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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용병’ 페이스메이커의 세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신기록 고삐 죄는 충직한 ‘가게무샤’(影武者)

‘육상 용병’ 페이스메이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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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로 사이클 경주에선 어느 팀이나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천천히 달리는 선수들은 하인이라는 의미의 ‘도메스티끄’라 불린다. 그들은 팀 리더를 다양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나의 팀에는 동료가 8명 있다. 가파른 경사를 오를 때는 동료 뒤에서 달린다. 그의 바퀴에 붙어서 바람을 피하면 에너지를 30%나 아낄 수 있다. 바람이 심한 날에는 8명의 동료가 앞에 나서서 바람을 막아줘 에너지를 50%나 아낄 수 있다.
  • -랜스 암스트롱 자서전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에서.
‘육상 용병’ 페이스메이커의 세계

2004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이봉주와 나란히 뛰고 있는 외국 페이스메이커들.

‘더빨리, 더 더 빨리’.

육상선수의 꿈은 오직 하나다.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다. 좀 더 빨리 달릴 수만 있다면, 모두들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단거리선수의 경우 한겨울 내내 죽어라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도 기록을 0.01초 단축하기가 힘들다. 아니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경우가 숱하다. 이쯤 되면 야생마의 몸을 빌려서라도 달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치타의 발을 빌려 달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스프린터(단거리선수)에게 0.01초의 거리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멀다. 0.01초는 서울과 부산만큼이나 까마득한 길이다. 어느 선수는 출발선상에서 0.01초 정도를 번다. 출발 총성과 함께 총알처럼 튕겨 나간다. 중력을 절반밖에 받지 않는 우주인 같다. 전기 스파크처럼 팍! 하는 순간에 저만치 뛰쳐나간다. 그들은 뭔가 확실히 다르다. 스타팅블록을 어떻게 놓는가, 두 손은 땅에 어느 정도 벌려 어떻게 짚는가, 어깨나 엉덩이의 위치는 어떤가, 다리의 각도는 얼마나 되는가, 총성이 울릴 때의 첫 스텝과 투스텝 그리고 이후 리듬은 어떠한가….

총성이 울리기 전에 출발하는 선수도 있다. 육상용어로 ‘플라잉’이라고 한다. 첫 번째는 누가 범하든 상관없이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두 번째 출발신호 때 플라잉을 범한 선수는 무조건 실격이다. 첫 번째 플라잉 유무와는 관계없다. 플라잉은 총성이 울리기 전 먼저 출발한 것만 뜻하지 않는다. 심판의 “준비” 구령에 맞춰 엉덩이를 쳐든 후 몸의 어느 부분이건 흔들리거나 움직이면 무조건 플라잉이다.

출발이 빨랐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속거리다. 가속거리가 길면 길수록 기록이 좋아진다. 자동차 기어를 순식간에 1단에서 3단으로 올릴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진 게 아니다. 하지만 출발 이후에도 계속 3단기어로만 간다면 문제가 있다. 비록 2단으로 출발했지만 계속 3단→4단→5단으로 가속한 뒤 그대로 결승선까지 골인하는 선수가 기록도 좋다. 보통 출발이 빠른 선수는 가속거리가 짧다. 100m선수의 경우 40~ 50m에서 가속거리가 끝난다. 그 정도라면 4단 기어까지밖에 끌어올릴 수 없다. 5단 기어까지 자신의 절대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데도, 최고속도가 4단 기어밖에 안 나오는 셈이다.



세계적인 스프린터는 가속거리가 적어도 60~70m는 된다. 출발해서 차례로 5단 기어까지 끌어올린 뒤, 40~30m를 5단 기어로 질주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절대속도와 최고속도가 같아진다. 한국 스프린터들은 스타트도 느릴 뿐더러 가속거리도 짧다. 그뿐인가. 60m 이후에는 최고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남자 100m 한국기록(10초34)이 29년째 깨지지 않은 이유다.

페이스메이커의 탄생

1953년 5월29일 오전 6시15분. 인간이 마침내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꼭대기(8848m)를 밟았다. 그 주인공은 영국원정대 소속의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그리고 그 나흘 뒤인 6월2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다. 영국인들은 열광했다. ‘지는 해’ 대영제국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바로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는 것이다. 1마일은 약 1609m로 육상트랙 4바퀴를 도는 거리. 영국인들은 그 마의 벽도 반드시 영국인이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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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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