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호

“K-팝은 디지털 굿판…‘민속의 귀환’ 시작됐다”

[AI 시대 다시 묻는 인문학②] 강정원 교수가 통찰한 ‘AI 시대 민속’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6-05-05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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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대를 넘나든 ‘회고’의 목소리

    • 회고는 인간임을 자각하는 행위

    • 한국의 기록문화, 이제 시작 단계

    • 민속(folk)은 자아의 숨통을 틔우는 것

    • 사주·명리 열풍과 K-컬처 샤머니즘

    한국민속학회와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을 역임한 강정원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MZ 세대에 불고 있는 사주 열풍을 넘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표현된 샤머니즘 등을 ‘민속의 귀환’이라고 말한다. 조영철 기자

    한국민속학회와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을 역임한 강정원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MZ 세대에 불고 있는 사주 열풍을 넘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표현된 샤머니즘 등을 ‘민속의 귀환’이라고 말한다. 조영철 기자

    ‘AI 시대 다시 묻는 인문학’은 재단법인 지관(止觀)과 ‘신동아’가 공동 기획한 시리즈다.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이 인간의 삶과 사유 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금, 오히려 철학과 인문학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목소리는 더 절실해진다. 그 물음을 함께 붙잡고 씨름하는 각 분야 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예정이다.<편집자 주>

    지난 3월 24일 서울 광화문프레스센터에서 이색적 시민네트워크가 출범했다. 이른바 ‘회고 네트워크(Memory Network)’다. 교수·학생·연구원·기업인 등 다양한 인사들로 구성된 발기인 50명은 “시민들이 이제 회고록 하나씩을 가질 때가 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AI시대, 회고하는 인간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세상에 너무 많은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이 유튜브와 쇼츠에 일상의 시간을 소비하는 동안 기억이나 감정은 축적되기보다 그냥 흘러간다. 회고 네트워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기록을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나를 찾는 행위’로 그리고 회고를 ‘사회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삼자고 말한다. 

    회고 네트워크는 출범 선언문에서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정의되기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적어 자아의 고유성을 증명하겠다. 기록은 AI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밝혔다. “유명인의 연대기만이 역사가 아니라, 시장 상인의 하루, 학교를 돌보는 선생님의 삶, 난민 아이의 이야기가 모여 비로소 온전한 시대의 초상이 완성된다”며 회고가 개인의 치유를 넘어 사회적 연결망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3월 24일 서울 광화문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회고 네트워크(Memory Network)’ 포럼 장면. “기록되지 않은 삶은 잊히고 잊힌 삶은 없었던 것처럼 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출범한 시민네트워크다. 허문명 기자

    3월 24일 서울 광화문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회고 네트워크(Memory Network)’ 포럼 장면. “기록되지 않은 삶은 잊히고 잊힌 삶은 없었던 것처럼 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출범한 시민네트워크다. 허문명 기자

    ‘전 국민 회고록 쓰기’ 하자

    발기인들은 2~4월 5차례에 걸쳐 사전 만남을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평범한 개인의 기록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회고 네트워크는 앞으로 ‘전 국민 회고록 쓰기’ 캠페인을 추진하고, 개인 서사를 축적하는 공동 아카이브도 구축할 계획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체로 운영되며 글을 쓰지 않아도,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남기는 방식으로도 충분하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memorynetwork.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고 네트워크 위원장을 맡은 이가 강정원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다. 정년을 2년 앞둔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평생 걸어온 학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민속학자의 꿈을 품었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독일로 건너가 시베리아 샤머니즘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돌아오자마자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아 한국 민속문화와 무속 연구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출범식에서 영상을 통해 발언한 강 교수는 “회고 작업은 기억을 파편화된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연결하고 이를 미래로 전환하는 것”이라며 “회고 네트워크의 형성과 발전은 개인과 세상이 만나게 하고, 우리의 문화를 살아 있게 만들어 급격하게 발전하는 기술문명 속에서도 개인과 사회에 균형과 안정을 안겨줄 것”이라고 했다.

    회고는 인간임을 자각하는 행위

    그가 회고 네트워크 제안을 수락한 데는 학문적 문제의식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회고나 자서전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강 교수는 이런 분위기를 “AI로 대변되는 기술문명이 가져온 여러 문제점에 대해 사회가 드디어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는다.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그가 쓰는 학문적 개념을 빌리자면 오랫동안 억눌려온 ‘민속 세계’의 귀환이다.

    “시스템이 과도하게 생활세계를 지배하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없어요. 그렇다 보니 어딘가에서 풀어야 해요. 전면적인 인간관계, 감정이 통하는 세계를 찾게 되는 거죠. 회고도 그 흐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는 ‘민속 세계’란 흔히 우리가 ‘민속’ 하면 떠오르는 단순한 옛날 풍습이 아니다. 강 교수는 민속 세계를 한층 폭넓게 정의한다. 바로 “전면적인 인간관계가 허용되는 세계, 감각·감정·공감이 살아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AI는 논리적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 민속 세계는 흉내 낼 수 없다. 그는 이것을 ‘통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개념은 “‘생활세계’는 모든 과학의 뿌리”라고 한 에드문트 후설이 먼저 말한 것이다. 강 교수는 이를 좀 다르게 정의해 인간의 통합 의식, 즉 감정 등이 함께 개입하는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이 통의식이 작동해 전면적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세계가 바로 민속 세계, 생활세계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회고를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성찰 방식”이라고도 했다.

    “인간이 AI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어떤 존재인지를 성찰하고 인식하고 있어야 해요. 그걸 위해서도 회고는 유용합니다. 회고록을 쓰는 작업 자체가 인간임을 자각하는 행위니까요. 현재의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와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는 지금 학계 안에서조차 “인문과학은 필요 없고, 미래는 컴퓨터 공학이 다 할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듣는다고 했다. 그럴수록 그의 목소리는 단호해진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한국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달려왔잖아요. 심리적 코어(core)가 없으니까 휘둘리는 거예요. 민속 세계, 즉 인간성이 충분히 확보되고 뒷받침될 때 강한 내적 근육이 생기고 기술 시스템에 대한 견제가 생길 수 있어요.”

    창의성은 고립에서 나온다

    강 교수는 한국의 기록 인프라가 아직 초기 단계임을 강조하며 해외 사례를 예로 들었다. 이를테면 미국은 1976년 포드 대통령 때 ‘포크라이프 아카이브’가 법제화됐고, 독일은 1900년대 초부터 100년 넘는 민속 아카이브를 쌓아왔다는 것이다. 영국은 ‘내셔널 헤리티지’로 전 국민적 차원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수집하고 축적한다. 아일랜드 더블린대학에는 켈트어로 된 민요와 손자 세대가 수집한 할아버지 이야기가 방대한 아카이브로 남아 있다.

    “한국은 민속 계열 박물관이 400여 개인데 서구나 일본 등에 비해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우리나라가 민속문화를 통한 인간과 국민, 민족 일반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과거 자기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을 연구하는 조선학회 회원만 아직도 500명이 된다고 해요. 민속문화를 통한 인간과 국민, 민족 일반에 대한 이해가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창의성은 고립에서 나옵니다. 카톡을 끊을 때, 연결을 끊을 때 자기만의 생각이 나오는 거죠. 그 성찰의 기회가 지금 필요합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관찰에 대한 관찰’을 할 때가 됐어요. 내가 나를 스스로 빠져나가서 관찰하는 것, 그런 점에서 회고 네트워크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속(folk)은 자아의 숨통을 틔우는 것

    그가 민속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격동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 전통과 뿌리가 다 무너지고 있다”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에 큰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좋건 싫건 모두 법대로 갔어요. 저는 그게 참 멋이 없더라고요. 남들이 안 가는 길이긴 해도 우리 삶의 뿌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난리가 나셨죠. ‘인류학’이라니, 그게 밥 먹여주냐는 거였죠. 하지만 저는 행복했습니다. 서울대 인류학과를 거쳐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독일 민속학의 방대한 지식 축적을 목격하며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초석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이었다. 한국 무속의 원류를 일본 학자들의 시각(아키바 다카시 등)으로만 수용하던 학계의 관성을 깨고 싶었다. 그는 직접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샤머니즘을 파고들며 한국 무속과 공동체 의례의 원형을 추적했다.  

    한국이 아니라 왜 시베리아였나요.

    “한국 무속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한국 무속의 원류로 시베리아를 꼽으면서도 정작 거기를 직접 연구하는 전문 연구자가 없었어요. 일본 학자들이 연결지어 놓은 걸 그냥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상태였죠. 그걸 직접 가서 연구해야겠다 싶었어요. 동시에 한국에 1980년대까지도 신분제 문화가 남아 있었잖아요. 이를테면 정육점집 자식, 무당집 자식은 결혼하기 어렵고. 그걸 저는 직업과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봉건적 문화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부분을 제대로 연구하면 한국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민속문화, 도시 민속, 기술문명과 민속의 관계를 연구해 왔으며, 현재 서울대 기록학 협동과정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민속학회와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그가 정의하는 ‘민속’은 우리가 흔히 아는 풍습 그 이상이다. 그는 생활세계를 ‘시스템(system)’과 ‘민속(folk)’으로 양분한다. 시스템의 세계는 국가, 관료제, 주식시장, AI 알고리즘처럼 논리와 효율, 법제화된 매뉴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이에 비해 민속의 세계는 노점상의 상(商)행위, 배달 노동자의 커뮤니티, 술자리에서의 공감처럼 비정형적이고 전면적인 인간관계가 허용되는 영역이다.

    “AI는 인간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가치를 부여하거나 감정을 공유할 순 없잖아요. 시스템이 과도하게 우리 삶을 도구화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민속 세계로 돌아가 숨을 쉬고 싶어 합니다.”

    사주·명리 열풍과 K-컬처 샤머니즘

    강 교수의 통찰은 한국의 종교와 세태를 분석하는 것에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어 한국의 기독교 전통에 일반적인 새벽기도, 안수기도, 방언 같은 것들은 서양 기독교에는 없는 한국적 샤머니즘적 작동 원리라는 것이다. 

    요즘 MZ세대의 사주명리학 열풍도 시스템에 대한 ‘민속의 반란’으로 해석한다.

    “매우 영리하고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세대라고 하는 그들이 왜 점집을 찾고 사주를 볼까요? 기존의 제도 종교나 시스템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불안, 즉 ‘불합리한 미래’에 대한 설명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나라에 국한한 현상이 아닙니다. 사회주의국가였던 소련이나 북한조차 점사(占事) 문화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지금 유럽도 교회와 성당이 사라지고 무당이 늘어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인간의 심성에는 이성적 시스템 세계가 채워주지 못하는 초월적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민속을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왔다”며 “이제는 이 ‘비합리적이지만 인간적인’ 영역을 이성적인 빛으로 비추어 학문적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다가 문득 요즘 유행하는 K-컬처에 녹아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생각이 났다.

    세계를 뒤흔든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도 걸그룹들이 귀신을 쫓는다는 설정 자체가 한국의 무당 역할을 인정하고 재해석한 전통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분하지요.

    “그게 바로 우리 민속의 깊은 곳에 흐르는 ‘신명’과 ‘에너지’입니다. 신명이란 단순한 흥겨움이 아니에요. 무당이 굿판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신명’은 모두를 하나의 리듬으로 녹아들게 만드는 해방감 혹은 집단적 황홀경을 느끼게 하지요. 

    장단이 고조되면 구경꾼들도 어느새 춤을 추고, 울음과 웃음이 뒤섞이며 한바탕 씻김이 일어나는 것, 그게 바로 ‘신명’의 본질입니다. 저는 K-팝의 칼군무나 떼창 문화, 콘서트장을 가득 메우는 응원봉의 물결을 보며 그 신명의 DNA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 민속의 핵심이 바로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정서적 응집력입니다. 방탄소년단(BTS) 음악에 열광하는 글로벌 팬들은 멜로디나 가사가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대동 세상’, 즉 파편화된 개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샤머니즘적 치유의 힘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현대인들은 SNS로 연결돼 있지만 극도로 고립된 시대잖아요. 공동체에서 느끼는 위로와 안도, 정서적 의지 같은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K-컬처 안에서 ‘우리’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 K-팝입니다.

    굿판에서 모르는 사람끼리도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울고 웃는 것처럼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보고 전 세계가 동시에 반응하는 것을 저는 ‘디지털 굿판’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한마디로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K-팝의 힘은 세련된 프로덕션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수천 년간 우리 안의 DNA에 축적된 인간을 잇고 상처를 씻어내는 민속적 에너지가 현대적 형태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민속학이라는 오래된 학문이 인간의 미래 삶과 연결되는 ‘최첨단 철학’처럼 다가왔다. 그러면서 일상을 휘감고 있는 차가운 디지털 공기가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역시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에너지의 교류와 온도만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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