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 뚫고 올라서니 구름바다가 산허리에 둘러친다. 바람에 뭉쳤다가 갈라지는 사이사이 동해도 보이고, 산자락도 보이고. 문득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어제와 다르게 차다. 백두대간에 벌써 가을이 찾아온 모양이다. 다람쥐 뛰노는 산꼭대기, 파헤쳐짐에 상처 입고 신음하는 산허리에도.
해안선 절벽이 아름다운 감추사.
이 짤막한 기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백두대간에 무관심한 사람의 눈에는 단순히 대통령의 생각이 관계부처에 의해 뒤집힌 점이 흥미로울 것이다. 하긴 과거 권위주의 시대였다면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 호사가들이 관심을 가질 만도 한 노릇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볼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백두대간은 이미 우리가 보살피고 싶다고 해서 마냥 가슴에 품어둘 수 없는 물건이 된 지 오래다. 집안이 어려워지면 가족 모두가 고생길로 접어드는 것처럼, 외환위기 이후 이 땅에 들이닥친 거대자본의 인수합병(M&A) 바람은 백두대간의 소유 지분마저 바꿔놓았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강원도 강릉과 동해지역에서 오랫동안 석회석 채광산업으로 재미를 본 기업은 한라시멘트와 쌍용양회. 외환위기 직후 유동성 위기를 겪는 와중에 두 회사의 경영권이 프랑스와 일본으로 넘어갔다. 물론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기 위해 국내기업을 적극적으로 외국에 매각했고, 외국기업들도 선뜻 한국의 우량기업에 손을 뻗쳤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석회석 채광을 중단시킨다면, 외국기업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다. 여기에 시멘트산업에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이 들고 강원도 지역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이 중요한 변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次惡)이라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점에서 백두대간 일대의 석회석 채광산업은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지도를 바꾸는 방식으로는 국민적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지난 수년간 거듭된 강원도 산간지역 자연재해에서 알 수 있듯이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 파괴를 넘어 대규모 인명피해를 부른다. 이제부터라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곳을 중심으로 채광하고, 개발지역에서는 반드시 복원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원도의 백두대간은 치유할 길 없는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정동진행 관광열차 안에서
8월13일 밤. 청량리역 대합실은 막바지 피서인파로 배낭을 풀어놓을 틈이 없을 만큼 북적거렸다. 청량리역은 서울역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탈(脫)서울’의 쾌감을 맛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좀처럼 시멘트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청량리에서 떠나는 경춘선과 태백선은 곧바로 자연의 풍광과 만난다. 경춘선은 북한강을 따라 달리며 낭만의 장소를 펼쳐놓고, 태백선은 강원도의 심산유곡과 동해바다의 장엄한 일출을 선물한다. 그래서 추억에 굶주린 사람들은 청량리역에서 흘러간 세월을 더듬고 잊혀진 사람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1990년대 이후 청량리역에서 가장 빨리 매진되는 티켓은 강릉행 밤 기차다. 이것은 전적으로 드라마 ‘모래시계’의 영향인데, 밤 11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모래시계’의 촬영현장인 정동진역에 이르러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도 있다. 특히 플랫폼 바로 옆에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기차와 해변이 어우러지는 절묘한 분위기로 빠져들 수 있다. ‘모래시계’가 방영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포즈를 취한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딸이 위장취업을 했다가 경찰에 쫓겨 도망친 곳이 정동진역 부근의 어촌마을이었고,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오려다 정신이상자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히는 비운의 현장이 바로 정동진역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동진에는 ‘모래시계’의 주인공이 머물던 조용한 어촌마을은 없다.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정동진에는 거대한 투기바람이 불어 이 일대 땅이 대규모로 외지인 손에 넘어갔다. 고기를 잡아서 팔아 먹고 살줄밖에 모르던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됐다. 대신 그 자리엔 대도시 못지않은 유흥단지가 들어섰다. 슬픈 일이다. 개발 자체를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개발의 양상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릉행 열차는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피서객들로 가득 찬 열차에서 소음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좌석번호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이에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객차 안은 시장바닥처럼 변했다. 한바탕 실랑이가 끝나자 이번엔 단체관광객들이 술잔을 돌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예전에는 의자를 돌려놓고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요즘엔 철도청 공무원들의 강력한 단속으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필자처럼 주변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잠을 잘 잔다면 몰라도, 잠자리에 민감한 사람은 강릉행 밤 기차가 고달플 수도 있겠다.
구름으로 뒤덮인 두타산
8월14일 새벽 3시. 기차는 강원도 정선 땅을 지나고 있다. 강원도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씨가 절절하게 배어난다는 정선아리랑의 고향은 증산역에서 왼편으로 꺾어지고, 기차는 이곳에서 곧장 달려 사북과 고한을 지나 태백으로 향한다. 사북과 고한의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매스컴에 무수히 오르내린 강원랜드의 정선카지노가 있다. 석탄산업의 사양화에 대비하고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꾀한다며 강원도 땅에 들어선 정선카지노. 과연 정선카지노는 설립목적에 충실하고 있을까. 백두대간에서 만난 강원도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했다.
새벽 4시, 태백이다. 1981년 삼척시 장성읍과 황지읍을 통합해서 만들어진 태백시는 한때 전국 석탄생산량의 30%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급격하게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50여곳에 달하던 탄광도 하나둘씩 문을 닫아 겨우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탄광도시 태백의 옛 모습을 살펴보려면 태백산 입구 당골광장의 석탄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택시를 타고 댓재로 향했다. 삼척시 하장면의 댓재에 이르자 실비가 뿌리고 있었다. 랜턴을 비추며 천천히 대간으로 붙자 산길이 무척 미끄러웠다. 아마도 밤새 비가 내렸나보다. 아침 일찍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다 보면 갈증은 덜하지만 빨리 지치고 체온관리에 애를 먹는다. 그래서 일단은 땀이 날 때까지 빨리 걷는 게 좋다. 다행히도 두타산(1353m)까지는 넓은 길이 나 있어 내칠 수 있었다.
두타산(頭陀山)의 ‘頭陀’는 불가에서 ‘모든 걸림으로부터 벗어나 산천을 떠도는 스님’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두타산을 걸으며 오른편의 무릉계곡을 굽어보면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고려 충렬왕 때의 이승휴는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자 이곳에 은거하며 스스로 두타산거사라 이름 지었고, 조선시대의 서예가 양사언을 비롯, 수많은 문인이 무릉계곡에 들어와 자연과 벗하며 호방한 문장을 남겼다.
두타산 정상은 온통 구름 천지다. 정상 표지석 밑에서 다람쥐 두 마리가 뛰놀고 있었다. 필자는 한입 베어 문 사과를 다람쥐에게 던져주고 주변을 둘러보다 수풀 사이로 눈길을 끄는 표지판을 보았다. ‘뉴밀레니엄을 맞아 1000명이 모여 1000년을 산다는 주목 1000그루를 강원도 지역의 1000m가 넘는 봉우리에 심었다’는 기록이다. 밀레니엄 이벤트 치고는 꽤 의미 있는 작업이라 여기며 나무가 잘 자라기를 바랐다.
두타산은 삼척과 동해의 경계지점이다.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에는 청옥산과 두타산의 지명이 바뀌었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두타산에서 청옥산(1403m)으로 가는 도중 비구름이 몰려왔다. 쏟아붓다가 잠시 쉬고 다시 쏟아붓는 게릴라성 호우였다. 오른쪽 무릉계곡 쪽으로 탈출할까 생각했지만, 빗길에 계곡으로 내려서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대간을 걷는 게 낫겠다 싶어 속도를 높였다.
우중산행 뒤의 환희와 슬픔
빗줄기가 굵어졌다. 청옥산에서 망군대를 지나 고적대(1353m)로 올라서는 동안 부서진 바위부스러기가 빗물에 흘러내려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바위부스러기를 내려다보니 깎아지른 절벽이다. 나무줄기와 밧줄에 의지해 가까스로 고적대 정상에 올라서자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혔다. 불과 10분 새에 흰 구름은 푸른 신록의 아래편으로 가라앉았다. 필자는 고적대 바위에 기대어 구름을 뚫고 솟구친 백두대간의 자태를 감상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멀리 동해바다의 풍광도 바라다보였다.
고적대를 떠나기 무섭게 또다시 빗줄기가 들이닥쳤다. 갈미봉(1260m)을 지나 이기령으로 가는 동안에는 지도의 코스와 실제 길이 달라 애를 먹었다. 이기령부터 상월산(980m)까지는 완만한 오르막. 필자는 이 구간에서 체력이 떨어져 곤욕을 치렀다. 장시간의 우중산행으로 힘이 빠진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릎 통증까지 재발했다. 한 걸음씩 발을 옮길 때마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리를 주무르는데 천만다행으로 비가 그쳤다.
비가 갠 백두대간의 동쪽 풍경. 운해가 아름답다
832m봉을 넘어서니 사방에서 돌 캐는 소리가 요란하다. 백두대간의 가장 큰 상처, 한라시멘트의 자병산(872m) 채석장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백두대간에서 자병산은 사라졌다. 단지 대간 마루금에서 자병산이 있던 자리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벌거벗고 신음하는. 동해와 정선을 연결하는 백복령에 이를 때까지 산을 찢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백복령은 행정구역상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의 경계선이다.
길을 만드는 산꾼, 박 선생
백복령-삽당령 구간은 동해에 사는 박 선생과 함께하기로 했다. 박 선생께선 필자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읽고 동해지역의 구간을 함께 탔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필자는 박 선생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전화 한 통화만으로도 이분이 대단한 내공을 다진 산꾼임을 알아차렸다. 필자가 태어나던 1969년부터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녔다는 그는 스스로 평한 것처럼 ‘산 속에서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8월20일 밤. 동해바다로 가는 기차표는 이미 매진됐다. 서둘러 강남터미널로 달려갔지만 고속버스 차표도 모두 팔렸다. 필자는 할 수 없이 늦깎이 피서인파를 태운 밴 승용차에 합승했다. 차가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마치 전자오락기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강남터미널을 떠난 지 불과 3시간 만에 동해시에 도착했다. 박 선생과 만나려면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근방의 망상해수욕장을 찾았다. 택시기사에게 “올해는 날씨가 더워서 해수욕장 경기가 좋았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자, 그는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음식은 서울의 대형마트에서 다 사오고, 해수욕장에는 쓰레기만 버리고 갑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태풍이 불어닥친 해수욕장은 폐허처럼 망가져 있었다. 산에서 떠내려온 나무뿌리들이 백사장을 뒤덮고, 피서객들이 버린 쓰레기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불꽃놀이를 즐기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수선한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닷가에 이르자 막힌 가슴이 확 트였다. 동해바다는 언제 봐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위엄이 있다. 눈을 감고 파도소리에 취했다.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천천히 눈을 뜨니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보였다. 배가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동이 틀 모양이다.
다시 택시를 타고 동해터미널로 나와 박 선생을 만났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북평을 거쳐 백복령 고개로 향했다. 버스 뒤편엔 할머니 여러 분이 앉았는데 고개 너머 감자밭에 김매러 간다고 했다.
백복령에 내리자 볼썽사나운 자병산 줄기가 드러났다. 상처가 너무 커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은 자병산 일대를 지나면서 종종 한라시멘트 관계자들에게 화풀이를 하는데, 환경파괴의 책임을 그들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다. 새만금 사업이나 영월 동강의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보존과 개발이다.
박 선생은 쌍용양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비록 쌍용양회 채석장이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다소 비켜나 있다고는 하지만 환경파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자병산 일대를 지나면서 박 선생의 생각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필자의 예상대로 그는 자연에 대해 겸손한 사람이었다. “개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뒤처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그것은 경제논리 이전에 예의의 문제다.”
백복령에서 생계령까지는 쉬지 않고 걸었다. 도중에 철탑과 함몰지를 무수히 지나쳤다. 백두대간이 마구잡이로 훼손된 곳을 되도록 빨리 지나가고 싶었다. 뒤따라오던 박 선생은 궂은 날씨를 원망했다. 맑은 날이면 이 구간에서 동해바다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데, 짙은 안개와 구름 때문에 산세를 제대로 살필 수 없었던 탓이다. 필자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대간의 왼편으로 넓게 분포한 임계지역의 카르스트지형이 안개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고적대 가는 길. 깎아지른 절벽과 고사목이 조화를 이룬다
생계령에서 석병산(1055m)까지는 900m 안팎의 봉우리를 다섯 개쯤 넘어야 한다. 경사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지만 등산로에 잡목이 많아 다소 거추장스럽다. 석병산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이라는 뜻으로 날씨가 좋으면 정상에서 강릉시 왕산면 일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석병산 정상에 홀로 바짝 붙어 서 있는 소나무의 품이 제법 의젓해 보였다.
박 선생은 곧 백두대간 종주에 나설 예정이라고 했다. 모르긴 해도 그의 종주는 필자보다 품위 있고 아기자기할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박 선생이 야생화에 관한 책을 구입해서 탐독했다는 점에 관심이 쏠렸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대간을 걷는 동안 나무와 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으로는 보았으되 머리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박 선생은 뭔가 다를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쉬는 동안 삽당령 쪽에서 단체 등산객 수십 명이 올라왔다.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석병산을 떠났다.
석병산부터 삽당령까지는 기분 좋게 산책하며 걸을 수 있는 내리막이다. 도중에 두리봉(1033m)이 있지만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다. 박 선생은 이 구간에서 다리에 통증이 온다고 했다. 필자가 “대간을 종주하려면 몸을 좀 만드셔야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벌써 이럴 나이가 아닌데….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모양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박 선생은 벌써 페트병 2개 분량의 물을 마셨다.
삽당령은 강릉시 왕산면 지역으로 35번 도로가 지난다. 필자는 지난 여름 백두대간 종주자로부터 삽당령의 묵은 김치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삽당령에서 매점을 하는 할머니가 김치를 3년 동안 땅에 묻어두었다가 라면의 밑반찬으로 내놓는데 그 맛이 일품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직접 매점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묵은 김치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김치는 전병 속에 넣어요”라고 답했다. 김치를 맛보려면 전병을 시키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옥수수막걸리 안주로 전병을 주문했다. 메밀을 갈아서 넓적하게 부친 뒤 묵은 갓김치를 넣고 둘둘 말아서 썰어낸 음식이었다. 메밀의 구수함과 갓김치의 시큼함이 입안에서 적절하게 어울렸다. 이런 것을 두고 음식궁합이 맞는다고 하는 모양이다.
삽당령엔 시인이 산다
박 선생이 먼저 술을 따랐다. 잔을 비운 뒤에는 필자가 따랐다. 박 선생은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집안 어른들이 겪은 비극을 소개했다. 막걸리에 취한 것일까, 박 선생의 이야기에 취한 것일까. 취기가 적당히 오를 무렵 갑자기 할머니가 연신 음식을 만들어내는 매점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우선 좁은 공간의 벽을 가득 메운 시구(詩句)가 눈길을 끌었다. 문구가 예사롭지 않아 할머니에게 사연을 물으니 아들의 글이라고 했다. 필자는 글을 쓴 당사자를 만나고 싶었으나 들일을 나갔다고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그네는 시구를 통해 농부의 심정을 헤아릴 뿐이다.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알 전부이다. 나는 손에 잔을 들고 그대 바라보며 한숨짓노라’.
우리는 삽당령에 놀러온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타고 강릉으로 빠져나왔다. 삽당령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지난 수년간 태풍피해를 심하게 겪은 곳이다. 특히 2002년의 루사와 2003년의 매기가 입힌 상처는 엄청났다. 2002년에는 동막댐과 장현댐이 터져 강릉 시내가 물바다를 이뤘으며, 2003년에는 삽당령 근방의 민가 상당수가 송두리째 흙더미에 매몰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8월29일. 다섯 살 된 아들과 함께 동해시로 갔다. 박 선생과 함께 무릉계곡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武陵’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무릉계곡은 예로부터 신선들이 노니는 곳으로 불렸다. 실제로 무릉계곡의 골짜기에는 곳곳에 기암괴석과 폭포가 자리잡고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됐지만, 아직까지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 있을 정도다. 박 선생은 무릉계곡으로 오르는 동안 이따금씩 필자에게 산 쪽을 가리키며 “길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필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 바로 자신이 만든 길이다.
용추폭포.
애국가 배경화면 된 감추사 해변
신선봉을 지나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는 다소 가파르다. 70도 가까운 철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들녀석은 꾀를 부렸다. 끝까지 내려가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달래서 겨우 발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관음사 주변은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곳에서 건너편 능선을 바라보면 무릉계곡에서도 가장 신비롭다는 신성12폭이 눈에 들어온다.
관음사 갈림길에서 30여분 걸려 내려서면 삼화사다.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1979년 본래 삼화사가 있던 자리에 쌍용양회 시멘트공장이 들어서면서, 천년고찰은 무릉계곡 입구로 옮겨왔다.
삼화사 아래쪽의 금란정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향교가 폐강되자 선비들은 이곳에 모여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정각을 세우고자 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당시 뜻을 모았던 선비들의 후손이 정각을 세우고 해마다 봄·가을에 시회(詩會)를 열고 있다.
금란정 아래쪽은 석장암동으로 불리는 무릉반석이다. 이곳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너럭바위가 무려 1500평에 달한다. 바위 위에는 갖가지 문자가 음각돼 있어 흥미를 더해준다.
석장암동에서 아들녀석과 물놀이를 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감추사로 향했다. 예전엔 이곳으로 감로수가 흘러들었다고 전해지는데, 해안 쪽으로 여러 개의 도로가 뚫리면서 물길도 끊겼다고 한다. 하지만 감추사 아래편의 한적한 해변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의 풍광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좌우로 절벽이 막아서고 푸른 파도가 쉼 없이 해변으로 밀려온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모 방송사는 애국가 중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배경화면으로 감추사 해변을 방영한 일도 있다.
감추사 해변에서 박 선생과 멍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인적이 드물어 더욱 마음에 드는 곳이지만, 최근엔 이곳도 입소문이 났던지 지난 여름엔 외지인들로 꽤 북적거렸다고 한다. 술자리를 파하고 박 선생께 작별인사를 할 무렵 아들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바닥만한 청거북을 잡아왔다. 박 선생은 단번에 거북이 죽었음을 알아보고, “민물에 사는 어종인데, 누군가 이곳에 방생을 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아들녀석은 그것도 모르고 거북을 살려주겠다며 해변으로 갔다.
방생의 취지는 생명존중에 있다. 하지만 최근의 방생 행태를 보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국 어종을 들여오거나, 민물고기를 바다에 풀어놓는 것이 단적인 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벤트가 아닌 생활 속의 방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