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당신은 타락한 전문가인가, 참된 지식인인가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11-28 09:5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비주류 부랑적 지식인은 사이드가 말한 ‘망명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사이드가 비코를 스승으로 모신 이유는 비코가 바로 그런 지식인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망명은커녕 평생을 나폴리에서만 산 비코는 18세기 이탈리아 사회에서 고독한 한계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에서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9월24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9 월24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오리엔탈리즘’의 번역자이자 오랫동안 사숙한 제자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후 그의 이름이 한국에도 본격 소개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이 글은 사이드의 죽음에 바치는 조사(弔詞)다. 사이드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며, 누군가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당장 ‘오리엔탈리즘’이라 할 만큼 내 인생에 충격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이드에게 위대한 스승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18세기의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다. 사이드는 1975년 ‘시작-의도와 방법’이라는 책에서 비코를 언급했고, 1993년 ‘지식인의 표상’에서는 비코를 자신의 영웅이라 불렀다. 이는 사이드가 죽기 직전에 쓴 ‘오리엔탈리즘’ 2003년판 서문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사이드와 비코의 관계는 물론, 비코라는 인물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비코를 이해하려면 벌린(Isaiah Berlin, 1909~97)이 1976년에 쓴 책 ‘비코와 헤르더’(번역 출간)를 참고해야 한다. 벌린에게도 비코는 정신적 스승이었음에 틀림없고, 사이드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선구자로 비코를 선택한 것처럼, 벌린은 비코를 다원주의의 선구자로 재발견했다. 물론 두 사람의 비코 해석은 약간 다르나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만큼 비코는 매력적인 연구대상이다.

    물론 비코가 벌린이나 사이드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생전 무명의 학자였고 심지어 많은 오해를 받으며 질병과 빈곤 속에 죽었지만 비코의 사상은 법학, 정치학, 문학, 미학, 민속학, 언어학, 신화학, 역사학, 철학, 수학, 논리학 등 서양의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다만 한국에서 비코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뿐이다.

    여하튼 벌린이나 사이드만이 아니라 19세기 미슐레나 크로체를 비롯해 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비코를 자기식으로 해석했다. 예컨대 미슐레는 그를 낭만주의자로, 크로체는 그를 헤겔주의자로 보았다. 또 자연주의나 역사주의, 심지어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해석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코를 하나의 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적어도 비코는 누구나 사숙하고자 한 거대한 사상의 원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비코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다.



    잊혀진 그 이름, 비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는 1668년 나폴리의 한 서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1744년 나폴리에서 죽었다.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독학을 했다. 그리고 이웃마을에서 가정교사를 한 것 외에는 나폴리를 떠난 적도 없다.

    비코의 평생 꿈은 나폴리대 법학교수가 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월급이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사학 교수로 42년간 일했다. 명색이 교수였으나 끝내 가난을 면치 못했다. 비코는 어릴 때 낙상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았고 맏아들은 범죄자, 외동딸은 배냇병신일 만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를 학자로 인정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서민출신인 비코가 교수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비코의 시대는 명석한 관념을 중심으로 한 데카르트가 풍미했으나, 비코는 그런 진리가 수학과 자연과학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역사를 비롯한 인문과학이란 여행처럼 여흥거리에 불과하며 키케로의 하녀가 갖고 있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라고 빈정거렸다. 반면 비코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진리란 그 발생을 이해해야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비코는 당대의 주류였던 자연법이론가, 사회계약론자, 공리주의자, 개인주의자, 유물론자, 이성주의자를 모두 부정했다. 즉 그들이 오류에 빠진 것은 체계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인간적 전망과 동기의 영속성, 그리고 그 전망과 동기가 다시 인간 본성의 변화하는 요구에 의해 지배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불변적이고 선험적인 인간 본성의 존재를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구정신을 통째로 부정했다. 이러한 서구정신이 20세기까지 이어져온 것을 생각하면 비코는 여전히 현대 서양문화에 대한 비판가로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벌린이 말한 대로 비코는 인류가 이제껏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갈 일련의 발전단계에서 각 단계 나름의 개성과 필연성, 특히 정당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즉 스스로의 내적 성장법칙에 따라 발전하되 외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변하며, 결코 기계적 인과관계에 귀속되지 않는 비물질적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행하는 일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비코의 사상을 이어받은 벌린은 라트비아 출신으로 영국에 이주한 철학자이자 사상사가였다. 벌린 역시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쓴 마르크스 전기와 비코 및 헤르더에 대한 연구서가 번역돼 있을 뿐이다.

    벌린은 일관된 다원주의 옹호자로 유명하다. 다원주의란 복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조화될 수 없으며, 서로 대립하는 가치를 취사선택하거나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에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주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와 사회제도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 선택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즉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직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합리주의, 특히 진리일원론-영원불변하는 단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대한다. 벌린은 여러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며 그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인류 공통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확인된다는 의미에서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나아가 벌린은 진리일원론에서 비롯된 ‘완전한 사회’에 대한 이상도 거부했다. 진리의 발견이 인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여러 가치가 조화되는 세계를 만든다고 하는 이상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한 이상은 가치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가치의 선택이라는 도덕적 책임을 면제하여 개인의 다양한 삶을 배제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반대한다. 상대주의도 합리주의를 반대하여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가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주의는 판단의 진위를 결정하는 객관을 부정하고, 자신의 전통과 문화에 완전히 구속되어 타인이나 타문화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다원주의는 상상력에 의해 자신과 자문화의 틀을 넘어 타인과 타문화에 공감하여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다원주의를 주장한 벌린은 사상의 원류를 비코에서 찾았다. 벌린은 비코의 사상을 다음 7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전통적 사고는 인간 본성을 정태적으로 보지만 사실은 동태적이며 동일성을 유지하는 본질을 갖지 않는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기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역사와 같은 인문학은 자기 이해를 추구하나 자연과학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찰에 머문다.

    넷째, 특정 사회의 행동이나 문화는 포괄적인 패턴에 의한 특징을 갖는다.

    다섯째, 법·제도·종교·제식·예술·언어·행동 등 인간의 모든 창조물은 작위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형식이며, 그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삶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인 사고에 의하면 신화나 우화, 제식과 유물은 어리석은 원시인의 환상이나 교활한 군주의 기만술로 여겨졌으나 비코는 이를 부정하고 원시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이러한 탐구의 열쇠를 제공한다.

    여섯째,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와 기준이 아니라, 그 탄생의 시공간과 사회발전단계에서 특유하게 사용된 상징들의 목적 및 특수한 용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만이 다른 문화의 신비를 풀 수 있다. 여기서 비코는 비교문화사·비교인류학·비교사회학·비교법학·언어학·민족학·종교·문학·예술사·사상사·제도사·문명사 등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사실 오늘의 사회과학은 모두 역사학적 또는 발생론적 관점에서 잉태됐다.

    일곱째, 이로써 전통적인 지식에 새로운 범주인 감각지각이 제공하는 ‘경험적 지식’, 그리고 계시에 의해 보증되는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지식 외에 ‘재구성적 상상력’이라는 지식범주가 새롭게 등장했다. ‘재구성적 상상력’이란 상상력을 통해 다른 문화의 정신과 전망, 생활방식에 침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 상상력이란 사회의 변화와 성장과정을 이와 병행하는 상징의 변화나 발전에 연결함으로써 파악하는 능력이자, 인간의 표현수단인 상징 안에 사회의 자취가 담겨 있다는 견지에서 사회의 발전을 추적하는 능력이다.

    비주류의 길 선택한 참된 지식인

    벌린은 위 7가지가 모두 사상사의 거대한 진전이고 그 하나로도 철학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코가 여러 갈래로 해석됐듯이 벌린은 자신의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비코를 해석했다. 적어도 일곱 번째의 ‘재구성적 상상력’이라고 하는 벌린의 지적이 과연 비코에게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지적은 이미 통설로 자리잡았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팔레스타인계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왼쪽)와 유대계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의 만남. 이들은 편견의 벽을 넘은 현대의 지성이다.

    비코에 대한 벌린의 평가는 사이드가 다문화주의의 입장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쓰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사이드는 벌린을 인용하는 데 인색한 편이지만 벌린의 저작을 읽은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잠시 사이드에 대해 살펴보자. 사이드는 1935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나 1947년 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지식인 문제를 다룬 ‘지식인의 표상’에서 사이드는 “망명 지식인은 과거의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하는 중간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한편으로는 향수와 감상에 젖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묘한 모방자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부랑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여 성공한 ‘교묘한 모방자’는 사이드가 말하는 참된 지식인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인은 부랑자이며 주류에서 벗어나 저항자로 살아가는 지식인이다.

    이처럼 비주류 부랑적 지식인은 망명 지식인만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사이드가 비코를 스승으로 모신 이유는 비코가 바로 그런 지식인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망명은커녕 평생을 나폴리에서 산 비코는 자신이 살았던 18세기 이탈리아 사회에서 고독한 한계인이었다. 한계인이었기에 비코는 당대 주류의 믿음이었던 신의 창조와 절대를 믿지 않았으며, 인간의 행위와 선택은 때와 곳에 따라 변경 가능한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인의 위대한 원형은 18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다. 그는 나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비코의 위대한 발견은 나폴리의 무명교수, 생활의 빈곤, 교회와 주위의 알력으로 인한 고독으로부터 생겨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위대한 발견에 의하면 사회현실의 올바른 이해방식은 기원의 지점에서 생긴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기원을 탐색해 보면 지극히 초라한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위대한 저서 ‘새로운 학문’에서 비코는 이를 마치 성인 인간이 말도 못하는 아기로부터 진화했다고 보듯이, 사물을 특정한 시점에서 진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속적인 세계에 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비코는 역설한다. 이 세계는 그 자체의 법칙과 과정을 갖는 역사적 세계이지 신에 의해 정해진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비코는 되풀이한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인간사회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념(留念)한다는 것이다. 가장 막강한 권력을 그 시작으로 되돌려놓고, 나아가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대단한 인물이나 거창한 제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권력자나 제도가 자주 침묵과 복종을 강제할 수 있는 대상은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한 권력을 언제나 숭고하게 바라보며(그래서 숭배한다) 초라한 ‘인간적’ 시작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명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해학적이고 회의적이며 유희적이다. 비록 냉소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실 사이드의 해석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사이드가 그런 해석을 한 상황은 새롭다. 사이드는 지식인이 부딪히는 두 가지 권력의 유혹을 경계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출생, 국적, 직업 등에 의해 구속되는 문화다. 또 하나는 사회적·정치적 확신, 경제적·역사적 환경, 자발적인 노력과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단으로 획득하는 체계다. 사이드는 비코 역시 문화와 체계의 양면에서 그 시대가 강요하는 바를 알았고, 따라서 평생 그런 압력에 저항하며 살았다. 비코는 사이드가 말하는 참된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1744년에 쓰여진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1997년에야 우리말로 번역됐다. 무려 253년이 지난 후였다. 그나마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중역한 것이니 앞으로 책임 있는 원어번역이 요망된다. 여하튼 현재의 번역본도 582쪽에 이르는 대작인 만큼 읽기가 만만치 않다. 그 책의 논증을 구성하는 요소인 공리가 114개나 된다. 이는 제1권 ‘원리의 확립’ 중 제2부 ‘원칙’에서 열거된다.

    여기서 그 모두를 검토할 수 없으니 일단 사이드의 독해를 따라가 보자. 사이드는 114개 중 가장 중심적인 공리로 106번을 든다. “학설은 그것이 취급하는 소재가 시작되는 곳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시작되는 곳으로부터’를 ‘시작되었을 때’라고 번역했으나 의문이다. 위 공리는 사이드가 1975년에 낸 ‘시작-의도와 방법’ 서두에 인용되었다. 사이드는 비코를 ‘시작(beginning)에 관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했다. 시작이란 그만큼 비코나 사이드에게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사이드가 비코를 ‘시작에 관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한 것은 비코가 시작이라고 하는 문제를 최초로 성찰한 철학자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인간-야만인이거나 성찰적인 철학자거나 간에-실제로 최초의 사람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각자 시작을 만들고 나아가 각자 언제나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의미에서다. 이러한 시작을 비코는 이교성(異敎性)이라고 부른다. 비코는 이 공리를 “여러 국민의 공통된 자연본성에 대한 새로운 학문의 공리로 삼기 위해 서술한다”고 밝혔다.

    한편 공리 24에서 비코는 고대세계가 히브리인과 이교도로 양분된 점에 대해 진실한 신에 의해 창건된 히브리 종교에서는 신점(神占)이 금지된 반면, 이교도의 경우에는 신점이 문명화와 국가생활의 길에 들어서는 토대를 형성했다며 그 차이를 지적했다.

    이 두 가지 비코의 공리를 두고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먼저 공리 106에서 비코는 인간의 지성이 감각 및 상상력 그리고 오성적 판단력 사이에서 상반된 관계를 형성하면서 단계적으로 발전했다는 이해의 패러독스를 깨달았고, 동시에 그 패러독스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현대인이 인류의 ‘시작’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어 인류의 ‘시작’이란 단지 현대 문명시대에 사는 철학자의 경우만이 아니라 원시 미개인-비코는 그들을 ‘최초의 인간’이라고 불렀다-에게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최초의 인간’에게는 바로 ‘이교도라는 것’의 가능성, 즉 히브리의 신적 ‘시원(origin)’으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스스로 ‘시작’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통찰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여기서 사이드는 멈췄으나 우리는 비코의 본령이 법학이었음을, 특히 그가 당대까지의 주류 법학이었던 자연법론을 비판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연법론이 인간 본성의 불변성과 보편성을 가정했다고 비판하고 “본성은 발생이다”라고 주장한다. 비코에 의하면 본성의 참된 법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연법도, 일련의 보편적 규칙도 아니다. 참된 법이란 특정한 사회환경에서 새로운 생활방식의 표현으로 발생하는 것일 뿐이고 ‘여러 민족의 자연법’뿐이라고 보았다.

    신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인간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비코가 민족과 학자의 자만심에 대해 언급한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비코는 “인간은 멀고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 눈앞에 있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인간정신이 갖는 하나의 특질”이라고 하는 2번 공리로부터 민족과 학자의 자만심을 도출했다. 곧 민족과 학자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 최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코는 고대세계를 히브리인 세계와 이교도 세계로 구분하고, 히브리 세계에서는 신점(神占)이 금지되었으나 이교도 세계에서는 신점이 문명화와 국가생활의 기초였다고 공리 24에서 밝혔고, 따라서 원시인이 그 이교도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기독교의 ‘기원(origin)’과 다른 ‘시작(beginning)’을 역사 발생적으로 끝없이 새롭게 만들어낼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했다. 이러한 ‘시작’의 이교도성은 기독교라고 하는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점에 사이드는 주목한다.

    여기서 잠시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학문’ 결론 부분을 보자. 비코는 인간이 여러 국민의 세계를 만들어왔으나, 그것은 인간이 설정한 의도와 다르거나 모순된 ‘뛰어난 지성’에 의해 생겨났고, 그 지성은 인간이 설정한 한정된 목적을 더욱 넓히고 지상에서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고 했다. 이어 비코는 야만적인 욕정을 채우는 것밖에 몰랐던 원시인이 정숙한 결혼생활을 하고 가족제도가 생긴 것을 위시해 도시의 발생, 민주적 자유의 발생 등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지성의 덕분이지 운명은 아니며, 인간의 선택이지 우연은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비코의 주장은 종래 ‘신의 섭리’를 찬양한 것으로 이해되어왔으나 사이드는 이를 부정하고, 도리어 비코는 인간의 ‘시작’을 신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보았다고 독해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사이드가 ‘참된 지식인’으로 꼽은 촘스키, 네루다, 피카소(왼쪽부터).

    비코는 제2권 ‘시적 지혜’ 중 제2부 ‘시적 논리학’에서 로마법의 노멘(nomen)이란 ‘법’을 말하고 그것과 발음이 유사한 그리스어의 노모스(nomos)도 법을 말하는데, 그 말에서 ‘화폐’를 뜻하는 노미스마(nomisma)가 나오고, 라틴어의 화폐를 뜻하는 눔무스(nummus)가 나온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불어에서는 법을 뜻하는 단어가 루아(loi)이고 화폐를 나타내는 것이 아루아(aloi)다. 그리고 중세의 교회법을 뜻하는 카논(canon)은 동시에 지대(地代)를 뜻했다.

    이러한 비코의 설명은 지금까지 언어의 계보성을 밝힌 것으로 이해됐으나, 사이드는 비코가 법을 뜻하는 여러 말이 동시에 화폐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인접한 복수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체계를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언어에서 추상어와 구체어의 직접적인 공존은 계보적인 계기성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 상호간의 체계적인 인접성에 근거해 실현된다고 본 것은 비코에 대한 사이드의 새롭고도 대담한 해석이라 하겠다.

    나아가 사이드는 비코가 1709년에 쓴 최초의 저서 ‘우리 시대의 학문 방법에 대하여’를 비롯해 여러 저작에서 그러한 인접성, 상보성, 병행성, 상관성을 밝혔다고 말한다. 원래 비코는 ‘여러 국민의 공통된 자연본성에 대한 새로운 학문’, 즉 여러 국민에 공통된 법을 추구하면서 나아가 하나의 공통된 시작을 발견하고자 계보학적인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상관성, 상보성, 인접성의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표상’ 머리말에서도 사이드는 비코의 ‘상관성’을 언급했다.

    “내 책에서 싸우고자 한 상대는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허구의 구조다. 종속 인종, 동양인, 아리아인, 니그로 등의 인종차별주의적 본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 나는 과거 식민주의의 폭정을 거듭 당한 나라들에서는 원초의 순수 상태가 서양인에 의해 침해되었다는 의식을 조장하기는커녕, 다음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했다. 즉 그런 신화적 추상개념은 허위이고, 그것과 같이 과거의 식민지국이 서구를 비난하는 다양한 수사도 허위라는 것이다. 문화는 너무나도 혼합적이고 그 내용도 역사도 서로 의존하며 잡종적인 것이므로 외과수술을 하듯이 크게 잘라 동양이나 서양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으로 나눌 수 없다.”

    이러한 사이드의 해석에 대해 논리의 비약이라든가 너무 대담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비코에 대한 가장 뛰어난 연구로 평가되는 크로체의 ‘잠바티스타 비코’(1911) 이래 60여 년 동안 나온 비코 해석 중 가장 새로운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비코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 사이드가 텍스트와 현실세계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없는 벽이 있다고 본 문학비평에 반대하여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텍스트와 현실세계를 연결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즉 사이드가 말하는 현실세계가 바로 비코가 말한 ‘여러 국민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적 기원으로부터 단절되고 성스러운 질서에서 벗어난 ‘이교도적인’ ‘여러 국민의 세계’였다.

    아이덴티티, 부정, 폭력

    사이드는 비코를 비중 있는 사회철학자로 보았다. 그는 ‘아이덴티티, 부정, 폭력’(뉴레프트 리뷰 1988년 9~10월호)이라는 글에서 비코가 ‘새로운 학문’ 제2권 제2부 ‘시적 형이상학’에서 아우토리타스(autoritas, 권위 또는 자기소유권)에 대해 설명한 문장을 예로 든다.

    비코는 아우토리타스가 신에서 비롯되며 신은 거인들이 야수적 습관을 버리고 동굴 안에 몸을 숨겨 오랫동안 참고 견디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는데, 사이드는 이를 현대국가의 아이덴티티 형성과 테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독해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설정한 제한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처벌을 받고 영원히 갇히는 존재가 되었으며 독수리에 의해 심장을 쪼인다. 그러나 대부분 길들여진 인간은 제우스가 제공한 장소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최초의 인간들은 동굴에서 살다 나중에는 집을 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방랑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제우스의 테러는 인간의 테러를 중단시키고 그것을 사회적인, 나아가 국가적인 틀 속에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비코가 제우스의 영웅적이고 일탈적인 테러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다. 비코에 따르면 권위를 휘두르고 처벌하는 제우스의 압도적인 재능이야말로 근대국가가 행사하는 강제력의 독점을 예상케 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근대국가가 강제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을 제국주의에 의해 범세계적 식민지 침략으로 확대하면서 동양에 대한 침략과 동시에 학문과 예술의 차원에서도 침략을 합리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사이드는 인간의 비참과 억압에 대한 진실의 기준이 개별 지식인의 정당 친화성, 민족적 배경, 그리고 근원적인 충성에서도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이드가 말하는 인간의 비참과 억압에 대한 진실의 기준이란 여러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나 가령 국제적 인권 기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보편성이란 문화적 배경, 언어, 국적 등이 제공하는 안이한 확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위험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인간 행동의 단일한 표준을 찾고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지식인이여, 국가와 전통을 던져라

    사이드는 나아가 지식인이 국가와 전통을 떠나서 활동하고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지식인은 국가와 전통에 대해 책임진다고 생각해온 것에 대한 비판이다. 즉 사이드는 이러한 집단적 사고가 지식인이 의문을 제기하고 회의를 품지 못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사이드에 따르면 지식인은 국가나 전통이 자연과 신에 의해 부여된 실체가 아니라, 구조화되고 만들어지며 어떤 경우에는 이면의 투쟁과 정복의 역사를 통한 창조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바로 비코의 역사관에 입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이드는 그런 지식인으로서 촘스키와 비달, 울프를 예로 든다.

    여기서 지식인이 선택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승리자나 지배자에게 편리한 안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안정상태를 거부하고 잊혀진 여러 목소리나 잊혀진 인간의 기억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사이드가 말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후자이나 문제는 현실에서 다수의 지식인이 전자라는 점이다.

    지식인은 언제나 충성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특히 지식인은 자국민이 위협을 받으면 당연히 방어적인 민족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프란츠 파농의 경우에서 보듯 지배자를 교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영혼의 창조가 문제된다. 타고르도 죽을 때까지 민족주의자였으나 민족주의 때문에 비판을 누그러뜨리지는 않았다.

    사이드는 지식인이 자신이 속한 인민의 집단적 고난을 대변하고, 그 고난을 증언하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시련의 상처를 끝없이 환기하고, 기억을 갱신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책무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에 더하여 피카소나 네루다의 작품에서처럼 지식인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즉 사이드는 지식인이 위기를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이 겪는 고난을 인류 전체와 관련지으며, 그 고난을 다른 고난의 경험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이드는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의 보상을 받는 전문가는 비판적이고 왕성한 독립정신으로 분석과 판단을 내려야 하는 지식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식인이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비전문가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것은 지식인의 글이 불특정 다수의 수용자에게 읽히고 예측할 수 없는 반응에 노출되는 불확실성을 기꺼이 선택한다는 의미다. 사이드 스스로도 전문영역을 이유로 결코 공공정책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또 지식인들이 흔히 자국문화 중심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토크빌은 미국의 인디언과 흑인노예 학대를 비판했지만 자국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정책에 대해서는 이슬람이 열등한 종교이므로 통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지식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문화와 사회 및 역사의 실재를 어떻게 다른 정체성과 문화 및 인민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의 영광이나 ‘우리’ 역사의 승리에 대한 과대선전은 지식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이드는 최근 이슬람을 둘러싼 미국 지식인의 애국주의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나아가 사이드는 지식인이 극도로 편향된 권력에 아첨하여 타락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으며 원칙을 존중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식인은 최소한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행동 기준과 규범을 따라야 한다. 그 중요한 보기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여러 국제인권규범들이다.



    우리 사회와 같이 관리된 대중사회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련의 도덕적 원칙들-평화, 화해, 고통의 경감-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은 지식인의 회피다.

    (‘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