킨 다부동 전투의 신화를 갖고 있는 전진부대는, 6·25 전쟁 당시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로 국군이 자랑하는 명부대중 하나다.
“전진! 신고합니다. 중위 이태중외 O명은 XX지점의 DMZ작전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2001년 12월 X일 일몰 XX분전, 영하 10도의 날씨에 완전군장 차림의 ‘무장병력’이 ‘개선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선문은 서부전선 X지점에 위치한 DMZ(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통문.
O명의 병력이 오늘 받은 명령은 DMZ XX거점을 점령해 매복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적의 기습적인 도발을 막기 위한 ‘첨병(尖兵)’ 임무는 내일 아침까지 계속된다.
“한방에 때려잡겠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또 조국을 위해, 서부전선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매복작전에 들어가는 김경덕 상병의 각오다.
살아있는 병사들의 눈
작전에 투입되는 장병들의 눈은 매섭게 살아있다. 혹한의 날씨도 ‘군기’ 앞에선 적수가 되지 못한다. 소대장의 호출에 관등성명을 대는 모습은 고생을 모르고 자라 ‘군기’가 예전같지 않을 거라는, 신세대 장병에 대한 선입견과는 크게 달랐다.
대대장에게 작전 투입신고를 마친 장병들은 굳게 닫힌 통문을 열고 사주경계를 하며 북을 향해 ‘진격’했다. 통문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매복병력이 이른 아침 개선할 때까지 절대 열리지 않는다.
한반도는 현재 정전상태가 아닌 휴전상태. 따라서 갈대숲 속으로 사라진 매복병력은 ‘훈련’이 아닌 ‘실전’에 나선 것이다. 한 병사는 “매일 반복되는 일과지만 통문을 통과할 때마다 전쟁터로 나간다는 생각에 긴장하게 된다”고 말했다.
매복한 장병들은 언제 적과 조우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한겨울 밤 내내 추위와 싸우며 한치의 두려움 없이 경계근무에 임해야 한다.
DMZ작전에 투입되는 장병들이 비무장지대 북쪽으로 사라지자, 다른 한 무리의 병력이 개선문을 향해 행군해왔다. 남방한계선 합동 경계근무 병력이 근무지에 들어가기 위해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서부전선 철책선을 따라 세워진 초소에서 적의 침투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대장과 무전병을 선두로 한 병력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초소로 줄을 지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들어갔다.
육군 전진부대가 관할하는 서부전선 X통문의 황혼 무렵 풍경이다. 전진부대는 1947년 12월 육군에서 가장 먼저 창설된 사단으로 현재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국토 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서부전선의 한 철책초소. 전진부대 병사 두 명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멀리 국군 GP와 북한군 ‘민초’가 한눈에 들어온다. GP와 민초는 같은 개념으로 DMZ 내에 자리잡은 요새를 말한다. 북쪽 하늘에서 독수리가 까치에게 쫓기는 모습이 이채롭다. 독수리 뒤로 개성외곽 도시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온다.
“휴전선 근무에 처음 나섰을 때는 적이 언제 내 목숨을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낮보다 시야가 좋지 않은 야간 경계근무가 훨씬 힘듭니다. 야음을 틈타 수로 등을 이용해 적이 침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초소근무를 하고 있는 오세욱 일병의 말이다.
1947년 국군 최초로 창설된 사단
한겨울 초소에서 사병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영하40도까지 내려간다. 추위를 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근무를 열심히 서는 것. 눈을 말똥말똥 뜨고 경계근무에 집중하지 않으면 졸음이 와 추위를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야간 경계근무는 한 초소씩 이동하는 ‘밀어내기’ 식으로 이뤄진다. 병사들이 긴장이 풀려 해이해지는 것을 막고 오랜 시간 경계근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초소 중 하나는 ‘대기초소’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대기초소에서 병사들은 라면을 끓여 먹으며 추위를 달래고 휴식을 취한다. 초병들은 대기초소에 들어갈 시간을 기다리면서 경계근무의 전반부를 보내고 그곳에서 따뜻해진 몸으로 후반부 근무에 대한 각오를 다진다.
전진부대 예하의 쌍용부대 이상규 상병은 겨울철 철책근무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체감온도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전방의 추위는 살인적입니다. 그러나 야간근무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들 때 느끼는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루하고 힘든 일과지만 남들보다 보람찬 군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전진부대는 1947년 12월 ‘남조선 과도 입법정부’ 통위부(국방부)에 의해 서울 남산동에서 ‘조선경비대 제1여단’이라는 명칭으로 전군 최초로 창설된 사단이다. 이후 경기도 포천, 강원도 홍천으로 주둔지를 옮겼고 경기도 연천을 거쳐 1971년 3월 전진부대 역전의 용사들의 혼이 서린 XX지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O번국도를 따라 전진부대가 위치한 XX지역으로 들러가는 길엔 대(對)탱크 방어진지와 낙석(탱크 방어를 위해 만들어놓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서울 방향으로 종(縱)으로 발달한 도로가 전시에는 적군의 ‘고속침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놓은 것. 전진부대가 책임지고 있는 서부전선 XX지역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45Km. O번국도를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데는 불과 30~40분 정도면 충분하다.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삼국시대 이후 국가가 전란에 휩싸였을 때마다 적과 아의 ‘주력’이 집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혁혁한 전공(戰功), 전사(戰史)를 빼고 전진부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진부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전진부대가 오늘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의 초석이 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부터. 1950년 8월12일부터 25일까지 계속된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투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루 평균 7km의 속도로 남하, 1950년 8월5일 낙동강을 넘은 북한군은 ‘8·15 해방 5주년 기념식은 대구에서’라는 구호 아래 다부동 근처 협곡에 1개 군단 병력을 투입하고 대구 공략에 나선다.
다부동을 빼앗기면 대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 전진부대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체절명의 각오로 ‘배수진’을 쳤고, 전진부대 용사들의 목숨을 건 저항에 북한군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송기석 현 사단장은 “다부동 전투에서 전진부대가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대한민국’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다부동 전투 승리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해 평양 입성을 눈앞에 두게 된다. 북한군의 화력은 평양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국군간, 그리고 국군과 UN군 간에 평양 선봉입성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선수를 친 것은 미 1기병사단과 전진부대. 미 1기병사단은 서흥,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 남단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북진을 계속한 전진부대도 평양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전진부대 12연대와 미 1기병사단이 대동강에 접근하자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시킨다. 미군 1개 대대가 교량으로 진입하고 있던 때였다. 북한군으로선 정확한 시점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미군은 10월20일 날이 밝자마자 부교를 가설하고 도하준비에 나섰지만 그때는 이미 전진부대가 평양에 입성한 뒤였다. 전진부대는 도하장비가 도착하기 전인 19일 위험을 무릅쓰고 수심이 낮은 곳을 따라 고속도하를 감행, 미군보다 하루 빨리 평양에 입성했다.
19일 오후 3시 15연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뚫고 평양 중앙청을 점령했고 20일 오후에는 평양시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다. 11연대와 12연대가 동평양을, 15연대가 본평양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평양선봉 입성의 영예는 전진부대에게 돌아갔다(평양에 최초로 입성한 부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칠성부대가 평양선봉 입성부대라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로선 전진부대가 평양에 최초로 입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진부대 장병들은 평양선봉입성으로 전 부대원이 일계급 특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전진부대 장병의 용전(勇戰)을 치하하면서 부대에 ‘전진’이라는 구호를 수여했다.
자율과 통제가 조화된 병영
지금도 전진부대 장병들은 선배들의 전과에 대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 동시에 이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국토방위의 최선봉에서 필승의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송사단장은 “적은 반드시 내 앞에 온다는 인식 아래 전 장병이 혼연일체가 돼 GP, GOP, 강안(임진강변)에서 철통 같은 경계근무를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합 감시체계를 구축해 적의 어떠한 침투 징후도 조기에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DMZ와 강안 수색·매목작전을 실시해 도발한 적을 응징할 수 있는 완벽한 경계태세를 갖춰놓았다는 것이 송사단장의 설명이다.
전진부대는 국지(局地) 도발 상황발생 1시간 이내에 출동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확립하기 위해 조건반사적으로 상황을 보고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놓았다. 또 전시에 민·관·군 통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비하고 적의 국지도발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있다.
이처럼 투철한 방위태세를 구축하려면 ‘자율’보다는 ‘통제’ 원칙에 입각해 사병들을 관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진부대는 자율과 통제가 적절하게 조화된 생동감 있는 병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병사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동아리 활동, 체육 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
오후 8시 전진부대 본부대 막사. 한 사병이 1층에 설치된 노래방에서 성시경의 ‘내에 오는 길’을 부르고 있었다. 노래방 맞은편으론 인터넷방이 설치돼 있다.
일과시간 이후엔 누구나 인터넷방을 이용할 수 있고, 인터넷방엔 PC통신을 이용한 화상면회소도 설치돼 있다. 그러나 군사기밀 보호를 위해 e메일 송수신은 불가능하다.
5명의 사병들이 인터넷방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던 박지환 상병은 “병장 4호봉 때부터 정보검색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할 것”이라면서 “최근에 제대한 선배 대부분이 정보검색사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송사단장은 “병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재전장(恒在戰場) 정신”이라면서도 “신세대 병사들이 여가생활을 즐겁게 보내는 것도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일부에서 신세대 장병들의 정신력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도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12월11일 오후 ‘천하제일 정병육성’이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전진부대 신병교육대.
훈령장에서는 신병들은 대상으로 한 기초군사훈련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간 교과목은 각개전투 훈련, 훈련병들은 적이 점령하고 있는 해발 400m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돌격 준비’를 하고 있다.
“분대 약진 앞으로!”
분대장의 구호가 떨어지자 훈령병들은 고지를 향해 소총을 겨누고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각개전투 교장은 실제 전장과 같은 환경에서 고지전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훈령병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훈련 중 하나가 각개전투다.
10분 남짓 달렸을까. 아직도 400고지는 멀게만 느껴진다. ‘헉헉’하는 훈련병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200고지부터는 장애물 구간, 김승 훈령병은 적이 설치해놓은 장애물들을 그동안 연습한 낮은 포복으로 신속하게 통과했다.
“고지다! 고지가 눈앞에 들어왔다. 분대 공격 앞으로!”
고지를 점령한 훈령병들은 고된 훈련을 끝마쳤다는 생각에선지 ‘개선장군’ 같은 모습으로 산을 내려왔다.
출발한 지점에 돌아온 김승 훈련병은 숨을 헐떡이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진부대에서 신병교육을 받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신교대에서 6주간의 교육훈련을 마치면 각 부대로 배치돼 맡은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전진부대 장병들의 주요 임무는 강안 GP, GOP 경계근무다.
양성민 일병은 신병교육을 마치고 쌍용부대에 배치돼 대공관측초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진부대는 X개의 대공관측 초소를 갖고 있다. 양일병이 하는 일은 레이더 사각지대로 잠입하는 적 항공기를 관측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우리측 항공기의 월경을 감시하는 것.
양일병은 부대와 임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남들보다 고된 군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 가장 중요한 곳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은 부대’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전진부대 장병들은, 양일병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며 ‘전진’ 또 전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