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가늠한 당대의 천재 정조는 자기가 죽기 전 당쟁으로 권력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 것을 걱정해 안동 김 씨 김조순의 딸을 간택해뒀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권력이 바로 김조순에게 쏠리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됐고 인사권과 과거제도,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이어진다.
수두, 홍역, 마마…
조선의 최고 과제는 왕권 강화였다.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태종조차 처가의 발호를 경계해 왕비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처남인 민 씨 형제를 모두 제거했다. 뒤에 발호할지도 모를 세종의 장인마저 죽여버릴 정도로 외척과 처가의 권력화를 경계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그만큼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중종반정 이후 단경왕후와 강제로 갈라서게 한 뒤 생긴 치마바위 전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왕비 권력의 생리를 반영했다면, 인조반정 성공 이후 노론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전략이 ‘국혼을 놓치지 말자’였다는 이야기는 왕비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현실적으로 평가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순조는 재위 19년 자신의 원자가 10세가 되자 다시 한 번 권력의 축을 옮기기 위해 풍양 조 씨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던 효명세자가 22세 나이로 요절하면서 왕권은 약해지고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는 전성기를 맞는다.
순조는 ‘국민 약골’이었다. 어릴 때부터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두 앓았다. 12세 때인 즉위 1년 11월 19일엔 수두를 앓았다. 의관들은 홍역과 같으나 홍역은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언제부터 발진했는지 묻는다. 순조는 “발과 다리 부분에서 발진했는데, 몸에도 많이 나 있다”고 말한다. 의관들은 해기음과 승마갈근탕을 처방했는데, 열흘 뒤인 11월 29일 수두로 진단하면서 완치됐음을 선언한다.
수두를 앓은 지 1년 후 순조는 홍역을 앓는다. 임금의 회복을 축하하는 교문(敎文)에서 “오랫동안 설치던 홍역이 갑자기 궁중에까지 침범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홍역이 궁궐 내로 퍼진 것을 알 수 있다. 순조는 당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왕비 책봉 15일 후 부부가 함께 홍역을 앓은 셈이다. 순조에겐 가미승갈탕, 왕비에겐 가미강활산이 처방돼 17일 만에 완쾌해 고유제를 지냈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러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적벽대전의 명소 적벽(중국 후베이성). 적벽대전 당시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한다.
두창은 전염병이지만, 당시 처방에 사용했던 약물의 구성을 보면 순조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 질병이 시작된 초기엔 가미활혈음이라는 마마 치료약을 처방했지만 나중엔 가미귀룡탕이란 처방이 잇따른다. 귀룡탕은 허약한 소아가 복용하는 대표적인 처방으로 당귀와 녹용을 같은 양으로 하여 술에 달여 먹게 하는 것이다.
마마에 보약을 처방했다는 건 순조가 어릴 때부터 허약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귀룡탕의 또 다른 적응증은 스태미너 부족을 보충하는 것이다. 양기가 허약해 후사를 잇고 싶을 때 복용하는 처방이다. 그래선지 순조의 여인은 정비 순원왕후 김 씨와 숙의 박 씨 둘이 전부다. 계비는 없었으며 두 명의 부인에게서 1남 5녀의 자식을 얻었다.
동서양 질병 패턴은 동일
순조는 한의학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전염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런데 한의학으로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한의학의 탄생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전염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일반인은 한의학의 원조라면 화타(華陀·중국 후한 말기~위나라 초기의 명의)나 편작(扁鵲·중국 전국시대의 명의)을 떠올리지만, ‘한의학의 히포크라테스’는 동양의학의 원전 중 하나인 ‘상한론(傷寒論)’을 지은 장중경이다. ‘처방’이란 말 자체가 장중경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한론 서문은 전염병으로 죽어간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애끊는 애정과 자괴감으로 시작한다. “나는 종족이 많아서 전에는 200이 넘었다. 그러나 상한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3분의 2가 넘었다…이 처방으로 모두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절반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시대적 배경은 공교롭게도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이다. 역사서에도 당시의 참상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삼국지 무제기(武帝記)는 “조조가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워 유리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욱 큰 병이 있었다. 관리와 병사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많아서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라고 담담히 전한다. 조조의 아들 조식은 좀 더 구체적이다. “집집마다 엎어진 시체들의 아픔이 있었으며 어떤 경우는 전 가족이 죽었다…부유한 사람이 죽은 경우는 적었고 가난한 이들이 대체로 죽었다.”
상한론의 치료방법은 전염병의 변화과정에서 나타난 증후들을 귀납적으로 파악해 6가지 증후군으로 나눈다. 첫 번째인 호흡기에서 소화기를 거쳐 마지막인 생식기로 전이되는 과정에 따라 각기 땀을 내거나 구토 혹은 설사를 시키면서 이물질을 죽이지 않고 밀어내는 관용의 치료법을 정한다.
질병의 전이과정은 그리스 아테네의 멸망을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기록과 세밀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오한, 발열과 눈의 충혈, 재채기와 기침이 뒤따른다…마침내 위장장애를 일으켜 설사와 구토가 시작되고 피부에 작은 농포와 궤양이 생긴다. 심하면 8일째를 넘기지 못하고, 살아남아도 생식기가 파괴되고 실명(失明)과 기억상실에 걸린다.”
동서양으로 나뉘어 있지만 질병의 패턴은 정확히 호흡기에서 소화기로, 다시 생식기로 감염되면서 끝을 맺는다. 많은 연구자는 발진티푸스를 이 전염병의 원흉으로 지목한다.
현대의학이 직접 바이러스나 세균을 죽이는 치료를 한다면, 동양의학의 기본 정신은 자연과의 조화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빨리 쫓아낼 생각을 한다. 죽여놓으면 간과 콩팥 등에 부담을 주고 뒤처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호흡기엔 땀으로 발산하는 약을 처방하고 소화기엔 설사로써 밀어내고 생식기에선 내면의 온도를 높여 저항력을 기르는 방식이다. 현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의학은 저항력을 기르고 보(補)하는 방식뿐이지만 한의학의 처방들은 훨씬 실증적이며 현실적인 치료의학이다.
순조는 전염병에 혼이 났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선 새로운 전염병이던 콜레라로도 곤욕을 치른다. 순조 21년, 평양부 감사가 처음 보고한 전염병의 양상은 공포 그 자체였다.
“갑자기 괴질이 발생하여 토사와 관격, 즉 구토, 설사와 가슴이 막혀 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다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된다”며 안타까워한다. 콜레라는 한자로 호열자(虎列刺)다. 호랑이가 물어뜯는 듯한 고통을 호소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엔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백련교도들에게 혐의를 돌리기도 했다.
“서장관 홍언모는 백련교도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오이밭에 독약을 뿌려 생긴 질병이라고 추측하면서 의심나는 몇 사람을 체포하여 실증을 얻어 조사 중이다”라고 보고한다. 당시 사망한 사람이 거의 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앓은 셈이다.
세도정치로 인한 스트레스
정작 순조를 괴롭힌 건 왕 노릇으로 인한 스트레스다.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주눅이 든 데다, 다시 여우를 피하다 만난 호랑이처럼 처가 쪽 김조순의 세도정치로 기를 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조증상은 신경성 질환으로 불리는 편두통처럼 다가온다. 순조는 재위 10년을 맞으면서 귀 주변이 땅기고 아프다는 고통을 호소해 육화탕을 처방받는다. 귀 주변이 아프고 땅기는 건 편두통 증상에서 흔한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런데 의관들은 신경성 증상을 중이염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염증성 증상에 투여하는 형개연교탕과 만형자산을 처방했다. 신경성 증상을 염증성으로 착각한 것도 무리일뿐더러 본래 속이 약한 사람에게 생지황이나 찬 성질의 약을 처방하니 소화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의관들은 설사와 식욕부진에 쓰는 건비탕을 급히 다시 지어 올린다.
순조가 본격적으로 신경성 증상을 호소한 때는 다음 해인 재위 11년이다. 순조는 전좌(殿座)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걱정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전좌 증상을 앉아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불안증세로 파악했다.
“근래에 전당에 임어하심이 거의 빠지는 날이 없으시니, 성궁의 노고는 이미 말할 수 없지만, 전좌하셨을 적에는 그 일을 끝낸 적이 없으며, 출궁이나 환궁하는 경우에는 매번 허둥대며 급히 서두르는 탄식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기(火氣)가 쌓인 증세로 인연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답답함을 소통시키는 자료로 삼기는 하지만….”
순조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내 마음을 내가 도리어 알지 못하는 때가 있다.” “평상시에도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걸어다니는 소리 같은 것도 역시 모두 듣기가 싫다.”
병적으로 나타나는 증상도 그대로 이야기한다. 조동(躁動)증이 생겼다고 말한 것이다. 조동은 말 그대로 심장이 급박하게 뛰면서 마음이 급해진다는 뜻이다.
이런 불안증세에도 영부사(領府事·조선시대 중추부의 으뜸 벼슬) 이시수는 유학적 치료법인, 마음을 기르는 양심(養心)을 제시했다. “간혹 번조하고 답답하더라도 참을 인(忍)자 공부에 착수하여 오늘과 내일에 참고 또 참는다면 저절로 평상시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순조는 마음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기력이 쇠진했다. “어머니께 문안할 때면 번번이 걸어서 나아갔지만 땀이 나는 경우가 없었는데 지금의 경우는 걸어서 절반도 못 가고 이미 몸에 땀이 나고 숨이 차며 수라는 입맛이 달지 않아 잘 먹지 못하며 정신이 황홀하다.” “잠이 드는 것을 하룻밤으로 견준다면 거의 3, 4경쯤이며 수라는 평상시의 10분의 1 정도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순조는 재위 11년, 22세가 되던 시점부터 불면증과 식욕부진, 사지무력, 피로, 정신황홀, 현기증이라는 다양한 신경쇠약증과 소화불량증을 호소한다. 처방한 약물들을 살펴보면, 순조의 여성적 성품이 분명히 드러난다. 귀비탕과 감맥대조탕, 가미소요산을 각각 처방받았는데, 이 처방들은 여성의 우울증이나 히스테리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치료 약물이다.
귀비탕은 송나라의 엄용화가 개발한 건망증 치료 약물로 ‘일에 대한 근심이 지나쳐 심장과 비장이 과로하고 건망증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병이 된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증상의 허실과 음양 중 몸이 활발하고 남성적인 양증에는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한 음증의 여성적인 처방이다.
감맥대조탕도 마찬가지다. 감초와 밀, 대추 3가지로 구성된 처방으로, 역시 장중경이 지은 ‘금궤요략(金·#54436;要略)’ 22편에 기재돼 있다. 치료 목표는 “부인이 히스테리로 울거나 웃거나 하고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되어 빈번히 하품을 하는 경우에 사용한다”라고 돼 있다. 즉, 정신안정 작용을 하는 처방이다.
가미소요산은 정조가 화증(火症)에 자주 사용했던 처방이다. 어깨가 자주 결리고 쉽게 피로하며 정신불안 등의 신경증상이 있는 허약체질에 사용하는 처방이다.
여성적 기질 뚜렷
순조에 대한 질병 치료의 특징은 약물 위주였다는 점이다. 처방의 종류도 아주 다양해서 100여 가지나 됐다. 순조에게 허약하고 피로한 허로(虛勞) 증상이 지속되자 의관들은 극단의 처방을 구사한다. 대조지황탕과 혼원단이라는 처방이 그것이다. 대조지황탕은 대조환이나 보천대조환에서 만들어진 처방으로 맥이 약하고 기혈이 쇠약한 것을 치료하는데, 허로한 사람이 성생활을 지나치게 하여 가슴과 손바닥에 번열이 나는 데 먹으면 효험이 좋은 약이다. 혼원단은 몸이 몹시 여위고 기침과 가래가 있으면서 귀주(鬼?)병을 앓는 사람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이 두 처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건 태반이다. 태반은 임신부의 자궁 안에서 태아와 모체 사이의 영양 공급, 호흡, 배설을 주도하는 조직이다. 고대에는 태반을 인간이 최초로 몸에 걸치는 가장 좋은 옷이라고 여겨 신선의(神仙衣)라고도 했다. 한약재로서의 정식 명칭은 자하거(紫河車)다. 자하거의 자색은 보라색이다. 보라색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혼합이다. 검은 어둠에서 해가 뜨는 붉은 여명의 아침이며,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색깔이다. 본래 자궁은 생명이 시작됐지만, 세상에 나오지 않은 미명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었다.
하(河)와 강(江)은 다르다. 하는 황하 이북의 물길을, 강은 황하 이남의 물길을 뜻한다. 북쪽이 황하의 근원임을 생각하면 뜻은 서로 맞닿아 있다. 거(車)는 자궁에서 생명의 힘을 충분히 준비해 타고 나오는 리무진을 뜻한다. ‘동의보감’에선 배태(胚胎)의 99수가 만족해 타고 나온다고 설명한다.
자하거의 약용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한의학에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기록은 현실과 신체발부(身體髮膚)에 대한 유학이념 사이의 치열한 괴리를 보여준다. “유구국(오키나와)에서는 부인이 출산하면 반드시 태반을 먹는다.” “팔계(광서성의 만(蠻)족)의 요인은 남자를 생산하면 친족이 모여서 태반을 먹는다”라고 적으면서도 “사람으로서 사람을 먹는다면 유구족이나 요인들 같은 오랑캐와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의 말을 달아놨다.
명대에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이 자하거의 사용을 망설였다면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자하거를 천하의 명약으로 사용했다. 청대비방집에 보천하거대조환이라는 처방으로 실질을 살렸다.
자하거의 약효는 대부분 자음(滋陰), 즉 음을 기르는 효능을 첫 번째로 꼽는다. 태반은 생명력을 기르는 텃밭으로 온갖 중요한 물질의 창고가 된다. 인체에서 물과 같은 혈액 모양의 물질이 부족해 잘 달아오르는 것을 음의 부족으로 파악해 음허(陰虛)로 인식하고 그 물질을 보충하는 데 자하거 약효의 특징이 있다고 본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기록한 자하거의 치료 효능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주목하는 치료 효과는 남성 성기능 장애와 여성 불임에 대한 효능이다. 입문대조환 처방의 주치(主治)는 더욱 구체적이다. “기혈이 허약하고 음경이 줄어들어 겨우 형태만 있으며 안색이 누렇게 뜨고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라고 성기능 개선을 효능으로 내세웠다.
자하거는 폐결핵과 같은 만성 소모성 질환에도 치료 효능을 발휘한다. 만성기관지 천식과 피로, 해소 등 호흡기도가 약해서 점액이라는 음적인 물질의 분비량이 줄어들면 쉽게 이물질이나 바이러스, 세균에 노출되는 상태를 치료한다.
순조의 허로 증상이 지속되자 의관들은 대조지황탕과 혼원단을 처방한다. 이 두 처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건 태반이다.
순조는 재위 13년에 웅주산과 인삼석창포차를 복용한다. 웅주산은 가위 눌린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한의학에선 가위눌림을 귀염이라고 한다. 이름처럼 귀신이 압박한다고 본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 증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잠들었을 때는 혼백이 밖으로 나가는데 그 틈을 타서 귀사가 침입하여 정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꿈을 꾸고 불안해지는 가장 큰 원인은 혈기가 부족해서라고 보았다. 혈기는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손상받는다. 가위눌림은 현대의학에서 수면마비라고 하는데, 일종의 수면장애로 본다. 잠자고 있는 동안 긴장이 풀린 근육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식만 깨어나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웅주산의 구성 약물은 우황, 웅황, 주사 등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물이다. 순조가 받은 심리적 압박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약재들이다. 이 시기에 처방된 약물들엔 대부분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심(心), 지(志), 신(神) 등의 글자가 들어가 있다. 가미영신환, 천왕보심단, 청심온담탕, 주사안신환 등의 처방을 잇따라 달여 올렸다.
소화불량에 신경쇠약 겹쳐
갖은 전염병에 시달렸던 순조는 콜레라도 앓았다. 사진은 1980년 9월 서울에까지 번진 콜레라 방역 작업.
순조가 지속적으로 허약해지면서 위장의 소화력이 떨어지자 가미군자탕 계열의 처방이 이뤄진다. 가미군자탕은 순조 자신이 운명하는 마지막 날까지 복용했던 처방이다. 가미군자탕, 육군자탕, 생위군자탕, 삼령백출산, 승양순기탕 등은 모두 사군자탕이라는 처방을 모토로 그때그때 증상에 맞게 변형한 처방이었다. 순조 14년, 왕의 신뢰를 받던 유의(儒醫) 홍욱호는 왕의 온몸이 불편한 증세는 오로지 위기(胃氣·한의학에서 원기를 이르는 말)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진단하면서 위기를 보충하고 건강하게 만들 것을 재삼 강조한다.
사군자탕은 인삼, 백출, 백복령, 감초 4가지로 구성된 약물로 전신이 무력하면서 소화기능이 약하고 자주 설사를 하면서 많이 먹지 못하고 힘이 없는 증상에 사용하는 처방이다. 사군자탕을 푹 달여 대접에 담아놓으면 담백한 마음을 지닌 군자 같다. 달인 듯 달이지 않은 듯 담담한 빛깔이어서 차 한잔 마시는 것 같다. 처음엔 그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기 힘들지만 한참을 먹고 나면 건강이 개선된 느낌이 오는 것이다. 가득 차야 드러나는 군자인 셈이다. 이런 처방을 꾸준히 한 탓인지 순조는 38세까지 13년 동안은 질병 기록이 없다.
죽는 날까지 가미군자탕 복용
순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사인은 다리 부위의 종기다. 다리 부위에 생긴 염창(?瘡)으로 짐작된다. 동의보감은 염창을 이렇게 설명한다. “양쪽 다리가 짓물러서 나쁜 냄새가 나고 걸어다니기도 힘든데 이것은 정강이뼈 위에 생긴 것으로 위험한 질병으로 보면서 많이 걷지 말아야 한다”.
순조 14년 11월 2일, 다리에 문제가 생긴 것을 먼저 지적하기보다는 다리에 약을 붙인 결과로 수포와 붉은 열이 올라오는 것을 호소한다. 11월 20일 다리 부위의 종기가 손가락 머리처럼 부풀어올라 고약을 바를 것을 의논한다. 이후 석 달 넘는 기간에 22종이나 되는 많은 고약을 붙이면서 종기를 치료한다.
문제는 똑같은 증상이 순조 34년, 45세 되는 해에 재발한 것이다. 그해 10월 28일 가벼운 두통 증세와 함께 대소변이 불순한 증상이 있다고 하여 순조에게 가미정기산이 처방된다. 11월 1일 기록을 보면, 종기가 재발해 메밀병으로 만든 고약을 종기에 붙인다. 메밀병은 순조 14년 9월에 사용한 바 있던 고약 종류다. 13일까지 종기 치료 목적으로 소담병자, 촉농고, 투농산 등 고약을 계속 붙이면서 치료했지만 순조의 종기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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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할 점은 종기가 진행됐음에도 탕약은 계속적으로 가미군자탕, 인삼이나 계피가 들어간 가감양위탕, 이공산 등 위장의 기력을 돕는 처방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순조 사망의 직접적 원인은 종기였지만, 그가 한평생 밥맛 떨어지는 인생을 살다갔음을 처방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