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방부 법무과장 고석 대령과 김대업씨. 병무비리 수사책임자와 제보자로 만난 두 사람은 지난 3년 여 동안 원수처럼 지내왔다. 두 사람의 모질고 질긴 악연에 얽힌 비화를 공개한다.
고석 대령
참여연대가 고석 대령을 고발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참여연대는 1999년 11월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이던 고대령을 직무상 비밀누설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바 있다. 두 가지 혐의 모두 김대업씨와 관련된 것이다.
김대업씨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 의해 두번씩이나 고발당한 고석 대령. 병풍과 관련해 국회 국방위와 법사위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그는 역시 증인으로 나온 다른 법무관들과 상반된 목소리를 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국회 위증 혐의는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다.
고석 대령. 그는 과연 참여연대의 주장대로 병무비리수사를 방해했는가. 그와 김대업씨는 어떤 악연을 갖고 있는가. 김씨 못지않게 화제의 인물이 된 그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인가.
고대령이 국회에서 한미연합사 법무실장인 이명현 중령 및 1군사령부 법송과장 유관석 소령과 배치되는 증언을 하며 대립한 것은 1999년 병무비리수사 상황의 재판이다. 당시 국방부 수석검찰관으로 1차 군·검합동병무비리수사 팀장을 맡았던 이명현 중령(당시 소령)은 검찰부장 고대령(당시 중령)이 기무사와 유착해 병무비리수사를 방해한다고 여겼다.
이중령에 따르면 고부장의 기무사 유착혐의가 처음 포착된 것은 병무비리수사의 촉발제가 된 1998년 5월의 원준위 사건 때다. 이중령의 증언.
“원준위 사건 당시 기무·헌병이 연루된 병무비리가 몇 건 있었다. 어느날 기무사 상사 한 명을 조사하는데 고부장이 ‘방(조사실) 좀 치우고 해라’ ‘호텔 가서 하면 안되냐’ 하면서 간섭했다. 그래서 내가 ‘부장은 도대체 검찰부장이요, 기무사 공보실장이요?’ 하고 따졌다. 당시 조사 받은 기무 요원들 중에 사법처리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반 군인은 500만원만 받아도 구속됐는데, 기무 요원은 1000만원 먹고도 경고만 받았다.”
이중령은 고석 검찰부장이 기무사측에 수사정보를 알려주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중령의 뒤를 이어 병무비리수사를 맡은 다른 검찰관들의 판단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령을 신뢰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고대령은 왕따당했던 것이다.
“김대업은 수사대상”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99년 4월 하순 고석 대령이 이끌게 될 2차 병무비리 수사팀이 발족하기 직전의 일이다. 업무인수인계를 해야 하는데, 직속상관인 고석 검찰부장을 못 미더워한 이명현 중령은 이홍기라는 기무 요원에 대한 수사자료를 따로 챙겨놓고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식 자리에서 슬그머니 이홍기 얘기를 꺼냈다. 검찰관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얘기하면 고부장이 설사 봐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봐줄 수 없으리라고 계산해서였다. 결국 이씨는 고부장에 의해 구속됐다.
고대령의 기무사 유착의혹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꼽히는 것이 1999년 5월 구속됐던 기무 요원 김○○씨의 진술서다. 1999년 8월25일 군검찰 조사실에서 작성한 이 진술서에서 김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감찰실장 대령 손○○이 ‘검찰부 고석 부장이 내 후배인데 그동안 기무사에서 상당한 도움(아마도 진급 및 보직관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됐음)을 준 바 있고 최근에 만나 대화했는데 앞으로 기무사 요원에 대해 더 이상 구속이 없을 것이다’라는 확약을 받았으니 부산(김○○씨는 부산 기무부대에서 근무했다)에 내려가 근무나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기무사의 자존심이 있는데 검찰부에서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하면서 ‘고부장이 앞으로 출세하려면 기무사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등의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전 기무사 감찰실장 손○○씨는 자신은 김○○씨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고석 대령도 마찬가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펄쩍 뛴다. 그렇다면 김씨가 소설을 썼다는 얘기인가.
2000년 2월 기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고석 대령에게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고대령이 기무 요원이 관련된 수사를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있다.
“내가 수사할 때 기무·헌병 요원을 가장 많이 집어넣었다. 터무니없는 음해다. 천용택 국방장관한테 확인하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무사와 유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
“내가 수사해 사법처리되지 않은 사람이 있나. 두 달 동안 수사하며 기무 요원 5명을 구속하고 8명을 입건했다. 지방수사(각 지방 군병원에 파견돼 있는 기무 요원 수사) 해야 한다고 청와대와 천용택 장관에게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제보자(김대업)가 KBS ‘추적60분’에 ‘검찰부장이 지방수사 안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그대로 방송됐다.”
-중요한 정보원인 김대업씨 신분을 노출시킨 것은 수사방해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인지 내부 수사자료가 밖으로 다 돌아다니더라. 그래서 그 친구(김대업)를 의심했다. 2차 수사할 때 그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내가 ‘너 최초에 100건(병무비리)을 갖다 준다고 약속했는데, 20건만 가져와라. 그러면 너를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안 가져왔다. 그 다음에 5건만 가져오라고 말했는데 역시 듣지 않았다. 그는 수사대상이었다. 처음 들어올 때 약속과 달리 자신이 연루된 병무비리를 다 털어놓지 않은 데다 비위사실이 드러나고 전과자 주제에 수사관 행세하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다.”
김대업을 둘러싼 갈등
김대업씨는 고석 대령과의 갈등에 대해 이런 얘기를 들려준 바 있다.
“나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그 사람은 달랐다. 당시 이수석(이명현 수석검찰관) 밑에서 일했던 나는 이수석에게만 모든 걸 보고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조사과정에 어떤 특별한 사람이 연루된 비리가 발견되면 그와 관련된 자료를 (고부장이) 다 가져가버리곤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고석 대령은 최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1999년 4월 어느날 김대업이 수사관 회의석상에 앉으려 하는 걸 내가 막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뒷날 멱살잡이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고대령과 김씨의 갈등은 초기 병무비리수사 전개과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명현 중령을 비롯해 2차 수사 당시 수석검찰관이었던 유관석 소령, 기관(기무·헌병)요원 수사를 위해 탄생한 특별수사팀을 이끌었던 김의형 소령, 남성원 소령 등은 모두 병무비리수사에 대한 김대업씨의 열정과 능력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반면 고석 대령은 기무사와 마찬가지로 김씨의 수사참여를 반대했고 그를 사기꾼 취급했다. 아울러 김씨를 감싸는 법무관들을 비난했다. 김씨의 수사참여와 기무 요원에 대한 수사방향을 두고 마찰을 빚었던 두 세력이 3년이 지난 오늘날 국회와 언론을 통해 다시 맞붙은 것이다.
고석 대령과 김대업씨가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엔 관계가 좋았다. 이명현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업씨에게 ‘김수사관’이라는 호칭을 처음 붙여준 이도 고대령이다.
고대령은 1999년 가을 천용택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어 청와대에 병무비리수사를 위한 군·검합동수사팀 창설을 건의했다. 그때 청와대에 올린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 바로 김씨다. 이렇게 보면 현 정권 들어 4년 가까이 진행된 병무비리수사는 김씨의 ‘손’(청와대 보고서)에서 시작해 김씨의 ‘입’(병풍)에 의해 마무리돼가고 있는 셈이다.
고석 대령은 1999년 5월 2차 병무비리수사를 시작하며 김대업씨를 수사팀에서 빼버렸다. 2차 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7월 초순 고대령은 과거 김대업씨가 연루된 병무비리사건을 추적하기도 했다. 김씨가 크게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7월11일 이명현 중령은 조성태 국방장관에게 병무비리수사가 은폐·축소됐음을 진정하는,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이중령은 고석 검찰부장의 기무사 유착의혹, 기무사의 수사방해 혐의를 제기하는 한편 김대업씨가 병무비리수사에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 강조했다. 이 편지에는 또 이중령이 고대령과 김씨의 갈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제가 유학 준비로 1998년 11월18일 토플시험을 보기 위해 1주간의 휴가를 받은 시기에 8월 이후 한번도 김대업씨를 찾지 않았던 고석 검찰부장이 김대업씨를 호텔로 찾아가 ‘같이 일을 해보자. 병무비리수사를 도와달라. 곧 청와대에서 연락이 있을 것이고 검·경·군 합수부가 설치될 것이다’ 등의 얘기를 하고, ‘국방장관께 다 말씀드렸으니 신분보장을 확실히 할 것이다. 이수석은 유학가니 수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며 저를 배제하고 자기와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으나, 김대업씨는 ‘이명현 수석검찰관과 이때껏 4개월을 국방부의 아무 지원 없이 고생하며 일해왔고 계속 함께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절했음.”
이중령의 편지 영향이었는지 김대업씨는 그해 7월 하순 발족된 특별수사팀에 합류했다. 반면 고대령은 병무비리수사 일선에서 물러났다.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은 최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이명현 소령의 편지를 읽었으며 수사팀 내부에 갈등이 심한 것 같아 김인종 중장(당시 국방장관 정책보좌관)에게 병무비리수사를 적극적으로 챙길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대업씨는 그해 11월 참여연대를 통해 고대령을 수사방해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석 달 뒤인 2000년 1월 반부패국민연대가 공개한 ‘정치인 리스트’와 관련해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언론에 오르내렸다. 김씨는 명단을 넘긴 장본인으로 고대령을 꼽았다. 병무비리 재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미리 명단을 흘렸다는 것이다. 김씨가 얼마나 고대령을 불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고대령은 박선기 법무관리관을 의심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고대령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얘기는 얼마 전 국방부에서 벌어졌던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병역 내사자료 논쟁과 관련해 귀기울일 만하다.
“거기(반부패국민연대 공개 명단)에 있는 정치권 인사의 3분의 1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관리하던 자료에는 그런 이름들이 없었다. 그 자료는 이명현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54명인가로 기억되는데, 병무청에서 임의로 사회관심자원이라고 따로 관리해오던 사람들 중 일부를 뽑아놓은 자료였다. 군의관 자백이 확보된 것도 있고 확보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확보된 것이 20% 미만이었다. 그나마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난 것이었다.”
고대령은 이명현 중령이 만든 자료에 이어 자신이 작성했다는 명단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김대업 이명현 둘이 하도 축소·은폐니 기무사 외압이니 하면서 이곳저곳 쑤시고 다닌 바람에 어느날 갑자기 청와대에서 (병무비리수사에 대해) 감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자 당시 박선기 법무관리관이 ‘우리가 사회관심자원이라고 숨긴 것 없지 않느냐’며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자료를 갖다주면 내가 청와대 감사팀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병역법상 사회관심자원은 국회의원, 연예인, 체육인인데, 우리가 만든 자료엔 대학교수가 많았다. 특히 군의관들 선배인 의과대학 교수가 많았다. 이들과 중소기업 사장까지 포함시키니까 한 70여 명 됐다. 그 중 자료가 확보되지 않은 30명 정도는 따로 분류해 법무관리관에게 갖다 줬다. 반부패국민연대 기자회견이 있은 후 법무관리관이 주변에 ‘반부패국민연대에 넘어간 자료가 우리 자료인 것 같다. 그 자료는 고부장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당시 반부패국민연대가 누군가로부터 넘겨받은 명단은 모두 세 종류다. 거기에 청와대 정무수석실과 민정수석실에 전달됐던 보고서 두 종이 끼여 있었다. 세 종류의 명단은 이명현 중령이 1차 수사 당시 만든 사회관심자원 명단, 고석 대령이 2차 수사 때 청와대 감사에 대비해 만든 사회지도층 명단, 김대업씨가 특별수사팀 해체 후 작성한 정치인 명단이다.
서로 결코 원하지 않았던 일이겠지만, 청와대에 군·검합동수사반 설치를 건의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1998년에 이어 다시 한번 김대업씨와 고석 대령의 ‘공동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반부패국민연대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발족된 3차 군·검합동병무비리수사팀은 겹치는 사람을 빼고 모두 119명(아들 숫자)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 8월 정치권과 국방부는 군검찰의 이정연씨 내사자료 여부에 대해 뜨거운 설전을 펼쳤다. 그 와중에 김대업씨는 고석 대령이 군검찰 내사자료를 감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령은 8월23일 김씨로부터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냈다. 참으로 모질고 질긴 두 사람의 악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