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 중국인 남자와 가난한 프랑스 소녀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연인’.
남진우의 시 ‘어느 사랑의 기록’은 이런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한다 말하면 될 것을 가시 돋친 비난이 먼저 다가간다. 미안하다, 말 한마디면 될 것을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지나고 나면 후회할 것을 그 순간에는 모른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마치 상처로 사랑의 인장을 남기려는 사람들처럼 열심이다.
언젠가 김영하는 자신의 산문집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남자가 되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변태를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우스꽝스럽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몸에 남은 기억을 증오한다. 하지만 또 영원히 그 기억을 사랑한다. 여자는 몸으로 배우는 기억을 수치스러워한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만큼 강렬히 그 기억을 원한다. 몸은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다. 몸으로 배우는 사랑은 여성에게 그것이 모순으로 이뤄진 감각의 아이러니임을 깨닫게 해준다. 강렬히 원하지만 원하지 않고 너무도 부끄럽지만 또한 소중하다. 그래서 때로 몸에 각인된 사랑은 뒤늦게 심장에 침전한다.
문제는 사랑의 체감이 너무도 늦게 다가올 때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채 육체의 황홀경만을 탐닉할 때, 사랑은 황폐해진다. 그리고 상처와 황폐함을 남긴 그 육체가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 황홀경은 회한이 되어 인생에 얼룩을 남긴다. 볼 때마다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참혹한 황홀경의 순간들, 여기 두 쌍의 연인이 그렇다.
▼ 욕망보다 늦게 도착한 사랑 ‘연인’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반도.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형편없이 무너진 나라인 중국의 남자는 부유하다. 부유한 남자는 하얀색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화려한 세단 승용차에서 세상을 내다본다. 그런데 프랑스 소녀는 다르다. 프랑스인이라면 결코 가지 않는 학교에 다니며 대부분의 프랑스인과는 달리 제대로 된 옷 하나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도발적인 눈빛 하나. 이 기묘한 커플은 영화 ‘연인’의 주인공이다.
장 자크 아노의 작품 ‘연인’(1991)은 영화보다 먼저 포스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녀는 양 갈래 머리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눈빛은 부끄러운 듯 도발적이다. 도발성은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아직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모험심을 포함하고 있다. 양 갈래 머리의 순결함과 루즈를 억지로 바른 듯한 입술의 덜 익은 요염함, 포스터 속 소녀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인’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에로틱하면서도 슬픈 사랑 영화 중 하나다. 툴롱을 오가는 선상에서 소녀는 한 남자와 만난다. 최신 유행 의상을 입기에 턱없이 가난한 소녀는 남자들이 쓰는 모자에 잠옷을 걸치고 삐딱하게 입술을 칠한 채 서 있다. 세련된 파리지엔처럼 보이고 싶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중국 부호의 아들인 남자는 남루한 옷을 입은 초라한 소녀를 차에 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