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인’이었던 데 있다. 1978년 전국대학가요축제 경연대회에 나가 강렬한 록음악인 ‘일곱 색깔 무지개’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못다 핀 꽃 한송이’ ‘내일’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 등의 히트곡을 터뜨리며 ‘1980년대의 중요한 음악작가’로, ‘가장 성공한 캠퍼스출신 록 뮤지션’으로 팬들의 뇌리에 저장됐다. 1984년 공전의 흥행을 몰고 온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에 주연배우로 출연한 것 또한 이 시기 그가 대중에게 남긴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다.
하지만 대중가수로 성공한 뒤 그의 행보는 기대와 사뭇 달랐다. 마치 방랑자처럼 종잡기 어려운 활동의 연속이었다. 가요를 부르는 가수에 만족하지 않고 인기와는 거리가 있는 영화와 드라마음악, 국악연주음악, 행사음악, 무용음악의 작곡가로 내달렸다. 음반판매량과 방송순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의 가수들에게서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운 ‘자기 전복’이었다.
비록 히트가요를 만들어내는 인기가수로는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지만 그의 이름은 영화 ‘서편제’의 국악음악으로,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개막식 음악 등으로 늘 우리 곁에 자리해 있었다. 특히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통해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1980년대 음악을 추억하는 일부 팬들은 심지어 그를 조용필 옆에 놓으며 비등한 점수를 매긴다. MBC 프로듀서 조형재는 “김수철은 1980~90년대 한국음악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그려낸 기념비적 자취이자 지금도 재생산이 계속되는 영원한 음악 탯줄이다. 드물게 1인 밴드를 추구했다는 점부터 그는 위대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음악가의 소임이 대중이 주는 명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힘들고 괴롭지만 ‘개척과 실험’이야말로 예술가의 의무임을 그는 잊지 않았다. 신중현과 송창식이 그랬듯 한국인은 한국의 전통소리로 향해야 한다는 명제를 그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다시금 일깨웠다. 지난 겨울 서양의 전기기타로 우리의 전통가락을 연주해 발표한 ‘기타산조’ 앨범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노력은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월드컵 열기가 일깨운 자신감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학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책상 위에는 행사음악을 만들기 위한 악보 여러 장이 널려 있었다. “행사음악을 맡으면 돈은 얼마나 받느냐”고 묻자 그는 “돈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잘라 말했다. “돈에 치이면 음악 못하지…”라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기성세대한테는 아직도 젊은 가수라는 느낌을 주는 동안(童顔)이지만 그의 이력은 어느덧 25년에 달한다. 짧지 않은 세월은 그의 눈가에 슬그머니 주름을 새겨놓았다. 그러나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투는 데뷔 때 그대로 여전히 발랄했다. 모처럼 지나간 시절과 음악을 회고하는 게 즐거웠던지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때로 자리에서 일어나 코믹한 제스처를 곁들이며 속사포처럼 얘기를 쏟아놓았다. 필자가 노트에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인터뷰 내내 연신 폭소가 터졌다.
김수철은 지난해 작곡가에서 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돌아와 오랜만에 앨범 ‘팝스 앤 록’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본인 이외에도 신해철 장혜진 박미경 이상은 등 후배가수들이 대거 참여해 헌정하듯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 음반이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는지 묻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작곡만 하다가 지난해에는 직접 노래도 부른 대중가요 음반을 내놓았습니다. 12년 만에 낸 가요 앨범인데다 ‘저기를 봐’ ‘잊을 수 없어요’ 등의 곡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고 활동도 열심히 한 것으로 아는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실적은 좋지 않았어요. 제 것만 안 나간 게 아니라 음반시장 전체가 워낙 어려우니까…. 음악가는 앨범이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죠. 판이 팔리고 히트곡이 나오는 것은 대중의 몫이니까요.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딱히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김수철이 다시 가요로 돌아와 기타를 잡았다는 것은 상당히 알려졌고,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