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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내리던 날

첫눈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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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내리던 날
‘겨울’ 하고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하얀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 가슴속 창, 그 첨부파일 속에 ‘첫사랑’이란 타이틀로 저장돼 있는 첫눈 내리던 날의 풍경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오른다.

지금부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43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 아주 참한 여학생이었다. 가슴 속엔 하루에도 2만5679번 정서불안증세가 오락가락하는 격렬·과격한 사춘기였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주 얌전하고 말없는 소녀였다.

음악실에 가서 음악을 듣는답시고 앉아 있었다. 그 시절엔 그것이 또 살짝 폼을 잡는 문학소녀들의 모양새였다. 웨이터가 나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엔 ‘만나고 싶은데’라는 딱한마디 글이 적혀 있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나에게 웨이터는 뒤에서 빙긋 웃고 서 있는 남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돌아보니 거기에는 소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귀공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본 순간 ‘어머나! 인간이 어쩜 저렇게 빛날 수가 있는 거지? 우와… 멋진 걸’하고 생각하며 얌전한 포즈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그 남자는 내가 키가 커서 대학교 1학년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에계계. 그러나 나는 겨우 중학교 3학년일 뿐. “좋아, 나는 여동생이 없으니 나랑 오빠, 동생 하자”는 그 남자의 말에, 나도 “딱 하나뿐인 오빠가 독재자처럼 굴어서 무지 맘에 안 들던 참이라 좋다”며 기술제휴, 아니 ‘마음제휴’를 했다.



그 뒤로 우리는 방학이 되어야 듬성듬성 만나는 오빠와 동생 사이로 지냈다. 그런데 내가 입학한 대학이 그의 학교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오빠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지만 군대 갔다 온 복학생이라 내가 1학년일 때 3학년이었다. 우리는 영화도 보고 빵집에 가서 곰보빵, 단팥빵도 많이 먹었다.

어느 날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 첫눈 내리는 날 베토벤공원에서 만나자. 늦게 오는 사람이 일찍 온 사람에게 맛있는 거 사주기!”

1965년 11월26일 첫눈이 내렸다. 대개 첫눈은 흔적도 없이 살짝 뿌리고 가는데 그 해는 살이 통통 찐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나는 초스피드로 달려 나갔다. 베토벤공원은 그가 다니던 학교 백양로를 쭉 따라 올라가면 있었다.

나는 내가 분명히 더 빠를 거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나갔는데 맙소사! 그는 더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북이 친구, 이제야 나타나시는군!”

공원 숲 언덕에 앉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빠가 소리쳤다.

“윤아, 조오기 별 좀 봐. 너무 예쁘다!”

나는 오빠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바로 그 찰나, 오빠는 내 볼에 기습뽀뽀를 해버렸다. 그 시대는 호랑이가 피자 먹던 시절이다. 남자 여자가 만나서 손잡는 데 최소한 6개월에서 1년, 뽀뽀하는 데는 거의 1년에서 2년쯤 걸려야 했다. 그 시절엔 탐색기간이 그만큼 길었던 것이다.

우리는 탐색기간의 평균치를 훨씬 밑도는 ‘순진 커플’이어서 뽀뽀하는 데 무려 3년이 더 걸린 셈이다. 그것도 본격적인 뽀뽀가 아니라 살짝 볼에 하는 뽀뽀! 나는 천둥번개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어머낫!”

비명을 내지르고 냅다 뛰어 달려가버렸다. “윤아, 윤아!”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두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나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를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웃기는 일이다. 가소롭기도 하고 가관이기도 하고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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