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마다 배낭을 멘 채 집을 나와 식량을 구하러 창동으로 갔다. 애호박, 가지, 오이, 토마토, 감자 등을 얻을 수 있었다. 길에 널려 악취를 풍기는 시체를 참으로 많이 보았다. 커가면서 인간은 왜 꼭 전쟁을 해야만 하며 전쟁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에 빠지곤 했다.
나는 1941년 12월 21일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81번지(서울 도봉구 창5동)에서 부친 원남(苑南) 송영수와 모친 송원(松苑) 김현수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생가는 1939년경 고하(古下) 송진우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가옥인데 당시의 경제 사정을 반영하듯 공사가 지지부진하고 건축 자금이 모자라 안채의 대청과 마루의 겉 분합문도 미처 달지 못한 채 신혼인 나의 부모님이 입주했다. 이 집 안방 뒤에 붙은 2칸의 골방 중 하나에서 내가 태어났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연령에 미달한 상태로 창동초교에 입학해 약 2년간 다니다가 창동을 떠나 사대문 안으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못했으나 어릴 적 살던 명륜동 31의 9번지 전셋집이나 원서동 74번지 고하 할아버지 댁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무네미(물넘어라는 명칭이 와전된 동네 이름인데 현재 수유동에 해당), 말미, 쌍감리(쌍문동), 벌리(번동)를 지나 창동까지 수없이 걸어 다닌 어린 시절을 회고하곤 했다. 그때마다 이 산자수명하고도 평화로운 농촌인 창동 마을이 서울로 편입된 뒤 어쩌면 그렇게도 평화롭던 농촌의 흔적이 깡그리 없어져 버렸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아름다운 산이 원근으로 알맞게 병풍을 친 전형적 농촌 마을인 창동리가 비옥한 문전옥답을 끼고 형성됐는데 물이 늘상 풍부한 동네여서 가뭄을 모르는 곳이었다. 태극당 제과점이 있는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시작되는 미아리고개가 높이를 낮추고 길을 넓혀 다니기가 좀 수월해진 것은 수십 년 뒤의 일이기에 내가 어릴 적에는 꽤나 높고 좁은 미아리고개를 힘들게 걸어 넘으면서 사대문 안에 드나들었다.
창동으로 이주한 志士들
나는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왼쪽은 돌 사진, 오른쪽은 창동초교 1학년 때 어머니와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일본의 단말마적 항전으로 인해 영미 연합군이 서울을 폭격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서울 교외인 창동 마을로 옮겨 자리 잡은 명사가 많았다. 위당 정인보(초대 감찰위원장), 가인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지헌 장현중, 호암 문일평, 일사 방종현,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와 그의 아들인 홍기문, 홍기무 등이 2차대전 말기의 어려운 삶을 창동에서 근근이 이어나갔다. 서울 사대문 안 원서동에 살던 고하 할아버지도 자주 창동으로 나와 우리 집에서 여러 날씩 기거하면서 이곳의 어른들과 조심스럽지만 허물없이 어울리셨다고 한다. 특히 위당과 가인 선생을 끔찍하게 모시고 가까이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들 영양실조로 얼굴이 창백하고 일제의 발악으로 기가 죽어 있었으나 유독 고하만은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음을 유난히도 강조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건국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을 열정적으로 강조하곤 했다는 것이 집안 내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후사가 없던 고하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일찍이 내심 양자로 정해놓고 온갖 비밀스러운 임무를 다 시키고는 언제 투옥되거나 고통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사실상 우리 전 가족의 유일한 생활 책임자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고하는 인문 고등학교를 거쳐 반듯한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아버지의 욕망을 포기하게 한 다음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고)에 들어가게 해 주판과 부기 등을 배우게 했다. 만일의 경우에 점원이나 서기로 취업해서라도 집안을 부양할 준비와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후일 아버지는 이 대목을 한탄조로 회고하신 일이 있다. 아버지는 고교 시절 주경야독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데다가 박준호 교장선생님(박병래 전 성모병원장 부친) 및 담임인 장면 선생(제2공화국 국무총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후일 장면 총리가 집권하자 정부의 고위직을 제의받았으나 완강하게 사양했다. 이것은 정치인인 할아버지의 암살 비극을 거울삼아 절대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그분 나름대로의 의지 표현이었다.
독립운동 구심점, 古下
아버지는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상과에 진학한 후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를 다녀 각황사 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보성전문 상학부를 어렵사리 졸업하자마자 암울한 현실에서도 당시 선망의 직장인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입사 시험에 대뜸 합격해 한 달에 90원이라는 거액의 월급을 받을 꿈에 부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인 대표적 지도자의 자손이 일제가 세운 금융기관에 근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시비가 고하 주변에서 일어나 결국 출근 하루 전날 이 황금 직장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당시 유일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현 경방)에 부랴부랴 취직하고 보니 월급이 40원이었다고 한다. 경성방직의 오사카 지점에 수년간 근무하다가 귀국해 창동 집에 정착한 뒤로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창동역에서 기차로 청량리역에 도착한 다음 전차로 갈아타고 노량진역을 지나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영등포 소재 경방의 공장까지 힘든 출퇴근을 여러 해 동안 계속했다.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다. 결혼 후 복잡한 집안 사정상 생가 시모, 양가 시모 및 서시모 등 사실상 세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어려움, 나를 낳으신 뒤 약과 음식이 부족하고 요양할 형편이 못 돼 수년간 괴롭혀온 병마, 거의 날마다 창동에서 원서동으로 출근해 고하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엄청난 가사업무량, 독립운동 지도자 집안에 가해지는 각종 위협과 공포 등을 감당하면서 한순간도 편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신 적이 없다. 더군다나 광복의 기쁨도 잠깐이고, 1945년 12월 30일 새벽 원서동 고하 댁의 사랑채에서 한현우 등 무뢰배가 시아버지를 암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90세를 사시고 2009년 여름에 별세하셨다. 아프리카 밀림 속을 출장 중이어서 임종을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으나 내가 국제형사재판소장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본 후 운명하셨다.
집안 어느 누가 암살과 같은 엄청나고도 비극적인 사유로 집안 어른이 갑자기 생을 마감하실지 미리 알았겠는가. 아무 준비 없이 황망 중에 유언집행인인 본부인 유차(柳次·본관 고흥) 할머니의 변호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총지휘하에 결국 송씨 문중이 민법상의 정식 친족회의를 열어 나의 부친을 고하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정식으로 법적 가통을 잇게 하는 결의를 했다. 당시 민법에 규정된 대로 사후입양(死後入養) 조치로 인해 그동안 사실상 아들과 며느리 노릇을 한 나의 부모님이 고하의 사후에야 비로소 법적으로 그분의 호적상 정식 입양된 후계자가 됐다. 지금은 가계를 꼭 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많이 희석돼 사후양자라는 제도가 민법 개정 시에 폐지됐지만 그 당시에는 중요한 가계 계승 방법의 하나였다. 나는 이처럼 고하의 피를 직접 받은 손자는 아니나 고하의 4남 4녀 형제분 중 손위 큰형님의 3남인 내 아버지가 아들로서 사후입양을 하셨으니 나는 법적으로 고하의 뒤를 잇는 유일한 장손이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새끼”
혜화초교 4학년 1반 친구들이다. 6·25전쟁 직전 촬영했다.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일본 형사 미와가 자행한 악독한 고문 중에는 고하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놓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훈련된 경찰견으로 하여금 무차별로 물게 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고하는 생식 능력을 잃어 다시는 자손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게 집안 내의 정설이다. 고하는 10대에 부모가 정해준 두 살 위의 처녀와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고하가 일본 유학 중 그녀가 천연두로 사망한 후 혈육이 없는 일생을 사셨다. 고하가 혹독한 고문 끝에 1년 7개월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무죄석방된 것은 적용 법률상의 문제 덕분이었다. 독립운동을 획책한 행위를 내란죄로 다스렸더라면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나 당시 법원은 오늘날의 집시법 위반에 해당하는 죄로 다스리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죄에는 예비 음모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광복되기 수일 전부터 웬일인지 원서동 집 주변에 감시원 수가 돌연 증가하고 사랑채로 고하를 방문하는 이가 늘었다. 광복 직전인 8월 초 어느 날 일이다. 나는 날이 더워 옷을 거의 다 벗은 상태로 원서동 집 안마당에서 혼자 놀았는데 제복을 입고 긴 칼을 찬 일본 고관을 따라 안마당으로 들어온 사람이 다짜고짜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새끼” 운운하는 욕을 큰 소리로 했다. 어린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걷어차여 턱을 토방의 댓돌에 부딪히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재동 부근 김웅규 외과에 가서 여러 바늘을 꿰맨 후에도 여러 해 동안 크게 고생했다. 조금 큰 다음 부모님에게 이 일을 물어보았다. 부모님에 따르면 이쿠다(生田) 경기도지사 등 일제의 고관들이 정권 인수 교섭 차 고하 할아버지를 비밀리에 수차례 방문했는데 고하가 결연히 거절하자 화가 난 조선인 수행원 한 명이 안채로 내려와 내게 분풀이했다는 것이다. 그가 일제 총독부에서 높은 관리를 하던 전봉덕(田奉德)이라는 것도 그때 들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
광복 직전 일제가 조선의 지도자를 모두 죽이고 철수하리라는 정보를 입수한 고하는 미리부터 병이 깊어 운신을 못하는 시늉을 했다. 더운 삼복 중에도 원서동 사랑채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고하의 머리맡에서 한약을 달이는 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할아버지 어디 아파?’ 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광복이 되자 그야말로 조선 천지의 모든 지도자가 원서동의 고하 댁으로 몰려들었다. 창덕궁과 휘문학교(현 현대건설 자리) 사이로 좁고 길게 난 원서동 골목(창덕궁길)은 할아버지 댁에 이르기까지 사람으로 가득했다. 물론 오시는 손님들에 대한 모든 치다꺼리는 어머니 몫이었다. 암살당하시던 전날 밤 할아버지는 백범 김구와 경교장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한 후 늦게 귀가하셨음에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원서동 사랑채의 거실에서 같이 자기로 돼 있었으나 마침 함께 주무실 손님이 따라오셨고 내가 먼저 아래채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저격범의 총탄을 피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다섯 살에 처음 겪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고하와 함께 주무시던 손님은 할아버지의 친척인데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어 오래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창동 집에서 할아버지 3년상을 치렀는데 고하의 암살은 집안에 두고두고 심대한 타격을 끼쳤다. 가족에는 커다란 트라우마였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주었다. 가족들은 앞으로 절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재삼 맹세했으며 부모님은 3년상을 치른 다음 나의 생가를 그대로 놓아둔 채 창동 마을에서 서울 사대문 안으로 이사를 계획했다. 그 당시에는 소위 적산가옥(일본인이 살다 떠난 부동산을 정부 소유로 삼은 이른바 귀속재산)이 일본인이 많이 살던 지역에 즐비했다. 웬만하면 각종 연고권을 주장해 적산가옥을 싸게 불하받아 집을 장만하는 것이 당시의 풍경이었고 현재 큰 부자가 된 일부 재벌급 인사는 귀속재산을 싸게 불하받아 부의 기초를 마련했다. 아버지도 비슷한 방법을 모색하신 모양인데 어느 날 이것이 고하를 따르던 동지들의 귀에 들어가자 ‘어떻게 대표적 항일 독립지사인 고하의 아들이 왜놈들이 남긴 적산가옥을 불하받아 살 수가 있는가’라고 엄하게들 꾸중해 아버지는 이를 포기해야만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불호령만 이곳저곳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우리 식구가 셋집을 전전하다 겨우 내 집 한 칸을 장만한 것은 6·25 피난살이 이후 환도하고도 한참이 지난 1957년의 일이다. 안암동 1가에 작은 한옥을 힘겹게 매입했다. 서울에 내 집이 없는 상태에서 청구동의 임시 거처를 잠시 거쳐 명륜동 1가 31의 9번지의 번듯한 한옥을 전세 내 살면서 내가 전학한 곳이 혜화초교다.
이승만의 거짓 녹음방송
1959년 2월 28일 경기고 졸업식 때 사진이다.
나는 날마다 배낭을 멘 채 집을 나와 식량을 구하러 연고지 농촌인 창동으로 갔다. 창동의 아는 집을 찾아가도 쌀이나 보리를 주는 사람은 전연 없고 여름이라서 그런지 애호박, 가지, 오이, 토마토, 감자 등을 조금씩 얻을 수 있었다. 어린 나에게 상당히 무거운 짐이지만 나는 이를 배낭에 지고 다시 창동에서 명륜동 집까지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걸어왔다. 이렇게 석 달간 식량 공급 책임을 맡았다. 날마다 여름 채소나마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오는 길에 그나마 얻은 것을 인민군에게 뺏기거나 폭격 또는 기총소사로 인해 도피하는 과정에서 배낭의 식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흩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온 식구가 굶기도 했다. 이즈음 길에 널려 염천에 썩어가면서 악취를 풍기는 시체를 참으로 많이 보았다. 커가면서 인간은 왜 꼭 전쟁을 해야만 하며 전쟁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7월 중 어느 날 옆집에서 숨어 지내던 이정우 대검 검사가 갑자기 들이닥친 인민군을 피해 우리 집으로 담을 넘어 도피한 일이 기억난다. 그분은 전신을 포대기로 둘둘 말아 짐처럼 리어카에 실린 채 우리 집 대문을 통해 교묘하게 빠져나가 고향인 군산 방향으로 위험한 피난길을 떠났다. 나의 아버지는 파리한 얼굴로 지하실 벙커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항상 단파 라디오를 들으셨다. 영어를 한 마디라도 이해하는 식구는 아버지뿐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는 하염없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유엔 연합군이 한국에 파견돼 곧 공산군을 무찌르게 됐다고 말씀했다. 미국 국무장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가 임시수도 부산에 와서 피난국회에서 연설했는데 첫마디를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Korea is not alone)”로 시작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파병 결의를 전달한 것이다. 그 후 저 유명한 인천 상륙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이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까지 우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다.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진군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북한을 도와 참전한 중공군이 대거 인해전술을 쓰는 바람에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한다. 이번에는 우리도 확실하게 피난을 가야 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채 함락되기 직전 혹한 속에서 우리 식구는 고령인 할머니를 모시고 만원인 기차 칸에 짐짝처럼 실려 여러 날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정처 없이 범일동에 있는 구(舊)조선방직 창고에 볏짚을 깔고 피난살이할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머무는 임시수용소의 바로 옆에서는 말들이 짚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말똥 냄새가 나는 마구간에 수용된 것이다.
말똥 냄새나는 마구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부산도 적의 손에 함락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우리는 배를 타고 거문도를 거쳐 제주도로 한 번 더 피난을 갔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휴전교섭이 진행 중이므로 우리도 적당한 기회에 육지로 복귀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우리 식구가 당연히 제주에서 서울로 가거나 적어도 부산으로 복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여의치 못해 난데없이 아무런 연고가 없는 목포로 간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도 그리로 간 이유를 잘 모르지만 아버지는 직장 관계로 부산에 주로 계시고 가족은 아름다운 유달산 밑의 도시 목포에서 뜨내기 피난민의 고달픈 생활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생소한 전주로 이사했다. 일제가 각 도청 소재지마다 세운 방직공장(鍾紡)이 광복 후 불하됐는데 그중 전주에 있는 공장을 불하받은 측에서 이 공장의 복구와 경영을 아버지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로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전주에 도착해 학교에 가보니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기내기…” 하면서 연신 놀려대는 급우가 많아 이들과 사귀는 데에는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나는 전주에서 중학교 입학 국가고시를 치렀는데 도내 석차에서 수석은 외우 최일섭 군에게 빼앗겼지만 500점 만점에 450점이 넘는 수준이어서 전국 석차로 따져 봐도 상위 10등 안에 들었으므로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396점의 경기중학에 들어가고도 남는 성적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경기중학에 보내주실 것으로 굳게 믿었으나 어린 나를 서울로 혼자 유학 보낼 것인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셨다. 가정 형편상 무리가 돼 눈물을 머금고 전주에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후 파괴되고 흩어진 건물과 교사진에도 불구하고 강택수 교장선생님의 열성과 배려로 전통 있는 명문 전주 북중학교에서 그런대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3년 후 전교 1등으로 졸업했고 경기고 입학시험에 합격해 1956년 초 비로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과 달리 환도가 약 3년 지연된 것이다. 이때도 내가 고하의 손자로서 중앙고교에 진학해야지 어떻게 관립학교인 경기고교를 가느냐고 고하를 흠모하고 따르는 분들이 다소 시비를 하셔서 아버지가 좀 곤란하셨는데 일단 경기고에 입학한 후에는 제도상 전학할 수도 없는지라 결국 흐지부지 넘어갔다. 나는 경기고에 입학하자마자 혜화초교 동창들을 다시 만나게 돼 기뻤다.
“해양 진출로 먹고살아야 하는 나라”
내가 다니던 경기고교는 분위기가 좋았다. 원래 수재들이 모이면 경쟁이 심하거나 자기 잘난 것만 내세워 행동하는 수가 많은데 우리 학년 605명은 끼리끼리 서로 통하면서 클럽도 만들고 토론도 많이 하면서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부하던 종로구 화동 교사는 현재는 정독도서관이 됐지만 강남구 삼성동에 거의 10배나 넓은 터를 잡아 큰 교사를 짓고 이전해 후배들이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마음이 뿌듯하지만, 기이하게도 내가 다닌 모든 학교가 폐지됐거나 옛날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버린 까닭에 추억을 가지고 원래의 모교 캠퍼스를 찾는 일이 불가능해져 유감이다. 혜화초교, 전주북중, 경기고 심지어 서울대와 사법대학원까지 없어졌거나 이사했다.1959년 3월 서울법대에 무난히 입학했다. 왜 하필 법대를 선택했는가. 당시의 어른들은 관존민비 사상이 있어 막연하나마 자제가 서울법대에 들어가 국가고시에 합격해 입신출세하는 희망을 압도적으로 갖고 있었다. 나의 유차 할머니가 전형적으로 그러한 분이셨으나 부모님은 적성과 관계없이 무조건 법대로 진학해야 한다고 강요한 일이 전연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보다는 법학이 인문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팔방미인 격으로 응용될 수 있는 분야라는 점에 착안해 전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내가 법대에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을 뿐 명확하게 생각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어려서 6·25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목격하고는 점차 커가면서 이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법으로 다스릴 수 있고, 법으로 재발 방지가 가능한지 늘 물음표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그러려면 법학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 것도 사실이었다.
서울에 환도한 이후 나중에 내 장인이 되는 그 당시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남재(南齋) 김상협 선생께 거의 매년 세배를 갔다. 명륜동의 그 댁은 갈 때마다 손님으로 넘쳐나고 활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바빠도 남재 선생은 나를 별도로 응접실에 안내해 짧은 시간이나마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당시 이분이 동경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신 줄 알았는데 정식으로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관계로 진출하는 것과 달리 흔들림 없이 학문의 길을 택한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분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에게 법대에 갈 것을 권했다. 판·검사의 길을 걸어도 좋지만 한국은 반도이고 해안선이 긴 데다 해양 진출과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는 나라이니 법대에 가서 공법인 해양국제법과 사법인 해상법을 모두 공부해 이 양 분야를 아우르는 거대한 바다에 관한 법체계를 세우도록 연구해보면 어떤가 하는 말씀을 하셨다.
민주학생의거와 군사정변
1959년 대학에 막상 들어가니 자유당 말기의 부패와 권력남용이 대단하고 특히 3·15 부정 선거를 감행하는 바람에 전 국민의 분노를 사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내가 2학년 때인 1960년 4·19 민주학생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나도 동숭동 캠퍼스에서 고 김증한 교수님의 민법 강의를 듣다 말고 뛰쳐나와 다른 학우들과 함께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해갔다. 아마 이때 대학생들이 처음으로 시국에 관한 데모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당시에 정치적 야심도 없고 우리가 하는 데모의 정치적 결과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여러 날 동안 격렬한 데모 중 청와대(당시 경무대) 방면으로 행진한 학생 중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그해 여름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민주적인 장면 정부가 들어섰으나 무능해 기본 질서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 장면 총리가 아끼는 제자이던 아버지에게도 이런저런 정치적 접촉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명확하게 거리를 두었다. 사실 자유당 정권 때도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유차 할머니를 경무대로 초청한 것을 우리가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아버지는 미동도 않았기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해를 넘겨도 무질서한 정치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으며 1961년 5월 군사정변이 터지고 말았다. 계엄령이 선포되는 상황 속에서 학교의 수업이란 거의 없었다. 대학 생활은 강의를 충실하게 들을 수 없는 시국 상황이어서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 많지 않았다. 당시 학생의 출석은 등교해 출석부에 각자 양심적으로 도장을 찍도록 돼 있었지만 대개 어느 학생 하나가 여러 명의 도장을 들고 와서 모두 찍고 가는 것이 상례였다. 학교 실정이 이 지경이다 보니 일찍 고시 준비를 시작할 생각으로 입학하자마자 절간으로 들어간 수많은 동기생이 선견지명 있는 사람처럼 여겨져 부럽기도 했다. 나도 공인된 증표를 확보하고자 고등고시를 쳐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합격해 판·검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습득한 지식의 척도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고시를 초개같이 여기던 나는 3학년 때 마음을 잡고 국가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고등고시 행정과 14회 시험시행 공고가 발표됐다. 행정과 시험은 자격시험으로는 이번이 마지막이고 이듬해부터는 3급(지금의 5급) 채용시험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행정과 응시를 목표로 한 바는 없으나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의 시험 과목이 당시에는 대부분 중복돼 두어 과목만 더 준비하면 양과를 치를 수 있는 데다 마지막 시험이라고 하니 용기를 내 행정과 고시를 먼저 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남에게 면박 주지 말라”
고등고시 행정과 14회 합격자들. 앞줄 맨 왼쪽이 나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나는 고하 할아버지를 받들면서 대물림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탄압, 6·25전쟁 동안의 고생을 극복하고 적어도 고하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으면서 집안을 유지하고 굶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아버지도 마음만 먹었으면 광복 직후 큰 위법이나 무리 없이 귀속재산 불하 등을 통해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나도 근 40년 서울대 교수를 하면서 외부의 각종 유혹 등을 물리치지 못한 채 뜬구름 같은 일시적 정치적 기회에 놀아나면서 정체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가훈을 묻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우리 집은 가훈이라고 똑 떨어지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고하 할아버지께서 평소에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강조했고 남에게 면박을 주지 말라고 말씀한 것을 지키고자 노력할 뿐이다. 주변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은 대인관계에서 돈이나 여자 문제에 투명하고 담백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며 면박을 주지 말라는 의미는 대화 시 같은 값이면 부드럽고 좋은 말로 상대방을 대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실천하고자 할 뿐이다. 남을 칭찬하고 투명하고도 공정한 언행을 하고자 노력하지만 잘 안 될 경우가 많음은 수양이 부족한 탓이리라.
송상현
● 1941년출생
●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 고등고시 행정과(14회)· 사법과(16회) 합격
●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 서울대 법대 교수
● 서울대 법대 학장
●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 現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