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선캠프 조직 명단 유출 때부터 이상했다”
- 18대 총선 공천 기밀 새…“SD 쪽에 또 당했구나”
- 인수위 시절 한상률 전 국세청장 직접 추궁
- 한 전 청장 “‘이명박 X파일’ 있다. 정두언 만나고 싶다”
- MB “가족 뒷조사 하나” 버럭…정두언 공천작업 배제
- “정두언 그룹은 처절하게 웃기게 당했다”
- 구악(舊惡)은 죽기 마련…청명(淸明)이냐 한식(寒食)이냐일 뿐
정중동(靜中動)하던 그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대선 막바지인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의 BBK 설립을 입증하는 동영상 CD를 갖고 있다”며 한나라당에 30억원을 요구한, 이른바 ‘광운대 BBK 동영상’ 협박범들을 호텔로 유인해 경찰에 넘기면서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대선 이후 인수위 정무분과 자문위원으로 이름 올렸고, 언론은 그를 ‘대선 일등공신’ ‘MB 신권력의 사람들’로 소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인수위 이후 지금까지 야인(野人)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지인의 소개로 한 중견기업 상임자문역으로 들어간 게 전부다.
그런 그가 4·27 재·보선 한나라당 패배 이후 한나라당 소장파와 친이(친이명박계) 주류 간 당권을 향한 힘겨루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두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새로운 한나라’ 모임을 만들어 쇄신 화두를 선점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8년 3월 18대 총선에 앞서 한나라당 출마자 55명이 이상득(SD) 의원의 공천 반납을 요구한, 이른바 ‘친이 55인 친위쿠데타’의 진원지도 박 전 특보였다. 재·보선 패배로 불붙은 당내 권력투쟁 2라운드에서 박 전 특보의 움직임이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수위 시절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직접 만나 ‘X파일’을 추궁한 사람도 박 전 특보였다.
권력투쟁에서 졌다
4월 중순 만난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다”며 정중히 거절한 터였다. 현 정권을 만든 사람으로서 ‘역사의 기록’에도 책임지라는 그럴듯한 명분과 2006년 어느 날 우연히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나 함께 야구경기를 관람했던 소소한 인연까지 들먹이며 4월 초 그에게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결국 그는 ‘인터뷰를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했다’며 기자와 세 차례 마주 앉았다.
▼ 어떻게 지냈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운동도 하고 일도 하고….”
▼ 운동?
“스크린골프요. 홀인원도 두 번 했어요.”
▼ 일은 할 만한가요?
“네. 여기서도 할 일이 많네요. 어쩌면 인터뷰 후에 짐 쌀지도 몰라 회사에 미리 얘기했습니다(웃음). (권력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부담 없이 얘기하라고.”
▼ 그렇게까지….
“운명이죠. 권력투쟁에서 진 사람의 운명. 그래서 그동안 조용히 지냈습니다.”
▼ 권력투쟁이라면 SD계를 염두에 둔 말씀인가요?
“그 얘기는…처음부터 많이 (앞서)나가시네요.”
▼ ‘나간 김’에 바로 묻죠. ‘55인의 반란’은 ‘박재성 기획’ 아니었나요?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08년 3월 정국(政局)으로 되돌아가보자. 18대 총선을 앞두고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 후보 등 수도권 한나라당 출마자 55명은 이렇게 주장한다.
“서민을 외면한 정책 혼선과 잘못된 인사, 잘못된 공천에 대해 당 지도부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인사를 잘못한 청와대 관계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2008년 6월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홍준표 원내대표(왼쪽에서 네 번째)가 “권력사유화 논쟁으로 불거진 당내 분란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이상득, 정두언 의원은 자중하라”고 말했다.
기자는 당시 SD계와 소장파 간 공방을 취재하면서 SD계와 반SD계의 잠재된 갈등은 ‘이상득 저격’으로 수면으로 떠올랐고, SD 공격의 최초 진원지는 박 전 특보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대답 대신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아래턱을 몇 차례 위로 밀어 올리더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경험칙상 이런 경우는 ‘나는 대답할지를 갈등하고 있다’는 신호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초기 조각(組閣)으로 민심이 흉흉했어요. 여기에 박희태 선대위원장 등 원로 정치 선배들은 공천을 못 받는데 SD는 살아남았죠. 일관성도 공정성도 없고, 도의적으로도, 그리고 한국적 정치 풍토를 감안해도 이해할 수 있는 ‘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MBC 여론조사에서도 ‘SD는 공천을 반납해야 한다’는 의견이 76.6%였어요. ‘이래 가지고 나라가 되겠느냐’는 고심이 깊어졌죠. 남(경필) 의원과 얘기하고, 지역 순방 중인 정 의원을 찾아갔어요. 남 의원은 ‘나가떨어지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겠다’고 하더군요. 정 의원도 흔쾌히 동의하면서 ‘나 혼자 해서 힘이 되겠느냐? 개혁적 이미지(남경필, 원희룡을 지칭)를 주든지(함께하든지)’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섰습니다. 소장파 의원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촉매 역할을 한 겁니다.”
SD 총선 불출마 기획
▼ 동참한 출마자도 19명에서 55명으로 급격히 늘었는데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 원희룡 의원은 다른 길을 걸었는데요.
“희룡(그는 원 의원과 같은 82학번 친구다)이와 호프집에서 만났어요. 한 시간 반 얘기했는데 ‘뉘앙스’가 안 맞더라고요. ‘친구로서 부탁인데, 동참하지 않아도 중립은 지켜달라’고 했어요.”
▼ 뭐라던가요?
“‘알겠다’고 했죠.”
▼ 이후 원 의원은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는 등 SD 측과의 관계가 좋아졌는데요.
“원 의원도 소장파 비주류로 크는 것보다 주류 안에서 활동해보고 싶었겠죠. 그 친구는 그 친구 스타일이 있으니까….”
▼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 3월 중순에 남 의원이 SD 지역구(경북 포항 남·울릉군)로 찾아갔어요. 포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 의원이 전화했기에 ‘진정성을 잘 말씀드리고, 후배들이 원로 선배를 잘 모시겠다’는 뜻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죠. 예상은 했지만 안 받아들이시더라고요.”
▼ ‘형님’과의 일전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네요.
“아니요. 오히려 쉬웠습니다. 누가 봐도 아닌 길로 가는데, 정권을 만드는 데 일조했던 사람이 ‘아니다’고 해야죠.”
같은 친이계로 대선 승리를 일궈냈지만 서로 간 깊은 불신 속에 일전을 벌였던 SD계와 소장파. 그 이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기자는 화제를 돌렸다. 속 깊은 얘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그의 답변은 자주 끊겼다.
▼ 캠프 시절 조직과 정무팀을 두루 오간 걸로 압니다만.
“처음엔 정무팀이 없었어요. 조직팀에서 일하다가 정 의원을 알게 됐고 함께 손발을 맞췄습니다. 조직팀 손놓고 정무 쪽 일을 했어요. 그땐 자다가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 자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친인척 문제부터 BBK 방어까지 안 한 게 없었죠. 처음에는 캠프가 꾸려진 (서울 여의도동) 용산빌딩에서 함께 일하다가 나중에는 인근 오피스텔을 구해 일했습니다. 상대방의 ‘네거티브 전략’을 분석하거나 MB 친인척 문제를 다루는 일은 보안 유지가 필수였거든요.”
MB가 서울시장에서 물러나기 전부터 대선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서울 견지동의 안국포럼.
“당장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지금 말하기에는…. 그 얘기는 안하는 것이 예의라고 봅니다. 사이가 좋을 때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은 제 스타일과도 맞지 않아요.”
▼ 스타일도 좋지만, 저는 인터뷰 기사로 뭘 씁니까?
“아이고….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뒤) 이것저것 많았습니다. 그(친인척)와 관련된 문제가 터지면 찾아가 부탁도 하고,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을 만나 협조도 구했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면 고마움은 잊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 협조해주셨던 분들에게 뭔가 보답을 못하고 있네요. 그 얘긴 이 정도 하시죠.”
박 전 특보는 캠프 조직과 정무 일을 하면서 당시 정두언 의원과 손발을 맞췄다. 사실 그는 정 의원과 일면식도 없었다. 그와 정 의원을 연결해준 사람은 MB였다.
박 전 대표와 ‘맞짱’뜨지 말라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지인이 저를 MB(당시 서울시장)에게 소개했어요. 2006년 2월경이었는데, 당시는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에게 더블스코어 정도로 지고 있던 시기였죠. 일요일 오후 시장실에서 만났는데, 제 의견을 듣더니 ‘정말 좋은 얘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가 일한 ‘안국포럼’은 2006년 7월 MB가 서울시장에서 물러나기 전부터 대선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정 의원 등 서울시청 출신 멤버들이 중심이었다. 박 전 특보는 MB가 스카우트한 1호 참모가 돼 합류한다. 당시 그가 MB에게 제안한 경선 전략은 ‘당내 조직을 지구당 조직 싸움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것. 박 전 대표와 ‘맞짱’ 뜨면 질 수밖에 없으니 정치적 야망이 있는 지방 대의원(광역·기초의원)을 잡으라는 책략이었다.
박 전 특보는 MB 캠프에서 활약하기 전부터 한나라당 핵심 인사들 사이에 ‘조직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대세론’이 한창일 때 “부산·경남에서 노풍(盧風)이 불면 창(昌)은 질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낸 사람도 그였다. 보고서를 눈여겨본 당시 윤여준 의원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독대 자리를 마련해줬고, 부산 금정구에서 구의원과 두 번의 시의원을 지냈던 그는 대선 부산특별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최병렬, 박근혜 의원의 당 대표 경선을 돕고, 총선 전략을 짰다. 어쨌든 MB의 소개로 만나 콤비가 된 정두언-박재성 조(組)는 치열한 경선을 치러내며 대선 승리를 이끌었지만, 역설적으로 대선 이후 MB의 눈 밖에 나는 운명에 처했다.
“안국포럼 시절 정 의원은 기획과 조직, 인재영입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했죠. 일도 잘했고, 파트너십도 괜찮았어요.”
▼ 그때 문건도 유출됐죠?
“문건이라면?”
▼ 경선 캠프 조직 문건 말입니다. 정두언 상황실장, 박재성 부실장이라는….
“아, 네. 거 참…그때부터 (SD쪽과)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당내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둔 2007년 5월 경기도의 한 일간지에 MB 경선 캠프 조직구성 문건이 유출됐다. 이 문건은 MB가 정 의원에게 내린 ‘밀명(密命)’으로, 조직 구성을 기획한 정 의원과 박 전 특보, 김해수 전 대선후보비서실 부실장, 경윤호 전 경기도공보관과 사전 보고를 받은 SD 정도만 아는 극비사항이었다고 한다. 캠프 구성은 박희태 선대위원장, 정두언 상황실장, 박재성 부실장 체제로 돼 있었다. 문건이 유출되자 이재오 의원은 물론 당 전체가 ‘난리’가 났다.
“선거를 지휘했던 또 다른 축인 이재오 의원도 무척 화를 냈죠. 그가 서운해한 것은 이해해요. (MB의) 최종 사인이 나면 (이 의원에게) 보고하려고 했었는데 그 사이에 새나간 거죠. 귀신 곡할 노릇이었죠. 그런데 의문은 왜 문건이 중앙 일간지나 다른 지역 일간지도 아닌, 경기지역 일간지로 새나갔을까 하는 겁니다. (경기지역 일간지에 새나가면) 당연히 우리 팀에 있는 경윤호 전 공보관이 오해를 받지 않겠어요? 결과적으로도 그 때문에 정 의원을 비롯한 우리 팀이 공격당했고요. 문건 유출은 의도적이었습니다.”
경선 캠프 명단 유출…SD 의심 시작
한나라당 남경필 권영진 정태근 구상찬 김성태 정두언 김성식 의원(왼쪽부터) 등 ‘새로운 한나라당’ 소속 소장파 의원들이 5월8일 오후 국회 정태근 의원실에 모여 향후 활동방향 등을 논의하고 있다.
“당시 MB는 ‘부의장님(SD)에게만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 명단 작성에 참여한 사람이 유출했을 가능성도….
“정 의원과 저, 경 공보관은 직접 캠프 조직을 짠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유출하겠어요? 유출되면 ‘보안 유지도 못한다’고 비난받을 사람들이 유출을 한다? 그 일로 정 의원은 이재오 의원과 틀어지고, 정 의원에 대한 MB의 믿음도 처음 금이 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요.”
▼ 왜 그랬다고 보나요?
“캠프 내 ‘정두언 체제’의 독주를 막으려는 거죠. 그때까지의 캠프 주도 세력, 즉 상황실장 정두언, 부실장 박재성 구도가 유출 사건으로 처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인터뷰는 자연스레 양측 간의 오래된 불신으로 흘렀다. 같은 친이계이면서도 정두언계와 SD계 사이에 빚어진 불신의 원인이 무엇인지가 인터뷰 모두에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 그런 일이 또 있었나요?
“인수위 시절에요. 사실 우리 쪽은 아무 생각 없었어요. 당선인께서 정 의원을 불러 이방호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18대 총선) 공천 작업을 할 건데 정 의원 팀이 지원하라고 했어요. 총선 밑그림을 그려보라는 건데, 딱 한 번 모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정 의원이 (당선인실에) 올라갔다 오더니 ‘왜 일을 그렇게 하느냐’며 버럭 고함을 치더라고요. 김무성 의원이 임태희 당선인비서실장에게 전화해 ‘박재성이 공천 작업하는데 우린 승복할 수 없다’고 했다는 거예요.”
2005년 9월 한나라당 당 대표 경선에서 그는 최병렬 후보의 전략을 짜는 핵심 참모였다. 반면 김무성 의원은 서청원 후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박 전 특보는 17대 총선 공천에서 최병렬 당 대표의 개혁 공천을 기획했고, 김 의원은 반대표를 던진 인연이 있다.
▼ 이번엔 말이 새어나갔군요?
“처음엔 저도 영문을 몰랐죠. 그래서 ‘우리가 언제 공천 작업을 했느냐’며 저도 화를 냈어요. 공천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지, 공천 작업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어요. (공천) 작업이라도 하고 욕먹으면 이해나 가지. 그런데 첫 모임에 참여한 사람을 따져보니 이해가 됐어요. 첫 모임에는 저와 이태규(전 대통령 연설기록비서관), 박영준 등이 참여했거든요.”
▼ 그래서 결국 공천 작업에서 정 의원 측이 배제됐군요.
“아시는 대로죠. 우리는 보안 유지도 안 된다고 또 찍혔죠. MB에게 정두언, 박재성은 또 눈 밖에 나고…. 처절하게 웃긴 얘긴데 정말 처절하게 웃기게 당했어요.”
▼ 일종의 모함인데….
“인수위 내에서 정두언을 필두로 한 그룹이 모든 걸 다 한다는 위기감이 작동하는 시절이었으니… 움직인 거죠.”
정말 처절하게 웃기게 당했다
▼ 증거가 있습니까?
“녹취록이라도 있어야 합니까? 다 아는 사실인데.”
여기서 잠시 친이계 내부의 권력투쟁 양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정치인 출신이 아닌 만큼 ‘강한 추종 세력’이 없었다. 마땅한 힘의 균형추가 없는 상황에서 세력을 끌어 모아 경선과 대선을 치르다보니 계파별 권력암투가 거세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선 직후 4개월 만에 총선이 치러지고, 다시 3개월 후 당 대표 선출이라는 빡빡한 일정도 친이계 내부 파열음을 크게 했다는 분석이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친이계 내에서 SD 그룹(박영준, 최시중, 장다사로, 류우익, 이방호 등), 이재오 그룹(공성진, 진수희, 이군현 등), MB 직계 정두언 그룹(이춘식, 정태근, 조해진 등) 간 3대 문파는 때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인수위 구성은 정두언 그룹이 주도했지만, 조각(組閣)과 청와대 인선은 이 대통령이 힘을 실어 준 SD 그룹의 승리였다. 총선 공천은 이재오-이상득-이방호-정종복 라인이 움직였다는 게 공통된 시각이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
▼ 계속 당했다는 건데, 가만히 있었나요?
“정 의원과 한번 크게 싸웠습니다. ‘일을 못한 건 못했다고 해야지 왜 음해를 당하느냐’고. 하는 일마다 음해가 있고 이상하게 돌아가니까요. (정 의원은) 저보고 세상을 삐딱하게 본다더군요. 저는 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냐고 따졌습니다. 정 의원은 밖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순수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당하고만….”
▼ 반격은 없었나요?
“반격? 제가 20대 후반부터 이 (정치)판에 있었지만 그런 식의 공격에 대응할 재주가 없어요. 똑같이 구르라는 건데…. 그냥 가랑비에 옷 젖고 있었던 거죠.”
▼ 가랑비라면?
“이런저런 일로 우리 팀에 대한 MB의 신뢰는 계속 줄어들고… 반대급부를 챙긴 그룹도 있고.”
▼ 어쨌든 캠프와 인수위 시절 권력암투에 밀린 게 ‘SD 공격’으로 이어졌군요.
“그건 조금 다릅니다. 캠프 시절부터, 대통령 당선 이후에 SD 은퇴선언을 기획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언제 했는지 명시적이진 않지만 ‘(대통령에) 당선되면 나(SD)는 뒤로 간다’는 말이 캠프 내에서 돌았어요. 그런데 인수위 지나고 첫 내각의 명단을 발표한 뒤 민심이 나빠졌고, 공천 잘못해 당이 쪼개질 위기에 처하게 됐잖아요? 결국 자초한 거라고 봐요.”
▼ 인수위 구성은 정 의원이 주도하지 않았나요?
“행정고시 출신인 정 의원이 자신의 기수 아래위, 각 부처 에이스를 대거 포진시킨 건 맞아요. 그것도 실력과 연공서열을 꼼꼼히 따진 겁니다. 정두언이 제 식구 챙겼다? 그건 정 의원 스타일이 아닙니다. 일 잘하니까 뽑힌 거죠. 그러면 뭐 합니까? 정작 중요한 인사는 만사형(兄)통이었는데.”
MB 당선되면 나(SD)는 뒤로 간다
▼ 정 의원의 SD 공격을 ‘몸값 올리기’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글쎄요. 가랑비 뿌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겠죠.”
이명박 정부 첫 조각과 청와대 인선 과정은 그의 말대로 SD계의 완승이었다. 당시 요직 발탁 대상자는 박영준 차관의 손을 거쳐 SD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다. 박 차관은 ‘신동아’ 2010년 8월호 인터뷰에서 “인사 권력을 놓친 것이 이후 정 의원의 ‘권력 사유화’ ‘인사 전횡’ 발언의 기저에 깔렸을 것이라고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이, 그때가 (발언 원인으로는) 제일 컸을 것이다. 그래서 정 선배 입장은 이해가 된다”고 했다. 정 의원과 박 차관은 서울시 부시장과 국장으로 함께 근무했다.
▼ 정 의원 그룹에 대한 MB의 신뢰는 금이 갔는데, 다시 공천 작업을 맡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팀이 일은 잘 처리하니까, 일은 시키고 한편으론 견제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이와 관련, 정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SD계와 틀어진 원인의 하나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이명박 X파일’을 꼽았다. 먼저 정 의원 말부터 들어보자.
“인수위 때 있었던 일 중에 국세청 사건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당시 한상률 국세청장이 ‘이명박 파일’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한 짓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끝내 안 내놓고 오히려 저를 모함했어요. 마치 제가 대통령 가족의 자료를 뒤진 것처럼. 그런 거 저런 거가 섞여서 (SD와) 불편한 관계가 됐어요.”
▼ 정 의원의 인터뷰 기사를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한 전 청장을 직접 만난 사람이 접니다. 그 일로 우리는 완전 게릴라성 집중호우에 번개까지 맞았습니다. 우리로선 결정타였죠.”
▼ 결정타였다면….
“선거 당시 ‘도곡동 땅’ 문제가 터져 나왔잖아요? 당시 여당(대통합민주신당)은 이 문제를 들고 나와 MB를 공격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분석해보니 도곡동 땅 문제는 국세청 등 권력기관이 뒷조사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인수위 시절에 국세청을 치고 들어갔어요.”
이상득 의원에게 총선 불출마 요청을 하러 포항으로 내려간 남경필 의원.
“국세청 직원을 통해 미리 조사하고, MB 일가를 뒷조사한 부서를 콕 짚어 말하니까 국세청에서 내분이 일어났어요. 한 직원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전 청장에게 ‘불법 문건 소지한 거 내놓아라’고 했죠. 선거 때마다 국가기관이 후보 뒷조사하는 불법행위는 근절해야 할 거 아닙니까. 저는 이번 기회에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어요.”
▼ 한 전 청장의 반응은 어땠나요?
“정확한 ‘워딩’은 이렇습디다. ‘나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문건이 있는 거 같다. 지금 찾고 있다.’ 그러면서 정 의원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더군요. 또 (정 의원이) 음해를 당할까봐 만남을 주선하지 않았어요. 이 활동은 모두 정 의원을 통해 당선인(MB)에게 보고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 당선인이 ‘왜 뒷조사하느냐’며 야단쳤어요. 분명히 보고하고 한 일이고, 불법행위를 근절하려고 한 정당한 조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선인과 가족 뒷조사를 한다고 의심하더라고요. 얼마나 어처구니없던지. 결국 또 당한 거 아닙니까.”
한상률 전 국세청장 “도곡동 땅 X파일 있다. 찾고 있다.”
▼ 한 번 더 묻겠습니다. 국세청 직원과 한 전 청장은 도곡동 땅을 조사한 문건이 있다고 했습니까?
“네. 생생하게 기억나죠. 인수위에 파견된 국세청 직원들도 조사했습니다. 한 전 청장은 분명 ‘(문건을 회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 한 전 청장이 SD에게 모함을 했고, MB도 이를 사실로 믿은 거 같다는 건가요?
“나중에 감은 잡았죠. 안원구 전 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이 SD를 만나 한 전 청장 유임을 부탁했고, 한 전 청장 역시 SD와 골프를 치면서 직접 연임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있었잖아요? SD 아들 세무조사 무마 후 한 전 청장이 연임에 성공했다는 기사도 났지 않습니까.”
▼ 국세청 문건과 한 전 청장 유임을 ‘맞교환’했다?
“그건 제가 알 수 있나요. 그 문건 문제로 우리는 완전히 눈 밖에 났죠. 진실이 밝혀질 날이 곧 올 겁니다.”
▼ 문건은 못 보셨죠?
“당연하죠.”
▼ 당선인께 보고도 했는데 호통을 들었다는 건 이해가지 않네요.
“저도 처음에 어리둥절했어요. 갑자기 왜 저러시나 싶었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당선시킨 사람을 우리가 왜 뒷조사합니까?”
‘도곡동 땅 의혹’은 이 대통령이 서울 강남구 도곡동 4개 필지를 친형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 명의로 매입 관리해오다가 1995년 포스코건설에 팔았다는 의혹이다. 대선 과정에서 실소유주 논란이 불거졌고, 안원구 전 세원관리국장은 ‘이 대통령이 실소유주로 나와 있는 전표를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전 청장 후임인 백용호 전 국세청장(현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009년 11월 국회 기획재정위 전체회의에서 “그런 문건은 없는 것으로 보고받았다”며 존재사실을 부인했다. 검찰과 특별검사도 도곡동 땅은 이 대통령의 소유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반면 도곡동 땅 의혹의 전모를 알고 있다는 의혹을 받은 한 전 청장은 박 전 특보에게 ‘도곡동 땅 뒷조사 문건이 있다’고 했다. 당시 국세청의 X파일 내용은 무엇이고, 한 전 청장은 그걸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국세청장이 된 한 전 청장이 유임된 데 대한 의혹은 여전하다. 두 청장 중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거짓말쟁이’가 백 전 청장이라면, 검찰 역시 ‘면죄부 수사’를 한 꼴이 된다. 만약 앞서 어떤 거래가 있었다면, 백 전 청장은 정말 보고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2010년 11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전방위 사찰에 대해 질의하면서 박 전 특보의 이름을 거론했는데요. 알고 계시나요?
“네. 그런데 이 의원이 잘못 알고 있어요. 저는 국정원장 특보로 특채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성호 전 국정원장이 저를 챙겼다는 대목에선 실소가 납니다. 김 전 원장이 저를 챙겼다니…. (이 의원이) 국가기관의 정보보고를 입수해 읽은 거 같아요.”
당시 이 의원은 남경필, 정태근 의원 부인 사찰 등 전방위 사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성호 전 국정원장 사찰사례입니다…부산 금정구 출신 시의원을 지낸 역시 브니엘고 출신(동문)인 박재성씨를 국정원장 특보로 특채했습니다. 이에 이창화 행정관은 김성호 원장이 친노 성향 PK 출신만 챙긴다면서 이종찬 민정수석에게 김성호 원장 체제의 문제점을 보고하면서 김성호 원장이 추후에 제거되는 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남경필, 정태근 의원 부인 사찰에 이어 박 전 특보가 함께 거론되는 게 공교롭네요.
“그래서 그런지 공직등록 검증 동의서는 제출했는데 어떤 자리에도 임용되지 못했어요. 권력투쟁에서 졌으니, 뭐 할 말은 없습니다만.”
▼ 가족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거(선거) 한다고 몇 년간 부산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살았는데 볼 낯이 없더라고요. 관계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욕도 못하고… 답을 못하는 게 고통이었습니다. 세상살이 많이 배웠죠. 아까 말씀드렸죠? 가족보다 더 볼 낯이 없는 사람들이 대선 때 저를 믿고 도움을 줬던 사람들입니다.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그분들에게는 평생 갚고 살아야죠.”
피는 콜라보다 진하다
▼ 정치권에선 박 전 특보가 선거 때 ‘조직’에 강하다고 하던데요.
“조직은 돈을 많이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목표를 단일화하면 됩니다. 남이 쓴 비용 절반도 안 써도 이깁니다. 사업은 이익이 목적이지만, 정치는 무언의 신뢰와 비전을 공유하면 (조직은) 그냥 됩니다.”
▼ 지난 대선에서는 비전 공유가 잘 안된 거 같네요.
“그런가요(웃음)? 후배들은 저보고 ‘DNA가 비주류’라고 합니다. 당 주류와 충돌한다고.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몸담은 당이 건강하고 세상 변화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까지 비주류였던 거였죠. 언젠가는 변하겠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오면 저의 갈등도 끝날 겁니다. 국정 농단 세력은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청명(淸明)에 죽느냐, 한식(寒食)에 죽느냐일 뿐이죠. 저를 포함한 한나라당 내 개혁파들도 갈고 닦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했잖아요? 이 상태로 권력투쟁하면 완전 ‘독박’쓸 수 있겠구나, 대통령 형님하고 싸우면 안 되겠구나, 피는 콜라보다 진하구나… 다 배웠잖아요?”
▼ 억울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내가 (권력투쟁에서) 밀렸다고 나쁘게 말하고 다니면 저만 불쌍해집니다. 뭐가 부족했을까, 또 내가 저 위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반성하는 게 중요하죠.”
▼ 4·27 재·보선 이후 당내에서 ‘젊은 대표론’이 뜨고 있습니다. 반격의 기회가 마련되는 건가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죠. 이제는 당 간판 교체보다는 당을 교체해야 합니다.”
▼ 당 간판도 바꿀 듯한데요.
“개혁적인 젊은 이미지는 원희룡 나경원 정두언 남경필, 그 정도밖에 없지 않습니까?”
▼ ‘젊은 대표론’을 예상하는 건가요?
“현재 경우의 수는 ‘실세 대표론’과 ‘젊은 대표론’ 2가지입니다. 실세 대표론은 각 계파가 모두 동의를 해야 해 복잡합니다. 젊은 대표론은 현실적입니다. 젊은 대표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실제로 당을 쇄신하자는 세력과 분위기에 편승해 자리를 노리는 사이비 세력을 골라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악(舊惡)에 저항하면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죠. 물론 건전한 견제세력으로 (소장파는) 당권에서 한걸음 물러날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