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주지 말아라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아무것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말아라술한테 주고 잡담한테 주고 놀이한테 너무 많은 자기를 주지 않았나 돌아다보아라가장 나쁜 것은 슬픔한테 절망한테 자기를 맡기는 일이고더욱 좋지 않은 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
2014012013년 12월 18일方向
그냥 무료히 꺾인 날들무슨 일이 스쳐갔더라 새벽은 그냥 열리고 문을 나서면 허허들판어디더라 거기가 어디더라방향을 잡으나 그 방향은 아니고젊음은 파릇하게 스치나노년은 어둡고 스산하여헤매다보면 幻影뿐다시 낯선 허허벌판 어디더라 거기가 …
2013122013년 11월 19일11월, 아득히 먼
햇볕이 적금된 통장그 붉고 노란 단풍잎마다비밀번호를 적고 사인을 했다.허허한 겨울을 위해 마음의 지갑을 채운다.어둠의 폭포를 뚫고 밤새 풀어헤친귀뚜라미의 사설그 벽에 붙어서 북을 친다.장단 추임새에 만가(輓歌)도 들썩인다.아궁이에 …
2013112013년 10월 18일돌아가신 어머님의 몸을 닦으며
반듯이 누우신 어머님하, 어머님하. 납작이 엎어진 놋사발 두 개의 젖가슴이시여. 일만 사발의 젖물, 일만 사발의 정화수, 삼만 사발의 눈물하.
2013102013년 09월 23일별 하나의 희망
내 영원한 별 하나 있다면 좋겠네기쁠 땐 기쁜 눈으로슬플 땐 슬픈 눈으로자나깨나 바라볼 별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구름과 바람과 세찬 비에도형형한 빛으로가시에 찔리고 긁힌 생채기 위에서도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눈빛을 닮은 그러한 별이라…
2013092013년 08월 20일서쪽
긴 포대기같이 구릉이 뒤집히며모래바람 불어올 때죽은 새끼를 끝내 데리고 가겠다고성지 성화(聖地 聖畵), 텅 빈 사막에 검은 들소가 울고 있다수심(水深)이 깊다그만지평선이 네 배꼽 밑까지 허기져 내려가겠다나는 뒤돌아서며가시나무꽃이 비…
2013082013년 07월 19일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잘난 꽃 되지 말고 못난 꽃 되자함부로남의 밥줄 끊어 놓지 않는이 세상의 가장 못난 꽃 되자
2013072013년 06월 19일영(嶺)
순하고 느릿한 구름들이 내려와 양이 되고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이 되고길길이 날뛰던 바람이 수만 갈래 풀과 이파리로 번져나발자국을 셀 수가 없다거친 숨 골라 여기에서 거기로 이동한 것들의 흔적에돌아가며 오르내리다기어이 제 속을 들여다…
2013062013년 05월 22일백마고지 역에서
철길처럼 마주보는 우리 팽팽한 기다림의종착역은 어디쯤일까 방금, 지상의 마지막 역에 내린 백발 할머니가 절벽 같은 철길 끝에서 지평선 너머 세상을 까치발로 넘겨다본다 슬쩍 눈물을 닦는 할머니 손가락에 외가락지 이제는 다 닳아 끊…
2013052013년 04월 18일고등어 한 마리
늦은 밤 지친 행색이 돌아와 누운 자리에흐물흐물 비린내가 먼저 기상하는 아침맞벌이 아내의 불 켜진 새벽 주방이 미안하다식탁 너머 음식물 쓰레기통 속노여운 기색 한마디 없이 낯익은 고등어 대가리 하나 묵언수행 중이다눈 부릅뜬 채 입 …
2013042013년 03월 19일홍도 풍란
유튜브를 탄 가수 싸이의 노래가 빌보드차트 2위에 오른 기념공연이라던가팔만 명의 인파가 말 춤판을 벌인 다음 날한 여자가 세종로 이순신 동상 앞에삐뚤빼뚤 손 글씨 적은 피켓을 들고 서 있다세 아이의 아빠에게 일터를 돌려주세요!쌀쌀한…
2013032013년 02월 20일겨울나무님께
한때 그는 세상을 향해 하염없이 불타오르던 열 살 스무 살 적 꽃단풍이었을 거외다.푸르뎅뎅한 사랑을 끝내 저버리지 못한 채 마침내 젖은 낙엽으로 거리를 나뒹굴다가 저렇듯 곁가지들 하나둘씩 죄다 쳐내 버리고 그날 밤 그는 마냥 휘몰아…
2013022013년 01월 21일소묘(素描)-백지
창문가에 선다눈이 내려 하얀 한겨울의 바깥이 춥다머리가 아프다눈이 흐리다느닷없이 백지 한 장이 창문을 가린다잃어버린 사랑이 무색의 꽃잎으로 지고 있다일상이 된 내 불명의 배회가 거기 황혼의 발자국을 남기고 눈물로 지고 있다가라앉는 …
2013012012년 12월 26일겨울폭포
나이에 맞게 적당히 살 수 없다거나시대와의 불화를 피할 수 없을 때마다난 얼어붙은 겨울폭포를 찾는다.봄에는 세상 안팎의 경계를 지웠고여름에는 바닥을 치며 자신을 비약시켰고가을에는 뼈와 살 사이로 마지막 망명을 떠났고겨울에는 자신의 …
2012122012년 11월 20일철야일지
입동이 내일 모레야근도 이젠 힘에 부쳐요 엄마막차를 손봐 놓고 컵라면을 먹는 새벽 첫 월급 타 사드렸던 빨간 내복이 엊그제 같은데 내후년이 정년이래요 기름때 전 작업복을 빨며 똑똑한 막내아들 못 가르친 죄라며 끝내 우시던 모습 눈에…
2012112012년 10월 19일시월이 붉어지거든
호곡號哭소리를 들으시라.잘못 복사된 사본처럼푸른 젊음이 결핍된 엽맥葉脈 구석구석바람 행로만 기록한저 깊은 소沼에 홀연히 젖어든돋은 그늘을 보라초여름 돌기마다 회오리 휘돌아붉게 산발한 머리채 이고인적 없는 계곡에서한 풍경을 도려내는저…
2012102012년 09월 20일나무들의 양식
나무가 먹고 있는 밥을 보았다몹시 조악한 악식(惡食)이었다스산한 늦은 저녁이었다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길 잃은 철새가성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나무의 밥과 인간의 밥은본래 하나나무와 인간은 같은 밥을 먹었지만 내 밥은 그에 비해 푸…
2012092012년 08월 21일향수鄕愁
이른 새벽, 하늘은 잿빛그리움에 고향은 멀다 길에 서면 인내(忍耐)는 바람낮은 가로등, 꿈도 엷다지는 달빛, 사랑도 얇다-이문근
2012082012년 07월 19일자월도紫月島 편지
그대, 오랫동안 잊고 산 얼굴이 보고 싶거든 여기 자월紫月로 오라.대부섬 방아다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갈매기떼 전송받으며 바다 위에서 한 시간쯤 창해일속滄海一粟을 몇 번 되뇌다 보면어느새 모성의 품으로 안아주는 한 섬에 닿으리.승…
2012072012년 06월 19일꽃잎 한 장
꽃잎 한 장이 수면에 떨어져작은 파문이 일고 있다파문이 물별을 만들고 있다꽃잎이 없다면파문이 없다면아름다운 물별을 볼 수 없을 것이다꽃잎 한 장 받는 일은가슴에 물별이 뜨는 일꽃잎 한 장 주세요
2012062012년 0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