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한나라·SK 100억 ‘거래’ 막전막후

지지율 역전, 그래도 SK는 ‘풀 베팅’

  • 글: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eu@donga.com

    입력2003-11-25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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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은 ‘뻗치기’ 전략으로 돌아섰다. SK비자금 외 대선자금 문제는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검찰이 재주껏 찾아내 보라”는 것이다. 비자금 100억원을 주고받은 SK와 한나라당의 속사정, 한나라당이 대선자금 공개 거부로 돌아선 배경을 추적했다.
    한나라·SK 100억 ‘거래’ 막전막후
    새벽 3시 탤런트 출신의 재벌가 며느리 고현정씨가 1억7000만원짜리 포르쉐 승용차를 타고 대리 운전사라는 남자와 함께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한강 둔치에 갔다가 승용차를 도난당한 뒤 되찾은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네티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특검을 해야 될 이유가 너무 많다. 한나라당은 즉각 특검을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회장 이영로씨’→(후원회장인 것 증명 안 됐다)→‘노무현 대통령 후원회장 역할을 한 이영로씨’→(너무 길다)→‘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고교 선배 이영로씨’→(고교 선배 중에 동명이인 있으면…)→‘부산 거주 이영로씨’→(지금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인 이영로씨’→ (이걸로 합시다)…. 최도술씨 비리관련 특검법안 문구를 놓고 국회 법사위에서 여·야가 마침내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 장면은 강금실 법무장관의 웃음소리와 함께 TV로 중계됐다.

    모 방송 여론조사결과 특검법은 5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특검법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여론도 만만찮다. ‘한나라당이 주도하고 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근 관련 특검법은 희화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검이 성사된다 해도 ‘SK 100억원 원죄’는 그대로다. 한나라당은 SK 100억원을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 끝까지 잡아뗐다. 첫 번째 실망이었다. 이후에도 검찰출두 등 ‘사소한 사안’을 두고 검찰과 티격태격했다. 두 번째 실망이었다. 이어 한나라당은 “대선자금 전모를 공개하…아니, 취소. 취소”라고 했다(11월6일). 세 번째 실망이었다.

    김영일 전 사무총장은 “SK 이외 기업에선 불법 대선자금을 안 받았다”고 선언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도 같은 주장. “검찰이 재주껏 찾아내 보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다른 기업이 준 비자금을 검찰이 더 밝혀낸다면 한나라당은 아마 또 사과할 것이다. 검찰이 못 찾아낸다면 한나라당은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검찰과 내기를 하고 있다. 이회창그룹도 최병렬그룹도 이심전심인 듯하다. 왜 한나라당은 이런 결정을 했을까.



    삼각지에서 차 돌린 최대표

    2003년 10월초 들어 한나라당 윤여준 의원(여의도연구소장)은 자주 사색에 잠겼다. 그의 생각을 사로잡은 주제는 ‘지지율 30%’였다.

    ‘임기 초반 지지율 30%를 견뎌낼 재간이 있는 대통령은 없다. 더구나 측근 장관은 해임되고, 쓰고 싶은 사람은 인준 부결되었으니 노무현 대통령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언론은 적대적이고 국회는 특검을 하겠다며 고삐를 조여오고 있다. 노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뭔가를 계획하고 있을 텐데…그게 뭘까.’

    10월10일 노대통령은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의 SK 비자금 수수의혹과 관련해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윤의원은 무릎을 탁 쳤다. 대통령공보수석 출신으로, 청와대 생리를 잘 안다는 그도 미처 생각지 못한 전격적 카드였다.

    “최병렬 대표에게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주문하려고 했다.”

    윤의원의 말이다. 같은 시각, 최대표는 국방부 국정감사를 위해 서울 용산 삼각지까지 갔다가 재신임 발표를 접하고는 차를 돌려 여의도 당사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최대표는 차안에서 한 당직자와 통화를 했다. “노대통령이 말을 번복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가 올라왔다고 한다. 윤의원과는 정반대 건의였다. 최대표는 당사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에게 “국민투표가 재신임 방안”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눈 펑펑 올 땐 쓸지 말라”

    이후 한나라당은 ‘국민투표의 늪’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결국 국민투표가 성사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 사이 정국주도권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연이어 최돈웅 의원의 SK 비자금 100억원 수수라는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윤의원은 “재신임카드를 꺼낼 때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패키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청와대, 검찰은 강력히 부인하지만 한나라당 인사들은 대체적으로 그렇게 보고 있었다.

    SK 사태가 터지자마자 윤의원은 최대표를 찾아갔다. “대선자금 전모를 모두 공개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최대표는 “지금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대표는 11월13일 TV토론 발언에서 입장을 정리했다. 이날 최대표는 “100억원 이외 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개연성만 갖고 말할 수는 없다”면서 ‘플러스 알파’의 존재를 암시했다. 그러나 최대표는 “대선자금을 공개 하려 노력했으나 당시의 극소수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없다”며 공개 불가를 밝혔다.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눈이 펑펑 올 때는 쓸지 말고 그냥 맞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SK로부터 100억원을 받은 최돈웅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최의원의 운전기사가 전화를 받았다. “나도 최의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필요할 때 의원 쪽에서 연락이 온다고 했다. 대선 당시 최돈웅 의원으로부터 SK 돈을 건네받은 김영일 전 사무총장에게 물었다. 그가 검찰에 출두하기 직전이었다.

    -100억원을 모두 건네받은 것이 확실합니까.

    “재정국장이 100억원을 재정위원장실에 갖다 놨다고 보고해 왔으니 사실이겠지요.”

    -SK 이외 기업에서 불법적인 자금을 직접 받은 적이 있습니까.

    “SK 외 다른 기업에서 불법 자금을 받은 것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까.

    “다른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내가 모릅니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SK 이외 기업에서 불법 자금을 받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SK에서 받은 100억원은 어디에다 썼습니까.

    “선거운동에 모두 썼습니다.”

    검찰은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전 모의를 한 뒤 SK로부터 돈을 받았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이것이 입증될 경우 당시 한나라당 수뇌부 전체가 ‘공모’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모가 입증되지 않으면 김 전 총장은 최의원이 조성해온 돈을 (불법자금인 줄 알면서도) ‘토스’받은 것이 된다. ‘정치자금법’ 위반 정도다. 한나라당 일각에선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다”는 해석도 나왔다.

    “당에서 3000만원 내려왔다”

    현재로선 최돈웅 의원 개인의 판단에 따라 SK에서 돈 일부를 받아 한나라당에 먼저 갖다놓은 뒤 김 전 총장에겐 시차를 두고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이 경우 사전 공모 혐의가 불투명하다. 김 전 총장은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구속된 실무자(이재현 재정국장)는 풀어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김 전 총장이 책임질 일이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김 전 총장은 “100억원을 선거운동에 모두 썼다”고 말했다.

    모 신문은 익명의 한나라당 위원장 말을 빌려 “한나라당이 대선 직전 비자금을 지구당별로 수 억원씩 돌렸다”고 보도했다. 전국에 지구당이 200개가 넘는데 지구당 별로 수 억원씩 돌렸다면 지구당에 준 돈만 300억~400억원이 된다. 최병렬 대표 측근은 이에 대해 “과장된 보도”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비례대표인 A의원에게 물어봤다.

    -대선 때 중앙당으로부터 선거자금 받은 것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얼마 받았습니까.

    “수표로 300만원 받았습니다.”

    임태희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대선 때 중앙당이 각 지구당에 대선운동 하라고 돈을 내려보냈습니까.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실장은 한나라당 지지세가 높은 성남 분당지역구인데, 대선 때 얼마를 받았습니까.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2000년 총선 땐 중앙당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습니다. 통장으로 들어왔습니다.”

    한나라당은 대선 때 ‘조직선거’를 했다. 조직선거엔 돈이 많이 든다. 한나라당 지도부 한 인사는 “대선 때 여야 격전지에 지역구를 둔 일부 의원들은 실탄지원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사용 명세를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직선거엔 지구당과 직능특위 등이 동원됐다. 부국팀도 전국적으로 대규모 조직을 결성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회창 후보 대세론이 선거 막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각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꾸려진 직능특위는 수월하게 운영됐다.

    대선 기간 후보연설회 등 일정이 잡히면 인근 지구당들도 사람들을 모아 현장으로 보냈다. 전세버스를 동원하는 등 돈이 드는 일이었다. 지구당 별로 300개 정도의 통책, 반책 등 선거조직을 가동하는 데도 돈이 필요했다는 게 한나라당 전 지도부 인사들의 설명이었다.

    이 같은 선거운동은 선관위에 신고한 대선자금 사용명세에 일부는 들어있고 일부는 포함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대선 때 정책개발비 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의 당 지도부가 지원을 해주지 않아 서운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여러 군데 일을 벌여놓은 데가 많아 돈 들어갈 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100억이 더 들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SK가 돈 줄 무렵 판도 급변

    SK 돈 100억원은 2002년 11월11~26일 5번에 걸쳐 한나라당으로 옮겨졌다. 대다수 언론은 “후보단일화 성사 이전이어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SK가 거액을 한나라당에 베팅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돈이 전달된 시기는 이회창 후보가 당선 유력에서 낙선쪽으로 선회한 매우 긴박한 때였다. 당시(2002년 11월22일)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회창 후보는 이회창-노무현-정몽준 3자 대결에서만 1위를 차지했다. 반면 노-정 후보단일화가 성사될 경우 이후보는 단일후보가 누가 되든 모두 패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한달 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었다. 갤럽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2002년 10월27일엔 이회창 후보는 누가 단일후보가 되든 모두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한나라·SK 100억 ‘거래’ 막전막후

    SK로부터 100억원 비자금을 받은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11월10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법 표결에 참여한 뒤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나라당이 SK 돈을 받을 때인 11월14일 밤 노무현-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에 합의, 포장마차에서 ‘소주 러브 샷’을 하고 있었다. 후보단일화가 가시권에 접어든 시점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한나라당이 SK 돈 100억원의 마지막 잔금을 받기 이틀 전인 11월24일은 ‘노무현 단일후보’가 탄생한 날이었다. 이날 이회창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 5%포인트라는 비교적 큰 격차로 노무현 후보에게 마침내 역전당했고 그로부터 이틀 뒤 SK의 막대금이 한나라당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노-정 후보단일화는 대선의 판도를 뒤엎었다. 한나라당 선거캠프엔 비상이 걸렸다. 대기업들도 여론조사의 변화추이에 주목하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조직선거가 몸에 배어 있던 한나라당은 후보단일화바람을 조직선거로 잠재우려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급전이 많이 필요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SK 입장에선 당선이 불확실한 쪽으로 빠져들고 있는 후보진영에 100억원씩이나 준 셈이다. 돈이 급한 쪽은 한나라당이었지만 반대로 SK로선 ‘올인’의 위험부담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정황만 놓고 봤을 때 돈을 받은 쪽의 경우 ‘사전모의 가능성’, 돈을 준 쪽의 경우 ‘대가를 구체적으로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 무렵 한나라당이 SK 이외 기업들로부터도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을 개연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 S그룹 구조조정본부 핵심관계자 A씨의 설명이다. 먼저 “SK의 성장사를 살펴봐야 한다. 1990년대 고 최종현-손길승 투톱 체제의 SK는 석유공사, 한국이동통신 등 공기업을 인수해 유공, SK텔레콤을 설립함으로써 현재의 그룹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거대 공기업을 인수하는 데 있어 정치권과의 협력관계가 절대적이다. 즉, SK 고위층은 정치권과의 특별한 관계설정을 통해 회사를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2003년 11월13일 “대선 때 삼성, LG,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 5대 그룹으로부터 받은 공식 후원금이 45억원, 2003년 1년 동안 5대 기업에서 받은 후원금은 81억원”이라고 밝혔다. 이 부분도 실은 한나라당이 자발적으로 공개한 것이 아니었다. 이틀 전 일부 언론이 “한나라당은 2001년 5대 그룹에서 81억원의 공식 후원금을 받았다”는 검찰 내사결과를 보도하자 공개한 것일 뿐이다.

    한나라당은 11월6일 이상수 의원(열린 우리당)의 잦은 대선자금 공개에 대해 ‘대선자금 공개 쇼’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그런 쇼조차 하지 않는다. 대선자금 문제에 관한 한 한나라당은 검찰, 언론을 통해 드러난 부분만 시인하는 행보를 일관되게 취하고 있다.

    SK가 한나라당에 100억원의 비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난 경위를 살펴 보자.

    “운이 좋아 SK 100억 포착”

    다음은 S그룹 구조조정본부 핵심 관계자 A씨가 말하는 SK 100억 비자금 사태의 전말이다.

    “2002년 12월 (주)SK 최태원 회장의 지분 문제와 관련, SK C&C와 워커힐호텔간 주식 맞교환이 경제전문 인터넷사이트 ‘이데일리’에 의해 첫 보도됐다. 2003년 2월 검찰이 이 보도 내용을 단초로 최회장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SK사옥에 대한 전격적 압수수색을 했다. 공교롭게도 SK측이 자체적으로 작성해 놓은 분식회계 보고서가 고스란히 검찰 손에 들어갔다. 회계사 수십명이 동원되어 만든 기밀 문건으로 알고 있다. 검찰은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수사결과를 지체 없이 발표됐다. 최회장은 구속됐다.

    이를 계기로 검찰은 SK의 내부 회계 시스템에 대해 SK만큼 정확하고 자세히 알게 됐다. 검찰은 수개월 뒤 현대그룹 비자금 수사를 위해 김영완씨 계좌를 뒤지던 중 SK해운 협력사에서 김씨 계좌로 돈이 들어간 사실을 포착했다. SK 회계시스템에 대한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이 자금을 추적하면서 검찰은 SK해운 등이 분식회계로 23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적발해 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2300억원대 비자금 안에 한나라당에 제공한 100억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검찰은 SK측에 2300억원의 용처를 구체적으로 대라고 했을 것이고 SK측은 별 도리 없이 한나라당에 준 100억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돈을 줬다는 사실을 시인하면 돈 준 시점, 운반 방법, 동원된 인력 등 구체적 정황도 진술하게 되어 있어 최돈웅 의원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SK 분식회계 수사에서 한나라당 비자금 포착에 이르기까지 검찰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기밀 문건이 단 한번의 압수수색으로 검찰 손에 들어간 점, 공교롭게도 현대 비자금이 SK해운 비자금 문제로 연결된 점, 한나라당에 제공한 비자금이 하필 SK해운 비자금에 들어 있었던 점 등 검찰 수사엔 운도 많이 따랐다.

    검찰은 대선 비자금 수사와 관련, 돈을 준 기업에 대한 사면 가능성을 거론했다. 그러나 기업들이 쉽게 대선 비자금을 공개할지는 미지수다. A씨에 따르면 검찰이 정치자금법 위반을 사면해준다고 하더라도 대선 비자금 조성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분식회계-조세포탈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게 때문이다. 재계는 검찰을 방문해 “대선자금 수사도 좋지만 경제를 생각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SK사태는 특별히 검찰 수사가 개가를 올린 경우였고, 다른 기업들이 스스로 비자금을 고백할 가능성은 희박하며 정치자금 수사에 대한 재계의 억지력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화답하듯 한나라당은 대선 비자금 고백을 하지 않기로 사실상 결정한 것이다.

    SK비자금 사건이 터진 지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한나라당 지도부도 지난 대선자금의 불법사안에 대해 일부는 파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은 “아는 것만이라도 공개하자”고 했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김영일 전 총장이 SK외 불법자금 존재 여부에 대해 “없다”와 “모르겠다”사이를 오가는 것도 주목거리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 B씨는 “정당이 소속 당원의 개인비리를 조사해 폭로하는 것은 현실적, 도의적으로 참 어려운 일”이라고 호소했다.

    “일단 숨겨놓고 보자” 전략

    그러나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한나라당은 검찰 수사를 불신한다면서 왜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무엇을 밝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고실장은 “김영일 전 총장이 불법 대선 자금 사용을 지시한 메모를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메모 내용부터 공개해야 한다. 본인이 대강은 기억하고 있을 것 아니냐. 대선 자금의 실제 총 규모도 공개해야 한다. 불법자금이 당으로 유입되어 어떻게 사용됐는지도 회계책임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실장은 “한마디로, 몰라서 공개 못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에서 새로운 한나라당 비리가 터져 나올 공산도 있다.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한나라당이 먼저 요구해 돈을 줬다”고 밝힌 데 이어 “민주당에도 돈을 줬다”고 추가 폭로했다. 검찰 수사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인상이다. 손회장은 탈세혐의로 검찰에 고발되어 있는 상태다. 그는 검찰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다. 이런 정황에 비춰보면 그가 제3의 폭로를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론조사 결과는 한나라당에 이미 무서운 교훈을 던졌다. 대선 때 한나라당은 김대업씨의 병풍(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불법병역면제 의혹) 사건으로 검찰과 전면전을 치렀다. 결국 검찰은 병풍에 대해 “불법의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여론조사에서 ‘수사결과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응답은 67.7%, ‘납득한다’는 응답은 23.4%로 나왔다. 특히 20대, 30대의 75%가 ‘납득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반(反)한나라당 민심’은 더 커졌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전투(검찰 수사)에선 이기고, 전쟁(선거)에선 진 것이다. 대선 비자금 문제에서도 한나라당은 “단 한 가지라도 먼저 공개하지는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검찰이 SK이외 추가 비자금을 밝혀내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검찰이 또 다른 한나라당 비자금을 찾아낼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또다시 검찰과 구차한 내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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