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지상 최고 목표는 정권교체, 정권 탈환
정권교체 2가지 조건=안정감 강화+거부감 약화
비토 정서 줄이는 데 집중한 DJ 대선 캠페인
이명박 강점, 강한 지지층 아닌 약한 반대층
국민통합으로 중도 포지셔닝한 문재인
997년 김대중 후보의 대선 캠페인은 비토층 축소에 초점이 맞춰졌다(맨 왼쪽).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강점은 확장성, 즉 약한 비토 정서였다(가운데). 2017년 대선에 문재인 후보는 안정감 강화 쪽에 방점을 둔 캠페인을 했다. [동아DB]
임기 반환점 앞둔 尹 대통령
11월이면 윤석열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돈다.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통상적으로 권력의 전성기에 들어갈 시점이다. 대통령직에 익숙해져 자신감이 생기고 참모들과도 손발이 척척 맞아 내각과 공직사회에 대한 장악력이 높아져 한창 일을 하고 성과를 낼 때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 부인에 대한 여러 의혹과 정치적 공방, 정책 추진 동력의 저하, 중도층 이반, 핵심 지지층의 실망감 표출 등은 전형적으로 정권 후반기 징후들이다. 더 큰 문제는 용산과 대통령이 민심 쪽으로 다가가서 해법을 찾으려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장악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게다가 생존을 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여당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집권 2년차에 치러진 2023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이어 집권 3년차에 치러진 2024년 총선에서도 경고음이 높아졌지만 오불관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이 불만을 토로하고 심지어 회초리를 드는데도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다면 심각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야당 지지자들이나 국정 운영에 불만이 큰 사람들은 더 큰 매를 들어서라도 대통령을 꺾으려 하게 되고, 중도층도 이들에게 동조하게 된다. 여당 지지자 상당수도 대통령과 정권을 옹호하려는 의지를 상실해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면 정권은 극소수 강성 지지층과 여러 정치경제적 이익을 생각해 권력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결국 민심과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총선 직후 7·23 전당대회에서도 그런 조짐이 일부 나타났지만, 여당 다수 당원과 지지층은 변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대 이후에도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자기 지지층의 요구에 호응하지 않는 모습이다. ‘생존본능’이 상대적으로 강한 여당과 용산이 수면 위를 넘나드는 갈등 양상을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야당 상황은 여권과 정반대다. 인기가 괜찮은 대통령일지라도 잔여 임기와 비례해 국정 장악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국정 장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 강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권 재창출 가능성을 높이는 것뿐이다. 야당은 정권교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곧 힘을 키우는 일이다. 게다가 여권에선 정권 재창출 언급을 차기에 대한 준비이자 불충과 레임덕 촉진으로 보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하지만 야당은 다르다. 대선에서 패배한 그 순간부터 지상 최고 목표는 정권교체, 정권 탈환이다.
정권교체, 변화에 대한 승인과 동의어
민주화 이후 정권교체는 네 차례다. 1997년 대선(김영삼→김대중), 2007년 대선(노무현→이명박), 2017년 대선(박근혜→문재인), 2022년(문재인→윤석열)의 경우다. 정권 재창출에는 ‘차별화’라는 일정한 법칙성이 있다. 정권교체에서도 마찬가지로 법칙성이 엿보인다.
특히 김대중, 이명박, 문재인에게 그 법칙성이 뚜렷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안정감의 강화 혹은 거부감의 약화다. 정권교체는 변화에 대한 승인과 동의어다. 하지만 국민 다수가 변화를 승인하기 위해선 안정감이 필요하다. 야당 지지자들의 지지를 유지 강화하는 한편 여권의 약한 지지자, 혹은 야권의 약한 반대자, 그리고 스윙보터들의 거부감을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1971년,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세 번 패배하고 네 번째 도전인 1997년 대선에서 당선한 김대중 대통령의 사례가 교과서적 케이스다. 1971년 40대 기수론 대표 격으로 야당 후보로 나서 부유세 부과, 한반도 4대국 안전보장론, 예비군 폐지 등의 공약을 내세워 선전한 이래 김대중은 대한민국 주요 정치인 중에선 가장 진보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투옥과 망명, 사형선고 등의 고난도 진보적 이미지를 강화했다.
민주화 이후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단일화에 실패한 이후 4자 필승론(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모두 출마할 경우 영남은 김영삼과 노태우로 분할되고 충청에서 김종필이 우위를 보일 테니 김대중이 호남을 석권하고 수도권에서 앞서나가면 승리한다는 구도)에 입각해 김영삼에 비해서도 더 진보적 이미지를 내세웠다. 당시 선거 포스터 속의 김대중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통해 단일화 압박을 떨쳐내고 재야·학생운동권·노동계 등의 지지를 더 얻었지만, 색깔론의 공격을 받았고 중도층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해 3위에 그쳤다. 군부나 독재의 탄압이 아니라 본인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4자 필승론은 소선거구제로 진행된 1988년 총선에서 뒤늦게 위력을 발휘해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누르고 원내 2당,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압박을 받은 노태우, 김영삼은 3당 합당이라는 인위적 정계 개편을 시행했다. 지리적·정치적으로 포위된 김대중은 재야인사들을 충원해 진보색을 더 강화하면서 수도권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고, 노무현·김정길·장석화 등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부산·경남(PK) 소장파들과도 손을 잡았다. 정책적·이념적 차별성이 나타나는 양당 정치의 토대가 만들어졌고, 김대중이 1992년 대선에 야당의 대표 선수로 나섰지만 김영삼에게 8%포인트 차이로 패하고 만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은 ‘대화합 정치’를 기치로 한 ‘뉴 DJ 플랜’을 내세웠다. 그는 “시대 변화에 맞추어 중도 우파적 온건 노선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대선 포스터 속 김대중은 양복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1992년의 이런 변화와 기획은 결국 1997년 15대 대선에서 만개한다.
‘뉴 DJ 플랜’은 미국 클린턴과 영국 블레어 등 정권교체 성공 사례 연구의 반영으로 업그레이드됐고, 김종필과의 연대가 1997년 7월에 최종 성사, DJP연합이 이루어졌다. 내각제 시행, 박정희기념관 건립 등 보수층을 겨냥한 공약이 차고 넘쳤다. 심지어 김영삼과 척을 진 5공 세력과도 자민련을 매개로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 수장이던 박태준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마이클 잭슨이 대선 캠페인에 활용됐고 멜빵 바지 ‘DJ와 함께라면 든든해요’라는 로고송이 히트했다. 모든 캠페인은 비토 정서를 줄이는 데 집중됐다. 상대 후보인 이회창에 대한 네거티브 캠페인도 거셌지만 후보 본인은 이에 대해 철저히 거리를 뒀고,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에 대한 비판 수위도 조절했다. 선거 분위기는 김대중을 승인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흘러갔다. ‘준비된 대통령’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슬로건이 당시 선거 분위기를 웅변한다. 상대인 이회창은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과 상대인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 옆에 선 일부 보수세력에 대해 3중 전선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의 승리는 당시 야당의 승리라기보다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진보 정치인의 수십년 간에 걸친 시행착오, 변화와 혁신에 대한 국민의 승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김대중은 1971년을 제외하곤 1987년, 1992년, 1997년 모두 제대로 된 경선 없이 대선 후보로 나섰다.
이에 비한다면 두 번째 정권교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의 승리 역시 큰 방향성은 일치한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부터 이명박의 강점은 확장성, 즉 약한 비토 정서였다. 서울시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청계천 복원, 버스 전용차선 시행 등의 성과를 거둔 이명박은 탈이념 실용주의 이미지를 차근차근 구축했다. 박정희의 딸이자 선거의 여왕으로 노무현 정부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대척점 이미지가 강했던 박근혜와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정권교체를 위한 전략으로 수도권 후보론, 경제 후보론이 차차 힘을 얻었다.
변화와 혁신에 대한 국민의 승인
게다가 당시 여당 지지층, 진보 진영에서도 이념적 선명성이 강하고 국가보안법 개정, 사립학교법 등을 좌초시킨 박근혜에 대한 반감은 거셌다. 그에 비해 이명박에 대한 반감은 그만 못했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이 신승을 한 후 노무현 정부 청와대 인사들은 공공연하게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된다고 나라 망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이명박 역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회창보다 노무현 스타일에 가깝다”고 말하며 호응했다. 실적과 실용주의를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운 이명박의 강점은 강한 지지층이 아니라 약한 반대층이었다. 이회창이 자유선진당 간판으로 독자 출마, 일부 보수층을 잠식했지만 이명박은 정동영에게 520만 표 차이 승리를 거뒀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이라는 특수성이 있었지만 2017년 문재인의 캠페인도 안정감 강화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2012년 첫 도전에서 ‘노무현의 친구’를 강조하며 야권 지지층의 압도적 지지하에 안철수와 단일화, 민주노동당 이정희의 사퇴를 이끌어내며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섰지만 2007년의 교훈으로 중도화 드라이브를 강화한 박근혜 앞에서 역부족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 교훈 탓인지 문재인은 탄핵 국면에서 줄곧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광장의 맨 앞자리는 이재명에게 내줬다.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에 비해 중도적이고 안정적 스탠스의 안희정이 주목을 끌었다. 다자 구도로 펼쳐진 본선에서는 안철수가 한때 치고 올라왔지만 문재인은 왼쪽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자기 왼쪽의 심상정, 오른쪽의 홍준표 사이에서 중도적 포지션을 고수했고, 곧 안철수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탄핵 이후 문재인은 전 정부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고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안정감의 강화와 더불어 “사람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공은 당선으로 이어졌다. 차점자인 홍준표와 득표율 17.05%포인트, 557만951표 차이였다.
尹, 정치적으로 매우 독특한 존재
김대중과 이명박의 정권교체는 정석적이고 공통점이 많다. 문재인의 정권교체 역시 안정감 강화와 비토층 약화가 주요 요인이라 할 수 있지만 박근혜가 탄핵된 순간 대선의 향방이 정해졌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보긴 힘들다.
이런 까닭에 다음 대선, 2027년 대선의 정권교체, 즉 야당 승리를 놓고선 구도와 전략에 대한 주장이 엇갈린다. 현직 대통령 윤석열이 정치적으로 매우 독특한 존재기 때문이다. 임기 초중반부에 이렇게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은 없었다. 이렇게 압도적 여소야대 상황에 처한 대통령도 없었다.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돌지도 않았는데 야당 인사들은 ‘탄핵’ ‘임기 단축 개헌’ 등의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별 역풍도 불지 않는다.
반면 민주당의 현황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다. 의석은 175석에 달하고 당대표는 의원과 지지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다. 그 당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차기 대통령 지지도에선 안정적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 인사 상당수, 주류 인사 다수는 “민심은 이미 현 정권을 심판했다.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탄핵이나 임기단축 개헌이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준(準) 탄핵에 버금가는 분위기를 이어가야 쉽게 이긴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중도 성향의 전문가들은 “다음 대선에 윤석열 대통령이 또 나오는 건 아니다. 이명박도 지지율이 낮았지만 박근혜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탄핵 직후 대선에서도 문재인이 중간 중간엔 비틀거렸다. 이대로 3년을 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특히 사법 리스크에 포획된 이재명은 비토 약화, 안정감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을지는 아직 모른다. 여론과 정치권 분위기로 본다면 현재는 전자 쪽에 힘이 실린다. 그런데 대선은 당장 몇 달 후가 아니라 2년 반 후에나 치러진다. 당장은 10월로 예상되는 이재명 대표의 1심 재판 결과가 차기 대선 향배를 가를 작은 분기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