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강연을 하고 다님으로써 1970년대 미국의 불교 붐 기반을 닦은 인물로도 일컬어지지만,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반전·반핵운동, 대항문화, 히피문화의 대두라는 문화적 배경에 힘입은 바 크다. 틱낫한은 1983년 남부 프랑스에 플럼빌리지란 명상수련센터를 세우고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명상 수련을 이끌고 있다.
베스트셀러 된 틱낫한 책들
올해 출간된 책으로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나무 심는 사람), ‘화: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명진출판), ‘지금 이 순간 경이로운 순간’(한길),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김영사), ‘틱낫한의 평화로움’(열림원) 등이 있다. 여러 출판사에서 현재 출간 준비중인 책도 5종 이상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는 1987년에 출간된 적이 있고, ‘틱낫한의 평화로움’도 1992년 출간된 ‘평화로움’(장경각)과 원서가 같다. 그밖의 저서 몇 종도 올해 이전에 이미 소개된 바 있지만, 틱낫한이 명상서적 베스트셀러 저술가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은 역시 올 상반기 말부터의 일이다.
그 시작이 바로 ‘화: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라고 할 수 있으며, 명상서적 분야의 ‘미다스의 손’인 류시화의 손길을 거친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와 ‘틱낫한의 평화로움’도 빠질 수 없다. 이중 전자의 책은 류시화가 틱낫한의 허락을 받아 20여 권의 저작과 강연, 편지 등에서 가려 뽑은 글들을 엮은 것이다. 이쯤 되면 도서시장의 트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법하지만, 명상서적이란 장르의 대두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류시화는 지난해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명상서적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에 대중이 관심을 가진다. 인간이 뭔가,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명상서적이 다루기 때문에 이 분야의 책은 항상 대중의 관심을 받아왔다’고 한 바 있다.
명상서적이나 이른바 구도서적이 본격적으로 우리 출판계의 한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사회과학서적이 득세하던 1980년대부터다. 밥, 노동, 사회, 역사의 문제가 첨예한 이슈였던 시절에 명상서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난세에 대처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내면으로의 침잠을 택한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화: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는 어떤 침잠을 이야기하는가? 마음이 화로 가득하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화는 온갖 불행의 근원이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하면 나는 그와 싸우거나 누군가에게 분풀이하려 하거나 자신이 지금 화가 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틱낫한은 이런 행태를 가리켜 ‘자신의 마음을 올가미 속에 가두는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면 올가미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옳은 말들로 가득한 목차만 훑어봐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많이 먹어도 화는 풀리지 않는다. 화가 날수록 말을 삼가라. 성난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라. 화가 났을 때 남의 탓을 하지 마라. 화내는 것도 습관이다. 그 연결고리를 끊어라. 무의식중에 입은 상처가 화를 일으킨다.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앙갚음하지 마라. 애써 태연한 척하지 마라. 상대방이 가진 나쁜 씨앗보다는 좋은 씨앗을 보라. 기타 등등. 물론 이 책은 구체적인 지침도 담고 있다.
틱낫한의 메시지는 트루이즘(truism)에 가깝지만, 트루이즘을 글로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고 구체적인 수행방법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남긴 위대한 가르침일수록 너무도 자명한 트루이즘에 가깝지 않던가?
그렇다면 ‘틱낫한의 평화로움’은 어떤가? ‘한 장의 종이는 종이 아닌 요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마음, 대지, 벌목꾼, 구름, 햇살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만일 그대가 종이 아닌 요소들을 그 근원으로 되돌려버린다면, 종이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종이는 얇지만, 그 안에는 전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대가 꽃과 나무에 물을 줄 때, 그것은 지구 전체에 물을 주는 것이다. 꽃과 나무에 말을 거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무수한 시간 동안 함께 존재해왔다.’
불교의 이른바 연기설(緣起說)을 이처럼 명료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마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받기도 했고, 난민을 위한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하는 등 평화운동가로서 틱낫한이 지닌 평화에 대한 추구와 강한 신념이 어떤 우주적인 명상 내지는 통찰에 기반을 두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이제 또 한 사람의 큰 스승 달라이 라마의 책을 살펴보자. 정신과 의사 하워드 커틀러가 달라이 라마와 가진 인터뷰에 바탕을 둔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류시화 옮김, 김영사) 역시 ‘좋은 의미에서’ 트루이즘에 가깝다. 달라이 라마는 욕망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행복을 위한 욕망,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욕망, 그리고 세상을 더 조화롭고 인간애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려는 욕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욕망들은 매우 쓸모가 있습니다. 다양한 물건들을 볼 때마다 내 안에 욕망이 싹트기 시작하고, 먼저 이런 충동이 생깁니다. 그래, 난 이것을 갖고 싶어. 저것도 필요해. 그러고 나면 두번째 생각이 떠오르면서 난 마음속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아, 정말로 이것이 내게 필요할까? 그 대답은 언제나 노입니다. 만일 당신이 최초의 충동을 따른다면 얼마 안 가 당신의 주머니는 텅텅 비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음식, 옷, 집을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욕망이며, 훨씬 더 합당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의 인용문을 간결한 메시지로 바꿔보자.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나 평화, 조화, 인간애, 행복 등을 향한 욕망 이외의 욕망은 버려라.’ 이 간결한 메시지를 달라이 라마는 누구나 일상에서 겪음직한 상황을 예로 들어가며 친절하고 알기 쉽게 전달한다. 바꾸어 말하면 달라이 라마는 탁월한 설교가인 셈이다.
인도 델리의 ‘투시타 대승 명상센터’에서 매년 열리는 법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설법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변한다’에도 달라이 라마의 그런 탁월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비심, 사랑, 용서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의 변화에 따라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진짜 적은 증오, 질투, 자만 같은 자기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특히 진정한 사랑과 자비심은 적을 포함한 상대도 행복할 권리를 가졌음을 깨달았을 때 생겨난다는 메시지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 책을 보면 불교의 정신과 가치를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독단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데 달라이 라마의 매력과 위대성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종교는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는 달라이 라마의 열린 생각 하나만 이 책에서 건져도 책값 이상을 건졌다고 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를 거론한 이상 도올 김용옥이 펴낸 3부작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통나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3부작은 ‘장자’에 대한 곽상(郭象·252∼312)의 주석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곽상의 ‘장자’ 주석은 단지 ‘장자’의 자구를 풀이하고 해설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주석 작업을 통해 사실상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때문에 훗날의 어느 승려는 “곽상이 ‘장자’를 주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자’가 곽상을 주석했다”고 말했다. 요컨대 달라이 라마가 도올을 주석하고 있다.
명상서적이나 구도서적이 역사와 사회의식이 빠진 공허한 사색의 심각한 포장, 고도 산업사회의 경쟁에서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인 독자들을 절묘하게 자극하는 상략적(商略的) 고려의 결과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독서 수요에 적절히 부응하는 책들이라는 사실까지 탓할 수는 없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출판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시대의 보기 드문 정신적 지도자이자 설교가인 틱낫한과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반성하고 마음의 평화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다만 우려하는 것은 ‘당의정(糖衣錠)’에 중독될까 하는 점이다. 당의정의 도움을 받을 땐 받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현실, 당의를 입히지 않은 현실에 대한 쓰디쓴 성찰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