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 최고의 스포츠 축제에서 가장 볼만한 이벤트는 어떤 것일까? 언뜻 ‘총알 탄 사나이’ 우사인 볼트가 출전하는 남자 육상 100m가 떠오르지만 한국인에겐 ‘우리 선수’가 출전해 금메달을 다투는 경기에 무엇보다도 관심이 갈 것이다. 그간 올림픽에서 한국을 빛낸 별, 런던에서 한국을 빛낼 별을 살펴봤다.
손연재가 메달에 도전하는 리듬체조 결승은 8월 11일 열린다.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딴 한국인은 양궁의 김수녕이다.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의 전이경은 금메달만 넷을 목에 걸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 1998년 나가노에서 각각 2관왕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인이 따낸 260개의 올림픽 메달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
올림픽 첫 메달을 딴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남승룡이다. 안타깝게도 올림픽 역사는 지금껏 두 선수를 일본인으로 기록한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해 딴 첫 메달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미들급 김성집,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이다. 둘은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서 첫 은메달을 딴 선수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복싱 밴텀급에 출전한 송순천.
“그날 경기는 당신이 이겼소”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송순천(맨오른쪽). 멜버른 올림픽에서 복싱 사상 첫 은메달을 쟁취, 영광의 얼굴이 됐다.
송순천이 복싱을 시작한 것은 멜버른 올림픽이 열리기 불과 1년여 전인 1955년 4월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송순천은 입문하자마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미친 듯 훈련하기 시작했다. 한국체육관에 입관한 다음 날 그는 초보 복서가 으레 그렇듯 스텝만 밟는 단조로운 훈련을 반복해야 했다. 지루해하는 게 당연할 터인데도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스텝을 밟았다. 이를 지켜보던 노병렬 사범이 “저 녀석 봐라” 하면서 관심을 가졌다. 노 사범은 송순천이 입관한 지 3일째 되던 날 당시 신인복싱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와 그를 스파링하게 했다.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후 반 년은 지나야 스파링에 나서는 것이 보통이다. 노 사범은 송순천의 담력을 시험해보려고 그렇게 했다고 한다. 스파링을 시작하자마자 송순천은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하더니 상대를 링 위에 꼬꾸라뜨렸다. 송순천의 소질을 엿본 노 사범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 같은 기분이었다. 노 사범은 다음 날부터 송순천을 세계타이틀 경기를 앞둔 복서처럼 훈련시켰다. 매일 20라운드의 스파링을 소화했는데, 상대로 나선 선수가 대부분 2라운드를 채 버티지 못하고 나자빠져 하루에 10명 넘는 복서가 그를 상대해야 했다.
송순천은 지칠 줄 몰랐다. 체육관 훈련에 만족하지 못해 틈이 날 때마다 발목에 쇳덩어리를 달고 인왕산을 오르내렸다. 송순천은 1955년 가을 열린 멜버른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 나가 1회전부터 결승전까지 5번의 경기를 모두 KO승으로 장식했다. 이후 4차례의 선발전을 더 거쳐 국가대표로 뽑혔다. 송순천이 올림픽을 앞두고 오스트레일리아 현지에서 스파링을 했을 때의 일화다. 당시 올림픽 밴텀급의 상한체중은 54㎏이었는데 송순천이 스파링에서 80㎏ 넘는 선수를 KO로 물리쳤다. 복싱 전문 잡지 ‘링’의 창립자인 네트 플레이서가 현지에서 그 장면을 보고 혀를 내두르면서“올림픽이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미국으로 초청해 세계적인 프로복서로 키워주겠다”고 말했다.
송순천은 멜버른 올림픽에서 알베르토 아델라(필리핀), 로버트 바스(오스트레일리아), 카메르 토바실리(아르헨티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준결승전에 올랐다. 4강전에서 만난 바리엔토스(칠레)를 제압하고 출전한 결승전. 상대는 독일의 볼프강 베렌트였다. 1·2·3라운드 모두 송순천이 우세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린 후 한광수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네가 금메달이야!”라고 소리쳤다. 당시 경기장을 가득 메운 2만여 관중도 ‘코리아’를 외치면서 송순천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도 베렌트의 승리였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63년 베렌트는 대한체육회를 통해 송순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날의 결승전, 그리고 당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경기는 당신이 이긴 것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가 한국 국적자로 첫 금메달을 땄다. 석연치 않은 판정이 없었다면 송순천이 한국의 첫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의 영광을 차지했을 것이다. 송순천은 은퇴 후 유도대(현 용인대) 격투기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은퇴해 경기 용인시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다.
‘미녀 선수 1호’ 변경자
유도의 김재엽은 ‘은메달의 한을 푼’ 금메달리스트다. 1984년 LA 올림픽 때 -60kg급의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LA 올림픽에는 옛 소련 및 동구권 국가가 출전하지 않아 유도 종목은 한국 일본 서독 미국을 대표한 선수가 메달을 놓고 다퉜다.
-60kg급은 호소카와 신지(일본), 리디 에드워드(미국)를 비롯한 네댓 명이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으로 예상됐다. 그중에서도 우승 후보로는 김재엽과 호소카와가 꼽혔다. 예상대로 두 선수가 결승에서 맞붙었다. 김재엽은 그날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선 게 오히려 패배의 원인이 됐다. 허벅다리후리기를 들어가다 호소카와에게 누르기 역습을 당한 것. A급 선수에게 누르기를 당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결국 김재엽은 은메달에 만족하고 4년 후를 기약해야 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4년은 길다. 어떤 강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데다, 4년 후에도 기량을 유지하리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코트의 미녀’라는 별명으로 불린 변경자.
김재엽이 서울 대회에서 결승전에 무사히 오른 반면 호소카와는 브라질계 미국 선수 케빈 아사노에게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났다. 김재엽은 결승전에서 아사노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아사노는 김재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김재엽은 현재 동서울대 경호스포츠학과 교수로 일한다. 윤현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차지했다.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메달을 따낸 것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배구팀이다. 한국은 남자 고등학교 배구의 명문이던 대신고 김한수 교장을 감독, 태광산업 코치를 지낸 전호관 씨를 코치로 삼았다. 당대 최고의 세터인 유경화 유정혜를 더블세터로 가동했으며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거포’ 이순복과 정순옥 윤영내가 주축이었다. ‘미녀 선수 1호’ 변경자를 비롯해 마금자 장해숙 이순옥 박미금 백명선이 엔트리에 포함됐다.
이낙선 당시 대한배구협회장은 물심양면으로 대표팀을 지원했다. 선수 개인 사정까지 돌봐준 것.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올림픽을 3개월여 앞둔 4월 초 박인실이 사적인 이유로 선수단에서 빠진 것이다. 박인실은 스파르타식으로 이뤄지던 국가대표 훈련을 받는 게 싫다면서 태릉선수촌을 무단으로 이탈했다. 대농 소속이던 박인실은 현재 한국 여자 배구 에이스인 김연경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역대 여자 배구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아왔다. 실업 최강이던 대농에서 ‘나는 작은 새’ 조혜정이 박인실에 밀려 보조공격수를 맡아야 했을 정도다.
한국은 예선 B조에서 소련에 1대 3으로 패했지만, 이후 동독에 2세트를 먼저 내주고 내리 3세트를 따내 3대 2로 역전승했다. 쿠바를 상대로도 역시 풀세트 접전 끝에 3대 2로 이겼다. 변경자의 날카로운 공격이 박인실의 공백을 메웠다. B조 2위를 차지한 한국은 A조 1위 일본과 준결승전을 치렀다. 0대 3 패배. 한국의 3·4위전 상대는 헝가리였다. 당시 국제배구연맹 회장이 헝가리 출신이었는데, 3·4위전 주심에 헝가리와 같은 동구권 출신의 불가리아인이 배정됐다. 3·4위전에서 한국은 불가리아 심판의 편파 판정에 시달려야 했다. 첫 세트를 12대 15로 내줬지만, 2세트를 15대 12로 따낸 뒤 두 세트를 더 획득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헝가리 선수들의 평균 신장은 180㎝에 가까웠지만 한국은 173㎝의 정순옥이 최장신으로 평균 신장은 169cm였다.
올림픽 첫금 양정모
1976년 몬트리올에서 양정모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양정모의 어머니 박월선 씨는 태몽으로 ‘큰 고목나무 밑에 용이 한 마리 있고, 그 밑에 깊은 못이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양정모도 어릴 적부터 골목대장이었고, 학교에서도 힘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승부욕도 대단해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할 때도 친구들의 딱지, 구슬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성미가 가시곤 했다.
양정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부산 덕진중에 입학해 유도를 잠깐 한 뒤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레슬링을 배웠다. 건국상고에 진학하면서 레슬링에 눈뜨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부산 시내 한일체육관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건국상고 2학년 때 전국체전에 출전해 고등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을 석권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는 한 선수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에 모두 출전할 수 있었다. 양정모는 레슬링 특기자로 동아대에 입학했다. 국가대표를 지낸 오정룡 코치를 동아대에서 만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197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주니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자유형 은메달, 그레코로만형 동메달을 획득했다.
서울 올림픽 유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재엽 선수가 한복 차림으로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황영조는 마라톤도 머리를 써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30㎞ 지점까지 선두를 달리던 김완기가 뒤로 처진 후 콜럼버스 동상이 서 있는 35㎞ 지점부터 황영조와 모리시타 고이치의 숨 가쁜 한일 대결이 시작됐다. 황영조는 에스파냐 광장을 지날 때까지 모리시타를 바로 앞에 세우고 페이스를 조절했다. 급경사인 몬주익 언덕에서 승부를 내고자 숨을 고른 것이다. 황영조는 언덕을 내려갈 때 스피드를 내면 모리시타를 따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계산대로 몬주익 언덕의 정점에서부터 전 속력으로 치고 내려와 상대를 제압했다. 금메달을 딴 황영조(2시간13분23초)와 은메달을 차지한 모리시타의 기록 차이는 22초였다. 모리시타는 2시간13분45초에 들어왔는데, 내리막길에서 승부를 걸지 않았다면 메달 색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4년 후 벌어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이봉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니는 더욱 치열한 승부를 벌였다. 이봉주 2시간12분39초, 투과니 2시간12분36초. 3초 차이로 금·은메달이 나뉘었다.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단 시간차로 승부가 갈린 경기였다. 이봉주는 넉 달 뒤 열린 후쿠오카 마라톤에서 투과니를 막판에 제치고 우승하면서 설욕했으나 올림픽에서의 ‘3초’는 이봉주에게 달랠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봉주는 올림픽 챔피언이 되고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잇따라 출전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10년 은퇴했다.
국민 마라토너로 불리는 이봉주는 현재 채널A 예능 프로그램 ‘불멸의 국가대표’에 출연하고 있다. 황영조는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으로 일한다.
태권도 격 높인 문대성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아시아에서 발원한 종목 가운데는 유도가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정식종목에 이름을 올렸다. 태권도는 서울올림픽 때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다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이 됐다. 태권도는 여러 차례 퇴출 위기를 겪었다. 심판 판정에 대한 항의 소동도 자주 일었다. 우슈, 가라테 등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런 가운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헤비급 결승전에서 문대성이 알렉산드로 니콜라이디스(그리스)와의 결승전에서 돌려차기로 KO승을 거뒀다. 문대성의 이 발차기는 태권도의 격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대성의 희생양이 됐던 니콜라이디스는 4년 후 베이징 올림픽 남자 태권도 헤비급 결승전에서도 한국의 차동민에게 4대 5로 판정패를 당했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한국 선수에게 두 번이나 패한 불운의 선수로 남은 것.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던 문대성은 올해 4·11 총선 때 박사학위 논문 표절 사실이 드러나 ‘문도리코’ ‘복사대성’이라는 비아냥거림마저 들어야 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추락은 문대성이 거의 유일하다.
구기 종목 중엔 여자 핸드볼과 야구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핸드볼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챔피언에 오를 때만 해도 홈 이점을 업은 결과라는 시비를 겪어야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또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그런 비판은 쏙 들어갔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에 도전했지만 결승전에서 덴마크에 덜미를 잡혔다. 두 차례 연장접전 끝에 승부던지기에서 패한 것. 이 스토리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돼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야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아마추어 강호 쿠바, 미국, 일본을 모두 물리치고 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런던 올림픽부터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지는 바람에 한국은 ‘마지막 올림픽 야구 금메달’ 국가가 됐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간의 결혼 소식도 간간이 들려온다. 유도 금메달리스트 김재엽과 서울올림픽 핸드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경순이 ‘금메달 부부’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아쉽게도 둘은 이혼했다. 베이징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박경모, 박성현은 올림픽이 끝난 직후 결혼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금메달리스트 김동문(당시 파트너 길영아)과 은메달리스트 라경민(당시 파트너 박주봉)도 부부다. 둘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혼합복식 팀을 이뤄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라경민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복식에서 동메달을 딴 후 은퇴했다.
유도의 김미정 김병주 커플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함께 출전했다. 김미정은 여자 -72kg급에서 금메달, 김병주는 남자 -78kg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작고한 이는 손기정 외에는 없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함께 시상대에 오른 남승룡도 고인이 됐다. 은메달리스트 중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유도 라이트급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장은경이 지병으로 사망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복싱 라이트플라이급 은메달리스트 지용주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연금 점수 100점을 얻어 매월 연금 100만 원을 받는다. 국민체육공단은 올해 4월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게 연금 점수 30점을 주던 것을 70점으로 상향 조정하고 매월 지급하는 연금도 45만 원에서 75만 원으로 올렸다. 동메달리스트도 20점에서 40점으로 연금 점수를 높이고 연금도 30만 원에서 52만5000원으로 올렸다. 금메달리스트 연금 점수와 연금은 예전과 같다.
주룰루에 밀리는 장미란
장미란은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한다.
IOC는 국가별 메달 획득 순위를 집계하지 않는다. AP를 비롯한 언론이 메달 수를 집계해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금·은·동메달을 합한 총 획득 메달 수로 순위를 정하는 언론도 있고, 금메달 수 기준으로(금메달 수가 같으면 은메달 수) 순위를 정하는 언론도 있다. 가시권에 들어온 한국의 금메달 수는 20개가 넘는다. 수영의 박태환, 태권도의 차동민·황경선·이인종·이대훈, 임동현·기보배가 출전하는 양궁 남녀 개인 및 단체전 4개, 남녀 유도의 왕기춘·김재범·정경미, 레슬링의 정지현·김현우·최규진, 복싱의 신종훈, 펜싱의 남현희·구본길, 배드민턴 남자복식(이용대 정재성)과 혼합복식(이용대 하정은), 체조의 양학선(도마)과 김수면(마루운동 개인종합), 역도의 장미란·사재혁, 사격의 진종오, 사이클의 조호성, 여자 핸드볼, 남녀 하키가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는 적어도 10개의 금메달을 획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박태환과 중국의 쑨양이 대결하는 자유형 400m와 박태환을 비롯해 4, 5명이 격전을 벌일 자유형 200m는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자유형 400m는 박태환이 2007년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1년 상하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올 시즌에는 쑨양이 기록상으로 박태환을 앞서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려면 파울 비더만(독일)이 갖고 있는 세계최고기록(3분40초07)을 깨뜨리거나 그 기록에 근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유형 200m는 박태환과 함께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파울 비더만, 2011년 상하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선수로 뽑힌 라이언 록티(미국), ‘프랑스의 신성’ 야닉 아넬, 쑨양이 손바닥 하나 차이로 금메달을 다툴 것으로 예상된다. 마이클 펠프스(미국)가 다른 종목에 치중하고자 자유형 200m를 포기하는 바람에 경쟁이 줄어들었다. 펠프스는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록티에게 간발의 차이로 이겼지만 본선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록티가 더 경쟁력이 있다고 본 것 같다.
여자 역도 +75kg급에서는 장미란과 주룰루(중국), 티티아나 카시리나(러시아)가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신예 여자 역사 주룰루가 합계 328㎏으로 기록이 가장 좋다. 카시리나는 주룰루에 1kg 못 미치는 327㎏이 최고기록. 장미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기록한 326㎏에서 더는 기록을 경신하지 못하고 있다. AP는 주룰루를 금메달 후보로 꼽으면서 장미란이 카시리나와 은메달을 다툴 것으로 내다봤다.
역도 남자 -77kg급에 출전하는 사재혁은 중국의 신예 류하오저와 금메달을 다툴 것으로 보인다. 사재혁은 인상보다 용상이 강하기 때문에 인상에서 5kg 이내로 뒤지면 역전승을 노려볼 수 있다. 장미란, 사재혁 모두 역도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한다.
경륜에서 돌아온 조호성
사이클의 조호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0㎞ 포인트 레이스에서 4위를 차지해 아깝게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조호성은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2관왕에 올라 아시아 최강임을 입증한 후 2004년 경륜 선수로 전향했다. 경륜에서도 2005년부터 4년 연속 상금랭킹 1위에 올랐다. 국내 경륜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불리는 47연승의 주인공이다. 조호성이 출전하는 종목은 이번 올림픽에서 신설 종목으로 들어간 옴니엄이다. 이틀 동안 단거리 및 장거리 6개 종목을 치른 뒤 점수를 합산해 최종 순위를 가린다. 조호성은 6개 종목 가운데 1㎞ 독주, 4㎞ 개인추발, 30㎞ 포인트 레이스 등 3개 종목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해 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재 옴니엄 세계랭킹 1위는 콜롬비아의 후안 에스테반 아랑고. 월드컵에서 두 번 금메달을 땄다. 조호성은 아랑고의 뒤를 쫓는 2위권 선수 중 하나다.
복싱은 서울올림픽의 김광선, 박시헌 이후 24년 만에 금메달을 노린다. 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하는 신종훈은 2009년 밀라노 세계복싱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쿠바 선수를 물리치고 4강에 오르면서 주목받았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때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으나 자키모프 바르잔(카자흐스탄)에게 3대 17로 참패를 당했다. 지난해 11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벌어진 세계복싱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 주사이밍(중국)을 만나 11대 20으로 패했는데, 주사이밍과는 시드가 엇갈려 둘이 모두 결승에 진출해야 재대결할 수 있다. 주사이밍은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협객처럼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을 구사한다.
리듬체조의 손연재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덕분에 세계랭킹이 지난해 19위에서 5위로 14계단 뛰어올랐다. 손연재는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 때 ‘미녀선수 베스트 5’에 뽑혀 많은 인기를 얻었다. 동메달도 획득했다. 올림픽에서도 빼어난 미모로 주목받을 것이다.
‘전설’과 대결하는 남현희
배드민턴 남자복식 이용대 정재성 조는 차이윈 푸하이펑 조(중국)에 세계랭킹에서 밀린다. 혼합복식 이용대 하정은 조도 중국, 인도네시아, 덴마크 복식조에 세계랭킹에서 뒤져 있다.
사격의 진종오는 50m 권총, 10m 공기권총에 출전한다. 주 종목인 50m 권총의 경쟁자인 탄중량(중국), 블라디미르 이사코프(러시아)에게 최근 밀리고 있다. 사격은 경기 당일 컨디션 조절이 중요한데, 진종오는 큰 대회 경험이 경쟁자들보다 많다.
태권도는 미국 중국 대만 이란의 추격이 만만치 않다. 차동민 황경선은 올림픽 2연패, 이대훈 이인종은 올림픽 첫 금메달에 도전한다.
펜싱의 남현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 ‘플뢰레의 전설’로 통하는 발렌티나 베찰리(이탈리아)에게 막판 3초를 견뎌내지 못하고 역전패했다. 백전 노장 베찰리는 런던 대회에서 6번째 금메달에 도전한다. 남현희가 금메달을 따려면 ‘전설’을 뛰어넘어야 한다. 남현희는 결혼 후 더욱 안정된 경기를 벌인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기술도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런던 대회가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각오로 준비했다. 대진 운이 따라야 결승에 진출할 수 있다.
남자 펜싱 사브르의 구본길은 기량이 절정에 올라 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때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만(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구본길은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려 올해 초 세계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구본길이 이끄는 남자 사브르 단체전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월드컵 A급 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세계랭킹 1위 러시아를 45대 42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등 좋은성적을 내고 있다.
양학선은 한국 체조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겠다는 각오로 2년여 동안 칼을 갈았다. 양학선은 2011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양1(공중 3회전)’ 기술을 앞세워 대회 전 종목 통틀어 최고 점수인 16.566점을 획득했다. ‘양1’로 시니어 무대 데뷔 2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는데, ‘양1’에 반 바퀴를 더해 세 바퀴 반을 도는 ‘양2’로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벼르고 있다. 김수면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마루운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세계 정상권 기량을 인정받았다. 체조는 아시아 대회에 세계 정상권인 중국, 일본 선수가 대거 출전하는 터라 아시아 정상은 당연히 올림픽 금메달 후보다. 김수면은 마루운동과 개인종합 두 종목에 출전한다.
남자유도 -73kg급의 왕기춘과 -81kg급의 김재범은 모두 ‘재수생’이다. 베이징 올림픽 때 2%가 부족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고된 훈련으로 2%를 채웠다고 자부하는 두 선수 모두 일본 선수가 난적이다.
여자 유도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조민선 이후 금메달 맥이 끊겼다. -78kg급의 정경미가 금메달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경미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 등 꾸준히 세계 정상권에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