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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미타 vs 핑구스

전통품종 중심 블렌딩으로 승부수 이방인의 단일 토착품종 고집

레르미타 vs 핑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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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와인은 세계 와인시장의 떠오르는 강자다. 세계 최대 경작 면적에 뜨거운 태양, 특유의 정열적인 투지에 힘입어 최고급 와인이 생산된다. 그중 레르미타는 토착품종 가르나차의 장점을 살리면서 여러 품종을 블렌딩하고, 핑구스는 토착품종 템프라니요로만 생산하는 와인이다. 선의의 경쟁 속에 두 명의 40대 양조가가 고집스럽게 소량만 생산한다.
레르미타 vs 핑구스
세계 최대 경작 면적을 자랑하는 ‘무적함대’ 스페인의 간판 와인 중에 레르미타(l‘Ermita)와 핑구스(Pingus)가 있다. 세계 와인시장에서 둘은 스페인 최고 와인 자리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선의의 경쟁을 하는 두 양조장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전통적인 명산지 리오하 지역을 생산 거점으로 택하지 않은 것과 두 명의 양조가가 모두 40대란 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핑구스는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 레르미타는 프리오라토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스페인 와인 지도는 스페인 와인의 시장점유율이 낮은 우리나라 애호가들에게 무척 낯설다. 하지만 이런 곳들이 대표적인 생산지이니 그 위치와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북서쪽에 위치한 리베라 델 두에로는 리오하 다음가는 명산지다. 리오하는 스페인 최고의 생산지다. 원산지 등급인 DO(프랑스의 AOC에 해당)보다도 한 단계 높은 DOC 지역으로 한동안 유일하게 이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고급 와인의 명성이 주변에 비해 약하고 리베라 델 두에로, 프리오라토 등 경쟁 산지에 신흥 명문 양조장이 우후죽순 설립돼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리오하는 점점 구시대의 생산지로 퇴색하고 있다. 리오하가 침체되는 동안 리베라 델 두에로와 프리오라토는 실질적인 간판 생산지로 진화했다.

1982년 DO로 지정된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에는 로마시대에 포도밭이 조성됐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 즉 국토회복 운동인 레콘퀴스타(Reconquista) 시기인 10~11세기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오랫동안 버려진 이곳을 다시 소생케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중세의 수도사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마을 시토에서 시작된 시토파 수사들은 수도원 클로 드 부조에서 포도밭 개간에 힘썼고, 밭의 토양 차이에 눈을 떠 엄청난 양조의 비밀을 체득했다. 이를테면 클로 드 부조는 유럽 와인 양조의 ‘싱크 탱크’였던 셈이다. 수도사들은 교황청의 부름을 받아 유럽 방방곡곡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닐 때도 근엄한 종교 수칙뿐 아니라 양조 기술도 함께 전수했다.

신규 유입 세력, 핑구스

리베라 델 두에로에도 시토파의 손길이 닿았다. 12~13세기 수도사들이 이곳으로 부임해 밭을 조성하고 주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석회암 토양에 조성된 셀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유서 깊은 지난 시절의 추억을 어루만질 수 있다. 피레네 산맥이 지형적으로 가로막고 있음에도 수도사들을 막을 순 없었다.



레르미타 vs 핑구스

핑구스

중세 수도사들이 이 산맥을 맨 처음 넘은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증표가 있었다. 약 2000년 전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스페인으로 전도여행을 왔다. 그 사도를 따라 수도사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그 수도사들을 통해 경건함과 정화를 목도한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도 오늘날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순례 길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산티아고의 길)’가 그것이다. 약 800km 거리의 끝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를 위한 교회가 세워진 도시다.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은 세 번째 성지 순례 길인 이 길의 종착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는 ‘세인트 야콥’, 우리말로 ‘성자 야고보’로 풀이된다.

리베라 델 두에로는 이 순례 길 중간에 위치하는데, 순례자들이 몇날 며칠을 걸어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긴 지역이다. 리베라 델 두에로에는 사실 1980년대까지 베가 시실리아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전통과 품질, 그 어떤 척도를 갖다 대도 스페인 최고의 와인으로 평가받는, 그래서 스페인 국왕도 고객이라는 베가 시실리아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간판 양조장이다.

하지만 그 위상은 가우디의 건축처럼 생뚱맞게 높은 첨탑으로서 존재했다. 즉 베가 시실리아를 빼면 별로 내세울 게 없다는 얘기다. 이 점은 스페인 와인산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원산지로 등록된 이후 외부에서 투자자금이 몰려오고, 전문가들이 정착하면서 리베라 델 두에로는 최고급 산지의 모양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해발 800m 고원에 있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포도밭에서는 포도가 쉽사리 익질 않아 11월에도 수확할 수 있다. 산도 높은 포도 템프라니요를 충분히 무르익힐 수 있는 조건이다. 핑구스는 이런 신규 유입된 세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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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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