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 혼란스런 영국 땅에 태어나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의 삶을 살다 간 토머스 모어.
- 그가 꿈꾼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인가, ‘어디엔가 있는 곳’인가.
그런 가운데 ‘유토피아 블루스’라는 영화를 보았다. 스위스의 10대 소년이 공부에 지쳐 유토피아를 노래하는 밴드를 만들려다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이야기다. 상영이 끝난 뒤 감독은 영화가 실화를 근거로 한 것이며, 실제 주인공 소년은 자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를 자살로 끝맺지 않았다. 소년의 노래처럼 그래도 아직 유토피아는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거꾸로 매달려 본 세상
그런 아이들이 문제아일까? 그렇다면 나도 문제아였다. 나도 10대에 정신병원에 끌려간 적이 있다. 30여 년 전, 빈부갈등을 욕하는 글을 썼다고 해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그때 잘못되었다면 나는 정신병자로 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땐 나 같은 학생은 예외에 속했다. 지금은 공부나 왕따 등으로 인해 더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정말 많은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을 강요당해 죽어가고 있다. 죽지 못해 어른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리라.
몇 달 전 아나키즘학회에서 권력도, 자본도, 종교도 없는 세상을 노래한 존 레논의 ‘이매진’이라는 노래를 소개했더니 한 기자가 “그런 내용인 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어디 그 노래만 그런가.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이었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도 사실은 유토피아를 노래한 것이다. 어디 노래만 그런가. 산더미 같은 시와 소설, 책들이 있지 않은가. 유토피아가 죽었다고? 천만에! 살기 힘든 세상에, 더욱 더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 어떻게 유토피아를 향한 외침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영화 ‘유토피아 블루스’는 주인공이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해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거꾸로 세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인공은 현실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까지 거꾸로 매달린다. 영화관을 나와 다시 역동적인 인파에 파묻히자 그 인파 모두 어쩌면 나처럼 좋은 영화에 굶주린 불쌍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의 며칠이 나나 그들에겐 어렵게 찾은 유토피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토피아가 정말 있다면 누구나 찾고 싶으리라. 그러나 중국의 유토피아로 불린 선경(仙境) ‘무릉도원’은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다. 일찍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었으나, 그저 희귀식물이 많은 큰 숲일 뿐이어선지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부근의 장가계는 이름난 관광지로 알려져 있으나, 무릉도원은 그렇지도 않다. 사실 도연명(陶淵明)이 노래한 무릉도원도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점 외에는 여느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지금 그곳은 아무런 특징 없는 중국의 시골마을일 뿐이다. 그래서 관광지가 되지 못한 것일 게다. 물론 관광지가 아닌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국가 유토피아’의 낡은 세계
도연명이 노래한 무릉도원이 유토피아일 수 있음은, 뒤에 왕안석(王安石)이 노래했듯 지배자의 권력이 미치지 않고 계급 없는 자급자족의 시골로 평화롭고 세금이 없었던 때문이다. 이는 중국 민중의 최대 문제가 세금이었음을 말해준다. 도연명이 산 4세기 전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없는 곳이 아닌가.
물론 도연명의 시는 유토피아를 추구한다기보다 마음속에 있는 유심(遊心) 또는 아예 무심(無心)을 찬양한 것일 터이므로 세금 없는 유토피아 운운하는 것은 유심 또는 무심의 시인들에게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무릉도원은 차라리 놀이토피아 또는 놀이공원일 것이다. 영화 ‘넘버 쓰리’의 조연 ‘랭보’처럼. 지금 그런 류의 ‘토피아’들은 너무나 많다. 머니토피아, 쇼핑토피아, 섹스토피아, 출세토피아, 권력토피아, 폭력토피아 등등등.
중국에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로 유교적 이상국가가 있었다. 요순(堯舜) 이래 이상적 왕이 다스리는 중앙집권의 관료제도에 의해 예와 법이 완비되고 계급이 분화된 인공국가가 그것이다. 이는 청대 말 강유위(康有爲)의 대동(大同)사회에까지 이어졌는데, 우리 실학자들 또한 그런 유토피아를 추구했다. 지금에 와서 대동이란 대학의 축제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배자와 계급이 없는 무릉도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독재자 왕의 계급 국가다.
이런 전통은 서양에도 존재한다.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서양사상은 바로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이래 유토피아는 끝났다고 여겨졌다. 반대로 그후 세계는 IT혁명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국경을 넘어 모든 차이를 해소하는 새로운 인터넷 전자 유토피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IT혁명의 주체란 국적도, 소유관계도, 규모도 알 수 없이 다만 ‘유통만을 기다리는 화폐 축적’인 지구 규모의 자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인터넷, 이메일, 핸드폰으로 상징되는 IT혁명은 인간관계를 정보 교환으로 바꾸고, 정보의 가속화 및 원격화와 함께 정보유통 범위를 제한시킨다. 아울러 가족붕괴, 학교붕괴, 사교육 증대, 공기업과 대학의 민영화, 자본에 대한 규제의 완화, 빈부 갈등의 심화, 외국인과 여성을 포함한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 등을 낳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다.
이를 그럴듯하게 신자유주의라 부르지만 미국을 모델로 한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군사력과 그 지배를 요구하는 막강한 국가권력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또 이는 가부장적 이성의 복권, 상징계의 회복, 국가 통일원리의 재구축이라는,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낡은 국가 유토피아의 복사판에 불과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영원한 미완성의 혁명
최근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데리다가 주장하는 권력화하지 않은, 환대·정의·책임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 연대를 향한 꿈이다. 또는 리피에츠가 주장하는, 생산력 발전을 부정하고 개방·연대·관용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영원한 미완성 혁명으로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유토피아론이야말로 유토피아란 말을 지은 르네상스인 토머스 모어(1478~1535)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라 생각한다. 모어는 상대적이고 관용적이며 다원적인 르네상스 유토피아의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여름 유럽 여행의 마지막을 벨기에에서 보냈다. 그곳 앤트워프에는 우리에게 ‘플란더스의 개’라는 동화로 잘 알려진, 루벤스의 그림이 걸린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동화 속 가난한 소년과 개는 그 그림 앞에서 꼭 껴안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지금의 앤트워프는 두 생명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슬픈 세기말의 분위기와는 달리, 화려한 국제도시로서 거대한 건축물들을 자랑한다. 소년에게 루벤스의 그림은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그릴 수 없었던 가난한 소년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1516년 앤트워프에서 쓰여졌다. ‘유토피아’는 1515년, 양모 수출 금지령을 내린 헨리 8세의 명령으로 화자(話者)가 양모 무역협상을 하기 위해 브뤼지에 가게 됐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브뤼지는 베네치아가 동방무역의 중심지인 것에 대응해 유럽·러시아·스칸디나비아 무역의 중심지, 즉 북부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브뤼지에는 모어에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모어는 루벤스의 그림이 걸린 대성당에서 친구의 소개로, 항해 도중 본 유토피아 섬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유토피아가 브라질에서 인도 캘커타로 향하는 항로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그 항로에 그런 도시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그야말로 상상에 불과했다. 모어의 ‘유토피아’가 당시 항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모어의 상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형 전후 모어의 삶을 그린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의 한 장면
‘유토피아’는 영국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토피아는 54개의 도시로 이루어졌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모어 당시 영국에 54개 주가 있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그밖에도 당시의 영국, 런던, 템스강을 연상시키는 내용이 많다. 물론 그런 부분은 지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당시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던 영국을 유토피아화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일컬어지나,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다 보면 오히려 ‘어딘가에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묘사가 현실적이다. 여기서 현실적이라 함은 거기 쓰인 현실비판이 너무나도 박진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어의 친구였던 에라스무스는 그 책이 ‘국가악의 근원’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흔히 그 책이 가공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간접 비판했다고 보나, 나는 오히려 실재의 영국 혹은 유럽을 소재 삼아 그 현실을 직접 비판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리 생각지 않았고, 한 발 더 나아가 모어가 말한 항로에 유토피아가 실재한다고 믿어, 교황에게 그 섬에 포교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청원을 내기도 했다. 또 수많은 탐험가들이 유토피아 섬을 찾아 항해를 떠났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에 그려진 이상사회를 신대륙에 세우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유토피아’ 이전에는 그만큼 구체적으로 묘사된 이상사회가 없었다. ‘유토피아’는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청사진으로서 거의 완벽했다. 그러나 신대륙에 ‘유토피아’적 사회를 구현하려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나는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있는 곳’이 아니라, 모어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하는 곳’, 즉 영국과 유럽의 이상을 그린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그가 그린 이상사회는 바로 르네상스 사회의 지향이며 이상적 인간이란 바로 르네상스 인간의 지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모어야말로 가장 르네상스적인 인간이었다.
‘양이 사람을 먹어치우다’
모어를 더욱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보게 하는 점은, 그 스스로 유토피아를 절대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선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 있다 해서, 그를 완전히 사악한 것으로 생각지는 말라. 모든 사람이 선해지지 않는 한 모든 일이 만족스럽게 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각들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실현되지 못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에 대한 노래가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모어 이전 르네상스의 터전인 이탈리아에서는 유토피아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인은 현실에의 저항이나 부정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현실적이라 함은,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에 밀착했다는 의미에서다. 마키아벨리나 미켈란젤로처럼 현실 비판을 했다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 긍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향으로서의 유토피아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현실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위기’는 아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인의 시야가 좁고 폐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 중심의 무역에 치중할 뿐, 그 이상의 통상 확대를 꾀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스코 다 가마(1469~1524)가 1498년 희망봉을 도는 신항로를 개척해 인도와 무역을 시작하자 이탈리아 상인들은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세계의 중심은 유럽 중부로 옮겨갔다. 16세기, 이미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반면 모어가 산 16세기 영국은 가톨릭과 봉건제가 온존하며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막 들어선 이탈리아와 달리, 오랜 제도와 관습이 급격히 해체된 격동의 사회였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 엔클로저 운동이 일어났고, 봉건지배집단은 급격히 해체돼 상당수가 빈민이나 도둑으로 전락해 있었다. 즉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가운데 수많은 모순과 해악,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14세기 이래 모직물공업이 급속 발전하면서 15세기에는 당시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플랑드르 모직물공업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쓴 플랑드르로 가게 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양모 수요가 늘고 가격이 높아지자 토지는 모두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변해 그야말로 양이 사람을 먹어치웠다. 농토를 잃은 영세 농민들은 정처없이 유랑하는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또한 그동안 국왕에 충성해오던 봉건영주나 기사, 그 부속 집단은 몰락해 부랑자나 도적이 됐고 대신 새로운 군대가 만들어졌다.
도둑이 들끓고 치안도 문란해졌으나 정부의 대책은 극단적인 처벌뿐이었다. 특히 부랑자를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노동법은 노인, 병자를 제외한 걸인을 참혹하게 처벌하는 반노동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부랑자와 걸인은 늘어만 갔다.
모어는 1478년 런던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에 옥스퍼드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신학을 공부했으나, 친구인 에라스무스에게 “부정한 사제가 되느니 정숙한 남편이 되겠다”고 하곤 사제의 길을 포기한다. 그후 아버지의 종용으로 법을 공부해 24세에 변호사가 되고 결혼도 한다.
모어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으로 법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과 예술에 관심을 가진 전인(全人)이자, 주체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법학 종용에 대해서도 의절까지 각오할 만큼 저항했다. 어려서부터 성 프란체스코를 숭상한 그가 사제직을 포기한 것도 4년간의 철저한 수도원 경험 이후 평신도로 남는 것이 신과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때문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아내를 직접 가르쳐 훌륭한 교양인으로 변모시켰다. 모어는 일찍이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라스무스는 모어의 집에서 ‘바보 예찬’을 완성했다. 법률가가 된 후에도 모어는 수도사 같은 생활을 지속했으며 거친 모직 옷과 절제된 식사 등 ‘유토피아’에서 그린 생활을 그대로 실천했다. ‘유토피아’의 일상생활은 사실 모어의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덕군자는 아니었다. 그의 간소한 의식주는 ‘순수한 기쁨’을 위한 실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그 기쁨을 위해 육체노동을 즐겼으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도 즐거움을 끌어낼 줄 알았다.
모어는 또한 끊임없는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이국의 풍물들로 집을 장식하고 정원에는 먼 나라에서 온 진귀한 동식물을 옮겨놓았다. 그의 집에는 도서실과 미술관, 예배당이 있었으나 그것은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어는 생계 유지와 휴머니스트로서의 욕구 충족을 위해 1504년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헨리 7세의 과중한 세금 부과안에 반대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의원직을 사퇴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이유로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국왕은 자기 재산만 관리하면 되지 사람들에게 세금을 많이 받아내 전쟁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509년, 그는 변호사로서 런던의 상인들에 고용돼 그들과 앤트워프 상인 대표 간의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그가 상인들에게 반감을 가졌음은 ‘유토피아’에 나오는 자본가 비판과 공산주의 찬양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휴머니스트로서 학구적인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를 종래와는 다른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방법으로 해석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후에 ‘유토피아’의 토대가 되었다.
상인들에 실망한 그는 1510년(32세)부터 런던의 민선행정관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판관이자 빈민의 보호자로서 런던 시민의 존경을 받았다. 1510년 모어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로서 모어의 귀감이 된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전기를 번역했으며, 1513~18년에는 ‘리처드 3세전(傳)’을 써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을 확립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모어의 해석을 많이 참고한 것이다.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 자르라”
1515년 모어는 영국-플랑드르 통상조약의 개정을 위한 협상 대표로 임명돼 브뤼지에 갔다 앤트워프에서 ‘유토피아’를 완성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1516년(38세)부터 국왕의 자문관으로 일했고, 1517년 5월 런던 체류 외국인에 대한 시민의 공격이 문제가 되자 이를 수습하려 노력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제기된 무수한 소송들 또한 평화와 개혁이라는 휴머니즘에 입각해 처리했다.
1515년부터 에라스무스가 성서에 입각한 새로운 신학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그리스 고전 연구와 성서 번역을 장려하자, 모어는 시와 공개서한을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에라스무스는 유럽의 모든 휴머니스트들에게 모어를 유럽 지성의 본보기로 소개했다.
1520년경 그는 재무차관이 되었으나 재무부 일 외에도 외국사절의 영접, 조약의 기초, 대법관에 대한 국왕의 답변서 작성 등 헨리 8세의 막중한 신하로 일했다. 특히 종교개혁 논쟁에 뛰어들어 헨리 8세를 위해, 배타적인 루터에 반대하는 여러 글을 썼다.
모어의 죽음을 부른 헨리 8세의 이혼, 앤 보린과의 재혼과 파경을 다룬 영화 ‘천일의 앤’
처형 직전 최후 진술에서 모어는 “내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왕의 이혼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조차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여기가 내 집보다 천국이지 않소”라며 아내를 위로했고, “만일 내가 하숙생활에 이러쿵저러쿵 하거든 나를 쫓아내시구려” 하고 감옥 간수를 달랬다. 사형집행인에게는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소.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시오. 내려올 때는 나 혼자 잘 내려올 테니까” “힘을 내시오. 당신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시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자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처형은 유럽을 경악시켰고, 신교 국가들까지 그 정당성에 의구심을 가졌다. 에라스무스는 모어가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졌다고 애도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가 굳은 신념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가 상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왕권이나 교회에 대해서도 무조건 충성을 바친 인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유토피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관용과 다원의 세계
예컨대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왕에 대한 충성이 종살이(servitude)가 아니라 봉사(service)라는 주장에 대해, 그 두 단어는 음절이 하나 다른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며, 자신은 ‘저 좋을 대로’ 산다고 답한다. ‘저 좋을 대로’란 당시 르네상스인의 모토가 된, 키케로가 말한 자유 개념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따를 뿐 부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 마키아벨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군주에 대해 명예롭고 평화적인 일이 아닌 전쟁 수행에만 몰두하여 ‘모든 수단을 다해 어떻게 죄 없는 나라를 쳐서 먹느냐’에만 광분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왕의 자문관에게도 ‘왕의 총신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아부하며, 그들이 말하는 형편없이 바보 같은 소리조차 옳다고 알랑거린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모어는 당시 영국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가 다 그랬듯 10대 시절 옥스퍼드에서 그리스 고전을 공부했다. 그 고전 중 하나가 플라톤의 ‘국가’였음은 틀림없다. 우리는 이를 독일이나 일본에서와 같이 ‘국가’로 번역하나, 영미나 프랑스에서는 ‘공화제’로 번역함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유토피아의 인구는 5000명 가량이었으니 아예 ‘마을’ 또는 ‘도시’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플라톤과 모어 사이에는 2000년이라는 긴 시간의 장벽이 존재한다. 그 사이 모어가 강의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보통 ‘신국’으로 번역되나 최근에는 ‘신의 도시’라는 제목을 쓰기도 함. 내용상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옳다)’가 쓰여졌으나, 이는 로마를 비판한 책이지 유토피아에 대한 구상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그 2000년 동안에도 유토피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의 나라’로서 유토피아는 중세를 통해 계속 존재했다. 특히 천년왕국에 대한 민중들의 희망은 끝없이 이어졌다. 단 그것은 루이스 멈포드가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도피의 유토피아’라 부른 것으로서, 이른바 ‘재건의 유토피아’와는 다른 것이었다.
고전적인 ‘재건의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이 플라톤의 ‘국가’와 모어의 ‘유토피아’다. 전자는 인간성을 불변의 것으로 전제하고, 그 통찰에 근거해 현명한 입법자인 철인왕(哲人王)이 정치를 하면 국가의 영구 존속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는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이념을 구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모어는 철인왕 같은 통치자에 관심이 없다. 인간성을 완벽하게 통찰하는 지도자는 처음부터 아예 전제하지 않는다. 모어 시대에 루터는 신앙만을 강조했고, 마키아벨리는 힘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루터는 신앙과 권력을 분리시키되 군주에의 복종을 주장한 점에서 마키아벨리와 다름이 없었다.
이에 비해 모어는 도덕과 권력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기독교를 정치 차원의 도덕적 규범으로 재생시키고자 했으나, 한편으로는 관용과 종교의 자유를 명백하게 인정했다. 관용과 자유야말로 유토피아의 정신적 토대다. 유토피아의 최고 도덕은 이웃의 불행을 덜어주는 선행이고,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인 것이다.
따라서 모어를 비롯한 르네상스 유토피안에게는 재생을 향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이 무엇보다 중시됐다. 플라톤의 인간은 폴리스에 종속된 부품에 불과하나, 유토피안에게 인간은 부속품이 아닌 교육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다. 아울러 모어는 정의를 위해 사유재산을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사유재산은 평등하고 공평한 분배를 방해하며, 빈부차별을 낳고, 화폐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모든 악덕·해악·알력이 생겨 건전한 정신과 육체의 쾌락을 향수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역시 공동체 전체의 입장에서 남녀의 결합을 국가가 규제하고, 우생학적 성교와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모어는 서로 완전히 이해한 남녀가 자신의 판단으로 결혼하는 일부일처제를 주장했다. 무엇보다 플라톤과 모어의 결정적 차이는 모어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전쟁을 거부한 점이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 에라스무스의 그것과 일치하는 관용과 다원의 사상이다.
도둑질 했다고 사형 당하는 사람들
‘유토피아’는 1, 2부로 구성된다. 제1부는 현실비판, 제2부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다.
제1부에 나오는 현실비판의 논점은 네 가지다.
첫째, 거지·부랑자·도적이 증대하는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모어는 그것이 농촌에서 봉건 영주가 몰락하고 농민이 추방됨에 따른 것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봉건 영주의 시종이 전투력의 근간이므로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플라톤식 군국주의 주장에 대해, 모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듯 군인과 도둑은 같은 것으로 상비군은 유해 무익하고, 기술자나 농민이 더 훌륭한 전투력일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이어 모어는 저 유명한 ‘양이 사람을 먹어치운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농장과 농촌을 파괴하지 말고 회복시키거나,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땅을 양도하는 법을 만들고, 자본가의 매점 및 독점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정부의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헨리 8세가 다스린 기간 동안 절도죄로 사형을 당한 사람만 1만2000명이 넘었다. 모어는 “도둑을 그렇게 벌하는 방식이 공평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못되기 때문”에 극형에도 불구하고 절도는 더욱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모어는 절도에 대해서는 노동형이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노동 이외에는 어떤 다른 고통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 과도한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한다. 빈곤한 노동자의 불안한 생활과 지주·상인·절대왕정에 기생하는 자들의 안일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대비하고 그것을 ‘사회적 불의’로 규탄한다. 나아가 모어는 부자는 그 부정 불법한 행위를 정의의 이름으로, 즉 법의 이름으로 부여받는다고 비판한다.
넷째,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모어는 화폐에 대한 욕망, 화폐의 사용, 그리고 사유재산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당시 국왕과 일부 귀족 및 지주의 무한한 소유가 법과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을 우려한 것이었지 사유재산 자체의 폐지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컨대 모어가 유토피아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옷을 입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 지배계층의 화려한 복장을 풍자한 것일 뿐 중국식 인민복을 찬양한 것이 아니었다 하겠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폭 200마일의 섬으로, 54개 도시로 구성돼 있다. 도시와 도시 사이는 아무리 멀어도 걸어서 하루면 닿는다. 경제기반은 농업이며 유토피아인은 모두 농업에 정통하다. 하나의 농장 또는 세대에는 40인 미만이 산다. 농촌에 2년을 살면 매년 20명씩 도시로 돌아가고 대신 20명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간다. 농가에서는 여러 동물을 키우며, 필요한 물건은 도시에서 무료로 구한다.
또한 여러 직업이 인정되고 그 직업 사이에는 귀천이 없어서 노동을 노예의 몫으로 한 플라톤의 경우보다도 훨씬 인간적이다. 군주나 귀족을 비롯한 모든 인간은 노동을 하므로 노동시간이 짧아져 오전 오후 3시간씩 모두 6시간이면 충분하고, 8시간 동안 수면을 취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로이 행동하는데 그 시간은 주로 지적 추구에 바쳐진다.
할 일이 없을 경우 노동시간은 더욱 줄어든다. 이처럼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노동을 하게 함은 그 사회의 지상목표에 따른 것이다. “사회적 필요가 허락하는 데까지 모든 시민이 육체 노동에서 벗어나 정신세계의 자유로운 함양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농업은 필수로 배우고, 그밖에 하나 이상의 공업 기술을 반드시 익히도록 되어 있다. 흔히 모어의 사상을 농업 중심의 회고조라 비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치 풍조를 비판하나 이를 회고조로 보아서는 안 된다. 도시의 집은 사유가 아니므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10년마다 집을 서로 바꾸며, 사람들은 정원 가꾸기를 즐긴다. 그들은 식사를 함께하는 등 공동생활을 하며 허식과 사치를 배척한다.
30가구당 1명의 공무원을 뽑는데, 10명의 공무원에 대해 1명씩 대표가 있어 200명의 대표가 각각 4명의 시장을 선출한다. 공무원 임기는 1년이며 시장은 독재가 아닌 한 종신이다. 각 도시에서는 3인의 시민 대표를 선발하는데 이들은 수도에 모여 회의를 한다.
모어의 도시는 뒤에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듯 전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도시의 기본 지역 인구는 400인 정도로 한정되며 마치 옥스퍼드대학처럼 생활을 함께한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법원은 없으나 병원은 있다.
모어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이상, 즉 현세적 행복의 긍정과 미래에의 희망, 공정한 ‘법 지배’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요구, 귀족의 태만과는 대조적인 노동의 미덕, 기독교적 윤리와 인문주의적 교양의 융합에서 생긴 인간성의 이념을 주장했다.
모어가 죽고 나서 반세기 뒤인 1603년, 베이컨이 태어났다. 그 역시 모어처럼 법률가, 궁정신하, 정치가, 철학자로 살았고 특히 모어의 ‘유토피아’에 필적하는 ‘뉴 애틀랜티스’를 썼다. 그러나 그와 모어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그는 인간이 자연을 정당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모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베이컨의 ‘뉴 애틀랜티스’는 유토피아라기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우리의 대덕단지와 같은 과학연구단지다.
‘뉴 애틀랜티스’ 와 실리콘밸리
베이컨은 순수하고 경건한 모어와 달리 야심에 가득 찬 출세주의자였다. 법무장관에 올라선 후에도 왕권 옹호파로서 법과 법관의 독립을 주장하는 개혁 세력을 물리치고 더욱 출세가도를 달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주장한 그의 사상도 어쩌면 그런 야욕의 결과였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점도 베이컨을 르네상스인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르네상스 유토피아 연구자인 김영한은 ‘르네상스의 유토피아사상’에서, 모어의 기독교적 공유제 유토피아와 베이컨의 과학적 유토피아는 공통적으로 기독교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는 서로 조화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며 이를 판소피아(Pansophia)의 꿈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대립하는 유토피아 사상의 흐름을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판소피아란 ‘백과사전식’이라는 뜻인데 그것을 모어와 베이컨의 사상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미 멈포드는 베이컨의 과학적 유토피아를 졸렬한 것이라 평가했고, 에콜로지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적 논의에 있어서도 자연지배를 주장한 점으로 인해 비판받고 있다.
김영한은 해방 이후 안정과 자유 등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조화를 추구하는 유토피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안정, 자유에 대한 양자택일을 조화시키는 사고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사고이지 현실의 대립을 조화시키려는 사고가 아니다. 나는 다시금 모어의 유토피아를 통해 우리도 다양성·상대성·관용성에 근거한 환대·정의·책임의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공동체와의 관계를 상실한 과학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의 문제점이라면 과학을 경시한 것일 게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과학은 교양과 분리되지 않았다고 봄이 옳다. 베이컨 이래 과학과 교양은 분리되고 18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산업혁명을 낳았으나, 과학은 그것으로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됐다. 왜냐하면 과학이 현실에 입각하지 않는 한 그 가치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이 각 분야에서 고립되어 상호관련을 상실하면 전문가는 사회로부터 유리돼 개인적 세계로 매몰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는 수도원에 갇힌 종교와 같이 미신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현재 과학은 공동체와의 관계를 상실한 탓으로 무질서한 상태에 있고, 공동체에 주는 이익보다 손실이 더욱 크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과학과 교양이 명확히 구분되기까지 그 둘은 인간의 지적 활동으로 함께 진행됐다. 예컨대 르네상스기의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예술가이자 기술자이며 과학자였다. 모어에게는 그런 전인적 측면보다 정치가·법률가·사회개혁가로서의 전인적 면모가 더욱 두드러지나, 그는 예술이나 과학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고 그 분리 또한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