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등산

  • 고은

    입력2014-05-20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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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

    일러스트·박용인

    산에 올라가자

    산에 올라가자 벗들 임들

    우리 모두

    산에 올라가

    백의민족으로



    하얗게

    하얗게

    산자락 뒤덮고

    마음껏 실컷 대성통곡하자



    산기슭에서 태어나

    산기슭에 묻힌

    내 조상들의 산을 내려와

    다시 시작하자

    다시 말하자

    다시 꿈꾸고

    다시 일터를 가자



    엉엉 울어버린 뒤

    그 영(靈)으로

    그 빈 손 빈 마음으로

    다시 가자

    저 남녘바다 어이없는 참변 그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

    그 이전의 참변들 그 때문이다

    썩은 세상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미쳐버린 성장

    미쳐버린 경쟁

    이런 난장판의 숙명이던

    온갖 비리와 탐욕

    어떤 절벽의 비탄으로도

    어떤 칠갑의 분노로도

    끝내 고쳐질 줄 모르던

    이 무책임과 이 무능을 불질러 태워버리고

    빈 혈혈단신의 각성으로

    다시 시작하자



    아퍼라

    아퍼라

    아퍼라

    아퍼라

    그리하여 얼어붙은 겨울밤

    안중근의 뜨거운 단지동맹 그것으로

    그 맹세로

    다시 시작하자

    4월이 무엇이더냐

    5월이 무엇이더냐

    이 하늘 사무치는 현대사의 애도제단

    몇 백 몇 천 생령의

    몇 백 몇 천 망령 영전에 서자



    목 터지도록 부른 이름들이었다

    넋 잃고 외친 이름들이었다



    이제 단 하나의 소원이 남았다



    제발 저기에 극락이 있으면 좋겠다

    저기에 천당이 있으면 좋겠다

    이 나라 밖에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6만 년 전

    아기 잃은 엄마

    그 아기 주검 이마맡에 히아신스꽃송이 놓았다

    울며불며 바라던 그 옛날의 세상이

    지금 밤구름 속에서 달처럼 나타났으면 좋겠다

    2만 년 전

    아기 묻은 엄마가

    아기 주검에 국화꽃송이 놓고

    이 험악한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태어나기를 빌었던

    그 세상이

    지금 달려와

    여기에 펼쳐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맹골수도 바다밑창에 묻힌

    어린 넋들

    몇몇 넋들

    우르르 솟아올라

    못다 산 삶의 낙원에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오로지 이 소원 하나뿐



    우리 모두 백의민족의 태초로 돌아가자

    돌아가

    모든 거짓 물리친 아침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

    ●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 1958년 ‘현대시’ ‘현대문학’ 통해 등단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초대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 現 서울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단국대 석좌교수

    ● 저서 : ‘고은 전집’(전38권), ‘백두산’(전7권), ‘만인보’(전30권) 등 15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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