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재취업 현실, 기업은 ‘경력’ 원치 않아
눈높이를 낮춰라? 현실에 맞게 ‘조정’하라!
재취업은 존재 의미와 자존감 회복하는 과정
시장은 중장년이 가진 ‘깊이 있는 경험’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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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구직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과거의 연봉’과 ‘과거의 직급’이다. 억대 연봉의 임원이던 사람이 40~50% 삭감된 조건을 제시받는 것도 흔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시장 주변부를 오래 맴도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업이 중장년 구직자에게 직급이나 경력 등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 판단 기준은 단 하나, “지금 당장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이다. 화려한 이력보다 현재 증명 가능한 가치가 우선한다. 따라서 면접에서는 과거의 직함을 나열하기보다 “귀사의 매출 하락을 OOO 전략으로 OO개월 내 OO% 반등시키겠다”와 같은 구체적 제안을 해야 한다.
눈높이를 낮춰라? 현실에 맞게 조정하라!
세계 각국은 제도적으로 시니어의 직업 전환을 지원한다. 일본은 ‘계속 고용제도’를 통해 임금을 조정하는 대신 정년 이후 근무를 보장한다. 독일은 정부 주도의 직업 재교육(Umschulung)으로 새로운 경력을 설계하게 하고, 미국은 은퇴자를 멘토나 프로젝트 자문으로 활용한다. 싱가포르와 호주는 학습 바우처와 임금 보조금 정책으로 기업과 개인의 부담을 덜어준다.핵심은 간명하다. 과거의 지위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그간 컨설턴트로 일하며 만났던 구직자들의 궤적도 이를 증명한다. 눈높이를 조정한 사람은 새로운 기회를 찾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끝내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령 영업 임원 출신 A씨는 대기업만 바라보다 좌절을 겪었지만, 이내 현실적인 연봉 조건을 받아들이고 중견기업에 지원했다. 그는 ‘신규 거래처 발굴·채널 확대’ 전략서를 직접 제시하며 스타트업 어드바이저로 합류했고, 젊은 최고경영자(CEO)와 시장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며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처럼 눈높이를 전략적으로 조정한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제2의 기회를 만들어냈다. 회계 전문가 B씨 역시 처음에는 자격증과 연차만 내세웠음에도 긍정적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재무구조 개선 로드맵과 현금흐름 체크리스트 등을 산출물 형태로 상품화하면서 중소기업 자문 업무를 잇달아 따냈다. 생산관리자 출신 C씨는 서울에서만 일자리를 고집하다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지방 스타트업의 스마트팩토리 전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신기술을 습득했고, 덕분에 연봉은 줄었지만 제2의 경력을 개척할 수 있었다. 30여 년간 군 생활을 이어온 중령 출신 D씨는 계급정년으로 전역한 뒤 좌절 대신 도전을 선택했다. 그는 건축시공기술사 자격 시험에 수차례 도전했고, 마침내 56세에 합격했다. 현재는 민간 건설사의 기술 책임자로 연봉 9000만 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군에서의 직급은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자격과 전문성이 새로운 경쟁력이 된 대표적 전환 사례다.
조건을 양보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정’하라는 얘기다. 흔히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을 하지만 필자는 다르게 말한다. “현실에 맞게 조정하라.” 낮춘다는 표현에는 패배의 뉘앙스가 담겨 있지만, 조정은 전략이다. 물론 연봉은 줄어들 수 있지만 근무 형태·지역·성장 옵션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직급 역시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영향력은 직급이 아니라 책임과 성과에서 나온다. 고용 형태가 유연해질 수 있으나, 이 역시 성과를 증명한 뒤 재협상하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정에 적응하지 못하면 재취업 시장에서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례로 임원 출신 E씨는 “연봉 1억 원 이하 불가”라는 고집으로 수년째 미취업 상태다. 과거 연봉 수준에 집착한 결과, 시장에서 고립된 대표 사례다.

1월 11일 서울 성동구 성동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중장년층을 위한 일·활동 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뉴스1
재취업은 존재 의미와 자존감 회복하는 과정
재취업은 단순히 과거의 소득을 되찾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의미와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회사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였고, 그 안에서 맡았던 역할은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이에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깊은 공허감이 밀려온다. 필자는 상담할 때면 늘 “불안은 사실이고, 방향은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작은 성취를 기록하고, 배움의 리듬을 유지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는 끝났다”에서 “나는 변했다”로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심리적 회복 없이는 눈높이를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다. 이제 청년인구만으로는 산업을 지탱하기 어렵다. 중장년을 ‘퇴장 인력’으로만 바라본다면, 사회는 스스로 소중한 자산을 버리는 셈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년 연장이 아니다. 핵심은 직업 전환을 지원하는 제도다. 예컨대 ‘시니어 인턴십 프로그램’을 도입해 5060세대가 6개월에서 1년 동안 프로젝트 기반 업무에 참여하도록 하고, 기업은 그 성과를 검증한 뒤 정규직·자문·멘토 등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정부 차원에서는 독일의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이나 싱가포르의 직무역량 향상 정책(SkillsFuture)처럼, 한국형 학습 바우처 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단순 고용을 넘어 시니어 멘토링과 프로젝트형 채용을 제도화해야 한다. 개인 역시 준비가 필요하다. 자격증과 경험을 결합해 스스로를 ‘문제 해결자’로 정의하고, 디지털 전환·AI 활용·ESG 등 새로운 산업 언어를 빠르게 습득해야 한다. 결국 메시지는 하나다. “준비 없는 퇴직은 위험이지만, 준비된 전환은 기회가 된다”라는 메시지 아래, 정부·기업·개인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시장은 중장년이 가진 ‘깊이 있는 경험’ 원해
앞으로 한국 사회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점은 ‘고령인구 활용이 곧 국가경쟁력’이라는 사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35년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30%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인구문제를 넘어 산업구조, 재정, 나아가 국가 지속가능성 전체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일본은 고령인구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시니어 고용을 제도화해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유지했다. 독일은 은퇴자의 40% 이상이 파트타임이나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전문성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퇴직과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구조다. 경험 있는 인력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적 낭비다.기업 차원에서도 구체적 모델이 필요하다. 가령 자동차업계는 퇴직 임원들을 품질·안전 자문단으로 운영해 사고율을 낮추고 있으며, 금융권은 창구 경험이 풍부한 시니어를 ‘브랜치 컨설턴트’로 재고용해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특정 산업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확산돼야 한다.
개인 차원에서도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 디지털 역량을 갖춰야 한다. 문서 협업,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AI) 도구 활용은 이제 기본이다. 둘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야 한다. 단순 실행자가 아니라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설계하는 인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셋째, 협업 리더십을 체화해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와 함께 일하게 되는 만큼 세대 간 이견을 조율하는 역량이 요구된다. 이 세 가지를 갖췄을 때 중장년의 경험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무기로 전환될 것이다.
중장년 재취업 시장은 냉혹하다. 그러나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문이 닫히지만, 현실에 맞게 조정할 때면 다시 열린다. 이들이 가진 경험의 깊이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시장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다. 눈높이를 조정하는 순간, 새로운 성공의 문은 열릴 것이다.

●고려대 정치학 석사
●前 대기업 금융회사 인사팀장
●한국인적자원개발연구원 원장
●공무원·공기업 채용 면접위원 및 승진후보 역량평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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