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에 감칠맛을 더하는 조연 연기자들.
-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져나오는 코믹 이미지부터
- 작품에 깊이를 더하는 강렬한 카리스마까지.
- 주연을 압도하는 실력파 조연 20인의 모든 것.
실제로 1990년대 후반 명계남은 “날 원하는 곳은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다”는 지론대로 출연작을 풍성히 늘려갔고, 웃자고 한 그 이야기는 사실인 양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배역의 비중이 크지 않아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명계남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의 출연작이 당대의 어떤 주연배우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한 해 무려 8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1997년의 일인데, 그해 명계남은 ‘초록물고기’ ‘베이비세일’ ‘홀리데이 인 서울’ ‘스카이닥터’ ‘마지막 방위’ ‘쁘아종’ ‘똑바로 살아라’ ‘박대박’ 등의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이들 영화에서 때론 악랄한 조직의 보스(초록 물고기)로, 때론 희대의 사기꾼을 돕는 정보수집가(똑바로 살아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1990년대 명계남만큼이나 활발히 활동했던 조연 스타 중 최종원을 빼놓을 수 없다. 명계남과 마찬가지로 연극배우 출신인 그는 1997년 한 해에만 ‘아버지’ ‘할렐루야’ ‘인연’ ‘로케트는 발사되었다’ ‘오디션’ 등의 영화에 출연해, 명계남과 쌍벽을 이루는 국내 최고의 조연배우 자리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2000년대가 되자 이들 두 명의 독보적인 조연배우는 영화 출연을 조금씩 자제하기 시작했다. 영화사 이스트필름의 대표이기도 한 명계남은 자신이 제작을 맡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에 잠시 얼굴을 비췄을 뿐이며, 최종원은 박종원 감독의 ‘파라다이스 빌라’를 끝으로 더 이상 영화 출연작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최종원과 명계남이 ‘싹쓸이’했던 조연 캐릭터는, 이제 누구의 몫이 되어 있을까.
믿음직한 후계자들은 그들의 부재를 잊게 할 만큼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히 제몫을 하고 있다. 개성 있는 연기로 영화에 무게를 더해주는 조연 캐릭터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데 이들 감초 연기자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비슷한 점이 많이 눈에 띈다. 대대로 국내 영화계에 스타급 조연 배우들을 공급해온 인큐베이터는, 다름아닌 연극무대였다. 최종원과 명계남의 고향이 연극무대인 것처럼, 현재 한국영화계를 움직이고 있는 대부분의 조연 캐릭터들은 연극무대에서 공력을 쌓은 믿음직한 연기파들이다. 연극판에서 연기를 배운 그들 중 얼른 눈에 띄는 인물만 꼽아 보아도 안석환 박광정 정은표 성지루 이문식 등 다섯 손가락을 훌쩍 넘는다.
‘넘버3’의 조직 보스 역으로 주가를 올린 안석환은 원래 연극이 좋아 다니던 회사마저 때려치운 저돌적인 연극 마니아였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기업체에 다니던 어느 날 승부수를 던지듯 연극판으로 뛰어든 것. 그는 딱 5년만 연극무대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1987년 ‘달라진 저승’이라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러나 애초에 생각했던 ‘시한부 연극인생’은 일찌감치 궤도 수정됐다. 연기에 재능이 많은 그는 ‘칠수와 만수’ ‘마술가게’ ‘고도를 기다리며’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등의 화제작에 연달아 출연하며 주목받는 연극인으로 거듭났다.
그런 그가 영화와 접속하게 된 것은 우연치 않은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를 준비중이던 이장호 감독은, 우연히 안석환의 연극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공연을 막 끝낸 안석환을 찾아가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킨다”며 치켜세웠고, ‘명자 아끼꼬 쏘냐’에 출연할 의사가 없냐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안석환은 자신의 배우인생을 바꿔줄 또 하나의 무대에 들어섰다. 물론 무게 있는 조연의 출현을 기다려온 영화계는 안석환의 궤도 수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안석환· 박광정의 등장
1994년 그는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과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동시 출연해 겹치는 부분이라곤 전혀 없는 상반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태백산맥’에선 극우파 경찰대장을,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선 색안경을 낀 호모 스타일의 남자를 연기했다. 이후에도 그는 ‘총잡이’ ‘꽃잎’ ‘진짜 사나이’ 등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그중 그의 존재를 제대로 확인시켜준 영화는 없었다.
영화팬들에게 안석환의 이름을 각인시킨 영화는 1997년 개봉된 송능한 감독의 데뷔작 ‘넘버3’. 삼류인생들의 삶을 재기 발랄한 유머로 포착해낸 이 영화에서 안석환은 조직 보스 역을 맡아 감히 넘볼 수 없는 중후한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멜로와 코미디를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로 채워졌다. ‘실낙원’에서 바람난 아내의 뒤를 쫓는 가부장적인 남편, ‘세기말’에서 요요를 가지고 노는 정체불명 사내, ‘텔미썸딩’에서 의문의 연쇄살인사건 판결을 맡은 검사, 가족을 총동원해 보험 사기극을 벌이는 ‘하면 된다’의 엽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느끼한 단란주점 사장 등. 그는 이들 영화 속에서 매순간 다른 얼굴, 다른 이미지로 돌변했다.
그와 더불어 1990년대 이후 영화계로 건너온 연극인 중 빼놓을 수 없는 조연 캐릭터는 촐싹거리는 이미지가 강한 박광정이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안석환과 마찬가지로 ‘명자 아끼꼬 쏘냐’다. 이후 ‘세상 밖으로’ ‘체인지’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영화에서 박광정이 보여준 이미지는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코믹 캐릭터에 머물렀다.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연극판에선 누구보다 진지한 배우이자 실력 있는 연출가로 명성이 자자한 그였지만, 영화계에선 얼굴만 봐도 웃긴 코믹 캐릭터를 넘어서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그가 맡은 역할들은 ‘퍼니 페이스’라는 닉네임이 딱 어울리는 것들. 그는 ‘자귀모’에서 자살을 권장해 실적을 올리는 영업사원이나 어쭙잖은 시로 유부녀를 농락하는 ‘넘버3’의 삼류 시인 랭보, 장의를 천직으로 아는 ‘행복한 장의사’의 이웃마을 장의사, 미국에서 불법 자동차 영업을 하는 ‘아이언팜’의 동석 등을 연기하며 ‘야비하게 웃기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999년 초입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한국영화계를 주름잡는 대표적인 조연 스타들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명계남 최종원 안석환 박광정 등을 제외하면, 조연 스타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활약한 대표적 조연배우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일정으로 수많은 작품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영화계의 분위기는 그때와 확실히 다르다. ‘넘버3’처럼 감초 연기가 더해져야 제 맛이 나는 영화들이 자주 기획되면서 스타급 조연배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넘버3’를 시작으로 ‘행복한 장의사’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달마야 놀자’ ‘공공의 적’ ‘라이터를 켜라’ 등의 코미디 영화들이 배출한 조연 스타들. 강성진 유해진 이원종 이문식 성지루 공형진 정은표 등이 바로 그들이다.
순박함과 껄렁함의 경계, 강성진
강성진(사진 왼쪽)
김상진 감독의 조폭 코미디 영화 ‘깡패수업’에서 그는 해구(박상민)의 충실한 부하 겐지로 출연한다. 고등학생에게 돈을 빼앗길 만큼 능력 없는 깡패인 해구. 유능한 바텐더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일본에 입성한 해구는 그곳에서 별 볼 일 없는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순진한 일본인 부하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강성진이 연기한 삼류 건달 겐지다. 비록 살벌한 조직세계에서 일하는 조폭이지만 순박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은, 강성진의 연기 패턴을 하나의 틀 안에 오랫동안 묶어두었다.
‘깡패수업’ 이후 출연한 영화는 안재욱이 여장남자로 등장해 화제를 모은 로맨틱 코미디 ‘찜’. 친구의 누나 채영(김혜수)을 사랑하게 된 준형(안재욱)이 여장을 해 그녀의 동성 친구가 되고 결국 사랑까지 얻어낸다는 다소 황당한 발상의 이 영화에서, 강성진은 준형의 절친한 친구이자 채영의 남동생으로 출연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캐릭터가 여장을 한 안재욱보다 훨씬 ‘오버’하는 연기로 코미디의 재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안재욱이 여자로 변장한 자기 친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러닝타임 내내 그를 향해 구애작전을 펼친다.
만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을 연기한 적은 이것말고도 또 있다. 일본영화 ‘비밀의 화원’을 리메이크한 ‘산전수전.’ 이 영화에서도 강성진은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여자를 향해 구애작전을 펼치는 남학생 역을 맡아 재기 발랄한 연기를 선보였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그는, 그 여자의 ‘돈 가방 찾기 대작전’에 겁 없이 뛰어든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성진은 분명 어눌하고 순박한 이미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1999년 말, 강성진은 드디어 자신의 연기인생을 바꿔줄 특별한 변신을 시도한다. 싸늘한 건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연기에 도전한 것. 이후 강성진은 영화 속에서 순박함과 껄렁함이라는 상반된 두 개의 캐릭터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나갔다. 주유소를 습격한 네 남자의 엽기 행각을 담은 ‘주유소습격사건’은 그 변화의 단초였고, ‘휴머니스트’의 유글레나나 ‘달마야 놀자’의 엽기 조폭은 건달의 이미지를 제대로 각인시킨 고마운 영화다.
특히 ‘달마야 놀자’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사고를 저지르고 산사에 숨어든 조폭들 중 유독 입이 험한 그는, 스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스님들도 아침이 되면 섭니까?”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될 것 같은 이야기들을 생각 없이 내뱉는 그의 모습은, 심상치 않은 카리스마로 빛난다.
최근작인 ‘라이터를 켜라’에서도 강성진은 이런 상반된 캐릭터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라이터를 켜라’는 전재산을 털어 라이터를 산 허봉구(김승우)가 잃어버린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테러범 양철곤(차승원)과 맞서 싸우는 ‘기차 안 대결’을 담은 코미디 영화. 그는 이 영화에서 우연히 기차를 탔다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승객 중 한 사람을 연기한다. 말만 잘할 뿐 결정적인 순간에는 매번 꽁무니를 빼고 마는 ‘떠벌남.’ 그는 “다 쓸어버려야 해. 누군가 나서서 뒤틀린 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해”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면 분노를 삭히고 마는 용기 없는 캐릭터다. ‘라이터를 켜라’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코미디 영화와 접속중이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을 연출한 김상진 감독의 신작 ‘광복절특사’에서 그는 ‘용문신’을 한 엽기 캐릭터로 등장할 예정이다.
웃음의 전령사, 공형진
강성진만큼이나 요즘 영화계에서 각광받는 조연 스타는 공형진이다. 이름만으로 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허름한 방안에서 최민식과 함께 레슬링을 하던 ‘파이란’에서 그 남자를 떠올려보라. 일명 ‘빠떼루 사나이’라 불리는 그는 ‘파이란’에서 생각 없는 건달을 연기한 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그는 최민식의 연기를 뒤에서 빛나게 한 숨은 조력자다.
공형진
‘파이란’을 통해 비로소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는, 실은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 ‘중고 신인’이다. 그의 데뷔작은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그뒤 ‘신장개업’ ‘박하사탕’ ‘단적비연수’ 등에서 스쳐지나가는 역을 맡은 그의 연기인생은 ‘파이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공형진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내와 개그맨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선물’에서 또 한번 색깔 있는 연기를 선보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물’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용기(이정재)와 함께 콤비 개그를 선보이는 삼류 개그맨. 이후 공형진은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보험회사에 다니는 진수(이정재)의 친구 역으로 잠깐 등장했으며, 로맨틱 코미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에선 커플매니저인 효진(신은경)의 둘도 없는 이성친구로 등장해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했다. 커플매니저인 효진이 실전에 약한 연애박사인 것처럼, 그 역시 박학다식하지만 제대로 하는 일은 없는 백수 캐릭터다. 그가 유일하게 잘 하는 일이 있다면 죽마고우인 효진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일. 조금은 맥빠지는 코믹멜로인 이 영화에서도, 공형진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순박한 코미디를 보여준다.
공형진의 장기는 그런 것이다.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지만, 그가 등장하면 스크린 속의 공기는 금세 발랄한 분위기로 바뀐다. 실없이 웃음이 나고, 천연덕스러운 그의 농담에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나름대로 슬픈 이야기였던 ‘오버 더 레인보우’나 ‘선물’에서도, 그의 코믹 연기는 과하지 않은 조미료가 돼 웃음을 머금게 만들었다. 그의 연기에는 광기가 서려있지 않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원일기’ 풍의 풀어헤친 노련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공형진도 기억하기 싫은 아픔을 겪은 적이 있다. ‘쉬리’에 출연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을 때의 일이다. ‘쉬리’에 꼭 출연하고 싶었던 그는 102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강제규필름에 출근도장을 찍었지만, 그가 맡기를 원했던 역할은 결국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공형진은 1년6개월간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당시의 고통이 약이 된 측면도 있다. 그때 이후 공형진은 “연기자라면 무엇보다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연기관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꼭 사기치는 기분이 들어서요”라며 환하게 웃는 공형진. 그는 여태껏 보여줬던 촐싹대는 이미지와는 달리, 꽤 진지한 배우임이 틀림없다.
순박한, 너무도 순박한 정은표
정은표
국내 최초의 잠수함 블록버스터로 화제를 모았던 ‘유령’에서 그는 잠수함 내의 어떤 내분에도 관여하지 않는 순진한 주방장으로 등장한다. 흰 주방 모자를 눌러 쓰고 아무 근심 없는 표정으로 요리를 나르는 남자. 그러나 영화 마지막 그는 산 채로 배가 갈리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때 그의 순박함과 대조를 이루는 짐승 같은 죽음은, ‘유령’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다.
정은표는 조연으로 출연한 이 영화에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카리스마를 쏟아냈고, 이후로도 꾸준히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장문일 감독의 ‘행복한 장의사’는 정은표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장의를 배우는 건달 역을 구수하게 연기했는데, 장의를 배우는 세 남자 중 유독 정은표의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착착 감겼다. 혀를 길게 빼고 죽은 시늉을 하는 장난스러운 모습부터 황마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느끼한 모습까지, 한 영화에서 이렇듯 다양한 이미지를 선보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후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제비 역으로 능글맞은 캐릭터에 도전한 그는, 이 영화로 오랫동안 고수했던 시골 청년의 순박한 이미지를 단번에 깨버렸다. 춤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유부녀를 농락하는 제비.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촌스러운 장발과 꽃무늬 양복을 걸쳐 입은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엽기적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변신은 그의 연기 경력에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영화 속에서 아직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냉철한 역을 소화하기 위해 요즘 본격적인 변신을 시도중이다. 민병천 감독의 새 영화 ‘내추럴 시티’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사이코 천재 과학자. “그저 웃긴다는 소리는 듣기 싫다”는 그는 이 영화로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영악한’ 단순무식, 성지루
정은표나 공형진 외에 요즘 들어 새롭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연극배우 출신의 조연 스타가 성지루다. 그는 원래 오태석 연극의 간판스타였으나, 연기 인생 14년 만에 영화배우로 변신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를 처음 영화 쪽으로 끌어들인 인물은 임상수 감독. 임감독은 ‘눈물’의 조연 캐릭터를 그에게 맡겼고, 성지루는 단숨에 영화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떠올랐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열연한 성지루(왼쪽)와 유해진
‘신라의 달밤’에서 왕년엔 경주고 짱이었으나 지금은 동네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덕섭도 그랬고, ‘공공의 적’에서 조폭보다 더 악랄한 경찰 강철중(설경구)에게 죽어나는 마약 판매상도, ‘라이터를 켜라’에서 라이터를 훔쳐간 양철구에게 설설 기는 천안 친구도 그랬다. 특히 ‘공공의 적’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몇 컷 되지 않는 비중에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강철중의 으름장에 설설 기다가도 돌아서선 “내가 약 먹었니, 그걸 알려주게”라며 뒷말을 쏟아내는 마약 밀매업자. 겉 다르고 속 다른 그 역을 얄밉도록 멋지게 연기해낸 성지루는, 이후에도 어벙한 코미디로 무겁게 진행되는 영화에 신선한 재미를 더해주었다.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는, 정준호와 김정은이 주연을 맡은 조폭 코미디 ‘가문의 영광.’ 그는 이 영화에서 조직 보스의 세 아들 중 둘째 역을 맡아 무식함의 극점이 어디까지인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여동생을 머리 좋은 남자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조폭 가문의 사람들. 이중 성지루가 맡은 둘째는 어느 누구보다 교양이 없는 단순 무식한 캐릭터다. 말끝마다 음담패설을 일삼고, 예의라곤 차릴 줄 모르는 조폭 가문의 문제아다.
그러나 배우 성지루가 이런 이미지만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연극판에서 성지루를 본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재능 있는 연기자인지를 잘 알고 있다. 영화계에서 소모품처럼 낭비되고 있는 그의 재능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는 과연 언제쯤일까. 성지루는 지금 그 지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쇄살인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스릴러 ‘H’에서 성지루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강력계 형사로 등장할 예정이다.
‘양아치 특공대’ 대표 유해진
성지루 이외에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조연 스타가 또 있다. 이문식 유해진 이원종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소시민적인 ‘양아치 특공대.’ 그들은 영화 속에서 각자의 고정 이미지를 복제 생산하며 코미디의 ‘맛’을 더한다. 이들은 한마디로 요즘 캐스팅 1순위에 올라 있는 스타급 조연배우들이다. 뱁새처럼 찢어진 눈이 트레이드마크인 유해진, 뭔가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이미지의 이문식, 아저씨처럼 퉁퉁한 몸매로 엽기적인 대사를 쏟아내는 이원종.
이중 생긴 게 워낙 양아치다운 탓에 양아치 전문 배우로 이미지를 굳힌 유해진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동네 양아치를 연기한 후 확실한 조연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유해진은 이상하게 영화 속에서 칼을 많이 집어든 배우로도 유명하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에선 고려로 돌아가기 위해 칼을 휘둘렀고, ‘공공의 적’에선 아예 전문 칼잡이로 등장했다. 각종 칼들을 일렬로 놓고 양아치 세계에서 사시미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장검은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하는 그를 보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칼잡이로서의 열정과 진지함에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이것은 장검이고 저것은 사시민디, 모가지 따고, 배 따고, 이렇게 하는 것이구먼요”라는 대사를 판소리처럼 읊조리는 그는, 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그런데 동네 포장마차에서 대판 싸움을 벌일 것 같은 엽기적인 이미지의 그가 최근작인 ‘라이터를 켜라’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은 보는 사람마저 답답하게 할 만큼 천천히 대사를 내뱉는 기차 승객. 하지만 시종일관 조용해 보이는 그도 타고난 성격은 감추기 어려운지, 영화 마지막 기차 안이 뒤집어질 만큼 엄청난 소란을 일으킨다. 억눌렸던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소시민의 얼굴. 이런 캐릭터는 유해진이 아니고서는 쉽게 하기 어려운 연기임이 분명하다.
그는 올해 말 개봉되는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에선 또다시 자신의 전공인 양아치 연기로 돌아간다. 해안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양아치 철구의 캐릭터는 그에 의해 또 어떻게 버무려질까. 아무래도 그는 ‘공공의 적’이나 ‘라이터를 켜라’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주연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연기로 영화를 채우게 될 것 같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그 못지않은 감초 연기를 선보인 인물이 이문식이다. 이 영화에서 양철곤의 왼팔로 등장하는 그는, 한 박자씩 늦거나 빠른 일 처리 때문에 두목에게 매번 핀잔을 듣는다.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이문식의 이미지는, ‘라이터를 켜라’의 ‘찐빠’ 캐릭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삼류인생의 이미지다.
이런 색깔은 동네 양아치를 연기한 ‘공공의 적’에서도 역시 빛을 발했다. 강철중 형사의 부탁을 들어주려다 얼떨결에 빈집털이범이 되어버린 산수. 그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아이큐 두 자리 수를 넘지 못한 듯한 덜떨어진 양아치다. ‘달마야 놀자’에서는 또 어떤가. 이 영화에서 김인문, 정진영 등과 함께 스님파 일원으로 등장한 그는, 여전히 자라처럼 목을 빼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비굴한 얼굴연기를 선보인다.
절대 보스 역은 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정과 가벼운 수다쟁이의 이미지. 이런 순박함이 매력인 이문식은, 사실 만만치 않은 영화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미지왕’에서 택시운전사로, ‘비트’에선 구청직원으로, ‘행복한 장의사’에선 동네 양아치로, ‘간첩 리철진’에선 택시 강도로 열연했다. 이중 장진 감독의 ‘간첩 리철진’은 이문식의 얼굴을 널리 알려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로 기억된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간첩인 줄 모른 채 리철진(유오성)의 가방을 털었다 권총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택시 강도를 연기했다. 가방 한번 잘못 털었다 이상한 사건에 연루되는 그는, 역시나 자신에게 일어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대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밖에도 그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의 녹음실 선배로, ‘선물’에선 주인공의 어린 시절 친구로 등장하며, 최근 개봉된 ‘연애소설’에선 이은주의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버스 승객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달려가는 연기파 배우 이문식. 그는 사람 좋은 이미지 그대로, 영화계에서도 넓은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유해진과 더불어 ‘주유소 습격사건’이 배출한 또 다른 조연 스타는 퉁퉁한 아저씨 몸매로 엽기 발랄한 표정 연기를 소화해내는 이원종. ‘커피, 카피, 코피’로 영화에 데뷔한 그는, ‘반칙왕’의 무명 레슬러 역으로 인지도를 높였으며, 조폭과의 공동생활을 반기지 않는 ‘달마야 놀자’의 스님, ‘신라의 달밤’의 경주 토박이 건달 두목을 연기한 후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라이터를 켜라’에서도 ‘짭새’로 등장해 감칠맛 나는 연기를 선보인다.
요즘 한국영화계에서는 조연과 주연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스타급 조연배우들을 주연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연과 주연의 경계를 오가는 대표적 배우는 ‘주유소 습격사건’의 중국집 배달부 역으로 유명한 김수로와 한국 고전 액션영화를 패러디한 디지털 영화 ‘다찌마와 Lee’의 임원희, ‘아나키스트’의 막내 아나키스트 김인권,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양동근과 임창정, ‘하면 된다’의 박상면과 이범수 등이다. 이들은 역할의 무게와 상관없이 개성 있는 연기로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비며 인기를 한몸에 누리고 있다.
‘이것은 법이다’와 ‘재밌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임원희는 ‘킬러들의 수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확실한 조연으로 성장했다. ‘재밌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김수로는 ‘반칙왕’ ‘주유소습격사건’ ‘화산고’ 등에서도 특유의 ‘나사 하나 빠진 짱’의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다. 김인권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스트’에서 비교적 큰 역을 맡은 그는, ‘송어’와 ‘박하사탕’ ‘조폭마누라’ 등에서는 영락없는 조연 캐릭터다. ‘송어’에선 송어양식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는 젊은 청년을, ‘박하사탕’에선 영호를 면회 온 순임(문소리)에게 농담을 건네는 보초 군인을, ‘조폭 마누라’에선 경상도에서 상경한 단순 무식한 양아치 ‘빤스’를 연기했다.
이밖에도 영화판을 주름잡고 있는 조연 배우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8월의 크리스마스’와 ‘반칙왕’의 신구, ‘달마의 놀자’의 김인문, ‘주유소 습격사건’의 박영규, ‘조용한 가족’의 박인환 등 나이 지긋한 중견배우들이다. 이들은 촌철살인의 연기력을 과시하진 않지만, 영화 속에 꼭 필요한 노인 혹은 중년 캐릭터를 도맡아 노련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여성 조연 캐릭터의 부재
그런데 이상한 일은 개성파 남자 조연들이 차고 넘칠 만큼 많은 것과는 달리 눈에 띄는 여성 조연 캐릭터들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에서 제작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조폭 영화로 대변되는 코미디거나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일까.
이렇듯 여성 조연 스타의 불모지인 한국영화계에서, 그나마 자기만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대표적인 여배우가 최강희와 김여진이다. ‘여고괴담’에서 말수 적은 학생 재이로 등장한 최강희는, ‘행복한 장의사’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마을을 밝은 분위기로 바꿔주는 아름다운 마을 처녀로, ‘와니와 준하’에선 와니의 사촌동생을 짝사랑하는 어린 시절 친구로 등장해 믿음직한 연기를 선보였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한 김여진 역시 영화계 최고의 조연 캐릭터로 활약중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친구의 애인과 첫 경험을 시도하는 대학원생을 연기한 그녀는, 이후 ‘박하사탕’에서 운전학원 강사와 바람이 난 영호(설경구)의 아내 역을 능글맞을 만큼 당차게 연기해냈다. 최근 김여진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서 그림에만 심취해 있는 장승업(최민식)의 부인 역을 훌륭히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여기 소개된 조역 연기자들이 언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주연배우로 거듭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 충무로 최고의 주연배우로 꼽히는 설경구 송강호 유오성 신하균 류승범 등은 모두 빛나는 조연 시절을 거쳐 정상에 선 주연배우들이다.
송강호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화랑을 어슬렁거리는 남자로 영화에 데뷔했으며, ‘초록물고기’의 깡패, ‘넘버 3’의 불사파 두목, ‘나쁜 영화’의 행려 등의 조연을 거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설경구 역시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진희경과 짧은 사랑을 나누는 남자로 등장해 눈에 띄는 조연 연기를 선보였다.
‘친구’의 유오성은 10여 년 넘게 조연배우로 머물다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주연배우로 거듭났으며, 신하균 역시 ‘기막힌 사내들’과 ‘간첩 리철진’ 등의 조연 연기를 거쳐 주연의 자리에 올라섰다. 현재 ‘품행제로’의 주인공을 맡고 있는 류승범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까불까불한 나이트클럽 디제이로 출연한 바 있다.
연기력만 있다면 어제의 조연이 오늘의 주연으로 쉽게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요즘. 여기 언급한 조연배우들을 성급히 조연의 카테고리 안에 끼워넣는 것은 조금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주연의 가능성을 향해 열심히 뛰고 있는 한국의 대표 조연 스타들이다. 이들 중 누군가는 제2의 송강호, 제2의 설경구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