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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⑭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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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재임기간 내내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서유럽 정치 변화에 영향을 받은 급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차르 체제의 절대 왕정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지그재그로 도망 다니기도 했고, 식당에 늦게 도착해 폭탄 테러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지만, 마차로 날아든 폭탄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짙은 초록색의 샴페인 병에 소형 폭탄을 장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병을 특별 주문한 뒤 그 병에 최고급 샴페인을 담아 마시면서 오늘날 그 유명한 샴페인 ‘크리스털’이 탄생했다.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알렉산드르 2세(Alexandr II Nikolaevich·1818∼1881, 재위기간 1855∼1881)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역대 황제 중에서 표트르 대제 이후 가장 획기적인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재임 기간 내내 반대 진영의 암살 기도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유명한 샴페인 제품 역시 그에 대한 집요한 암살 위협 속에서 탄생한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끈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18년 철저한 반혁명주의자로 유명한 부친 니콜라스 1세(1796~1855, 재위기간 1825~1855)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개혁적 행보에 비해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큰 키에 준수한 용모의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선진국인 서유럽은 물론, 당시로는 드물게 러시아 자국 내를 6개월가량 여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황태자의 신분으로 처음 시베리아를 방문한 인물로 기록됐다. 1841년 23세의 나이에 마리아와 결혼해 6남2녀를 두게 되는데, 이 중 차남이 훗날 그의 왕위 계승자가 되는 알렉산드르 3세다.

1855년 그가 37세가 되는 해의 3월이었다. 아버지 니콜라스 1세가 크림 전쟁의 와중에 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시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게 된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 전쟁에 매달렸다.

크림 전쟁(Crimean war·1853~1856)은 러시아가 1853년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를 주 무대로 오스만튀르크,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었다. 우리에게는 오늘날 ‘백의의 천사’란 별칭으로 잘 알려진 나이팅게일(1820~1910)이 활약한 전쟁으로도 유명하다. 이 전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당시 오스만튀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 성지 관리권을 주장하자, 그리스정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니콜라스 1세가 발끈하면서 시작됐다. 명분은 이러했지만 러시아의 목적은 쇠약한 오스만튀르크 영토로 남하하려는 남하정책 일환이었고, 연합군으로서는 러시아의 이런 팽창 전략을 허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정치·사회개혁 나선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알렉산드르 2세.

그런데 이 전쟁은 처음부터 러시아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 때문에 니콜라스 1세는 전쟁 내내 분노와 실망에 사로잡혀 지냈고, 마침내 러시아의 패색이 완연한 전황 속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황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국정 쇄신을 위해 되도록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는 일련의 외교 노력 끝에 즉위한 지 1년 만인 1856년 3월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오스만튀르크로부터 빼앗은 영토 일부를 양도하고, 흑해에서의 제해권을 포기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강화조약을 맺고 서둘러 전쟁을 끝낸다.



알렉산드르 2세는 그의 부친이 저지른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자마자 곧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획기적인 내정 개혁 작업에 착수한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 그의 개혁 정책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농노해방이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지주 귀족들에게 소속된 농노제가 지속되는 국가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당시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농민들의 불만이 더 고조돼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선제적으로 농노제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콘스탄틴 대공을 위원장으로 하는 ‘농민 생활조건 향상위원회’의 실무 작업을 거쳐, 마침내 1861년 3월 3일 그의 즉위 6년째 되던 해에 농노해방 칙령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훗날 알렉산드르 2세가 ‘해방황제(解放皇帝)’로 불리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폐지 이후에도 일련의 개혁 정책을 지속시켜나갔다. 1864년에는 ‘젬스트보(zemstvo)’로 불리는 지방자치 제도를 도입해 과거 중앙정부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되던 지방행정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다. 이 제도는 처음에는 농촌 지역에만 적용되다가, 1870년에 큰 도시로 확대됐다.

1864년에는 프랑스식 제도에 기반을 둔 사법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법관 임기 보장, 재판 과정 공개 및 간소화, 배심원제 수립 등이 포함됐다.

또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겪은 무기력한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병역제도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1874년에 발표된 국민개병제였다. 이전의 러시아 군대는 억지로 동원된 농노 계급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진 장교들도 정규 사관학교에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여서 제대로 된 군사작전을 펼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했고, 국방 인프라 확충에도 힘썼다. 이런 제도의 개혁에 힘입어 러시아는 훗날 1877년에 벌어진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농노해방과 알래스카 매각

알렉산드르 2세의 집권 시절에 그가 내린 결정 중 주목할 만한 것은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기로 한 것이다. 당시 그는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알래스카 땅을 경쟁국인 영국으로부터 지켜내기 어렵다고 보고 그때 돈으로 70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해방자’이자 ‘자유의 차르(Czar)’는 과감한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과격파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에 대한 암살 기도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1866~1880년 사이 네 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계획 단계에서 그친 암살 기도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암살을 시도한 주체는 서유럽의 정치 변화에 영향을 받은 급진적 성향의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르 2세 집권 이후 과거에 비해 많은 개혁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차르 체제에 입각한 절대 왕정이 지속되는 데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공식적인 첫 암살 시도는 1866년 4월 4일에 발생했는데, 이때 암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생존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전역의 도시에 많은 교회를 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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