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문재인도 못한 이재명 대세론
‘초한지’ 본편은 진나라 멸망 이후 시작됐다
일극 체제 영광 속에 위험 요인 부상
팬덤으로 당 장악엔 성공, 조직 역량은 퇴보
중도층 포용 못하면 차기 대선 승리 어려
8월 18일 더불어민주당 정기전국당원대회에서 이재명 대표는 연임에 성공했다. [뉴시스]
이 대표가 2021년 경기도지사를 사임하고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뒤 3년 만에 일극 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전망 때문이다. 전당대회 결과는 4월 총선 승리의 전리품이면서, 동시에 총선 결과를 놓고 형성된 이 대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대선 직전까지 승리 가능성이 있느냐는 회의론에 시달렸던 세 명의 민주당계 전 대통령(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과 이 대표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2024 한국 정치 상황, ‘초한지’와 비슷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대실패가 이 대표의 압도적 우세를 낳았다. 2022년 3·9대선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보수가 순식간에 몰락하는 양상은 중국 진·한(秦漢) 교체기를 떠올리게 한다. 진나라가 15년 만에 멸망하게 된 원인은 기본적으로 억압적 통치에 있다. 2대 황제 호해는 국정 기조를 바꾸기는커녕 억압의 강도를 높였다. 비선 실세였던 환관 조고가 승상 이사 같은 전통적 관료 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 기반은 약해졌다. 그 과정에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엘리트 집단 내부의 의사소통은 마비됐다. 동시다발적 반란을 꾸역꾸역 막아내다 결국 장한이 이끄는 주력군이 항우에 투항해 멸망에 이르렀다. 전통적 보수는 소멸하고 뉴라이트가 득세하며, 비선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지지율 급락에도 요지부동인 대통령실과 여당의 모습과 닮았다.중국 진나라 말기 서초 패왕에 등극한 항우. [위키피디아]
먼저 일극 체제의 역설이다. 이재명만 바라보는 팬덤 정치는 민주당의 정치적 행보를 제약하고, 다양한 지지 세력을 끌어안을 수 없게 한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 등 ‘성남시 성공 모델’이라 할 만한 정책들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대통령직에 걸맞은 수권 능력이나 중도층에 대한 포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대표는 독주 끝에 몰락한 항우가 될 것이냐, 아니면 여러 세력을 끌어모으고 질적 도약과 변신 끝에 승리한 유방이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할 수 있다.
중국 진나라 말기 혼란을 수습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전한 초대 황제 유방. [위키피디아]
‘찐명’ 포섭 못한 유권자 집단 이탈 조짐
한나라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팀플레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방의 주력군이 항우를 정면에서 막는 동안, 한신은 북방 지역을 공격해 평정했고, 팽월은 항우의 후방에서 끊임없이 교란작전을 폈다. 그에 비해 항우에게는 자신 외에는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군사력을 이용해 왕을 내쫓고 권력을 쥔 항우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전권을 주고 대군을 맡기기란 불가능했다.
지금의 민주당에서 이재명 이외 다른 인물이 주체적으로 정치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한나라보다 초나라에 가깝다. 최고위원 경선 후보자들이 누가 더 ‘찐명’이냐를 놓고 경쟁한 것이 대표적이다. 팬덤 정치 메커니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민주당에서 가장 큰 팬덤인 이재명 팬덤과 거리를 두거나 거스르는 정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당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재명 팬덤에 편승할 수 있어야 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이 대표가 내세우는 이슈에 대해 누가 더 선명한 목소리를 내는지 경쟁하는 건 그 때문이다.
민주당에서는 중진이더라도 독자적 정치 역량을 키울 수 없는 구조다.
1인자의 팬덤에 제각각 모인 정치인들의 기계적 결합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직력도 뒤떨어진다. 수는 많지만 구성원은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이재명 개인만 바라볼 뿐이다. 정상적 조직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구조다. 최고위원 경선 과정은 이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다. 정봉주 전 의원이 경선 초반 선두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권리당원이 최우선 후보를 찍은 뒤 다음 표를 행사할 차선 후보를 정하지 못한 결과였다. 찐명 후보들이 경쟁력이 뒤떨어지고 확장성이 낮아 정봉주 후보가 한동안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 김민석 의원은 이재명 대표가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죠?”라고 노골적으로 지원해 준 이후에야 표를 모을 수 있었다. 이 대표의 당대표 출마 선언 때 옆에 선 5명 가운데 한 명은 경선 꼴찌, 다른 한 명은 컷오프 대상이 됐다.
성남시 성공모델, 대한민국에는 안 통해
‘찐명’이 포섭 못한 유권자 집단이 아예 당 밖으로 튕겨 나가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정당은 사회경제적으로 또는 역사 문화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르고 정치의식이 상이한 여러 인구 집단의 결사체다. 특정 정치인이 각각의 인구 집단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다. 한 울타리에 있지만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는 집단도 언제나 존재한다. 정당 내 분파가 여럿일 수밖에 없고, 비주류가 일정 규모 이상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다. 따라서 특정 개인에게 쏠리고 비주류가 사라진 팬덤 정치는 소외되는 지지자 집단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소외된 집단 중 이 대표의 가장 큰 ‘두통’은 바로 호남이다. 총선 비례대표 투표 때 조국혁신당 득표율은 광주 47.7%, 전남 44.0%, 전북 45.5%로 모두 민주당(36.3%, 39.9%, 37.6%)보다 앞섰다. 10월 16일 치러질 전남 곡성 및 영광 군수 재·보궐선거에서 조국혁신당 후보가 당선할 경우 이 대표는 민주당 텃밭에서 사실상 불신임을 받게 된다. 여기에 더해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경남도지사 또는 부산시장에 도전하고 당선되면 부산·울산·경남도 비(非)이재명 지역으로 간주될 것이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꺾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장 선진적이던 진나라의 군사제도를 적극적으로 채택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진나라 군사제도 채택은 군대 운영뿐 아니라 장교와 병사의 확보, 관직과 토지 배분 등 진나라식 사회제도의 도입을 의미했다. 리카이위안(李開元) 일본 슈지쓰대 교수는 “초나라 제도를 폐지하고… 진나라의 국토, 백성, 제도를 전면적으로 계승한 것이 항우를 대적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 바탕”이라고 분석한다. 과거의 적이 싸우는 방식을 받아들여 혁신에 나선 것이다. 반면 항우는 옛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초나라 귀족과 그의 친인척들로 구성된 엘리트 구성도 바꾸지 않았다.
이 대표는 2010~2018년 성남시장으로 재직할 때 업적을 자산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기본소득을 비롯한 주요 경제·사회 정책은 성남시에서 시작한 것이다. 2021년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실적으로 실력을 검증받은 ‘준비된 대통령’이라 자부한다”면서 “성남에서 성공한 민생정책은 경기도의 정책이 됐고, 경기도의 성공한 민생 정책은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성남시 8년이 핵심 치적인 이유는 경기도지사가 서울시장과 달리 예산이나 정책에서 권한이 작은 데 있기도 하다. 문제는 이 ‘성남시 모델’이 2027년 대선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성남시 모델의 핵심은 ‘공격적 복지 확대’다. 그리고 수혜 대상을 콕 집어내는 선별적 방식이 아니라, 중산층까지 수혜를 보게 하는 보편적 방식이다. 기본소득의 예고편으로 성남시에서 실시했던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 산후조리원은 물론이고 경기도지사 시절 도입한 지역화폐를 관통하는 특징이다.
문제는 보편적 복지가 고비용이라는 데 있다. 가파르게 성장하고 기업이 몰려들던 2010년대 성남시와 달리 저성장 고령화 추세가 뚜렷한 2020년대 한국에서는 재원 확보가 어렵다. 2010~2019년 성남시 세입은 연평균 7.3%씩 늘어났는데, 세출 증가율은 5.1%에 불과했다. 무상복지를 늘리고도 부채를 모두 없앨 수 있었던 배경이다. 명목 경제성장률이 3.4%(2023년 기준)에 불과한 중앙정부와 다른 여건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각종 사회복지서비스가 확충되면서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정책을 만들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거꾸로 세금과 사회보험료에 대한 부담은 점차 높아졌다. 우리나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공공부문의 사회복지지출(SOCX·Social Expenditure, 1% 안팎의 민간 부문 제외)은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14.8%로 OECD 평균(21.1%)에 못 미친다. 하지만 지출 증가 속도는 OECD에서 가장 빠르다. 2010년 SOCX 비중은 7.9%에 불과했지만 불과 12년 만에 2배 가까이 늘었다. 게다가 고령화로 20% 선을 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의료제도·국민연금을 둘러싼 논쟁에서 추가적 사회보험료 부담에 난색을 보이는 여론이 힘을 얻고, 금융투자소득세나 상속·증여세 등을 놓고 감세에 대한 호응이 높은 이유다.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찬반 투표를 계기로 본격화된 복지 확대 정치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대표가 ‘먹사니즘’을 적극적으로 내걸면서 좀 더 중도 유권자 구미에 맞게끔 보수적 정책을 내놓고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본사회’를 완강하게 고수하는 한 정책 기조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포용이냐 배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항우의 최대 실책은 진나라 사람을 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항복한 병사들을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어느 날 밤 불시에 몰살시킨 신안대학살에 이어, 함양에 진입한 뒤 도시를 폐허로 만들기도 했다. 항우의 대규모 포로 학살은 진나라 사람들이 완전히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고, 나아가 유방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세력이 약했던 유방은 진나라 사람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항우를 죽이고 시체를 나눠 가진 5명 모두 진나라 군인 출신이었다. 수색과 추격, 측면 공격에 꼭 필요한 기병대를 만들면서 진나라 기병 출신을 발탁한 결과였다.
이 대표가 국회에서 170석을 넘게 가진 민주당을 이끌면서 보여야 하는 것은 민주당 밖 정치세력이나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를 포용하고 타협을 끌어낼 수 있는 역량이다. 권력 분점에 따른 교착상태야말로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값이다. 국민의 선택은 늘 특정 정치세력의 독주를 용인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당 장악 과정에서 드러난 비주류에 대한 배척은 중도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게 됐을 때의 독단적 국정 운영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이 대표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윤석열 정부와의 극단적 대치와 심판론에 기댈 것인지, 아니면 실용주의에 입각해 과감하게 보수 진영과 과거의 경쟁 세력을 끌어들일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양쪽 모두 적잖은 어려운 점이 있다. 포용적이고 중도 지향적 방향으로 전환한다면 지금의 강고한 팬덤을 만들어낸 이재명식 정치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일극 체제가 완성된 지금, 이 대표가 진짜 시험대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신동아 10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