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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⑨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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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아 칼라스는 전설이다. 클래식 분야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전설. 데뷔 때부터 그를 괴롭힌 고·중·저음이 각기 다른 목소리는 예술적인 표현력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극복했지만, 정작 사랑만큼은 극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사랑 오나시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2년간 아파트에 칩거하다 끝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는,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됐는지 모른다.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아’에서 열연하는 마리아 칼라스.

요즘 “전설이 됐다”는 말은 그 분야에서 최고로 뛰어났던 사람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찬사로 쓰인다. 대중가수 중에는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조용필 등이 이 찬사를 듣고 있다. 클래식 분야에서는 아마도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를 꼽을 수 있겠다. 최고의 프리마돈나였던 그는 너무 유명했던 까닭에 일간지의 문화·예술면을 넘어 사회면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최고 무대를 선사한 예술가로, 때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악녀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 마리아 칼라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가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비극적 여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필자는 프리마돈나를 꿈꾸던 어린 시절 음반가게앞을 지나다가 한 여인의 포스터를 넋 나간 사람처럼 들여다본 적이 있다. 튀어나올 듯 정열적인 큰 눈,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 하는 높은 콧날, 모나리자 모습과 비슷한 다중적인 표정의 매혹적인 여인…. 차비까지 털어 구입한 그의 LP판을 듣는 순간 필자는 한 번 더 놀랐다. 그의 음성은 ‘천상의 소리’가 아니었다. 때로는 투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친 소리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동경과 존경심에 매일 듣고 또 들었다. 그 덕분에 필자의 목소리에도 이상이 생겼다. 저음에 너무 힘을 주게 됐고, 고음에서는 이상한 바이브레이션을 넣는다는 지적을 들어야 했다.

미운 오리새끼 칼라스

내팽개쳤던 칼라스를 다시 접한 것은 이탈리아 유학시절이었다. 오페라 음반을 찾으면 어디에나 칼라스의 음반이 있을 정도로 방대한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지만, 그를 최고로 만든 것은 음성이 아니라 예술적인 표현력이었다. 표현력이 그의 음성을 예술로 만든 것인데, 어린 필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의 음성만 모방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필자는 칼라스의 팬이 되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마리아 칼로게로풀로스’라는 본명에서 알 수 있듯,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그리스계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부친은 그리스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의료사고에 휘말려 부인과 큰딸과 함께 이민선을 탔다. 당시 여느 남부 유럽인처럼 이들 부부도 아들을 원했지만 첫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등졌다.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가 마리아였다. 비만에 심한 근시로 알이 두꺼운 안경을 낀 마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롭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 부모의 이혼으로 13세의 칼라스는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마리아 칼라스는 불안정한 그리스 사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또 언니만 편애하던 어머니 때문에 애정결핍을 겪으면서 말수가 적은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은 그로 하여금 모든 열정을 음악에 쏟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아테네음악원 재학시절에는 같은 반에 있던 학생들의 노래 레슨을 도와주는 열성을 보였으며, 그 덕분에 후일 모든 파트의 레퍼토리를 빠른 시간에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군의 성악적 기량을 보인 칼라스는 각종 극장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날로 성숙해갔다.

2차대전 중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은 독일 작곡가의 작품 공연을 전략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칼라스는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의 음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의 정치와 경제가 극도로 불안정해지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칼라스는 더 이상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됐고, 결국 그리스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향했다.

27세 연상 남편 메네기니

미국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수많은 오디션에서 낙방했다. 그의 목소리가 저음, 중음, 고음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겨우 오디션을 통과해 연습 시작을 기다리다가 이유 없이 교체통보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이탈리아 베로나의 야외극장인 ‘아레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라 조콘다’의 오디션이 눈에 띄었다. 1947년 미국 오디션에서 선발돼 난생처음 이탈리아 베로나 땅을 밟게 되면서 칼라스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탈리아에 도착할 당시 칼라스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가 들고 온 허름한 가방 안에는 쓸 만한 물건이라고는 오디션용 의상 한 벌과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칼라스의 국제무대 데뷔는 대성공을 거두며 각종 찬사와 주목을 받았지만, 막상 계약을 하려는 에이전트는 없었다. 그동안 겪었던 인고의 시기가 여전히 지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베로나의 부유한 사업가로 예술, 특히 오페라에 조예가 깊었던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896~1981)가 후원자로 나타났다. 27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확실하게 서로 능력을 믿어주는 예술적인 동지 관계로 발전해나갔고, 동지 관계는 점차 사랑으로 바뀌었다.

후세 사람들 중에는 메네기니를 칼라스의 발목을 잡고 ‘노예계약’을 한 악덕 매니저이자 남편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부정확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칼라스는 예술적인 가능성은 보여주었지만 인정은 받지 못했고, 몸무게도 100㎏에 육박해 열등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칼라스는 메네기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관계에서는 칼라스가 더욱 적극적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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