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부터 책을 말하는 책은 꾸준히 출간돼왔지만, 최근에는 위와 같이 다양한 목소리와 제 나름의 분위기로 책을 말하는 책들이 전례 없이 쏟아지고 있다. 우선 회사원이자 철학박사 강유원의 ‘책’(야간비행)이 있다. 저자가 굳이 자신을 ‘회사원이자 철학박사’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공부하길 좋아하지만 공부로 돈을 벌자고 하면 자존심이 다칠세라 줄곧 공부와 돈벌이를 따로 해왔다’는 것이다. 자기소개에서부터 시대와 불화하는 지식인의 강기(剛氣)가 느껴진다.
할말은 다 하는 서평
아니나다를까. ‘책 사서 읽고 서평 쓰기’라는 서문에서부터 이유 있는 딴죽이 시작된다. 책과 관련한 강유원의 원칙은, 자신이 셈을 치르고 구입한 책이 아니면 그 책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강유원의 ‘책’에는 바로 위와 같은 범상치 않은 원칙에서 나온 범상치 않은 서평들이 실려 있다. 무엇보다도 책에 관해 ‘할 말은 하는’ 서평이다. 박노해의 ‘오늘은 다르게-박노해의 희망 찾기’(해냄)에 대한 서평의 일부를 보자.
“셋째는 저자가 추구하는 ‘가치로서의 사회주의’이다. ‘노동가치의 중시, 평등과 공동선에 대한 지향, 돈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는 굳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인간주의적 윤리덕목이라 해도 충분하다. 사회주의가 아니라도 그걸 주장하는 교설은 많이 있다는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탈정치화된 사회주의일 뿐이다. ‘박노해라 불리던 전직 혁명가 박기평’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은 무엇일까? 달리기 정도가 아닐까?”
위의 인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무척이나 솔직하다. 표현 수위의 가감을 재지 않고 가장 효과적인 표현에 충실할 뿐이다. 때문에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을 읽고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던 독자라면, 강유원의 서평에서 찜찜함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장정일의 독서일기2’(미학사)에 대한 서평 중 다음 부분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두 번째 독서일기 75쪽에 ‘젊은 소설가들에게서……읽고 싶어하는 나는’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젊은 소설가들이란 아마도 20대 소설가들일 게다. 그럼 스스로는 ‘늙은’ 소설가라는 말인데, 이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장정일은 1962년생으로 나와 동갑내기인데, 난 아직 철이 안 든 탓에 아직도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동년배나 40대보다는 20대에게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이제 늙은이 행세를 할 모양이다. 늙은이 행세를 하는 구절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이건 그가 맛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라 할 수 있다.”
책과 혼연일체가 되는 체험
강유원의 ‘책’에서 고추냉이의 알싸한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최근 출간된 장석주의 ‘강철로 된 책’(바움)에서는 일종의 공감의 책읽기, 그러니까 저자의 생활과 생각과 느낌 깊숙한 곳으로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을 밀착시키는 글을 만날 수 있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에세이풍의 서평에 해당하는 셈이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열림원)에 대해 장석주는 이렇게 말한다.
“새벽에 깨어나 창문을 여니 차가운 공기가 이마에 와 닿는다. 황사바람과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고 버티며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군락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서 있는 밤나무들은 녹색의 무성한 잎을 매달았는데, 어쩐지 오랫동안 고수해온 신앙을 갑자기 잃어버린 냉담자와 같이 느슨하고 방심한 표정이다. 그 아래 광활한 호수의 물은 새벽의 청신한 공기 아래에 서 깊은 명상에라도 빠진 듯 고요하다.”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를 연상시키는 이 첫 부분은 장석주 자신의 생활체험과 음악체험으로 이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의 책이 등장하는 건 한참 뒤이며, 그 뒤로도 저자 자신의 재즈론 등이 글의 주맥(主脈)을 이룬다.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이게 도대체 하루키 책에 대한 글인지 장석주의 에세이인지 구별하기 힘들 수도 있다. 바로 그렇게 구별하기 힘든 데 이 서평 아닌 서평의 매력이 있다. 책과의 공감, 나아가 책과 혼연일체가 되는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장석주의 이 책에 환호작약할 법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책을 꼬투리 삼아 자신의 주관적 상념을 배설하는 데 그치거나, 책에 대한 상찬(賞讚)에 머무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책과의 공감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책 내용을 철저히 소화했다는 증거일 터,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느끼게’ 해주며 적절한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예컨대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살육과 문명’(푸른숲)에 대해 장석주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지배하는 것은 핸슨이 그토록 입이 마르게 칭송해 마지않는 서구의 이성이나 합리주의 정신이 아니다. 놀랍게도 많은 전쟁을 지배하고 조종한 것은 광기와 맹목의 정신이다. 때로 경제적 이익과 생존이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전쟁은 두려움, 이기심 때문에 일어난다. 모래폭풍이 이는 저 중동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전쟁을 보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강철로 된 책’이 지닌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다루는 책의 종수가 많고 장르가 전방위적이라는 점이다. 80종에 가까운 책을 말하고 있으며 문학, 역사, 철학사상, 사회과학, 예술, 논픽션, 건축, 자연과학 등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또 각 글의 끝에서는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을 여러 권 소개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비평으로서의 서평과 에세이풍의 서평을 살펴봤으니 이제 독서 안내로서의 서평을 살펴볼 차례다. 독서 안내라고 하면 단순히 책 내용을 요약 정리해놓은 책, 예컨대 무슨무슨 ‘명저 100선’ 같은 제목을 단 책을 떠올리기 쉽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책 내용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는 명저 다이제스트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네 취른트의 ‘책-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들녘)은 그런 유의 요약본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슈바니츠의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자매편 격인 이 책은(슈바니츠가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교양으로서의 책읽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분명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거나 그저 즐기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문화의 총체를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기 위한 독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런 주안점을 이 책은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는가. ‘사랑’이라는 항목에 등장하는 13세기 초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19세기 작품 ‘보바리 부인’ ‘안나 카레니나’를 보자.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는 남녀 두 주인공이 실수로 사랑의 마약을 마시고 서로에게 매료된다. 바꾸어 말하면 약물의 효과로 다분히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 시작된 것이며, 이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의 합리적 결혼관계 바깥의 일이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사랑으로 결합된 한 쌍의 부부라는 결혼의 이상이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의 충격과 격정을 견뎌내기에는 당시의 결혼 제도가 역부족이었다.
‘경제’라는 항목에 등장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와 청교도주의의 은밀한 상호작용을 읽어내기도 한다. 또한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가졌던 데 비해, 브레히트는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계급 가장이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려면 악당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단순히 책 한 권을 요약, 정리한 것이 아니라 책의 배경, 나아가 한 권의 책을 다른 책과 연결짓는 고리가 무엇인지 밝혀준다. 요컨대 책과 책 사이에 무수히 나 있는 길을 안내해준다.
위에 소개한 세 권의 책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다리를 끝까지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책읽기의 다양한 풍경을 통해 책 그 자체의 풍경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세 책의 저자들이 독자에게 공통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주문하고 있는 사항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