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한국에 싹튼 인문학의 뿌리는?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koyou33@empas.com

    입력2011-05-19 1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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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싹튼 인문학의 뿌리는?

    인문학의 싹<br>김기승 등 12명 지음, 인물과사상사, 419쪽, 1만6000원

    디드로, 달랑베르….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들이 프랑스 백과전서파 인물임을 떠올리리라. 18세기에 그들은 당시의 다양한 지식을 집대성해 본문 19권, 도판 11권 규모의 대규모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시민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이 백과사전은 프랑스혁명의 불씨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냥 지식만 모은 게 아니라 비판정신을 담았기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몽매 상태에서 벗어났다. 집필자들은 토론, 강연 등의 치열한 과정을 거쳐 원고를 작성했다.

    21세기 들어 프랑스에서는 옛 백과전서파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새 지식을 총망라해서 시민에게 전달하자는 뜻에서 대중을 위한 강연회가 열렸다. 2000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술학교의 메카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진행됐다. 그해는 2월이 29일까지 있었으니 1년이 366일이었다. 366개 강의가 묶여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한국에서도 번역돼 나왔다. 강연을 정리한 것이니만큼 생동감이 돋보인다.

    선진국에서는 이처럼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는 사례가 흔하다. 이런 책이 명저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적잖다.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손에 꼽히는 명저인 ‘역사란 무엇인가’도 저자 E. H. 카의 강연집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활동하며 서구중심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강연집 ‘저항의 인문학’은 ‘오리엔탈리즘’에 버금가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현대 미술이론을 정립하는 데 큼직한 기둥 하나를 세운 미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도상해석학 연구’라는 대표적 강연자료집을 남겼다.

    강연을 정리한 책의 장점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구어체로 기술되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질의응답을 덧붙이면 현장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노련한 저자나 편집자는 현장 분위기를 잘 묘사해서 독자가 오디오뿐 아니라 비디오도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청중 가운데 가끔 ‘재야의 고수’가 앉아 있다. 그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발표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서울 종로구 계동에 ‘인문학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보통명사 같지만 특정 박물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길로 10여 분 걸어가면 나타나는데 중앙고교 구내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아한 석조 건물인 이곳에서는 근대화 자료를 전시하는 것말고도 인문학 교양강좌가 꾸준히 열린다. 강좌는 1회성이지만 이를 정리한 서적은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2010년 5월에는 ‘인문학 박물관에서’라는 책이 나왔다. 인문학자 12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연 또는 대담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 이어 1년여 만에 나온 ‘인문학의 싹’도 이곳에서 열린 대중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책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문학이 어디에서 싹을 틔웠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지역은 한국. 시기는 근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싹을 품은 씨앗 12개를 골랐다. 이 책의 부제는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이다.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처럼 널리 알려진 고전부터 북한의 대표적인 국어학자인 홍기문(1903~92)의 ‘조선신화연구’까지 다루어 다양성이 돋보인다. 인문학박물관 측은 남북한의 인문학을 통합해 ‘우리의 사상사’로 재탄생시켰다고 밝혔다.

    먼저 ‘택리지’를 살펴보자. 1751년에 나온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다. 종전의 다른 지리서들은 행정구역별로 서술했는데 이 책은 생활권, 문화권의 관점에서 주제별로 나눠 설명했다. 마을의 입지를 결정하는 4대 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꼽았다. 여기서 ‘생리’는 물자의 생산 및 유통 환경을 말하는 것으로 경제가 중요하다고 언급한 점이 두드러진다. 살기 좋은 곳으로는 소백산 아래쪽 안동권과 상주권, 지리산 섬진강 유역, 충청도 공주 등이 꼽혔다. 이중환 자신이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소백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쪽에 있는 청화산이었다.

    국학 연구자 안확(1886~1946)이 쓴 ‘조선문명사’는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의 정치사를 다루었다. 부제가 ‘조선정치사’다. 유럽의 선진 문명에서처럼 조선시대에 향회, 촌회 같은 자치제가 발달한 면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수준 높은 여러 저서를 낸 안확은 신채호, 최남선, 이광수 등에 비해 생소한 편인데 앞으로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겠다. 강의를 맡은 류시현 전남대 HK교수는 “안확은 해방 후 근대 학문적 아카데미즘에 속하지 못했기에 그의 조선문화 연구의 성과가 계승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혁명, 사랑, 아나키즘 추구한 박열

    개화기에 의사, 교육자로 활동한 이만규(1889~1978)가 쓴 ‘조선교육사’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실증사학에 따라 교육사를 살핀 책이다. 화랑도 교육을 매우 높이 평가했고 교육 면에서 일제강점기를 민족교육파멸기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경성의학교를 나와 개성에서 개업의로 일했으나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배화여학교 등에서 25년간 교편을 잡았다. ‘조선교육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 정미량 박사는 “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현재 남북한 대부분의 한국교육사 개설서는 이 책을 재인용하는 것만 봐도 고전의 위치에 오른 책”이라 평가했다.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박열(1902~74)은 애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국왕을 테러로 제거하려다 붙잡혔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일본인 판사에게 반말을 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 국왕을 죽이려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에 당황한 판사는 비공개 재판으로 얼른 바꾸었다. 박열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여 년간 일본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8년에 출판한 ‘신조선혁명론’에서 우리 민족에 알맞은 민주주의와 좌우분열을 극복할 통일전선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한 논리였다. 오제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혁명, 사랑, 아나키즘 이 세 가지 단어가 박열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키워드”라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신남철(1907~58?)의 저서 ‘역사철학’은 같은 제목의 다른 책과는 달리 치열한 현실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았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미야케 교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광복 후 서울대 교수가 된 그는 1948년 1월에 이 ‘역사철학’을 펴낸다. 곧이어 5월에는 ‘전환기의 이론’이라는 책을 냈고 6월에는 월북한다. 6·25 때 그는 남한에 내려와 서울시 문화부장 자리에 앉는다. 신남철은 피란을 가지 못한 옛 동료 박종홍 서울대 교수와 조우했는데 북한 체제에 약간 실망한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기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김동석(1913~53?)이 지은 ‘뿌르조아의 인간상’은 1949년 2월에 나온 평론서다. 4월에 재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안회남, 김동리, 이광수, 김광균 등의 작품에 관한 평론을 수록했다. 이광수와 김동리 같은 우파 진영의 작가에 대해 혹평을 퍼부었다. 김동석은 인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뿌르조아의 인간상’을 낸 후 몇 달이 지나 월북한다. 전쟁 때는 인민군 통역장교로 남한에 왔는데 그 후로는 활동상이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전후에 국내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인정받던 백남운(1894~?)은 1949년 2월22일부터 4월7일까지 소련을 방문했다. 북한의 내각교육상 자격으로 갔다. 소련 방문기를 정리한 책이 ‘쏘련인상’이다. 강의 진행자인 이상호 박사는 “이 책을 분석하면 당시 지식인의 최고봉인 백남운의 시각을 통해 북한의 대외인식, 특히 사회주의 대국 소련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인 배성룡(1896~1964)의 ‘농민독본’은 지식인 시각에서 농민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한 책이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는 “이 책은 농민을 각성시켜 스스로 권익을 쟁취하도록 도왔다는 점에서 ‘농민민주주의’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서구 미학사상을 국내에 제대로 소개한 선구자 김태오(1903~76)는 1950년에 ‘미학개론’ 초판을 펴냈다. 문필가, 심리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저자는 독일 학풍에 영향을 받아 심리학적 미학 분야에 천착했다. 강의 진행자였던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한편으로는 지루했지만 당시에 이런 고민을 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북한 학자 홍기문의 ‘조선신화연구’는 우리 고대사의 맨 앞을 차지하는 역사를 정확히 보자는 의도를 담은 책이다. 신화를 역사학적 입장에서 규명한 최초의 시도였기에 부제를 ‘조선사료고증’이라 붙인 듯하다. 홍기문은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의 장남이다.

    대구에서 활동한 이종하(1913~2007)가 쓴 ‘우리 민중의 노동사’는 저자가 88세이던 때인 2001년에 출판됐다. 영남대 교수였던 저자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노동자 단체들이 무상으로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도록 묵묵히 도와주었다. 이 책은 민중에 대한 저자의 사랑을 그득 담았다. 저자의 아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12강이 진행되는 동안 진지하게 참여한 청중 가운데 수십 년 전 저자들과 직접 만난 분들이 있었다. 이들 원로 청중은 강사도 파악하지 못한 저자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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