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스트레인지 프룻의 공연 ‘필드’.
호주 땅에는 왜 영국인들이 들어가 살고 있을까. ‘아시아의 유럽’으로 불리는 호주의 역사는 그 말처럼 흥미롭다.
호주대륙에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이 거주했던 시기는 약 3만8000년 전인 제 4빙하기로 추정된다. 원주민은 아시아대륙에서 인류 최초로 바다를 건너 이주한 민족이다. 그 후 해빙기가 시작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호주대륙의 고립이 시작됐다.
일부 호주 역사학자들은 애버리진 역사가 6만~12만5000년을 헤아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일된 언어(250개 이상의 언어 확인)와 문자가 없었던 애버리진 역사는 고고학적, 인류학적 연구대상일 뿐이다.
이뿐 아니라 2006년 인구조사에서 확인된 애버리진 숫자도 전체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51만7000명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6만년 대비 0.004%에 해당되는 223년을 살아온 백인그룹을 중심으로 호주인의 정체성을 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고대 애버리진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증거는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호주를 맨 처음 방문한 서양인은 멘도사로 추정된다(1521~1532). 그러나 멘도사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은 1606년에 호주 북부 해안을 통과한 루이스 토레스를 호주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라고 주장한다. 그 바다는 토레스 해협으로 불린다.
장구한 애버리진 역사와 17세기 초에 호주로 유입된 백인의 역사를 결합한 ‘진디워라박 운동(Jindiworabak Movement)’을 옹호하는 역사학자들은 “호주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영국은 물론이고 고대 유럽의 역사까지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인이 호주를 발견했다?’
언제부턴가 호주 대륙을 중국인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아울러 이를 입증하는 유물이 발견되어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호주 원주민(애버리진)이 중국 쪽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으면서 관련 증거를 찾고 있다.
폴 키팅 총리의 연설문을 쓰기도 했던 저명한 역사학자 돈 워슨 교수는 ‘캡틴 쿡은 호주를 발견하지 않았다(Captain Cook did not discover Australia)’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중국(명나라)의 환관 정화(鄭和)가 이끄는 62척의 거대한 선단이 1432년 호주 북쪽 해안에 정박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역사학자 매닝 클라크는 ‘호주의 역사(The History of Australia)’에 호주 대륙 발견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썼다. △1606년 스페인 해양탐험가 루이스 토레스 △1642년 네덜란드 상인 아벨 타스만 △1688년 영국인 해적 윌리엄 댐피어 △1770년 영국 해군 제임스 쿡. 이를 근거로 계산해보면, 정화의 호주대륙 발견(1432)은 루이스 토레스의 발견 시기보다 174년 빠르다. 또한 호주대륙을 대영제국 제임스3세의 식민지로 선포한 캡틴 쿡보다 338년이나 빠르다. 더욱이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1492년보다 60년 먼저였다.
인도 출신 불교도들과 힌두교도들도 금과 향료를 찾아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으로 진출했다. 그들은 불교를 전할 목적도 함께 갖고 있었는데, 15세기에 회교도들이 인도 북부를 침략하자 더 이상 호주대륙 쪽으로 남하하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호주 진출의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인도네시아의 회교왕국들도 호주대륙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시아 국가들이 비교적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던 호주대륙을 외면한 것은 마치 운명 같은 일이었다.
거기엔 터무니없는 미신도 한몫했다. 역시 매닝 클라크의 기록이다. “힌두교도들은 자바와 인도네시아 남쪽 바다에서 생기는 큰 소용돌이에 말려들 것을 두려워했고, 중국인들은 여인 왕국이 있다는 바닷속에 배를 빨아들이는 큰 구멍이 있다고 믿었다.”
그뿐이 아니다. 회교도들은 말세가 오기 직전에 나타난다는 적 그리스도들이 세운 왕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호주대륙으로의 진출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결과, 1788년에 호주대륙은 영국 차지가 되고 만다. 바로 그 시점에 런던에서 창간된 ‘더 타임스(The Times)’는 호주식민지 출범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사생아
호주 애버리진이 호주 땅의 원소유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은 호주 식민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영국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자유와 평등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 그 결과, 호주인의 끈끈한 동지애(Mateship)를 잉태하게 만든 평등주의(Egalitarianism)는 호주의 건국이념이면서 200년 넘게 이어지는 국가이념이 됐다.
호주를 일컬어 ‘계몽주의가 낳은 사생아’라고 표현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 식민지 건설 당시의 유럽 상황에 빗댄 태생적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세적 질서에 저항하면서 과학적·합리적인 사고로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영국이 지구 반대편 호주대륙에 죄수 유형지를 만든 까닭이었다.
그래서일까. 식민지 첫 도시였던 시드니는 우울한 구석이 있다. 눈부시게 강렬한 시드니 햇빛으로도 낙오자들(Underdogs)의 절망감, 모국에서의 추방과 유형(流刑)의 경험에서 생겨난 트라우마(trauma)를 지울 수 없었던 것. 호주가 1인당 맥주 소비량 1위, 1인당 도박 액수 1위를 기록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호주인의 특성 중에서 영국적인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초기 정착민(죄수·Convicts)이 산업혁명의 뒷전으로 밀려난 ‘올리버 트위스트의 후예들’과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구빈원(Work House) 출신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영제국에 태어났으면서도 하층민 계급의 열패감에 시달렸던 그들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호주 신대륙에 도착하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mono class society)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호주의 건국이념이 된 평등주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호주는 태생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영어권 국가인 캐나다, 뉴질랜드 등과 함께 영국 역사와 문화를 공유했고, 20세기 패권 국가로 등장한 미국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런 가운데 형성된 호주인의 특성을 모아봤다.
# 사투리가 없는 호주 : 적은 숫자의 인구가 드넓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투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놀랍게 받아들이는 언어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호주인은 독특한 억양과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언어 습관(파리가 입안으로 들어가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있음)을 갖고 있어서 외국인들로부터 알아듣기 힘들다는 불평을 듣는다. 호주인의 발음 습관은 사회계층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1) 약 40%가 런던 노동자 계층이 사용했던 발음 습관을 갖고 있다. 2) 약 50%가 영국 발음과 미국 발음의 중간에 해당되는 호주 표준 발음을 한다. 3) 약 10%의 호주 국민이 ‘퀸스 잉글리시(Queen′s English)를 구사한다. 음절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호주 ABC방송 방송인들의 발음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속물들의 영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한다.
# 삶의 태도 : 힘들게 살면서 목표를 성취하는 성공/출세 지향적인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고, 단순하게 살면서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역사학자 매닝 클라크는 이런 성향에 대해 “호주인 대부분이 야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낙천적인 방식으로 살면서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할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 호주인의 개방성과 열패감 : 호주 서민은 집과 집 사이에 울타리가 없고, 존칭 대신 이름만으로 통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경찰관을 적대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관료, 정치가, 학자, 직장상사에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다.
반면, 평생 광산지역을 떠돌았지만 단 한 번도 행운을 맞지 못한 사람(리처드 마호가니)을 높이 평가하고, 은행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의적(네드 켈리)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등 열패자의식(underdog)을 떨쳐내지 못한다.
# 동지의식과 평등사상 : 음식과 의복을 훔치는 등의 작은 죄 때문에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호주(Never, never land)로 내동댕이쳐진 초기 죄수들(Convicts)은 간수와 경찰의 잔혹함을 견뎌내기 위해서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오지를 떠돌면서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서도 동지가 필요했다. ‘호주 문학의 아버지’ 헨리 로슨의 작품 ‘조 윌슨과 그의 동지들’의 테마가 고립(isolation)과 동지애다.
순수한 동지애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동지의식이었다. 그런 연유로 갑자기 성공한 동지와 신분상승을 꾀하는 친구를 배반자로 취급했다. 이를 두고 ‘키 큰 양귀비 증후군(Tall Poppy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키가 웃자란 양귀비를 쳐내듯 혼자만 잘나가는 사람을 좋지 않게 보는 현상을 말한다. 그 결과, 호주의 평등주의에 의구심을 표하는 학자들이 있다.
시드니 퀸빅토리아 빌딩 내부에 걸린 대형 시계. 영국 죄수들이 호주에 도착하고 삶을 일궈나가는 것을 표현한 미니어처가 표현돼 있다.
호주 스포츠 팀이 영국과 경기를 벌이는 날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한일전과 비슷한 양상인데, 특히 온몸으로 부딪치는 럭비경기 도중에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인구가 많지 않은 호주가 스포츠 강국으로 등장한 이면에는 영국을 이기겠다는 오기가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 영국적인 것을 끝까지 고수 : 그럼에도 호주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대륙에 또 하나의 영국을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영국적인 것을 추구했다. 또한 영국이 주도한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당했고, 지금도 영연방국가로 남아서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를 고수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호주는 영국여왕의 생일을 국경일로 지내는 나라이고, 일부 왕실 추종자들은 여왕 생일에 속옷까지 새로 사서 입는다고 한다. 호주의 경제력이나 대외적 위상을 감안하면 호주공화국(Republic)으로 바뀌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직도 입헌군주제 유지를 원하는 국민이 더 많다.
# 아시안 국가들에 대한 공포심(Yellow Peril) : 신생국가인 호주가 짧은 기간 안에 세계 1위의 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양모 산업 붐과 골드러시 덕분이었다.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주 배서스트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이어 빅토리아 주 벤디고와 발라라트에서 대형 금광이 발견되면서 중국인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그 결과, 호주의 치욕이 된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역사가 73년 동안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과 전쟁을 치렀고 호주 북부가 비행기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이웃한 호주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 아시아 국가 덕분에 먹고사는 호주 : 1973년, 고프 위틀람 노동당 정부에 의해서 악명 높았던 백호주의가 공식 폐지됐다. 1993년, 폴 키팅 정부는 본격적인 ‘아시아 드라이브 정책’을 채택해서 호주는 아시아 국가의 일원으로 거듭났다. 2011년 현재의 호주 경제를 감안해볼 때, 두 차례에 걸친 노동당 정부의 선택은 미래를 지향한 슬기로운 결정이었다.
양모 산업의 후퇴로 영국과의 교역량이 급격하게 줄어든 호주는 아시아 국가들에 자원을 팔고 교육 수출과 관광객 유치를 통해서 1980~2000년 기간에 발생한 경제위기에서 탈출했다. 시드니올림픽이 개최된 2000년 이후, “호주가 아시아 국가들 덕분에 먹고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 호주인의 자아분열 현상과 다민족 다문화주의 : 호주는 모국(mother country)인 영국과의 애증관계로 1차적인 자아분열 현상을 겪었다. 이어서 아시아 국가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2007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분석해보면 호주는 아직도 자아분열 현상을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설문조사에서 호주의 장점으로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꼽힌 반면에 호주의 단점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차별과 지나친 아시아국가의 영향력이 지적됐기 때문이다.
독창적인 호주문화의 탄생
호주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처음 100년 동안 철저하게 영국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로 옮겨다놓은 또 하나의 영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 그렇게 10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다음, 마침내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호주 민족주의(Australian Nationalism)가 싹텄다.
그 중심에 ‘호주 문학 1세대’인 헨리 로슨과 밴조 패터슨이 있다. 또한 호주 미술의 역사를 바꾼 화가 3명이 있다. 이들 중에서 기자와 변호사로 활동한 밴조 패터슨을 빼고는 모두 고등학교 교육도 변변하게 받지 못했다. 아서 스트리튼, 톰 로버츠, 프레드릭 매커빈은 야간이었던 하이델베르그 미술학원 출신이다.
죄수유형지로 출발한 식민지 호주에서 문화적 욕구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자유이민자(Free Settler) 그룹이 신대륙으로 건너왔지만 좀처럼 대영제국의 정서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호주의 예술문화 전반은 영국이나 유럽의 아류(亞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독창성이 결여된 예술은 외부세계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스스로도 그냥 흉내만 낼 뿐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
독창적 호주 화풍으로 그린 매커빈의 작품 ‘왈라비 트랙에서’.
또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문화를 최고라고 받아들인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호주로 귀국한 후에도 영국적인 것, 유럽적인 것을 계속 좇았다. 가끔 예외가 나타났지만 십중팔구는 아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학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의 예술가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장 호주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본능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유학파들의 작품에는 없는 호주의 자연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NSW(뉴사우스웨일스)미술관 1층 전시실에 가면 프레드릭 매커빈의 작품 ‘왈라비 트랙에서(On the wallaby track)’가 걸려있다. 식민지 개척시대를 견뎌낸 서민가정의 모습인데, 당시 유학파들이 그린 인상파풍의 그림과 사뭇 다르다.
마침내 호주 예술가 1세대 그룹이 탄생했다. 그들은 유럽풍 일색이었던 도시를 벗어나서 호주의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는 오지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문학작품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특히 헨리 로슨과 밴조 패터슨은 장기간 오지를 여행하면서 ‘부시 발라드(Bush Ballards)’를 채록해서 시집으로 묶었다. ‘호주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월칭 마틸다’(Waltzing Matilda)도 그렇게 태어났다. 두 사람의 초상은 호주지폐에 담겼다.
호주 예술가 1세대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잡지가 있다. 1880년에 창간된 주간잡지 ‘불리튼(Bulletin)’이다. 저널리스트 J. F. 아치볼드와 재력가 존 헤인즈가 창간한 이 잡지는 도회지의 소식을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오지 사람들에게 ‘부시의 바이블(Bush Bible)’로 불렸다.
‘불리튼’은 유학파가 아닌 문인과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게재했고 그들이 원만하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을 ‘블리튼 스쿨 장학생’이라고 불렀는데 호주 예술가 1세대 대부분이 거기에 속한다.
호주를 방문하는 외국 정상이 ‘립 서비스’ 차원에서 자주 인용하는 아이템이 호주의 노벨상 수상기록이다. 200년 남짓한 짧은 역사와 2234만명의 인구를 가진 호주에서 9차례에 걸쳐 10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호주 첫 노벨상 수상자는 1915년에 물리학상을 받은 로렌스 브래그다. 그는 24세의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해 최연소 수상자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 1945년 생리학 및 의학상에 하워드 월터 플로리, 1960년 생리학 및 의학상에 맥파런 버넷, 1963년 생리학 및 의학상에 존 카루-에클스, 1970년 생리학 및 의학상에 버나드 카츠, 1973년 문학상에 패트릭 화이트, 1975년 화학상에 존 콘포스, 1996년 생리학 및 의학상에 피터 찰스 도어티, 2005년 생리학 및 의학상에 베리 마셜 교수와 로빈 워렌 박사가 지명됐다.
올해 10월4일, 마침내 호주의 10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1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호주 출신 브라이언 슈미트 교수(44) 등 3명을 선정했다. 나머지 2명은 미국인이다. 이들은 초신성 연구를 통해 ‘우주가 가속 팽창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