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충북 청주 출생<br>○홍익대 동양화과, 미국 뉴욕 프랫아트인스티튜트 석사<br>○여름그룹전(1985, 뉴욕 라세갤러리), 빙리 강익중 2인전:많은 것이 더 좋다(1991, 뉴욕 아멜리에이왈레스미술관), 강익중 3×3전(1992, 뉴욕 퀸스 미술관), 백남준 강익중 2인전:멀티플/다이얼로그(1994, 코네티컷 챔피언 휘트니아메리칸 미술관), ‘놀라운 세상’전(2001, 유엔본부) <br>○1997년 제47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1999년 독일 루드비히 미술관 선정 ‘20세기 미술작가 120명’
강익중(姜益中·48)은 이렇게 하찮은 고민을 통해 쓸모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발명가’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찬찬히 듣다 보면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아 그렇겠구나’ 하고 맞장구를 치게 된다.
그는 달변에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동안(童顔)을 가졌다. 그의 ‘제2의 고향’ 같은 맨해튼 차이나타운을 걸을라치면 주변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 대해 다양한 지식과 해석을 동원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던지는데, 그 말을 받아낼 재간이 없다.
그렇게 그는 주변에 관심을 두고 찬찬히 생각하면서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한번 보고 스쳐 지나는 게 아니라 다시 찾아가 확인하고 그 변화를 기억해둔다. 이런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나름의 공부를 토대로 한 자신만의 해석이 그대로 작품이 된다. 작은 패널들은 하나의 커다란 패널을 이루고, 이것들이 조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는 과정을 보면 그의 작업이 곧 그 자신의 일상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하철 화실
사실 그의 작업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그걸 이해하거나 알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닌 ‘내’가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다. 내가 그렇게 봤으니 남도 그렇게 봤으리라 착각할 뿐이다.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라고 하지만 각자 보는 것이 다르기에 믿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만큼 여유롭거나 넉넉하지 못하다. 오직 자신의 것을 강요할 뿐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단위와 그것의 조합의 차이가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한 해 동안 쓴 일기장을 읽다 보면 지난날의 일과 느낌이 되살아나지만, 한 권의 일기장을 모두 읽고 한마디로 한 해를 규정하려면 당혹스러운 것처럼. 그의 작품은 하나이되 여럿이며 여럿이되 하나다. 그 차이에서 오는 느낌과 감동의 차이 또는 다름이 바로 그의 예술의 요체다.
1960년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강익중은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에서 수묵채색화를 전공했다. 1984년 대학 졸업식을 한 달 앞두고 미술학도라면 누구나 꿈꾸는 뉴욕으로 떠났다. 그에게 뉴욕생활은 어렵고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우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 아니 주업을 시작했다. 낮에는 맨해튼 청과물가게에서, 저녁에는 퀸스 파락어웨이의 벼룩시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이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집념으로 고안해낸 것이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3˝×3˝ 캔버스가 그것. 그는 손바닥에 딱 잡히는 크기의 캔버스에 뉴욕의 일상을 일기처럼 담아갔다. 지하철은 그에게 움직이는 화실이었다. 그는 단순한 선묘로 일상의 이미지나 영어단어를 그려나갔다. 바지런함이 방법을 마련해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