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차기 정부는 급진개혁을 원하는 진보진영과 그것을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미 포위되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건전한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아우르는 탕평(蕩平)에 의해 좌우 양극단을 중화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일종의 자유주의적-진보적 민주대(大)연합이다.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는 노무현 당선자. 노무현 정부는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신뢰받는 개혁 작업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권위와 기성이 밥 먹여주던 시절은 이미 옛날이 되었다. 권위주의는 평등주의, 형식주의는 실용주의, 그리고 집합주의는 개인주의로 점차 바뀌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 이를 재촉한다. 가상이 현실이고, 현실이 미래가 되는 가운데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바로 5060의 한계와 2030의 가능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한국정치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를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새 정부의 향후 5년의 과제를 짚어본다.
누구를 위한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였던가
해방 이후 한국전쟁 다음의 최대 국난이라는 IMF 외환위기. 바로 그때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씨에게 거는 국민적 기대는 컸다. 그는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빼들고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에 착수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란 구호 아래 금융·기업·노동뿐 아니라 교육·언론·사법·의료·복지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그야말로 광범한 개혁이었다. 개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도 김대중 정부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5년 임기 안에 끝낸다는 야심찬 목표를 내걸었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던 한국경제가 되살아난 것은 분명 개혁의 성과다. 지금 일본, 중국, 대만 다음으로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이 됐고, 지난 5년 동안의 무역흑자 총액만 하더라도 무려 900억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무려 16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느라 국가재정이 거의 200조원에 달하는 빚더미에 올라 있다. 우리 주식시장의 3분의 1 이상을 외국인들이 장악하고 있고, 대부분의 알짜 기업들이 외국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당장이야 괜찮겠지만 앞으로 위협이 될 수 있다. 한국경제가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산업과 금융의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분야의 개혁은 복지를 제외하고 성공적이지 못했다. 교육·언론·사법의 경우 개혁 자체의 명분에 빠져 절차와 방식에서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준비 없이 무리하게 강행된 의약분업이다. 중형병원의 도산과 소형 약국의 퇴출은 그렇다 치고 외국계 제약회사와 대규모 병원이 실익을 챙기면서 소비자인 국민의 의약비 보험 부담만 올려놓은 결과를 놓고 잘된 개혁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김대중 정권이 김영삼 정권의 개혁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개발독재 이후 최초의 민간정권답게 김영삼 정권은 총체적인 개혁 청사진을 들고 나왔다. ‘통일된 세계중심국가’라는 미래 한국의 이상을 설정한 김영삼 정권은 교육·법·경제·정치·언론·행정·지방·환경·문화·의식 등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를 꾀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개혁은 법과 제도보다 인치에 의존함으로써 추진력을 잃고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개혁은 김대중 정권과 김영삼 정권의 공통된 특허 상표였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통해 수립된 민간정권으로서 이들은 해방 이후 쌓인 권위주의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나름대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졌다. 그런데도 두 민간정권은 두 김씨 사이의 세계관 차이, 특히 정치적 입지와 이해 충돌로 인해 서로 개혁연합의 형성에 무관심했다.
흥미롭게도 김대중 정권이 내놓은 대부분의 개혁안은 이미 김영삼 정권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개혁을 정권유지와 재창출이라는 권력동기에 의해 수단화함으로써 개혁의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커다란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김영삼 정권의 업적이라 할 금융실명제와 역사 바로잡기가 김대중 정권에 의해 뒤집힌 것이 단적인 예다. 집권을 위해서 이질적인 세력을 끌어들이면서도 개혁을 위해서 동질적인 세력을 외면했던 것이다.
두 민간정권 지도자의 개혁 추진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흔히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여러 전선에 걸쳐 변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개혁은 저항과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국민적 합의와 지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3독(독선, 독주, 독단)’과 김대중 대통령의 ‘3과(과신, 과욕, 과시)’에 따른 ‘나홀로’ 스타일의 국정운영은 정부부처와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데 장애가 됐다.
대통령 노무현의 등장은 이미 예고돼 있었는지 모른다. 권력 핵심부의 각본이 엉성하다 보니 기적처럼 보일 뿐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노무현씨와 정몽준씨는 서로 이념과 배경이 다르긴 했으나 하나의 대안으로 인식됐다. 대쪽 이미지의 이회창 후보는 ‘3독’과 ‘3과’를 넘어서는 신선함과 대중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노무현과 정몽준 사이의 후보단일화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거둔 것도 이회창 후보에 대한 회의에 기인한다.
이번 대선의 특징은 바람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의 정치의 중심에는 뉴미디어가 있다. TV, 라디오, 일간 신문보다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여론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 1위의 인테넷과 이동통신 인구가 말해주듯 디지털 언론이 공론장(public sphere)을 주물렀다. 기성세대의 여론지배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다.
흔히 이번 대선의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세대와 지역을 지적한다. 붉은 악마로 결집된 젊은 세대가 바람의 정치를 이끌었다. 이들은 변화를 갈구하는 역동적인 존재다. 잘못된 교육제도가 부추긴 지나친 경쟁에 대한 반발이 이들을 뭉치게 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추구하는 저돌성과 개성미를 지니고 있다. 춥고 배고픈 시대에 눈치를 보고 살 수밖에 없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싫고 좋은 것을 분명하게 가르는 무서운 아이들이다. 이들은 명분보다 실리,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오^ 대한민국’을 연호하면서도 싫으면 언제든지 이민을 떠날 수 있는 현실주의자들이기도 하다.
광주의 노무현 후보 지지율 95.18%와 대구의 이회창 후보 지지율 77.75%는 우리 사회에서 지역감정의 골이 매우 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해주었다. 과거 지역주의의 피해자인 호남이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영남보다 더 지역감정에 빠져 있다. 두 지역은 방어적인 의미에서 몰표를 던졌겠지만 동서갈등의 지속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노무현 후보가 고향인 부산에서 29.86%라는 약소한 지지율을 얻은 것은 호남 정권과 영남 민심 사이의 극명한 거리감을 보여준다. 김대중 정권에서 패권적 지역주의는 약해졌다. 그러나 연고와 정실에 의한 인사 불균형은 지역감정과 대립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바람의 정치가 지니는 맹점은 변덕스러움이다. 자연의 이치처럼 강하게 불기도 하고 쉽게 죽기도 한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무정형(無定形)의 여론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예측을 불허한다. 포퓰리즘이 자라나는 온상이다. 대중추수와 인기영합으로 인해 국가정책의 일관성과 공정성이 무너질 수 있다. 예전 아르헨티나의 페론이나 브라질의 바르가스, 최근 페루의 가르시아나 베네주엘라의 차베스의 사례가 보여주듯 포퓰리스트들은 현재를 위해 미래를 저당잡히는 경향이 있다. 이 중남미 국가들이 겪고 있는 오늘의 경제위기와 사회혼란, 정치불안이 그 참담한 결과다.
새 정부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대통령 당선자의 카리스마가 약하다 보니 포퓰리즘의 유혹이 크다. 국민에게 의견을 묻고 답을 구하는 쌍방향 정치는 좋다. 문제는 그것을 제도화시키는 것이다. 굳이 대통령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내각이 국민의 동참을 유도하면 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인터넷 추천제만 해도 그렇다. 중앙인사위원회가 있는데도 장차관을 인터넷으로 추천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유명무실화된 제도에 착안한 데서 여론정치 기미가 엿보인다.
의약분업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의사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실패한 정책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실 있는 개혁을 이뤄나가야 한다.
개혁이란 현상태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한 국가의 낡고 잘못된 제도와 관행과 의식을 국민적 동의를 얻어 적법하게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인적청산과 기구개편, 정책쇄신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개혁은 기성 권력과의 근본적 단절을 통해 이뤄지는 혁명과는 달리 기존 질서 안에서 새로운 권력의 토대를 만들어가면서 전사회의 구조적 불균형과 기능적 비능률을 바로잡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혁명이 총알(bullet)에 의한 초법적인 급진적 변화를 추구한다면, 개혁은 투표(ballot)에 의한 합법적인 점진적 변화를 지향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개혁은 혁명보다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구한다.
개혁의 어려움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개혁에 실패한 사례가 성공한 사례보다 많다. 또 성공한 개혁이라 해도 그 의미가 변질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구(舊)체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도혁신을 시도했던 개혁이 지배세력의 반발과 저항에 따라 반동적인 결과로 이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파시즘으로 귀결된 일본의 명치유신이나 독일의 바이마르개혁이 좋은 본보기다. 개혁의 이면에 민생문제가 자리잡고 있지만 권력동기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중 상당수는 개혁의 ‘개’ 소리만 들어도 염증을 느낀다.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이 내건 개혁이 개선보다 개악이 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부 개혁이 국민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기보다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개혁이란 미명으로 저지른 권력다툼과 부정부패는 개혁에 대한 회의와 혐오를 더욱 키웠다.
원래 개혁의 과실은 그것이 잘된 경우라도 상당 기간이 지나야 나오는 법이다. 그러기에 당장의 불편과 불만으로 개혁 자체를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된다. 국민의 조급한 기대를 추스르는 정부의 진지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잘못된 개혁의 경우 그 실책은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남아 일반 국민이 누대에 걸쳐 희생과 비용을 감당하게 된다. 개혁에 관한 한 위정자가 역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거시적 식견과 혜안을 가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 일변도의 잘못된 경제개혁을 한 결과 체제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의 아르헨티나를 보라. 자신의 권력기반 확충을 위해 메넴은 페론주의와 자유주의를 결합시키면서 자본의 이윤과 노동의 임금을 동시에 보장했다. 국가 부문의 대량 매각에 따라 반짝 성장을 하였지만 10년이 지난 현재 아르헨티나는 재정적자와 외채 누증으로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물가는 다시 치솟고 생필품이 부족한 가운데 정치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새 정부는 조용하지만 내실 있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종래와 같이 떠들썩한 개혁을 하다간 패닉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해 불안해하는 3분의 1과 냉소하고 있는 또 다른 3분의 1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5060의 일부는 허탈감에 빠져 있고, 2030의 일부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개혁은 국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좌파적 실험이라는 사시(斜視)를 떨쳐버리기 위해서도 개혁이 한국사회를 좀더 ‘정상적’이고 ‘균형적’이고 ‘발전적’으로 만들어간다는 설득과 대화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권은 소수 정권이다. 이번 대선의 투표율 72%와 득표율 48.91%는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정도만이 그의 지지세력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의회는 여소야대이고 집권당에선 비주류 출신이다. 안팎으로 어렵다. 자칫하면 ‘물 정권’이 될 여지도 있다.
제아무리 훌륭한 개혁정책을 내놓아도 국회의 동의를 구하고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개혁이 추진되고,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 거론되며, 5년 단임 대통령제의 개편이 구상되고 있는 것도 그의 취약한 당내외 기반과 무관치 않다. 자칫하면 취임 초부터 노무현 당선자가 제1의 국정과제로 내건 정치개혁이 정략적 발상이란 논란에 휩싸일 수도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비교경험에서 볼 때 새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개혁전략은 포고령주의(decretism), 위임통치주의(mandatism), 의회주의(parliamentalism), 조합주의(corporatism) 등이 있다. 집권당이 소수당이어서 개혁입법의 국회 동의가 어려울 때 국가 수장이 직접 법령을 선포하는 것이 포고령주의다. 중남미의 민주화 과정에 흔히 나타난 현상이다. 위임통치주의는 의회의 동의와 무관하게 국가 수장이 개혁을 추진하는 경우다. ‘철의 여인’ 영국의 대처 전 수상은 절대적인 국민지지를 확신하고 위임통치주의를 애용했다. 집권당이 다수당인 경우엔 대화와 타협에 의해, 소수당인 경우엔 제휴와 연합에 의해 국가 수장이 국회 안에서 개혁정책을 심의하는 것이 의회주의다.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발견된다. 조합주의는 이익집단과 사회 부문 사이의 이해조정 방식으로 의회 바깥에서 이뤄진다. 이것은 과거 중남미에선 노조를 포섭하기 위해 악용됐고, 현재 서부 유럽에선 노사정 협조를 위해 활용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위임통치주의에 의존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조합주의를 편용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회 내에서 다수여당임에도 철저하게 위임통치주의에 의해 개혁을 밀어붙였다.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자만심이 그에게 위임통치주의의 허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의회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개혁추진 과정에서 법치가 빠지다 보니 여러 계층 집단 부문들 사이의 이해갈등을 추스르지 못하고 결국 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회 안에서 소수여당의 한계를 안고 노사합의라는 조합주의에 의해 개혁을 시도했다. 의회는 애초부터 경시됐다. ‘국민의 정부’라는 깃발 아래 그는 ‘제2건국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조합주의적 기제를 통해 사회동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합주의는 한편으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일부를 포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다수를 배제하는 모순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 정부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실착(失着)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의회주의를 무시하고 개혁이 성공할 수는 없다. 비록 국회 안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의회주의에 호소할 때 여야의 협조를 얻을 수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국민적 호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국회의 대의성과 정부의 책임성을 높여주는 관건이기도 하다.
소수 정권으로서 노무현 정권의 과제는 무엇보다 국민이 신뢰하는 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정책의 일관성과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껏 두 민간정권은 정직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았다. ‘문민정부’가 초기의 외환위기를 애써 감추려 한 것이나, ‘국민의 정부’ 아래 이뤄진 남북관계의 뒷거래가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시중에는 군사정권은 금방 탄로날 ‘새빨간 거짓말’을 했지만, 민간정권은 완전 오리발을 내미는 ‘하얀 거짓말’을 즐긴다는 야유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비위나 비리는 언젠가 밝혀지게 돼 있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노무현 정권은 지지기반이 넓지 않지만 특정 정파나 지역, 세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이점을 적극 살려 국민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정책을 내놓는다면 더 좋고 나은 정부가 될 수 있다.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기보다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정부를 만드는 것이 사회통합을 위한 지름길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국내외 환경은 매우 어렵다. 걸프전의 재발, 국제 유가 상승, 세계 경기 하락 등 국제정세의 불안요소가 늘고 있으며, 빈부격차 확대, 가계부채 증가, 보혁갈등 심화 등 국내상황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특히 북핵 위기로 인한 북미 갈등 아래 전통적인 한미공조 관계에 금이 가면서 안보위기가 경제위기에 중첩될 위험마저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개혁을 통한 변화 이전에 위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안보위기나 경제위기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위기를 사전에 차단하거나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는 도상계획과 예비훈련을 준비해둬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훌륭한 지침이다.
새 정부는 김대중 정권이 남긴 여러 미결과제를 처리해야 한다. 구조조정도 보완해야 하고 남북대화도 조율해야 한다. 구조조정 와중에서 늘어난 대외의존과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대응이 요구된다. 상호주의 원칙이 훼손되고 있는 남북관계도 교류와 대화의 폭을 강화해 대북정책에서 견제와 균형을 취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선공약인 신행정수도 건설은 막대한 예산이 드는 것으로 조속한 시일 안에 재고돼야 한다. 지금까지 제2의 수도건설에 성공한 외국의 사례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중부권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은 통일시대에 역행하는 행위다. 국토 균형발전의 맥락에서 해결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자칫하면 신행정수도 건설의 적실성을 둘러싼 공방으로 집권 5년을 소비할 공산도 없지 않다.
돌이켜 보면, 19세기말 서세동점의 시기 한중일 동양 3국에 청의 이홍장,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조선의 이흥선 등 삼걸(三傑)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을 돌아보고 새로운 문물을 체험한 뒤 근대화를 서두른 정치인이고, 이홍장은 상해에서 서양 함대의 무력시위를 보고 군사력 증강에 힘쓴 군인이며, 이흥선은 직·간접의 국제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세계의 변화를 외면하고 쇄국을 통해 개혁을 시도한 왕족이다.
공교롭게도 일본만이 구미열강에 의한 침탈을 벗어난 반면, 중국은 그들에 의해 반(半)식민지로 전락하였고, 한국은 후발(後發) 제국주의국가인 일본에 의해 식민화됐다. 이 지나온 역사의 명암에 비춰 자주외교와 국방, 경제를 위해서는 세계의 변화와 동향에 대한 적확한 인식과 통찰이 전제돼야 함을 알 수 있다.
지난 두 민간 정권의 국정수행 과정에 겪은 시행착오는 여러가지 교훈을 던져준다. 개혁을 추진하면서 과욕과 독단은 금물이며, 우선순위를 정하고 속도조절을 하라는 것이다.
개혁은 국가발전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날처럼 개혁을 위한 개혁 명분에 빠져 개혁지상주의와 개혁만능주의를 외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개혁과제는 현실적합성과 실현가능성를 부단히 평가하면서 화급하고 중요한 것부터 점진적이고 탄력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권의 근시안적 이해를 넘어 최소한 반세기를 심모원려(深謀遠慮)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안목과 비전이 긴요하다. 특히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킴으로써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새 정부가 개혁작업을 원활하게 하려면 인적청산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수직적 정권이동의 속성상 인적청산이 쉽지 않다. 주도세력의 교체에 무게를 두겠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생각은 인적청산의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차기 정부는 급진개혁을 원하는 진보진영과 그것을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미 포위되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아우르는 탕평(蕩平)에 의해 좌우 양극단을 중화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일종의 자유주의적-진보적 민주대(大)연합이다.
기구개편은 현재로선 그 전망이 흐리다. 지난 정부에서 두 차례에 걸친 정부조직 개편이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시도하기에는 명분과 자원이 부족하다. 결국 당분간 현 정부조직에서 권한 위임과 기능 재조정을 통해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행정과 관리를 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새 정부에 대한 기대는 정책쇄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구화 정보화 개방화 추세에 걸맞게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정책들을 개진해야 한다. 기존의 잘못된 것을 수정해 좀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제시한 차기 정부의 10대 국정과제만 해도 이를 일방적으로 국민에게 제시하기보다 먼저 그것이 국회에서 심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정과제는 한낱 미사여구로 포장된 정권구호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인물도 바꾸고 시스템도 고쳐야 한다
이제 ‘3김정치’는 물리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3김정치’의 유산과 폐해는 깊다. 지역과 보스를 연고로 한 정치는 정책과 대중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새 정부의 미래는 ‘3김정치’를 뛰어넘는 인적청산과 정책쇄신을 통해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한국사회의 패러다임 변화에 걸맞게 원칙과 상식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국가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새로운 국가관리 시스템만이 세계화와 지방화시대에 더욱 다원화·이질화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이해를 대변하고 갈등조정을 원활히 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