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휴먼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류가 개발한 최고이자 최악의 도구 AI(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는 근미래에 우리 일상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명암이 뚜렷한 이 신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예술계에서 발생한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동영상 생성 AI ‘Sora’를 이용한 영상 화면 캡쳐. [OpenAI 유튜브]
조영남 사건과 미학 논쟁
지금까지 예술계의 논쟁이 법원의 판결로 이어진 예는 비일비재하다. 대부분은 성적 표현, 정치 의도, 위작에 관한 것으로, 조영남 대작 사건은 미학 논쟁으로 번진 최초의 사례였다. 그의 행위를 현대예술의 관행으로 여기며 옹호하는 측도 있었지만, 몇몇 전문가와 대중은 이 사태를 사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사기’가 예술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독일 바이마르의 예술종합학교, 바우하우스에서 작업하던 라슬로 모홀리 나지(László Moholy-Nagy)가 원거리에 있던 간판업자에게 지침을 내려 작품을 완성한, 일명 전화-회화(telephone-picture)를 도입한 이후, 대작은 예술계에 어느 정도 관행이 됐다.
중요한 것은 ‘실행’이 아닌 ‘콘셉트’라는 현대미술의 발상은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에게도 이어졌다.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것을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우리에게 ‘영웅문’으로 잘 알려진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 역시 대필 작가를 고용해 작품을 쓴 적이 있으며, 수많은 만화가가 문하생을 두고서 자신의 화풍에 따라 작품을 제작했다.
2022년 92세의 일기로 사망한 프랑스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작가 장뤼크 고다르는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네 멋대로 해라’(1960)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지만, 고다르 미학의 정점은 그가 1988~1998년 10년 동안 작업한 ‘영화의 역사’다. 이 작품은 4개 장으로 구성된 266분짜리 대작이다. 그러나 단 한 군데도 그가 실제 연출한 장면이 들어 있지 않다. 무려 350여 편의 영화를 ‘짜깁기’한 이 작품을 영국의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다. 고다르 역시 조영남처럼 본인의 콘셉트를 편집자에게 전달해 작품을 완성했다.
고다르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의 제작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하다. 레네는 2012년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브뤼노 포달리데스라는 신예에게 한 시퀀스 전체를 맡겼고, 그가 작업한 장면을 그대로 삽입해 작품을 완성했다.
조영남의 대작 사건은 ‘창조성’과 ‘실행’이라는 두 축으로 돌아가던 고전예술에 반기를 든 현대 예술의 방법론을 되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됐다. 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혁명적 미술가,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세워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이며 시작한 미학적 반동은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가 예술의 원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조영남 사태가 상기시켜 줬다. 희대의 대작 논쟁은 이제 인공지능(AI) 예술론의 미학 논쟁과 연결되며 또다시 우리를 상념에 젖게 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탈인간을 뜻하는 포스트-휴먼(Post-human) 논의는 최근에 개진됐지만 그 기원은 유구하다.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르스, 이카루스 같은 피조물은 인간과 동물을 결합한 상상의 산물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한계를 날개나 지느러미 등과 같이 동물이 가진 속성을 이용해 극복하고자 했다. 사실 인간이 유사 이래 개발한 모든 기술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기술 발달로 인간은 더는 휴머니즘 관점에서 스스로 존재를 정의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은 첨단 기계문명과 관계를 맺으면서 삶의 형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도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제 인간은 모든 형태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이 생산한 존재와 연결되며 상호 네트워크를 통해 살아간다. 과거 반인반수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상상의 산물에 의존하던 인간은 다리를 대신할 자동차를 만들었고 뇌를 보조할 컴퓨터를 개발했다. 디지털 기술은 도구를 제작해 인간을 유인원과 구분 짓게 했던 손에 휴대폰을 쥐여줌으로써 전 세계를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AI 칩을 들고 있는 엔비디아 CEO 젠슨 황. [위키피디아]
안전한 일반 인공지능 개발을 목표로 설립된 비영리 단체, 오픈AI가 출시한 챗GPT는 엔비디아의 AI칩을 이용해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다. 학생들은 챗GPT로 리포트를 작성하고, 기업에서는 이를 이용해 오랜 시간이 걸리던 작업을 순식간에 해결한다. AI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신장하기까지 한다. 지금도 AI의 역량과 이를 이용한 결과물은 놀랍지만 우리 세대 이후의 풍경은 상상 저편에 존재하는 숭고(sublime)의 영역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을 이긴 AI 예술
하늘을 나는 1978년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는 사실 블루 스크린 앞에 서서 와이어에 매달린 채로 시늉만 했다. 그러나 2006년의 ‘돌아온 슈퍼맨’은 실제 인물을 디지털 배우로 대체하면서 와이어 없이 하늘을 나는 시늉을 해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1994)에서 세기말 검프가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영화의 위대함(혹은 위험)에 몸서리쳤다.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제작진은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해야 했다. 저메키스의 또 다른 영화 ‘베오울프’(2007)에서 배우 레이 윈스턴은 모션 포인터 슈트를 입고 연기를 펼치는데, 영화에서 구현된 모습은 실제 윈스턴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났다. 하지만 제작진은 윈스턴에게 피부 시술을 받거나 체중을 감량하거나 근육을 만들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모션 포인트 슈트를 입고 촬영하면서 생성된 여러 선(lines)을 컴퓨터로 합성하면, 게르만족의 전설 속 인물 베오울프가 만들어졌다.
인간이 개발한 도구는 실제와 가상을 섞어 새로운 현실(virtual reality)을 구현한다. 저명한 뉴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가 예견한 대로 밀레니엄 이후 시각 매체는 카메라의 광학적 메커니즘이 아닌 컴퓨터로 조종하는 키노 브러시(영화 붓)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도구는 말 그대로 손의 연장(延長)이었으며, 컴퓨터를 이용한 저작물은 ‘불쾌한 골짜기’란 뜻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AI가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지던 창작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AI 프로그램인 ‘미드저니(Midjourney)’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2022년 8월 26일 콜로라도 미술대회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우승한 작품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제이슨 M 앨런이 ‘미드저니(Midjourney)’라는 AI 그림 제작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들었다. [위키피디아]
누구나 자신만의 영화 제작 가능한 시대
미드저니의 베타 버전은 2022년 7월 12일, 챗GPT는 2022년 11월 30일 첫 선을 보였다. 2024년 현재, 겨우 2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지금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Novel AI’를 이용하면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만화를 머릿속에서만 상상하는 사람도 같은 회사에서 출시한 ‘Novel AI 이미지 제너레이터’를 활용하면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AI 툴은 정지된 그림이나 텍스트 구현에 한정됐지만, 오픈AI가 2024년 2월 15일 공개한 동영상 생성 AI 소라(Sora)는 차원이 다르다. 영상 전문가들은 소라의 가공할 만한 능력에 찬탄과 두려움을 동시에 표했다. 소라가 만든 동영상 A는 “A Young man at his 20s is sitting on a piece of cloud in the sky, reading a book(20대 젊은 남자가 하늘의 구름 위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한 결괏값이다. 소라가 만든 동영상 B는 “Historical footage of California during the Gold Rush(골드러시 때의 캘리포니아의 자료 화면)”라는 프롬프트에 의해 도출된 영상이다. 실제로 이 두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CG를 이용하든 실사로 촬영하든 간에 엄청난 자본이 소요된다. 하지만 적절한 프롬프트를 소라에 입력하기만 하면 이용자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장면이 만들어진다.
7월 2~4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데이브 클라크 감독이 선보인 AI로 만든 단편영화 ‘봉화 밑에(Below Bonghwa)’ 포스터. [제작사 인스타그램 @afraid_2_sleep]
7월 3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열린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 현장. [BIFAN]
그러나 AI 혁명 이면에는 많은 논점이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AI 시대에는 배우의 역할이 지금과 달라지고, 기존의 배우는 자신의 이미지를 판매하고 그것은 AI의 밑그림으로 이용될 것이다. 이처럼 AI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바다에 떠도는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합성하고 새롭게 배열·배치한 후에 이미지에 운동성을 발생시켜 작품을 만든다. 그러므로 미묘한 저작권 문제가 발생할 것이며, 영화산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사람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2023년 미국 작가 조합(WGA)이 파업한 이유는 재방료 기준 확립, 원고료 인상, 업무 환경 변화 등이었지만, 이 중에 ‘AI를 통한 인력 감축 철회’도 포함됐다. 이는 챗GPT와 같은 AI 툴을 이용해 시나리오를 쓰는 것을 막고자 내건 요구 조건이었다. 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작가뿐만 아니라 감독, 단역이나 엑스트라 배우들도 AI 생성물로 대체돼 실업자가 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우후죽순 등장한 기계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던 사람들이 벌인 기계파괴운동(Luddite)이 디지털 시대에 재현될 수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 포스터. 가상과 현실이 완전히 뒤범벅된 세계를 그린다. [IMDB]
이제 인간이 자신과 같은 종을 지배하던 전근대적 방식을 완전히 탈피할 기회를 AI를 통해 잡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AI가 15년만 빨리 선보였다면, 화수 조영남은 송모 씨 대신 미드저니를 이용했을 것이며, 그랬더라면 그가 곤경에 처할 일은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AI를 둘러싸고 각종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확실한 사실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가지고 있던 관점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