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바꾼 후 ‘희망의 연대’ 이뤄내야
- 모방 아닌 ‘길 개척하는 삶’ 모색
- 같은 길 걸을 ‘사랑하는 이’ 만나자
사람에 따라 행복을 ‘남부러울 것 없는 상태’ ‘심신이 편안한 상태’ ‘원하는 것을 얻은 순간’ 등으로 정의할 것이다. 행복의 정의에는 사회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이 함께 들어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뭔가를 획득해야 하며, 그 결과 심리적으로 흡족하고 느긋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현실적이거나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이 중요하지만 초월적이거나 정신적인 관점에 서면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행복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 두 가지가 결합돼야 한다. 물질적 고통 속에서 정신적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고, 정신적 불행감 속에서 물질적 즐거움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것
잘사는 사람이 있고 못사는 사람이 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사이에 보통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흔히 중산층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산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다. 중산층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주관적 귀속감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하면 중산층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의미의 중산층은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과거엔 70%에 육박하다가 지금은 50%대로 떨어졌다.중산층에 대한 이 같은 주관적 정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객관적 수치로 중산층을 정의한다. 예를 들자면 5억 원 이상의 부동산과 1억 원 이상의 은행 잔고를 갖고 있으며 월 소득 500만 원 이상이면 중산층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정의는 명료하지만 현실을 너무 단순화해서 보는 탓에 겉으로 나타나는 객관적 수치로는 같은 중산층 범주에 속하지만 교육 수준, 직업, 문화자본 등 타인과 구별되는 개인적 특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중산층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고, 일정한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면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자본도 가지고 있어야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끈 동력은 잘살아보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지금 나는 이렇게 살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집도 사고 자가용도 사고 자식들 대학교육까지 시킬 수 있고 바캉스와 해외여행도 즐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지방 도시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온 많은 젊은이가 그런 꿈을 실현했다.
박정희, 정주영 같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앞에서 이끌었으며 6·25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주력 부대가 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중산층이 확대됐다. 많은 사람이 크든 작든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됐으며 더 많은 사람이 자가용 차를 타고 다닌다.
1990년대 후반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금융자본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졌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사회적 문제는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다. 기성세대는 50대가 되면 퇴직을 준비해야 하고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인 청년세대는 취업을 못해 고민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중산층 붕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다”
수없이 입사원서를 제출해도 일자리를 못 찾는 젊은이들은 헝그리 정신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좌절감에 젖었다. 이렇게 현재의 무게에 눌려 미래를 비관하는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말이 ‘헬조선’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래서 나온 말이 금수저냐 흙수저냐를 따지는 ‘수저론’이다.수저론은 부모 잘 만난 사람은 쉽사리 중산층이나 상류층에 머무를 수 있지만, 부모 잘못 만난 사람은 하류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이동(social mobility)의 가능성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중산층 축소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일정한 정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른바 선진국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프랑스에선 이런 현상을 두고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다”고 표현한다. 1층에서 아무리 승강기를 기다려도 한번 올라간 승강기가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해체된 사다리나 고장난 승강기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다리나 승강기를 고쳐놓겠다고 약속하며 지지와 협조를 부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약속이 실현되기 어렵기에 나온 것이 복지국가론이다. 경제성장이 주춤하고 중산층이 축소돼 복지 혜택을 받을 사람은 늘어나는데 그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결국은 재벌을 비롯한 상류층이 내놓아야 하는데 그들은 일단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최소한의 복지국가가 구현될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 20대의 젊은이는 다가오는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수치로 표시되는 중산층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낙담하며 불행감을 씹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을 것인가. 그냥 앉아서 이것도 포기하고 저것도 포기하는 N포세대가 될 것인가.
다행히 한국의 20대에 속하는 젊은이들은 프랑스 청년들과 달리 거의 다 대학 공부를 마쳤고 부모 세대 못지않은 상승 욕구를 갖고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의지도 지녔다. 그런데 그들의 목표가 수치로 표현되는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는 게 문제다. 앞에서 말했지만 중산층이 되려면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남이 정해놓은 중산층 기준에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중산층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나는 나대로 재미있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겠다는 꿈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 남이 “너는 행복하겠다” 하면 행복하고, 남이 “너는 불행하겠다” 하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부모 세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지나가서 빤질빤질해진 길을 뒤따르지 말고 자기 나름의 새 길을 개척해야 한다.물론 힘든 일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길이 아닌 길을 걷는다는 게. 그러나 그 길을 모색하다 보면 새로운 희망이 솟을 때가 올 것이다. 대학 나와서 정규직 갖고 결혼해서 집 장만하고 아이들 나아 잘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고 손자들과 함께 노후를 안락하게 보내겠다는 중산층의 꿈을 저버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헬조선’을 외치며 ‘수저론’을 주장하는 젊은이를 만나면 3가지 얘기를 해주고 싶다.
첫째, 자기 인생을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삶의 주체가 되자.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탓한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갈 내공을 키우자.
둘째, 다수를 따르는 모방의 삶을 살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대안적’ 삶을 모색하자.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 기준과 행복의 조건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재단하지 말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실현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삶을 살자.
셋째, 함께 그런 길을 걸을 친구와 연인을 만나자. 주류를 따르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지옥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삶이 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선 자신의 삶을 바꾸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들 사이의 ‘희망의 연대’가 이루어질 때 정책도 바뀌고 사회도 변하면서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변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