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드니 가을나그네 바빠진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11-25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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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간 마루 북으로 거슬러 오르다보니 남보다 계절을 앞서 만난다. 가을을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저만치서 기다린다. 설악산 어귀 나무장승 틈 사이로 백두대간 완주를 목전에 두고 마음의 병을 앓았던 이의 글귀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진부령 가까워오니 산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드니 가을나그네 바빠진다

    낙산사에서 바라본 일출.

    강원도 평창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그곳은 본래 화전민들이 머물던 땅이다. 시대의 풍파에 쫓긴 백성들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정착했던 땅. 강원도 내륙의 백두대간은 바로 그곳을 지나간다.

    비록 강원도 일대의 화전민들은 1973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척박한 땅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온 민초들의 잔향은 여전하다. 산이 끝나고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마다 옥수수와 감자밭이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구황작물이라 불렀으나, 화전민들에게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이었다.

    산에서 잘 자라는 작물은 제한돼 있다. 토양이 척박하고 일조량이 모자란 탓이다. 이런 현상은 겨울이 긴 북쪽으로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때문에 화전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백두대간을 타고 조금씩 북상하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걸음을 멈추고 촌락을 형성했다. 옛 문헌에 따르면 현재의 오대산국립공원 부근이 한 차례 숨을 골랐던 곳이다. 강원도 강릉시와 홍천군 그리고 평창군에 둘러싸인 298.5㎢의 오대산. 그곳은 한때 화전민들의 생명을 지켜준 젖줄이었으나, 요즘은 연간 100만에 달하는 탐방객이 찾아드는 국민관광지로 변모했다.

    단풍에 미친 가을나그네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드니 가을나그네 바빠진다
    10월2일 토요일 오후.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행 시외버스를 탔다. 강릉까지 빨리 도착하려면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고속 직행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지만, 도중에 영동고속도로 선상에서 내리려면 시외버스가 오히려 편리하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지방도시를 두루 거쳐 지나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낭만적이다. 특히 진부 장평을 거쳐 횡계로 빠지는 버스에 올라타면 강원도 내륙 특유의 산촌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서울에서 강원도로 흘러가는 차량이 줄을 이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려면 아직도 2주쯤 더 기다려야 하지만, 설악산 깊은 산골은 벌써부터 불을 뿜고 있었다. 발 빠른 산꾼들은 이런 그림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등산객들로 뒤덮인 단풍관광보다도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미완의 풍경에서 더 큰 감동을 맛본다.

    그러고 보면 산을 타는 것과 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얼마 전 오대산 노인봉에서 만난 어떤 나그네는 단풍의 전조를 따라 남하한 지 벌써 보름째라고 했다. 그는 1년 동안의 휴가를 한데 몰아서 가을에만 산을 찾는 단풍마니아다. 남들이 단풍을 기다릴 때 그는 산속을 달리고, 남들이 단풍을 찾아 몰려올 때 그의 산행은 막을 내린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이 들면 가을나그네가 움직입니다.” 그가 오대산을 떠나 두타산으로 향하면서 던진 말이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평창군 진부면에 내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시가지 상점마다 일찌감치 불을 꺼 초겨울 분위기다. 요기를 할 만한 곳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막 문을 닫으려는 식당 아주머니를 채근해 다음날 산행에 가져갈 김밥을 주문했다. 순식간에 김밥 네 줄을 말아준 아주머니는 “이런 날씨에도 산에 가느냐. 일기예보를 보니까 내일은 얼음이 언다는데…”라며 길손의 안전을 걱정했다. 10월 초에 얼음이라. 역시 남한에서 겨울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동네답다.

    진부에서 택시를 타고 10여분 달리면 오대산 월정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여기서 오른쪽 방향, 즉 진고개 쪽으로 들어가서 동대산으로 붙는다.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비로봉 밑에 적멸보궁을 짓고 2년 뒤에 창건한 고찰로, 역시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상원사와 더불어 오대산 자락을 대표하는 불교유산이다. 흔히 오대산에 들어선 사람들은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 숲길에서 한 차례 마음을 씻고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는다고 한다. 특히 8km나 이어지는 월정사~상원사 코스는 경사가 거의 없어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다.

    한편 오대산 주능선에서 백두대간을 타려면 상원사에서 1시간 남짓 올라선 뒤 동대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를 만나야 한다. 결국 백두대간은 오대산 주능선을 빼놓고 동쪽 줄기만 걸치고 지나가는 셈이다.

    택시기사는 자신이 잘 아는 민박집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등산객들로 가득했다. 할 수 없이 길을 돌아 내려오다 예전에 민박집을 운영했다는 농장으로 찾아가니 비닐하우스 채소를 재배하는 50대 부부가 필자를 맞았다. 요즘은 민박 손님을 받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들을 설득해 타향으로 유학을 떠난 아들 방에 짐을 풀었다. 일단 손님이 들자 집주인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출출한 속을 달래라며 과일과 과자를 차려내고 다음날 아침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주겠다며 필자의 걱정까지 덜어주었다. 역시 산골마을의 넉넉한 인심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니 별빛이 장관이다. 하늘 가득 촘촘히 박힌 별들의 행렬이 산 너머로 이어지고, 하늘과 산이 만나는 공지선을 따라 오대산의 시원스런 산세가 부드러운 실루엣을 연출한다. 별자리를 살피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옥수수 밭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콧날을 스쳐 콧속 깊숙이 빨려든다. 바람에 취해 한참을 서성거리는데 집주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한다. 안방에서는 TV뉴스 일기예보가 흘러나온다. ‘내일 아침에는 강원도 전역에 서리가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동대산에서 바라본 노인봉

    10월3일 새벽. 주인집 아주머니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자 한기가 느껴졌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밖으로 나오니 밤사이 내린 서리에 사방이 하얗다. 주인집 아저씨는 하룻밤 묵고 가는 나그네를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채소를 운반하는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진고개까지는 10여분 거리.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저씨는 백두대간에 대해 조목조목 물었다. 그는 백두대간 밑에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집 앞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줄은 몰랐다고 한다.

    진고개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동대산으로 향했다. 날이 밝으려면 30분 남짓 기다려야 하지만 이 구간의 등산로는 어둠 속에서도 쉽게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 몸이 채 풀리기도 전에 1km가 넘는 긴 오르막을 통과하자니 온몸이 뻐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줄기에 땀이 흥건해질 무렵 동쪽 노인봉 너머에서 붉은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오대산 마니아들이 감탄해마지 않는 노인봉 일출이 시작된 것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감상했다. 새벽공기에 묻어나는 산내음이 더없이 향긋하다.

    동대산(1434m) 정상에 이르자 먼저 출발한 등산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첫눈에 단단한 내공이 느껴질 만큼 빈틈이 보이지 않는 산꾼이다. 동대산. 말 그대로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가운데 동쪽에 우뚝 솟은 산이다. 오대산은 본래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다른 이름으로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공부했던 곳이다. 그가 신라로 돌아와 한반도 전역을 순례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 청량산과 매우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 바로 오대산이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문수보살이 1만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오대산에 살고 있다고 믿어왔고, 그런 연유로 고려시대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오대산은 불법이 가장 흥할 곳”이라고 적었다.

    동대산에서 두로봉(1421m)으로 향하면서 아침 햇살이 산 주위로 퍼져가는 광경을 감상했다. 처음에는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스며들던 기운이 어느새 나무를 붉게 물들이고 숲 전체를 태웠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것이 마치 비취색 바다가 펼쳐진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어찌 보면 물 항아리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하고, 달리 보면 오대산 자락이 바다에 빠져 있는 모양새다. 얼마나 오랫동안 머리를 젖히고 걸었던지 고개가 아플 지경이다. 배낭을 풀어놓고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필자의 시선은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산에 미친 60대 노인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이 갈리는 두로봉에서 신배령으로 가려면 거추장스런 잡목지대를 두 번 통과해야 한다. 이 구간의 나무들은 벌써 단풍철을 지나 초겨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한 부모 밑에 여러 형제가 있듯이, 같은 산이지만 살아가는 양태는 골짜기마다 제각각이다. 나뭇잎들은 이미 바짝 말라 쭈글쭈글해졌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도 수두룩하다. 낙엽이 수북한 길은 딱딱한 길보다 걷기에 편하지만 이따금씩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바로 낙엽 밑에 숨어 있는 돌멩이 때문이다. 잘못 디디면 발목이 삘 수 있으므로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드니 가을나그네 바빠진다

    오대산 계곡이 가을단풍으로 붉게 물들었다.

    쌓인 낙엽을 헤치면서 천천히 걷다보니 야릇한 냄새가 콧등을 자극한다. 바로 은행 껍질이 풍기는 비릿한 향내다. 은행을 수확해본 사람은 안다. 은행 껍질을 벗기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마침내 신배령이다.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오대산 국립공원과 이별하고 설악산을 향해 달린다. 신배령에서부터 대간 마루금은 굴곡이 심한 능선을 이룬다. 강릉시와 양양군의 경계지점인 1210m봉에서 왼편으로 90도 틀었다가는 만월봉(1280m)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휘어져 꿈틀댄다. 이 구간의 백미는 역시 응복산(1359m). 이곳에서는 서쪽의 홍천과 동쪽의 양양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응복산에서 다리를 두드리며 쉬는 사이 이른 아침 동대산에서 만났던 산꾼이 도착했다. 그도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백두대간을 타기 시작해 혼자서 종주하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또 한 명의 산꾼이 나타났다. 3년6개월 일정으로 길을 떠났다는 이 60대 노인은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힘이 있을 때 남한의 높은 산들을 모두 오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집 떠난 지 벌써 70일. 자동차에서 먹고 자며 산만 찾아다니는 이 노인을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오대산에서 만난 어느 산꾼의 말이 떠올랐다.

    “산에 미치면 아무것도 안보인답니다.”

    응복산에서 마늘봉(1126m)과 약수산(1306m)을 지나 구룡령(1013m)으로 가는 길은 다소 굴곡이 심하다. 특히 마늘봉에서 시작되는 긴 오르막에서 어지간한 사람은 다리가 풀리게 마련이다. 필자가 걸어가는 동안에도 더 이상 못가겠다고 응석을 부리는 어린이와 아예 나무 밑에 드러누운 청년을 여럿 봤다. 또 어떤 중년 부인은 “어차피 못갈 길이면 구경이라도 하겠다”며 나무 위를 오르기도 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 조금만 더 땀을 흘리면 약수산의 시원한 조망이 기다리고 있다. 약수봉에 거의 다다를 지점에 북쪽으로 설악산 능선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산꾼들이 너무 힘들다 보니 이곳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곤 한다. 필자는 이곳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악산 구경을 하라고 귀띔했다. 필자의 권유에 이곳에 들른 사람들은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남설악의 관문 한계령에서 구름 속에 살짝 가려진 대청봉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남녘 백두대간의 최북단 능선을 감상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명소다.

    ‘이승복’이라는 이름의 상처

    약수산에서 구룡령까지는 급한 내리막으로, 앞서 오르막에서 진을 뺀 산꾼이라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비가 내린 뒤에는 곳곳에 토사가 흘러내려 미끄러운 곳이 적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사가 심한 곳마다 나무계단이 놓여져 있는 점. 필자가 이곳을 지날 때도 일꾼 10여명이 등산로를 보수하고 있었다.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통나무를 들어올릴 때마다 경쾌한 구령이 울려 퍼졌다. 쉴새없이 작업장을 통과하는 등산객들이 귀찮을 법도 한데, 짜증 한마디 없이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구룡령에 도착하자 두로봉에서 인사를 나누고 먼저 출발한 아저씨가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차를 불렀는데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함께 타고 가자고 했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려 했던 필자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선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필자는 ‘소나무와 샘’이라는 민박집을 운영하는 아주머니의 차에 동승해 오대산 자락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설 때마다 지명에 얽힌 유래와 산세의 특징을 설명했다. 가만히 듣다 보니 그 깊이와 구수한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후일 기회가 온다면 꼭 ‘소나무와 샘’에 들러야겠다고 다짐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보니 자동차는 아주 낯익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바로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의 이승복 기념관이다. 현재의 기념관 자리에서 동북쪽으로 4.6km 떨어진 곳이 바로 1968년 이승복 일가가 북한 무장공비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절규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사회 반공교육의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해 왔다. 또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 사건의 실체를 둘러싸고 ‘조선일보’와 일부 시민단체가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이 사건을 최초로 외부에 알린 이승복의 친형을 장시간 인터뷰한 일이 있다. 비록 업무였다지만, 혈육의 죽음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에 대해 캐물은 것은 돌이켜 생각해도 괴로운 기억이다. 분단 반세기를 얼룩지게 만든 비극의 역사가 어디 이뿐일까마는, 이승복 사건의 사회적 의미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그때마다 우리 사회가 홍역을 치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필자의 공세적 인터뷰에 고통스럽게 응해준 이모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10월23일 새벽. 양양시 낙산해수욕장을 거닐다가 의상대로 향했다. 의상대는 본래 신라의 의상스님이 도를 닦은 곳인데, 후세 사람들에게는 일출이 아름다운 장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출말고도 의상대에서 놓쳐서는 안 될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바라다보이는 홍련암이다. 홍련암에 가면 신발을 벗고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예를 표한 뒤 마루를 유심히 살필 것을 권한다. 법당의 중간쯤에 조그마한 뚜껑이 있는데 이것을 열면 암자 밑으로 바닷물이 들이치는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불가의 전설에 따르면 의상스님은 홍련암에서 관음보살을 보기 위해 기도를 드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닷물에 투신하려 했다. 바로 이때 바닷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며 “산 위로 수백 걸음을 올라가면 대나무 두 그루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관음보살의 말대로 의상스님은 대나무 두 그루가 심어진 곳을 찾아 절을 세웠다. 그곳이 바로 현재의 낙산사 원통보전이고, 불자들은 그때부터 홍련암을 관음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낙산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높이 6m에 달하는 해수관음상이다. 이 화강암 불상은 962년에 세워져 천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켜왔는데, 이곳에서 굽어보는 동해바다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이밖에도 낙산사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데, 낙산사가 빛나는 건 가람이 숲과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경내를 그냥 걷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디 한군데 모난 구석이 없는 도량. 누가 뭐라 해도 낙산사는 오랜 시간 마음을 의지해 볼 만한 곳이다.

    오전 8시 양양터미널로 이동해 동해시에서 올라온 박 선생을 만났다. 백복령-삽당령 구간을 함께 탄 이후 2개월 만의 해후다. 양양에서 구룡령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1대뿐이어서 아침 차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한다. 구룡령은 그 이름만큼이나 길고도 야무진 고개다. 단풍은 벌써 오대산을 넘어 소백산까지 내려갔음에도, 구룡령 자락은 여전히 절정의 색채를 뽐내고 있다. 이 때문에 차안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던 필자는 연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구룡령 위로는 홍천군 내면과 양양군 서면을 연결하는 56번 도로가 지난다. 이 도로는 비교적 최근에 뚫렸는데 주변에 약수터와 자연휴양림이 많아 여름철 피서지로 주목받고 있다. 구룡령 동쪽의 미천골 불바라기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고, 갈천약수는 광물이 다량 함유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구룡령에서 인제 방향으로는 삼봉약수와 방동약수 등이 유명하다.

    구룡령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쯤 지났을까. 우리는 홍천과 인제가 갈라지는 갈전곡봉(1204m)에서 길을 잘못 들어 2시간이나 헛걸음을 했다. 결국 방태산 휴양림과 연결되는 가칠봉에 이르러서야 지도를 거꾸로 읽었음을 확인하고 길을 되돌아 나왔다. 필자는 초장부터 괜한 고생을 하게 된 박 선생께 미안한 마음을 표했는데, 박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덕분에 가칠봉도 구경했잖아요. 다음엔 방태산에서 이쪽으로 한번 올라와야겠습니다”며 넉넉하게 받아주셨다.

    시간을 따져보니 야간산행이 불가피해 보였다.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고자 속도를 냈으나, 2시간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리는 야간산행을 감수하기로 했다. 일단 마음의 부담을 벗어버리자 산세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956m봉을 지나 1시간 남짓 이어진 단풍군락지에서는 노을빛에 물드는 늦가을의 풍경에 한껏 취할 수 있었다.

    ‘소나무와 샘’ 민박집과 행복론

    해는 순식간에 넘어갔다. 단풍잎은 붉은색에서 고동색으로 다시 검정색으로 시시각각 바뀌었다. 이제 등산로를 희미하게나마 구분해 주는 것은 달빛뿐이다. 처음엔 랜턴 없이 달빛을 따라 걷는 것도 꽤나 운치 있었으나 차츰 기온이 내려가자 빠른 속도로 피로가 몰려왔다. 조급한 마음에 조침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민박집 아주머니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멀리 쇠나들이 마을과 바람불이 야영장 쪽으로 길게 늘어선 불빛이었다. 그것은 오늘의 목적지인 조침령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반가운 신호였다.

    ‘소나무와 샘’ 민박집 아주머니는 조침령에서 30분이 넘게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필자가 조침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민박집에 들지 않고 1시간 이상 떨어진 ‘소나무와 샘’을 숙소로 택한 것도 바로 아주머니의 남다른 인심 때문이었다. 도시의 삶을 버리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정착한 그의 민박집에는 오랜 단골이 많다고 한다. 한번 ‘소나무와 샘’에 묵은 사람들은 이곳의 묘한 매력에 끌려 다시금 찾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필자는 아주머니의 얘기 속에서 그 이유를 넌지시 짐작했다.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은 제철 나물을 뜯어서 반찬을 만들고,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드시고…’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드니 가을나그네 바빠진다

    점봉산에서 바라본 설악산 주능선.

    깊은 밤 박 선생이 먼저 잠을 청하고 필자는 마루에서 탈이 나기 시작한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마침 ‘소나무와 샘’에 투숙한 지인들과 어울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제법 심각해 보이는 대화가 오가다가도 금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둥그렇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익숙한 시구가 적힌 액자가 보였다. 이 상황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조지훈 ‘행복론’이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혼자서 들여다보며 가만히 웃음짓는 것.’

    민박집 아주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장작보일러에 불을 지피고 우리를 위해 아침상을 차렸다. 가는 길에 먹으라고 주먹김밥과 오이까지 챙겨주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산행을 시작하는 조침령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해가 뜨기 직전의 구룡령은 어제의 아침풍경과는 또 다른 묘미를 발산했다. 56번 도로에서 조침령으로 접어드는 길은 돌멩이가 깔린 비포장도로라서 백두대간을 타는 산꾼들이나 이따금씩 드나들 뿐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이곳에도 도로포장을 위한 지반 다지기가 시작됐고 조침령터널이 뚫렸다. 그간의 수많은 사례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단풍철에 호젓하게 조침령을 드나드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 될 듯하다.

    조침령에서 아주머니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밤새 다리가 부어올라 어찌 걸을까 싶었으나 막상 걸음을 내치자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산에서는 가끔씩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축구선수가 응급치료만 받고 운동장에 들어가 펄펄 나는 격이다.

    1시간쯤 걸어가자 왼편으로 진동리 양수발전소가 보였다. 이곳은 한국전력이 환경단체와 지역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5271억원을 들여 두 개의 댐을 건설중인 현장이다. 환경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상부댐이 들어설 인제군 기린면 지역에는 하늘다람쥐 수달 산양 등 30여종의 천연기념물이 자라고 있으며, 하부댐 건설 예정지인 양양군 서면의 후천은 남대천의 지류로서 산천어와 은어가 사는 1급수 하천이다. 현 상태에서 진동리 양수발전소가 향후 강원도 내륙지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강원도에서도 환경의 보고라 할 이 지역이 발전소 때문에 파괴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침령에서 북암령으로 가는 길은 멀리 푸른 동해바다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다. 여름철에 이곳에서 야영하면 밤바다를 수놓은 불빛을 감상할 수 있고, 겨울철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항구로 돌아가는 이국적 풍경에 빠져들 수 있다.

    북암령을 지나서 단목령으로 가는 길은 앞이 훤히 트인 능선이다. 표고차도 높지 않아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대간 마루금에 북암령 표지판이 없기 때문에 독도에 애를 먹을 수도 있으나, 멀리 우뚝 솟은 점봉산(1424m)을 중심으로 산세를 파악하면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청산에 홀로 가는 나그네

    단목령부터는 산 아래쪽으로 남설악의 길목인 오색약수터가 눈에 들어온다. 바야흐로 설악산의 초입에 들어선 셈이다. 단목령에는 ‘백두대장군 백두여장군’이라 쓰인 나무장승이 서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 틈 사이로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써 놓은 다양한 문구가 보인다. 이번에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문구는 다소 특이하다. 아마도 문구를 쓴 사람은 백두대간 완주를 목전에 두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듯하다.

    ‘진부령 가까워오니 산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단목령부터 점봉산까지는 기나긴 오르막이다. 이 구간에서 필자는 두 사람의 백두대간 종주자를 만났다. 그들도 필자와 박 선생처럼 산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는 백두대간 코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은 키보다 높은 배낭을 짊어지고도 필자보다 빠르게 걷는다. 그가 바로 길이 애매한 지점마다 ‘청산에 홀로 가는 나그네’라는 표지를 매단 사람이었다. 노란 리본에 초록색 글씨. 필자는 지난 여름 태백산을 지나면서 그 표지를 처음 보았는데, 설악산에 이르러 주인공을 직접 만난 것이다.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갈림길마다 리본을 다는 나그네라니….

    점봉산은 남설악의 절경을 굽어보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다. 멀리 설악산을 바라보면 귓때기청봉부터 끝청 중청 대청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기암절벽들이 산행의 피로를 너끈하게 풀어준다. 우뚝 솟은 바위 사이로 가는고래골, 십이담계곡, 흘림골이 차례로 늘어서 있고, 절벽이 끝나는 지점마다 등선폭포, 십이폭포, 용소폭포가 떨어진다. 또한 점봉산 서편으로는 멀리 곰배령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아늑하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남설악의 진수를 아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다.

    “이 바위 두고 못가겠습니다”

    점봉산에서 망대암산(1236m)을 거쳐 한계령(1003.6m)으로 내려서는 코스는 다소 험하다. 도중에 아찔한 암릉이 두세 군데 있어서 악천후나 해질 무렵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철계단과 밧줄이 설치돼 있었으나, 설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측에서 통제구간으로 지정한 뒤 모두 철거했다. 때문에 원칙적으로 이곳을 통과하려면 사전에 공원측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어지간한 등산객들은 망대암산을 지나 십이담계곡 쪽으로 빠져나간다. 망대암산은 예전에 도적들이 망을 본 곳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고, 십이담계곡은 오래 전 주전골로 불렸는데 주전골은 위조지폐범들이 숨어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지명에 얽힌 이런 사연을 더듬어보면 이 지역이 꽤나 험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계곡의 절경을 마다하고 암릉으로 향한 사람은 모두 4명. 앞서 가던 2명의 종주자와 박 선생 그리고 필자다. 첫 번째 암릉을 통과한 직후 앞서 달리던 ‘청산에 홀로 가는 나그네’의 주인공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긴 숨을 내쉰 뒤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필자는 행여 탈이 났나 싶어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필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산꾼은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는데, 저는 이 바위를 두고 더는 못 갈 것 같습니다.” 자신을 몹시도 괴롭혔던 바위, 바로 그 바위에 미련이 남아 더 가지 못하겠다는 사람. 필자는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청산에 홀로 가는 나그네’의 심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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