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정몽준·축구협회·히딩크의 ‘오버액션’

정치적 계산이 한국 축구 망친다

  • 전용준 toto@sportstoday.co.kr

    입력2002-10-09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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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컵 바람을 등에 업고 대권을 꿈꾸는 ‘정치가’ 정몽준, 회장의 뜻이라면 모든 것을 다할 준비가
    • 돼 있는 ‘충성파’ 대한축구협회, 자신의 몸값과 향후 진로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장사꾼’ 히딩크.
    • 이들의 계속되는 홍보성 플레이에 과도기에 놓여있는 한국축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히딩크 신드롬’의 부작용 철저 분석.
    지난 9월9일 파주에 있는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 박항서 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박감독이 이날 발표한 성명서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현재 대한축구협회가 자신의 몸값을 너무 낮게 책정해 현실적으로 연봉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고, 계약기간도 2004년 올림픽까지 보장되지 않아 팀을 지휘하기 어렵다는 불만. 다른 하나는 7일 열렸던 2002년 남북통일축구대회에서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이 벤치에 앉은 것에 대한 문제지적이다.

    사실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 감독이 상징적으로 벤치에 앉은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월드컵 4강신화를 기록한 이후 히딩크 감독은 2002년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우상이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오히려 국민들 입장에서 벤치에 앉은 그를 다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짜릿함과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그저 ‘돌아온 영웅’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 일이 성사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답이 나온다.

    예견된 불행 ‘벤치 사태’

    이른바 ‘벤치 사태’가 일어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스포츠와는 동떨어진 정치적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통령 후보 출마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입장에서 히딩크 감독은 사전 홍보를 위해 가장 뛰어난 ‘얼굴마담’이다. 월드컵으로 급성장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유지하는데 히딩크만한 카드는 없다. 히딩크 감독의 영향력과 소구력을 대신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이번 남북통일축구도 초청자의 특성상 이미 처음부터 대선을 앞둔 전략적 성격이 짙었다. 여기에 히딩크라는 강력한 카드를 덧붙임으로써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애초부터 벤치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필자가 지난달 중순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현지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났을 때도 그는 통일축구경기 벤치에 앉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필자에게 “현재 한국축구는 과도기에 들어갔다. 경험 많은 노장들이 은퇴하는 시점이라 젊은 선수들을 대거 보강해야 한다. 따라서 코칭스태프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것이다. 대표팀을 맡은 초반에는 승률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며 “내가 벤치에 앉는 것은 오히려 이에 역행한다. 벤치에 앉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일은 그의 말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9월4일 히딩크 감독이 입국하자마자 당장 그날 저녁 대한축구협회 고위 관계자는 그에게 벤치에 앉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히딩크 감독은 5일 오전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항서 현 감독에게 “벤치에 앉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고 박항서 감독은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로 어설프게 동의를 표시했다.

    대놓고는 말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감정의 굴곡이 있었던 것일까. 박항서 감독은 다음날인 6일 오후 상암경기장에서 가진 훈련 직후 인터뷰에서 “축구협회로부터 경기 당일 히딩크 감독이 벤치에 앉을 것이란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때문에 이와 관련된 어떤 질문에도 답하고 싶지 않다”고 못박았다. 특별히 감정적인 발언은 없었지만 히딩크 감독이 벤치에 앉는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문제는 이날 박감독의 반응이 정몽준 회장이나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가 밝혔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는 사실. 정회장은 5일 북한선수단 환영만찬에 앞선 인터뷰에서 “상징적인 의미에서 히딩크 감독이 남북전 벤치에 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전무도 “이미 박감독과 얘기가 끝난 상황”이라고 확인했다. 만찬장을 찾은 히딩크 감독 또한 “만약 허락한다면 기꺼이 벤치에 앉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정황을 살펴보면, 박항서 감독을 제외하고 모든 관계자들이 히딩크를 벤치에 앉히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구협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5일 히딩크 감독이 박항서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그를 벤치에 앉히기 위한 준비작업이 마무리되자 히딩크 감독과 동행한 축구협회 관계자들에게 “기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살펴보라”며 동태 파악을 지시했다. 그만큼 히딩크 감독을 벤치에 앉힌다는 것은 아이디어 자체부터 물의가 따를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그 과정도 ‘일단 밀어붙이기’ 식이었기 때문이다.

    정몽준·축구협회·히딩크의 ‘오버액션’

    지난 9월6일 정몽준 회장(오른쪽 끝)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한 히딩크 감독(왼쪽 끝)

    그러나 언론들도 히딩크 감독의 벤치 착석에 대해 별다른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과정이나 목적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민족의 염원이 담긴 통일축구대회의 전체적인 의의를 망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또한 현재 최고의 인기와 신망을 얻고 있는 히딩크 감독의 입지 등 여러가지 부분을 고려해 일부러 거리를 둔 흔적도 역력했다.

    감히 히딩크를 상처내?

    그러나 경기 당일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행동은 벤치에 앉은 것이 순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경기 시작 전 대회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눈 히딩크 감독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벤치로 향했고 상석을 놓고 잠시 박항서 감독과 상투적인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히딩크 감독이 가장 상석에 앉고 바로 옆 자리에 통역이 착석, 그 옆의 박항서 감독과 완충지대를 형성했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시작 직전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고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여유를 보였지만, 전반전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어깨를 벤치에 푹 묻고 조용히 경기를 지켜봤다. 결국 후반전엔 벤치를 떠나 곧바로 VIP석으로 올라와 여자친구 엘리자베스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일단 히딩크 감독을 벤치에 앉혀 국민들에게 ‘6월의 뭉클한 감동’을 다시 한번 각성시키는 데 성공한 축구협회는, 정몽준 회장의 대선 행보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더욱이 히딩크 감독은 정몽준 회장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 김대중 대통령을 만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몽준 회장에게 엄청난 홍보효과를 안겨줬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상황은 꼬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9일 박항서 감독의 성명발표로 인해 자신들의 계획에 흠집이 나자 축구협회는 이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축구협회측은 “협회를 겨냥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항명 감독의 경우 감독이 사표를 낼 수도 있고 협회가 직무정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징계 조치를 예감케 하는 대응이었다.

    결국 박항서 감독이 기술위원회에서 ‘성명서 사태’에 대해 공식사과하고, 축구협회도 중징계에서 ‘엄중 경고’로 징계수위를 완화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축구협회 고위관계자가 “박항서 감독에게 협회가 제시한 연봉(1억8000만원)이면 지금이라도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발언하는 등 앙금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사실 축구협회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연봉 문제보다는 히딩크 감독에 대한 부분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협회 입장에서 보면 정몽준 회장의 대선 출마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인 데다 표심을 잡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딩크 감독에 대한 비판이나 흠집은 곧바로 정몽준 회장의 입지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 수장이 히딩크 감독에 대해 비토성 발언을 했다는 것은 협회로선 ‘괘씸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히딩크 감독. 방한 기간에 그가 네덜란드 최대 일간지 ‘알게마인 다흐블라트’와 가진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고민을 잘 보여준다. ‘다흐블라트’는 7일자 33면 전체를 할애, ‘대부의 근심(De Zorgen van een Godfa ther)’이란 제목 아래 히딩크 감독과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이 인터뷰에서 히딩크 감독은 “정몽준 회장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에 유리한 발언이나 행동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엄청난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고 한국의 정치풍토나 역학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 정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그는 “나는 축구에만 관심 있을 뿐이며 정몽준은 축구협회 회장이란 직분으로 나와 관계 있는 것”이라며 “축구클리닉 등 스포츠를 통해 남북관계가 좋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히딩크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인기가 권력화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한국인들의 관심으로 형성된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말해 정치와 스포츠를 확실하게 구분짓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정회장은 히딩크 감독과의 조그마한 불협화음도 대통령을 향한 행보에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히딩크 감독과의 관계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히딩크 감독이 현재 상황의 미묘함을 잘 파악하고 있음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그가 미리 박항서 감독의 양해를 구한 뒤에 벤치에 앉은 것이나 경기 내내 불편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이 때문이다. 차라리 순수한 마음이었다면 90분 내내 박항서 감독과 자리를 함께하며 경기를 편하게 관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남북통일축구 벤치에 앉아달라는 협회의 집요한 설득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코칭 스태프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평소 철학과 완전히 배치되는 행위였지만, 한국을 떠난 이후 첫 방문이었다는 점이나 대한축구협회 기술자문역 계약을 앞둔 시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은 그저 협회나. 정회장의 정치논리에 끌려가고 있는 것뿐일까. 상황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히딩크 감독은 축구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한 수 앞을 내다본다. 자신의 고집을 결코 꺾는 법이 없고, 자신의 일을 합리화 시키는 데 상당한 수완을 갖고 있음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물론 이는 한 집단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카리스마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러한 능력이 히딩크 감독 또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일정부분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번번이 “정치와는 관계하지 않겠다”고 밝혀온 히딩크 감독이 물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그의 ‘비즈니스 감각’ 이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까닭이다.

    한국의 정치상황과 정몽준 회장의 입장은 그로서는 미래를 위해 놓칠 수 없는 자산이다. 그가 아인트호벤의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축구 기술자문역도 맡기로 한 것은, 앞으로 한국축구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보함과 동시에 향후 진로에 안전장치를 보장받기 위한 방법이다. 기술자문역을 유지하면서 한국축구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것.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인이다. ‘더치 페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네덜란드인들은 실리에 밝고 자신이 밑지는 장사는 죽어도 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동안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장사수완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5박6일간의 방한일정을 통해 히딩크 감독은 CF 계약 2건, 자서전 출판 등으로 43억원이 넘는 돈을 챙겼다. 또한 한국에 매니저를 두고 있어 네덜란드 현지에서도 많은 부분을 원격 조정할 수 있다. 사실 굵직굵직한 계약건들은 그가 방한하기 전에 이미 모두 완료된 상황이었다.

    이번 방한만해도 형식은 남북통일축구 대회 참관이었지만 그의 일정은 상업성 행사에 상당부분이 할애됐다. 하루 한두 차례씩 마련된 이들 행사를 통해 그는 자신의 몸값을 높이거나 금전적인 이익을 얻었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많은 돈을 벌었는데 좋은 곳에 쓸 생각은 없는가”라고 기자들이 질문하자, 히딩크 감독은 애매한 답변만을 남겼고 결국 수재의연금 형식으로 2002만원을 기부한 후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Just One Card For MJ!

    그는 올 11월21일 브라질과 한국 대표팀간의 친선경기때 “소속구단(아인트호벤)에 무리가 없다면 한국을 방문해 경기를 지켜보기로 협회와 약속했다”고 밝혔다. 12월19일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히딩크 방한이란 소재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히딩크 감독은 “브라질전에선 절대 벤치에 앉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한창 세몰이에 분주할 정몽준 회장이 ‘히딩크 카드’를 멋지게 활용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특히 히딩크 감독과 정몽준 회장의 관계, 히딩크 감독이 정몽준 회장을 생각하는 마음을 고려하면 이같은 시나리오를 점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히딩크 감독은 누가 결정권자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누가 가장 자신을 믿는지도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에피소드 하나. 지난해 말 히딩크 감독은 계약서상의 휴일을 모두 사용한 후 크리스마스 휴가를 따로 신청, 협회와 큰 충돌을 빚었다. 그때만 해도 대표팀 성적이 좋지 못해 히딩크 감독도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던 상황. 정몽준 회장도 처음엔 히딩크 감독의 유럽 휴가건에 대해 ‘절대 불가’ 방침을 내렸다.

    정몽준·축구협회·히딩크의 ‘오버액션’

    2002월드컵 한국 대 폴라드전 당시 광화문에서 거리응원을 펼치는 붉은 악마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이 이에 크게 반발해 축구협회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정몽준 회장도 마지못해 히딩크 감독의 휴가를 승낙해 주었다. 히딩크 감독은 여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후 열린 정몽준 회장의 출판기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같으면 1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지만 이날은 행사 막바지까지 장시간 자리를 지키며 굳은 믿음을 보여줬다.

    월드컵 이후에도 히딩크 감독은 정몽준 회장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베티스에서 경질되며 1998년 월드컵 이후 유럽 축구계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그가 2002년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정몽준 회장의 간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해도 정치와 축구의 경계선이 모호한 지점에서는 정몽준 회장의 뜻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번 ‘벤치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축구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히딩크 감독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축구인들은 현재의 상황이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축구협회의 행정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SBS 해설위원 신문선씨는 “이번 벤치사태는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다. 아인트호벤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를 상시적으로 자문하기는 힘들다. 상시자문이 어렵다면 대표팀에 무슨 힘이 될 수 있겠는가”라며 “특히 이번 남북통일축구 경기에서 대표팀 벤치에 앉은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불씨를 제공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의 경우 전임 감독은 감독직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대표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축구협회를 향해서도 “무리수를 동원해 히딩크를 벤치에 앉힌 것은 축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처사다. 이번 사태는 축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축구협회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정치에 신경 쓰지 말고 그 힘을 축구계의 전체적인 시스템과 틀을 고치는 데 쏟아야 한다. 월드컵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대표팀에게 힘을 실어줘도 모자랄 판에 ‘1억8000만원이면 대표팀 감독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위원은 축구에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들린다는 것 자체가 협회의 처사가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축구대기자 김덕기씨도 변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기술자문역 문제만해도 전력에 보탬을 주기보다는 이벤트를 일으켜 관심을 유지시키려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협회가)최근 일어나고 있는 작은 반발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무시하려 드는 것도 비정상적인 구조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히딩크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히딩크의 파괴력은 갈수록 약해질 것이 분명한데 그러다 보면 축구협회가 축구발전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돌출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는 점이 염려스럽다는 견해다.

    2006년 붉은악마를 다시 보려면

    부연할 필요도 없이 2002년 한국에서 ‘히딩크’는 단순히 축구감독의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을 활용하고자 하는 갖가지 정치적·경제적 이해타산이 난마처럼 얽혀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히딩크 감독을 활용해 짧게는 2006년 월드컵, 길게는 한국축구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 정치에 발목이 잡히면 스포츠의 본질은 그것으로 끝이다.

    축구협회는 대한민국 축구 전체를 위해 활동하는 집단이다. 어떤 한 사람이나 특정집단을 위한 소유물이나 선전도구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지금은 히딩크 감독 본인이 이야기하듯 지도자 육성, 유소년 발굴 등 갈 길이 먼 ‘엄청난 과도기’이다.

    2006년 월드컵, 다시 한번 붉은 악마들이 광화문과 시청 앞 거리를 물들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축구협회와 정몽준 회장, 히딩크 감독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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