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1993년까지 핵폭탄 5개를 이미 만들었으며 최소한 10개 제조를 목표로 하고 있다.” 1994년 7월,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간 대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시점에 터져나온 탈북자 강명도씨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했고, 서울 외교가에서는 ”안기부 내 보수파의 고의적인 플레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핵심관계자들은 이 날의 기자회견이 청와대의 직접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상상해보자.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서 한국 국가정보원이 북한 고위관계자의 망명을 발표하고, 이 망명자가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에 숨겨진 핵폭탄이 여러 개 있다”고 증언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연 2차 6자회담은 열릴 수 있을까. 평양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베이징과 워싱턴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더욱이 이 기자회견이 청와대의 직접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해빙 기류는 단숨에 사그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1994년 7월27일 북한에서 망명한 강명도씨(강성산 정무원 총리의 사위)와 조명철 김일성대 교수(조철준 전 건설부장(장관)의 아들)의 기자회견은 당시 상황에서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이었다. 북한 최고위급 인사들의 직계가족이 망명을 택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북한의 ‘과거 핵전력’이 초미의 관심사였던 시점에서 터져 나온 ‘핵폭탄 보유 증언’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기부 1특보 해임, 3국장 대기발령
우선 기자회견장에서 강명도씨가 했던 ‘핵폭탄 발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북한은 핵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으로 보느냐, 북한이 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강명도씨는 “1993년 10월 영변 핵시설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책임자 조문백으로부터 관련정보를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 5개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장거리미사일도 개발중인데 1994년 내에 실험에 성공할 것이며, 잘하면 핵폭탄도 10개까지 확보가 가능하다고 했다. 당초 목표는 20개였지만 최소한 10개만 만들면 이를 국제사회에 공개하고 유리한 위치에서 북미 회담이나 남북 회담에 임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최소한 핵탄두 10개가 완료될 때까지 김정일은 지연전술을 펼 것으로 생각한다.”
기자회견장은 발칵 뒤집어졌고 이 소식은 외신을 타고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이 다섯 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강씨 발언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나섰고, 미국 또한 “강씨의 발언을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며 의미를 축소했다.
정작 당황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 이튿날 청와대 관계자들은 “강씨의 발언은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정부의 종전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히며 진화에 나섰다. 문제의 기자회견을 준비한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고위관계자 역시 “강씨의 이야기는 제3자로부터 전문(傳聞)한 사항이고 이를 뒷받침할 다른 정보가 없어 현단계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첩보의 하나로 평가한다”며 “이 발언으로 안기부의 정보판단이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수선한 분위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듯 중요하지 않은 ‘첩보’라면 정부와 안기부는 왜 기자회견을 열어 분란을 일으켰느냐”는 비난이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쏟아졌다. 특히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한국측은 (강씨 등의)귀순사실은 물론 이에 대한 발표 및 회견계획도 우리측에 알려주지 않았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안기부가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통일원이나 외무부 등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 외교안보라인 간의 조율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높아졌다.
결국 청와대는 익명의 고위관계자 입을 통해 “대북 관련부처의 사전 의견조율을 보다 강화함으로써 더 이상 혼선이 빚어지지 않도록 할 방침”이라고 언론에 흘렸다. 김영삼 대통령이 관계기관 책임자들과 실무자들을 강하게 질책했다는 이야기도 보도됐다. 안기부 1특보가 사태에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고 담당간부인 3국장은 대기발령 조치를 받았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이로써 이른바 ‘기자회견 파동’은 안기부 내 정보관리 능력의 부재와 관계부처간 공조부족으로 인해 빚어진 ‘실수’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과연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9년이 지난 지금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과 정부 외교안보라인 구성원들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퍼즐의 한 조각을 꺼내놓는다. “강명도, 조명철의 기자회견은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흥미로운 증언이 그것이다.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북미 핵 협상에 반감을 갖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게 그 요지. 우선 당시 안기부 핵심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94년 7월18일로 기억한다. 해외에서 오랜 기간 안기부와 접촉했던 김일성대 경제학부 조명철 교수가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서울로 들어오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2개월 전에 귀순해 서울에 들어와 있던 강명도에 대해서는 청와대에 보고를 올린 터였다. 당시 청와대는 계속되는 북한 고위층 인사들의 망명으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비중이 큰 사건이었으므로 김덕 안기부장이 직접 보고하기 위해 관련파일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부장이었다. 대통령이 당장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사무실로 돌아올 틈도 없이 청와대에서 바로 전화부터 한 것이었다. ‘이미 넘어와 있는 강명도와 함께 조명철을 기자회견에 내보내면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뜻이라고 했다. 당혹스러웠다. 당초에는 강명도와 조명철 두 사람 모두 망명사실 비공개를 조건으로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동아일보’는 조명철씨의 귀순소식을 1면에서 특종으로 전한다. 안기부 관계자들과 보고를 받은 청와대 인사들 이외에는 알기 어려운 정보가 상당히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조명철의 이름과 나이, 신분, 성장배경, 아버지인 조철준 전 건설부 부장의 이력까지 담고 있었다. 보고라인에 있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흘리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기사였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그 전날 서울에 들어와 정신이 없었던 조명철씨였다. 현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통일국제협력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망명사실이 노출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도착한 다음날이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공개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기부 사람들의 설명이었다. ‘그럼 나는 그냥 돌아가겠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관계당국이 절대로 신분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서울행을 결심했는데, 입국한 다음날 바로 신문에 났으니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 방 먹일 수 있는 찬스’
기자회견 준비사실을 통고받은 강명도씨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당시 서울의 안가에 머물며 조사와 적응교육을 받고 있던 강씨도 망명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고 들어왔다. 요즈음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준비중이라는 강씨는 기자와의 국제전화통화에서 “망명한 지 2개월이 지났고, 알고 있는 사실은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모두 이야기했지만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것은 당초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갑자기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북핵문제 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피했다.
결국 일주일 남짓 지난 7월27일 조명철씨와 강명도씨는 기자회견장에 선다. 특히 조명철씨의 경우 망명 후 열흘도 지나지 않아 기자회견을 하게 됐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수 개월에 걸쳐 망명동기와 신분, 갖고 있는 정보 등을 조사하는 것이 당시 안기부의 귀순자 처리 과정이었다.
기자회견 전에 한 차례 만났다는 두 사람은 안기부 담당 직원들로부터 예상 질문지를 건네받았지만 구체적인 발언내용을 상의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본인의 뜻과는 달리 신분이 노출된 두 사람이 선뜻 기자회견 준비에 응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 조명철씨는 “기분도 나빴고 위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긴장했던 까닭에 기자회견장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이 때문에 기자들의 질문은 강명도씨에게 쏟아졌고, 강씨는 ‘핵폭탄 보유 발언’으로 기자회견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렇다면 기자회견을 강행함으로써 청와대가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1994년 7월의 한반도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해 봄 전쟁위기로 치닫던 북핵문제는 6월16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극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후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중단 위기에 놓였던 북미 대화는 우여곡절 끝에 8월5일 3단계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합의함으로써 상황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매우 난감했다. 예정돼 있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경호 책임자들이 상호 방문하던 시점에서 들려온 김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은, ‘남북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던 청와대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라인 고위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6월 이후 핵문제 협상은 북한과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한국은 거의 배제된 상태였다. 특히 7월초 합의의 당사자는 미국인 반면 경수로 건설비용 등 경제적인 부담은 대부분 한국이 지는 해결방안이 가시화되자 YS의 불만은 엄청났다. 초기에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 컸던 YS는 이 시기 미국으로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회의 때마다 이 얘기로 언성을 높이곤 했다.
핵 불안 해소를 위해 외교적인 차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 진언했지만 ‘정치인 YS’의 입장은 달랐다. ‘한국은 봉이냐, 도대체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느냐’는 언론과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핵문제 해결과 관련해 YS는 초지일관 ‘대책 없이 북한에 끌려가는 미국의 협상을 막고 북한을 잘 아는 우리가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시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기자회견 준비작업에 관여했던 안기부 관계자는 “YS는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과 북한을 ‘손봐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쉽게 말해 ‘한 방 먹일 수 있는 찬스’라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 소식을 전해 듣고 ‘참으로 YS다운 결정’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망명사실 유출은 청와대 사전작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는 강명도씨의 사전진술에서 파악한 ‘핵폭탄 다섯 개 첩보’에 대해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근거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안기부는 신뢰할 만한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이 ‘핵폭탄 1~2개 분량의 핵물질을 보유했다’는 결론을 갖고 있었다. 미국 CIA의 인식도 이와 정확히 일치했다. 비전문가인 데다 당사자도 아닌 강명도씨의 ‘전언’ 한마디로 북핵문제를 재검토해야 할 만큼 우리 정부의 판단 근거가 빈약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당시는 북핵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근거 없는 핵 관련 정보를 전해 자신의 가치를 과대 포장하는 일이 드물지 않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보가치 판단에도 기자회견은 강행되었고, 그 파장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단순히 ‘한 방 먹이는’ 차원으로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자회견 직후 미국의 반응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는 게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워런 크리스토퍼 당시 미 국무장관이 직접 외교경로를 통해 한국정부에 엄중 항의했다는 것. “김일성 주석 조문파동 등을 계기로 강경 분위기로 돌아선 한국 정부가 예정돼 있는 북미회담을 방해하기 위해 ‘플레이’를 한 것 아니냐”는 분노와 함께 “합당한 재발 방지조치가 없을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 메시지도 전달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대책회의를 열고 안기부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 인사조치를 결정했다. 통상 안기부 간부의 인사내용은 공개되지 않던 관행과는 달리 이 인사조치는 두 주일 후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 입을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 그러나 문책의 성격에 대해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은 “조명철의 입국 당일 아침 ‘동아일보’에 관련사실이 기사화된 것에 대해 보안상의 문제를 들어 책임자를 문책했을 뿐, 기자회견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아일보’의 ‘조명철 귀순’ 특종보도 정보가 안기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안기부는 보도 이후 자체 감사를 벌였고 담당 직원들이 본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유출경로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안기부 내에서는 “기자회견의 명분을 얻기 위해 청와대에서 흘린 것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기사를 작성했던 ‘동아일보’ 윤모 기자는 1999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이 기사의 유출경로가 어디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신동아’는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대한 김영삼 전 대통령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상도동에 질문서를 보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측은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기자회견을 하라고 지시한 것은 맞다. 북핵문제에 대한 협상이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데 대한 불만이 그 이유였다”고 답변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핵 협상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미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특히 북한의 과거 핵 전력에 대한 검증 없이 현상 동결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하시모토 총리도 동의한 바 있다. 지금도 제네바합의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수로 사업이 실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기자회견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면, 이후 안기부 관계자들에 대한 문책조치는 어떻게 된 것이냐”는 추가 질문에 대해 상도동 비서실측은 “각하께서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지 않다. 추측컨대 미국측 항의에 대한 대응이나 관련자 문책 등은 청와대 비서진들이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당시 외교안보라인 관계자들은 “기자회견 결정에는 김주석 사망 이후 팽배했던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극단적인 온건책과 강경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문민정부 대북정책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 발빠른 대응 덕분에 북미 대화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미약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기자회견 결정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는 회고다.
정치가 목숨보다 중요한가
일련의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아닌 강명도씨와 조명철씨, 그리고 북한에 남아 있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조명철씨는 “당초 내가 신분공개를 원치 않았던 것은 가족과 지인들의 안전 때문이었다”며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자회견이 결정됐다면 나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망명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후 함께 근무했던 김일성대 관계자들이 상당수 숙청됐다. 가족들은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파악할 길이 없다. 나의 귀순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국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국가는 본래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북에 있는 내 가족은 무시되어도 좋은 사람들이었나. 세월이 많이 흘렀고 북한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으므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