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의 싹<br>김기승 등 12명 지음, 인물과사상사, 419쪽, 1만6000원
21세기 들어 프랑스에서는 옛 백과전서파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새 지식을 총망라해서 시민에게 전달하자는 뜻에서 대중을 위한 강연회가 열렸다. 2000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술학교의 메카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진행됐다. 그해는 2월이 29일까지 있었으니 1년이 366일이었다. 366개 강의가 묶여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한국에서도 번역돼 나왔다. 강연을 정리한 것이니만큼 생동감이 돋보인다.
선진국에서는 이처럼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는 사례가 흔하다. 이런 책이 명저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적잖다.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손에 꼽히는 명저인 ‘역사란 무엇인가’도 저자 E. H. 카의 강연집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활동하며 서구중심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강연집 ‘저항의 인문학’은 ‘오리엔탈리즘’에 버금가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현대 미술이론을 정립하는 데 큼직한 기둥 하나를 세운 미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 연구’라는 대표적 강연자료집을 남겼다.
강연을 정리한 책의 장점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구어체로 기술되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질의응답을 덧붙이면 현장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노련한 저자나 편집자는 현장 분위기를 잘 묘사해서 독자가 오디오뿐 아니라 비디오도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청중 가운데 가끔 ‘재야의 고수’가 앉아 있다. 그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발표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서울 종로구 계동에 ‘인문학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보통명사 같지만 특정 박물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길로 10여 분 걸어가면 나타나는데 중앙고교 구내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아한 석조 건물인 이곳에서는 근대화 자료를 전시하는 것말고도 인문학 교양강좌가 꾸준히 열린다. 강좌는 1회성이지만 이를 정리한 서적은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2010년 5월에는 ‘인문학 박물관에서’라는 책이 나왔다. 인문학자 12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연 또는 대담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 이어 1년여 만에 나온 ‘인문학의 싹’도 이곳에서 열린 대중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책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문학이 어디에서 싹을 틔웠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지역은 한국. 시기는 근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싹을 품은 씨앗 12개를 골랐다. 이 책의 부제는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이다.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처럼 널리 알려진 고전부터 북한의 대표적인 국어학자인 홍기문(1903~92)의 ‘조선신화연구’까지 다루어 다양성이 돋보인다. 인문학박물관 측은 남북한의 인문학을 통합해 ‘우리의 사상사’로 재탄생시켰다고 밝혔다.
먼저 ‘택리지’를 살펴보자. 1751년에 나온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다. 종전의 다른 지리서들은 행정구역별로 서술했는데 이 책은 생활권, 문화권의 관점에서 주제별로 나눠 설명했다. 마을의 입지를 결정하는 4대 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꼽았다. 여기서 ‘생리’는 물자의 생산 및 유통 환경을 말하는 것으로 경제가 중요하다고 언급한 점이 두드러진다. 살기 좋은 곳으로는 소백산 아래쪽 안동권과 상주권, 지리산 섬진강 유역, 충청도 공주 등이 꼽혔다. 이중환 자신이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소백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쪽에 있는 청화산이었다.
국학 연구자 안확(1886~1946)이 쓴 ‘조선문명사’는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의 정치사를 다루었다. 부제가 ‘조선정치사’다. 유럽의 선진 문명에서처럼 조선시대에 향회, 촌회 같은 자치제가 발달한 면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수준 높은 여러 저서를 낸 안확은 신채호, 최남선, 이광수 등에 비해 생소한 편인데 앞으로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겠다. 강의를 맡은 류시현 전남대 HK교수는 “안확은 해방 후 근대 학문적 아카데미즘에 속하지 못했기에 그의 조선문화 연구의 성과가 계승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